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이 코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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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경영인. 2008년부터 SL 벤피카 단장을 맡고 있다."후이 코스타에 의해 포르투갈 축구의 새 시대가 열렸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포르투갈 골든 제너레이션[1] 와 ACF 피오렌티나, 밀란 제너레이션 2기의 중원을 지휘한 포르투갈의 마에스트로서, 최강의 패스마스터로 평가받던 선수.
2. 선수 경력
2.1. SL 벤피카
5살의 나이에 Damaia Ginásio Clube라는 유소년 클럽에 입단하면서 축구를 시작했고 이후 벤피카 유스로 적을 옮겨 흑표범 에우제비우의 조련을 받고 성장하였다. 지금도 회자되는 포르투갈 황금세대가 첫선을 보인 91년 u21 월드컵 이후 벤피카의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주앙 핀투와 함께 강력한 중원을 형성하여 93년 포르투갈 컵, 93-94 시즌 리그 우승을 견인한다. 이후 벤피카는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부임한 2005년 이전까지 11년간 리그 우승과 담을 쌓게 된다.
2.2. ACF 피오렌티나
재정 문제를 겪던 벤피카는 94년 피오렌티나의 1200만 에스쿠도[2] 의 오퍼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피오렌티나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세리에 A 무대는 소위 7공주라 불리는 최강급의 7개팀이 있었고 리그 수준도 2위 라리가나 3위 분데스리가, 4위 EPL이 대적도 못할 만큼 수준높은 리그였고, 각 팀마다 손꼽히는 미드필더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후이 코스타는 매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시즌 베스트 11에 계속 선정되고 매해 이적시장마다 이적루머가 뜰 정도였다. 당시 비교된 선수로는 AC 밀란의 즈보니미르 보반, 유벤투스 FC의 지네딘 지단, SS 라치오의 파벨 네드베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등이 있다. 하지만 2001년 거품이 꺼지면서 피오렌티나는 파산하기에 이르고 후이 코스타의 광팬이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그를 영입하기 위해 무려 3천만 파운드(42M 유로)[3] 의 사재를 지불하면서 AC밀란으로 이적한다. 이때의 활약만 놓고 실력이나 호사가의 입담에서나 프란체스코 토티, 지네딘 지단,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과 더불어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중 한 명이였다. 지금도 피오렌티나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선수로 추앙을 받고 있다.
2.3.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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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으로 이적 후 보반의 공백을 매우는 사명을 받고 출전하였지만 그의 약점이였던 압박과 부상 문제로 인상깊은 활약이 적어 먹튀논란도 일기도 했었다.[4]
2002-03 시즌에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챔스 도움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의 주역이 된다.[5] 특히 중원에서 후이 코스타가 정확히 찔러넣어주는 킬패스와, 최전방에서 필리포 인자기의 천재적인 라인 브레이킹 & 안드리 셰브첸코의 득점연결은 실로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냈으며, 본격적인 밀란 제너레이션 2기를 열어젖혔다.
그러나 2003-04 시즌 카카가 영입되고 나서는 카카가 후이 코스타를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했고 코스타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출전하는 등 후보신세로 전락하고 만다.[6][7] 밀란에서 리그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1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를 기록한 후 2006년 황혼기를 불태우기 위해 다시 친정 벤피카로 이적하고 은퇴 경기를 한다.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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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 코스타를 필두로 한 황금세대의 FIFA U-20 월드컵 우승으로 혜성같이 떠오르며 에우제비우 이후 그저 그런 유럽 중위권 팀이던 포르투갈은 국제대회에서 강력한 팀으로 부상한다. 황금세대의 최전성기이던 UEFA 유로 2000에서는 4강까지 진출하였지만, 4강에서는 당대 최강의 팀이던 프랑스에게 2:1로 석패하였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부상 때문에 폴란드전 1경기 출전[8] 끝에 조별리그에서 탈락.[9] 홈에서 열린 UEFA 유로 2004에서는 조별리그와 결승전에서 복병 그리스에게 2번 패해 준우승에 그치는 등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부재와 클럽에서 빛나던 시기에 결국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서브가 되고 나서야 겨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점을 보면 결국 이름값에서든 실력으로든 대표팀에서는 루이스 피구, 클럽에서는 카카에게 가려진 후이 코스타 본인의 축구인생을 보는 듯 하다.
4. 플레이 스타일
월드클래스급 공격형 미드필더. 패싱 능력, 특히 2선에서 스루 패스가 빼어나서 어떤 상황에서든 빈 공간으로 스루 패스를 찔러넣는게 그의 장기였다. 피오렌티나 시절에는 후이 코스타 스루 패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슛이 주요 득점 루트일 정도. 어찌보면 단순하면서 금방 막힐 루트지만 최정상급 선수 두명의 찰떡호흡은 항상 엄청난 파괴력을 과시하였다. 소위 만화에서 나오는 수비 가담 전혀 안하고 있다가 킬패스 한 방 찔러 넣는 고전적인 플레이 메이커 스타일. 그 밖에 킥력이 좋아서 프리키커로 나서기도 했고, 거기에 스피드도 빠른 편이고 드리블도 상당한 편이라 볼 키핑에 이은 패스가 주무기이던 다른 당대의 플레이메이커들과는 달리, 직접 돌파를 통해 상대 수비를 부수곤 하던, 동 시대의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들과는 차별화된 장점을 보여주었다. 다만 신체조건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해 피지컬로 비벼대는 선수들을 만나면 작아지는 약점이 있었다. 결국 이는 AC 밀란에서 카카,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데쿠에게 밀려나는 원인이 된다.
뭐, 꼭 플레이 스타일과 신체조건 때문에 밀려났다기보다도 그냥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클럽과 대표팀에서 세대 교체가 된 부분도 있었다. 후이 코스타는 02-0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이었는데 밀란이 카카를 영입한건 못해서일리는 없고, 나이 때문에 후계자를 영입한 것. 후이 코스타는 72년생이라 2003년에는 만나이로 31살이라 슬슬 서브로 나올 만한 나이였다. 게다가 카카는 밀란에서의 첫 시즌인 03-04 시즌에 완벽한 적응을 마치며 세리에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면서 그 다음 시즌 밀란에서의 주전 확보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마찬가지로 데쿠도 이미 UEFA 유로 2004가 개최되기 직전인 03-04 시즌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소속팀인 FC 포르투의 리그 우승, FA컵 준우승, 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을 하지 못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에서의 우승을 이끌고, 본인은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그 해 UEFA 올해의 선수상까지 차지했으니 당연히 UEFA 유로 2004를 기점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포르투갈 대표팀에서의 주전이 될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버렸다. 게다가 카카는 82년생, 데쿠는 77년생이라서 한창 전성기대의 나이였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ACF 피오렌티나
- 코파 이탈리아: 1995-96, 2000-01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96
- AC 밀란
- 세리에 A: 2003-04
- 코파 이탈리아: 2003-04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03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2-03
- UEFA 슈퍼컵: 2003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준우승: 2004
- FIFA U-20 월드컵: 1991
- 툴롱 토너먼트: 1992
5.2. 개인 수상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2-03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6, 2000
- 프리메이라 리가 이달의 선수: 2007년 9월
- 툴롱 토너먼트 MVP: 1992
- 툴롱 토너먼트 득점왕: 1992
- FIFA 100: 2004
- FIFA XI: 1998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4
- 피오렌티나 역대 베스트 XI: 2016
6. 여담
- 카카랑은 특히 사이가 좋았는데, 카카가 막 이적한 03-04시즌 초반에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언론의 비난을 받자 인내심을 가지라며 카카를 쉴드쳐준적도 있었고[10] , 아직 경험이 부족한 카카에게 조언과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 10살이나 어린데다 같은 포르투갈어를 쓰는지라 말도 통했을테니 본인도 카카를 후계자라고 생각한듯 하다.
[1] 세르지우 콘세이상, 누누 고메스, 파울레타, 루이스 피구 등.[2] 포르투갈의 예전 화폐단위.[3] 당시 이적시장 규모로 보면 미친 수준이다. 지금이야 3000만 파운드야 유망주 영입하는데 지급하는 수준이지만 8년전 안드리 솁첸코가 첼시에 입성하는데 든 이적료가 3000만 파운드로 호비뉴이전 리그 최고액수였다.[4] 특히 득점력이 확연히 떨어진 것이 컸다.[5] 이 때 당시 주전 경쟁에서 밀어버린 선수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히바우두다. 코스타가 잘한것도 있지만 히바우두가 피지컬 저하 및 컨티션 난조, 전술과 리그에 적응을 못했다.[6] 가끔 선발로 나올때는 카카를 밀어내는게 아니라, 안드리 셰브첸코를 원톱으로 세우고 카카와 코스타가 패스를 셰브첸코에게 몰빵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7] 포지션 경쟁에선 카카에게 밀렸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좋았다고 한다. 카카가 동 포지션의 베테랑인 후이 코스타에게 조언을 구했고 후이 코스타도 카카의 겸손한 태도에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고....심지어 후이 코스타는 본인이 뽑는 베스트 11에서 자기 포지션에 자기가 아닌 카카를 꼽았다. #[8] 1골 기록.[9] 결국, 후이 코스타는 2002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전에 출장하지 않았고 교체멤버로 대기만 했고 박지성에게 결승골을 허용하여 패배한 걸 지켜보기만 했다..[10] 실제로 몇 경기 뒤에 카카는 이런 평가를 날려버리고 대활약 해서 세리에 올해의 선수상도 받고 발롱도르 후보에 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