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누 고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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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포르투갈의 전 축구선수. 그의 별명인 누누 고메스 중 '고메스'는 은퇴한 스트라이커이자 FC 포르투의 전설인 페르난도 고메스에게서 따온 것이다. 포르투갈의 전성기였던 1990~2000년대를 이끈 선수 중 하나로, 같은 시기 활동했던 포르투갈 선수는 후이 코스타, 파울레타, 루이스 피구, 세르지우 콘세이상, 주앙 핀투 등이 있었다.
2. 클럽
2.1. 보아비스타 FC
10살 때 아마란타 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 이후 보아비스타로 이적하였고, 94-95 시즌 데뷔전을 치루었다. 보아비스타에서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는데, 96-97 시즌 벤피카를 누르고 우승한 것이었다. 이 활약으로 여러 명문팀의 관심을 끌었고, 우승 직후 벤피카로 이적하게 된다.
2.2. SL 벤피카
당시 3시즌 연속 포르투가 우승을 하며, 최고의 팀이라는 명성을 쌓는 동안 벤피카는 단 한 차례의 우승도 차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트라이커진의 보강을 위해 누누 고메스를 영입하게 된다. 이적 후 3시즌 동안 101경기에 나와 60골을 넣었지만, 팀은 우승을 한번도 하지 못했고, 벤피카는 5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에 실패하며 암울한 시즌을 보냈다.
2.3. ACF 피오렌티나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과 더불어 유로 2000에서의 활약[1] 을 지켜본 피오렌티나는 17M 이라는 거금을 주고 고메스를 이적 시킨다.[2] 이적 첫 시즌만에 이탈리아 컵을 들어 올리며 성공적인 영입임을 입증했지만, 이후 실망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보이며 위기설에 휘말리기 시작했다.[3] 그러던 도중 피오렌티나의 재정이 무너지며[4] 다시 벤피카로 이적하게 되었다.
2.4. SL 벤피카
부상으로 인해 3시즌 동안 단 70경기에 그쳤는데, 그 동안에도 국내 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04-05 시즌에는 드디어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5] 이후 05-06 시즌, 최고의 시즌을 보내는데, 한 시즌동안 15골을 넣으며, 포르투를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했고, 첫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거기에 비토리아 FC를 상대로한 포르투갈 슈퍼컵에서 유일한 골을 넣기도 했다.
06-07 시즌 부터는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우선 파라과이 출신의 이적생 오스카 카르도소가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으며,[6] 한 시즌동안 겨우 6번밖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출전 기회가 굉장히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9골을 넣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폼을 보여줬다.
07-08 시즌, 유로파리그에서 SSC 나폴리를 상대로 150번째 골을 넣으며 그럭저럭 서브 공격수로 괜찮은 성과를 냈으나, 08-09 시즌 하비에르 사비올라가 이적해오며 완전히 주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10-11 시즌이 시작되었으나, 34살이 된 누누 고메스는 출전 기회를 도통 잡지 못하였고, 헤수스 감독과의 면담을 통해서만 몇 번의 출전 기회를 잡을 뿐이었다. 시즌 종료 후 그의 기록은 3경기 3골[7] 로 암울한 시즌을 보냈다.
2.5. SC 브라가
클럽과의 계약이 1달 남았을때, 벤피카는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고, 그렇게 은퇴수순을 밟는 줄 알았는데... 브라가에서 영입 제의가 왔고, 은퇴를 철회함과 동시에 브라가와 1년 계약을 맺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백업 공격수로 출전하였고, 20경기에서 6골을 넣는 서브 공격수임과 나이를 고려했을때 괜찮은 성적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2.6. 블랙번 로버스
브라가와의 계약이 끝나고 난 이후, 당시 2부 리그에 있던 잉글랜드의 블랙번 로버스에서 2년 제의가 왔고, 그것에 동의하며 다시 한 번 축구인생을 이어갔다. 입스위치 타운과의 경기에서 데뷔하였으며, 레스터 시티전에서 첫 골을 넣었다. 2년 계약이 만료되자 18경기 4골의 기록을 남기고 팀을 떠났으며 그대로 은퇴했다.
3. 국가대표
유스 시절 경기에서 55경기를 뛴, 타고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이다. 그 중에서는 1995 피파 유스 챔피언쉽 3위와 1996 아틀란타 올림픽 4위도 포함되어 있다. 첫 성인 국가대표 경기 데뷔는 1996년,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였다. 이후 유로 2000에서 데뷔 골을 넣었는데, 잉글랜드와의 2:2 상황에서 3:2로 이기는, 결승골을 넣었고, 이후 터키와의 8강전에서도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유로 2000에서 맹활약을 하며 팀의 4위를 이끌었고, 본인은 4골을 넣으며 득점 랭킹 공동 3위에 위치하였다.[8] 다만 이후 8개월 출장 정지를 받으면서 주전 자리를 파울레타에게 내주면서 그의 은퇴 전까지 국대에선 다소 주춤한 시기를 보내야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안도라를 상대로 4골을 넣으며 최다골 기록을 세웠으나 정작 본선에서는 미국전, 한국전 2경기 교체 출전이 전부였다. 2003년에는 21분 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명성을 쌓아갔다.[9] 유로 2004에도 출전하여 스페인과의 조별리그 마지막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다.[10]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회 직전 부상으로 단 2경기에만 교체 출전했으며, 독일과의 3,4위전에서 골을 넣었지만 3:1로 패배했다. 이후 유로 2008 예선에서 핀란드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으며 3개의 유로 대회에서 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으며 본선에도 주전으로 활약하였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다소 많은 나이와 폼 저하로 브라질 출신 리에드손, 우구 알메이다에 밀려 출전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월드컵과는 운이 없는 선수다. 2011년 10월 11일, 덴마크와의 경기에 출전하여 79번째 국가대표 경기를 뛰었고, 이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경기명단에 뽑히기도 했으나 출전하지는 않았다.
4. 플레이 스타일
명불허전 발리슛의 대가였던 선수. 순간적인 트래핑 이후 논스톱 슈팅으로 아름다운 골을 많이 넣은 선수로, 한국의 한 축구 선수가 떠오른다.[11]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과의 3차전에서 결정적인 1 대 1 찬스를 잡았지만, 허무하게 이운재에게 막혔다. 덕분에 누누 고메스는 한국인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12]
5. 기록
5.1. 대회 기록
- SL 벤피카 (2002~2011)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준우승: 2004
- UEFA U-18 챔피언십: 1994
5.2. 개인 수상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 프리메이라 리가 올해의 선수: 1998-99, 1999-2000
- 프리메이라 리가 이달의 선수: 2005년 9월ㆍ10월
- 툴롱 토너먼트 득점왕: 1996
[1] 당시 포르투갈은 4강에서 프랑스를 만나 정규시간까지 1-1을 유지하고 연장전에 돌입하여 117분 지단에게 pk실점을 하고 탈락한다. (당시 연장전 골은 골든골)[2] 당시 파격적인 수준의 영입이었는데, 뛰어난 활약을 한것은 사실이나, 분명히 포르투갈 리그에서 활약한 것이었고, 다른 외국 리그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입 금액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는데, 당시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안드리 셰브첸코의 이적 금액과 비교해도 만만치 않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3] 성적은 53경기 14골.[4] 당시 구단주였던 비토리오 체키 구단주의 정계 도전이 실패로 끝났고, 그와 더불어 방만한 자금 운영으로 폭탄을 맞게 되었다.[5] 다만 당시 기록은 23경기 7골로 부상의 여파가 지워지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6] 당시 이적료는 9.2M으로 클럽 레코드 2위에 기록되는 금액이다.[7] 상대팀은 모두 하부리그의 팀이였다.[8] 당시 3골로 공동 5위를 한 선수 중에는 티에리 앙리와 세르지우 콘세이상이 있었다.[9] 상대는 쿠웨이트[10] 결승에서는 그리스에게 패배하였다.[11] 실제로 이동국과 닮은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훈훈한 외모를 갖추고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해외진출에 실패한 선수가 바로 그런 점이다.[12] 왜냐하면 이때 한국이 박지성의 선제골이 터트린 후, 미국이 폴란드에게 1:3으로 지고 있던 상황인터라, 2002 동계올림픽 안톤 오노 사건으로 반미에 격앙되어 있던 한국팬들은 미국 떨어지게 포르투갈과 비기길 바래서 은근히 포르투갈 응원을 해주는 시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