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축구인)

 



'''Hwaseong Football Club'''
''' 이름 '''
'''김학철'''
'''Kim Hak-chul'''
''' 출생 '''
1972년 11월 4일 (52세) /
대한민국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76cm | 체중 75kg
''' 직업 '''
축구선수(센터백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colbgcolor=#eb6d00> ''' 선수 '''
부산 대우 로얄즈(1995~2002)
상무 축구단(1998~1999 / 군복무)
대구 FC(2003)
'''인천 유나이티드(2004~2008)'''
''' 감독 '''
인천 유나이티드(2008~2010 / 코치)
인천 유나이티드 U-18(2010~2012)
동국대학교(2014 / 코치)
강릉제일고등학교(2015)
포천시민축구단(2016)
파타야 유나이티드 FC(2016)
화성 FC(2017~2018 / 수석코치)
화성 FC(2019~)
''' 국가대표 '''
1경기 0골(대한민국 / 1998)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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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연곡초등학교
강릉상업고등학교
국민대학교


[image]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 공인 레전드 '''
'''장외룡'''
'''임중용'''
'''전재호'''
'''김이섭'''
'''김학철'''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지도자 경력
6. 여담


1. 개요


인천 유나이티드 No.6
대한민국 출신의 전 축구선수이자 현 K3리그 참가팀 화성 FC의 감독으로, 현역 시절 센터백을 소화했다.

2. 클럽 경력



2.1. 부산 대우 로얄즈


국민대를 졸업한 김학철은 1995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했다. 점차 시간을 늘려나가면서 1997년에는 팀의 주전 수비수로 자리잡았고, 나름대로 쏠쏠한 활약을 하던 김학철은 1998년 상무 축구단에 입단해 1999년 전역할 때까지 주축 선수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부산으로 복귀하지만, 여전히 출전 기회를 나름 부여받았음에도 2002년을 끝으로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는 이안 포터필드의 청사진에 그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2.2. 대구 FC


방출된 김학철은 안종복의 추천을 받고 대구 FC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게 된다. 호제리우 프라테아트와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던 김학철은 임중용과도 좋은 호흡을 맞추었는데, 이런 활약이 무색하게 1년만에 인천 유나이티드의 창단 멤버로 떠나게 된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연봉 협상에서 이견이 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2.3. 인천 유나이티드


인천은 대구 FC에서 쏠쏠한 활약을 펼치던 김학철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보였고, 2004년 마침내 그를 창단 멤버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2004년 당시 인천의 감독이었던 베르너 로란트는 피지컬이 좋은 센터백을 기용하던 터라, 합류 초기에는 선발 출전하는 일이 적었지만 장외룡 감독 부임 이후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였다.
장외룡임중용에게는 빌드업을, 장신 수비수 이상헌에게는 제공권 싸움을, 그리고 김학철에게는 상대 주축 공격수를 꽁꽁 묶는 맨투맨 수비를 요구하며 인천의 탄탄한 수비진을 완성 시켰다.
김학철은 축구선수에게는 환갑을 넘긴 나이인 30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체력과 스피드에서 상대 선수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팀의 고참으로서 궅은 일을 도맡아 하며, 인천이 2005년 리그 우승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세월이 세월인지라 어느덧 노장이 된 김학철의 기량도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고, 2008 시즌을 앞두고 플레잉 코치로 역할을 전환하였다. 그리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프로 마지막 경기를 가지고 선수 생활을 마쳤다.

3.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 경력도 한 번 있는데, 1998년 3월에 요코하마에서 열린 다이너스티 컵 경기였다. 당시에는 상무 소속이었지만 그 전 해 프로 무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있던 차범근 감독이 부임한 이후 국가대표팀에 차출했는데, 무려 데뷔전이 한일전이었다. 그러나 전반 17분에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데다 부상을 당하며 국가대표팀 경력이 그대로 끝나버렸다.

4. 플레이 스타일


찰거머리 수비수.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스피드와 터프한 수비로 주목 받았다. 특히 대인 마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는데, 당시에는 최고라 불리던 황선홍부터 최용수, 안정환, 박주영 등 K리그에서 내로라 하는 공격수도 김학철의 마크가 붙으면 90분 내내 볼을 못 잡는 일이 허다했다.
센터백으로선 작은 신장을 지닌지라 제공권에서 밀리는 일도 있었으나 타고난 점프력을 통해 보완하였다.
선수 생활 막바지인 인천 유나이티드에서도 대체로 피지컬이 좋은 외국 용병 선수 (이따마르, 산드루, 에두 등) 들을 맡는 모습을 보이며 뛰어난 자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5. 지도자 경력


2008년부터 플레잉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은퇴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2군 코치로 보직을 변경했으며, 얼마 후에는 인천의 유스팀인 인천대건고등학교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2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이후 2014년에 동국대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2015년에는 강릉제일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6년에는 K3리그포천시민축구단의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성인 무대 감독으로 발돋움했고, 2016년 6월에 태국 프리미어 리그의 파타야 유나이티드의 감독 제안을 수락하면서 반 년만에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타야에서는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이후 화성 FC에서 코치 생활을 했고, 2019년에는 화성 FC의 감독이 되어 팀을 K3리그 최초로 FA컵 4강에 올리는 쾌거를 올린다.

6.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