양택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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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에게 서울-수도권 조경공사 현황을 보고하는 양택식 서울특별시장(1973년경)
梁鐸植
1924년 7월 11일 ~ 2012년 11월 13일
1. 소개
2. 일생
3. 기타


1. 소개


대한민국의 관료, 기업가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2. 일생


양택식은 1924년 7월 11일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오사카부립 이마미야(今宮)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으며, 나라시 난토세이쿄(南都正强) 중학교에 편입, 5년 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8.15 광복 직전 귀국했는데, 당시 리승기의 도움으로 경성제국대학 전시과학요원에 선발되어 강제 징병을 면할 수 있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 졸업 후 1947년 4월 경상남도 생산위원회 기사에 특채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하자 경상남도청 화공계장으로 승진했다가 정부 고위관료의 권유로 상공부 유기화학계장으로 영전했다. 상공부 근무 초기에 미국 원조에 의한 해외유학생에 선발되어 미국에 유학,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귀국 후 다시 진로 선택에 고민하다가 1956년 비누제조회사 평화유지공업 전무로 입사하였으며, 이무렵 황산제조회사인 삼우화학공업 설립에도 참여하여 전무이사직을 맡았다. 또한 밀양 소재 밀양도자기공업을 인수하여 부사장으로서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기술관료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부산직할시 부시장[1], 철도청장, 경상북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사퇴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후임으로 임명됐다. 서울특별시장 재임시절 양택식은 김현옥 시장 시절 대략의 틀만 잡아놓은 서울 지하철 건설과 강남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강남 개발 중에 도산공원도 조성하였다. 다만 임기 중 광주대단지사건을 겪었다.
그런데 참 불운하게도, 그가 그렇게 정성을 쏟은 서울 지하철 1호선1974년 마침내 개통식을 하는 날, 하필 그 직전 광복절 기념식 행사에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터져버렸다. 이로 인해 개통식에 대통령이 불참,[2] 암울한 상황에서 축소해서 실행할 수 밖에 없었으며, 저 광복절 기념식 행사를 주관한 서울특별시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어 시장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그가 세웠던 서울 지하철 계획도 지금의 모습으로 수정되어버렸다. 그는 이후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재임기간 동안 잠실 주공아파트의 건설을 주도했는데, 잠실주공 1~4단지를 건설할 때 '''180일 작전'''을 선포하고 실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에는 동서석유화학 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임했다.
그가 서울시장에 취임했던 1970년에는 김현옥 전임 시장이 서울 바닥을 온통 헤집어놓느라(...) 서울시 재정이 바닥 상태였는데,[3] 빈털터리 상태의 서울을 물려받은 그는 조심조심 서울 재정을 복구하면서도 지하철 1호선 공사[4]에 강남개발 등 굵직한 사업들을 해냈으니 그 수완이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2012년 88세로 사망하였다.

3. 기타


  • 이름 가운뎃글자가 '방울 탁'[5]이라 헷갈릴 수 있는데, 확실히 원래는 '탁식'이 맞지만 주변에서 '택식'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아 '택식'으로 바꿨다고 한다.(동아일보 '휴지통' 1970년 4월 18일자) 이 경우 외에도 일부 문중에서 저 글자를 돌림자로 쓰면서 '택'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전주 이씨 등) 2004년부로 대법원에서 일관적으로 탁으로 전환하거나 한글이름으로 처리하거나 하는 식으로 택으로 등록하는게 금지되어 현재는 택으로 사용할 수 없다.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그가 남긴 기념비가 시청역 대합실에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하철 종로선 개통에 즈음하여'''

여기 땅 속을 뚫어 3년 4개월 서울 시민 교통에 신기원을

이룩할 지하철 종로선이 650만 시민의 뜨거운 염원과

대망리에 완공 되었다

이 거역이 우리의 기술진과 노력으로만 이루어 졌으니

민족의 저력을 과시할 장한 일이다 그동안 이 일에 힘을

기울인 모든 분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오늘 역사적인 개통을 맞아 활기찬 의욕으로 자랑스러운

수도 서울과 영광된 조국에 힘을 다할 것을 다 함께

다짐하는 바이다

'''1974. 8. 15.'''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 대머리였기 때문에 당시 광택제 브랜드 이름인 '호마이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지하철 건설을 빗대어 '두더지'라는 별명도 있었다. 서울시장 - 주택공사 사장 시절의 양택식에 대하여는 손정목[6]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 자세한 소개가 되어 있다.
  • 전임 김현옥, 후임 구자춘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리며, 이촌향도 현상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에 시장직을 역임하였다. 군인 출신이며 불도저 스타일로 유명했던 다른 두 시장에 비해서 상당히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7]
  • 1970년에는 대대적인 서울시 추가 확장안을 박정희한테 직접 제안하여,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으로 잡혀 잠정적으로 서울시 추가편입이 계획된 지금의 과천시, 광명시, 고양시 지축·신도지구, 부천시 오정지구 뿐만 아니라 지금의 안양시, 고양시 덕양구, 성남시 일부, 하남시 일부 주민들을 서울 편입이라는 꿈으로 설레게 한 적이 있다. [8][9]

[1] 1963년 1월 1일부로 직할시로 승격은 되었으나 정식으로 '부산직할시'의 명칭을 얻지는 못하고 경상남도에서 분리된 그냥 (내무부 직할) 부산시였다. 부산직할시가 된 것은 1981년 4월 4일. 부산직할시로 쓴 것은 소급 적용한 것.[2] 원래 박정희 본인은 가려고 했는데 참모진이 말리고 말려서 가까스로 고집을 꺾었다고 한다.[3] 오죽 돈이 모자랐으면 당시 명동에 있던 명동공원 부지를 민간에 팔아 돈을 충당했을 정도였다. 소속 공무원들의 월급도 제대로 주기 힘들 정도였다고.[4] 심지어 정부 지원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당시 동부이촌동 모래밭을 아파트용지로 만들어 건설사에 매각한 대금을 투입하여 적자를 줄였다.[5] 반절은 徒落切로 ㅗ+ㄹㅏㄱ. 즉 (→탁)이다.[6] 1970년대 서울시 기획관리관과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했고, 양택식 시장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이후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며 도시와 도시계획에 대한 많은 논문과 책을 남겼다.[7]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시장은 군인-민간인이 번갈아가며 역임했다. 공교롭게도 3대 시장의 재임기간은 대략 4년씩으로 비슷하다.[8] 1981년 광명시 승격으로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은 사실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광명시 승격 자체가 서울 추가확장의 중단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9] 사실 아예 없었던건 아니고, 신도지구의 3개 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는 편입에 성공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