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로란트

 

'''베르너 로란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독일의 축구감독 '''
''' 이름 '''
'''베르너 로란트'''
'''Werner Lorant'''
''' 출생 '''
1948년 11월 21일 (75세) /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벨베르
''' 국적 '''
독일
''' 신체 '''
172cm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71~1973)
로트바이스 에센 (1973~1977)
1. FC 자르브뤼켄 (1977~1978)
E. 프랑크푸르트 (1978~1982)
FC 샬케 04 (1982~1983)
하노버 96 (1983~1984)
''' 감독 '''
1. FC 슈바인푸르트 (1986~1990)
빅토리아 아샤펜부르크 (1990~1992)
TSV 1860 뮌헨 (1992~2001)
페네르바흐체 SK (2002)
LR 알렌 (2002~2003)
인천 유나이티드 (2004)
아포엘 FC (2005)
시바스스포르 (2005~2006)
사이파 카라지 (2006)
카이세리 에르지예스스포르 (2006~2007)
SpVgg 운터하힝 (2007)
카슴파샤 SK (2007)
랴오닝 훙윈 (2008)
SV ATA 스포 뮌헨 (2008)
DAC 1904 두나이스카 스트레다 (2008~2009)
DAC 1904 두나이스카 스트레다 (2012)
1. 개요
2. 선수 시절
3. 감독 시절
4.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시절
5. 이후


1. 개요


독일 출신의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2003년 인천 유나이티드 창단과 함께 선임된 초대 감독이었다.

2. 선수 시절


로란트는 현역시절 차범근과 함께 1978년부터 1982년까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1980년 UEFA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분데스리가 325경기에 출전해 46골의 기록을 갖고 있다.

3. 감독 시절


1984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로란트는 1992년 분데스리가 TSV 1860 뮌헨의 감독으로 취임한 뒤 2부 리그에 있던 팀을 이듬해에 바로 1부 리그로 끌어올리는 능력을 발휘했다. 로란트는 1860 뮌헨을 9년간 1부 리그 상위 성적을 유지한뒤 2002년부터 터키 페네르바흐체 SK를 맡으면서 1부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회장인 칼하인츠 빌트모저는 “우리 클럽에서 일했던 가장 최고의 감독”이라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4.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시절


인천 유나이티드는 초대 감독 선임을 놓고 로란트 감독과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크로아티아 감독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를 꺾고 3위에 오른 미로슬라프 블라제비치 감독과 마지막까지 고심했다고 한다.
2003년 9월 24일 인천 유나이티드 초대 감독 부임이 공식 발표되었다.
2004년 3월 1일 J리그 감바 오사카와의 창단 기념 경기를 4대0 대승으로 이끌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하지만 2004년 K리그 참가 첫 해, 인천 유나이티드는 전기리그 13위에 그치고 만다. 전기리그 종료 후, 그 해 8월 31일에 로란트는 부인의 건강 악화라는 개인 사정으로 사임했다.[1] 당시 독일 병원 측에서 부인의 병세가 악화되어 약 10주간의 격리치료와 요양이 필요하다는 권유에 따라 사임을 결심했다고 한다. 다만 시즌 중반에도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여론이 컸고, 계속해서 터키 리그의 감독 제의가 들어왔다는 보도가 계속되는 등의 이유도 감독 사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인천 유나이티드에서의 성적은 5승 9무 10패.

5. 이후


2012년까지 그리스, 터키, 이란, 독일, 중국 등 전 세계 다양한 리그의 감독을 수행했다.
성격은 좀 불같은 모양. 인천 감독 시절, 터키 안탈리아에서 전지훈련을 하다가 연습경기를 한 유럽 어느 리그 팀 감독과 멱살잡고 욕을 내뱉다가 주먹을 날릴뻔하여 코치진들이 잡고 말리던 일도 있었다.
[1] 공교롭게도 6년 후 일리야 페트코비치 감독도 같은 사유로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사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