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피구

 

''' 루이스 피구의 역임 직책 '''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페르난도 쿠투
(2002~2004)

'''루이스 피구
(2004~2006)'''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2007~ )

''' 루이스 피구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97-98 · 1999-00



'''2000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지네딘 지단
2위
'''루이스 피구'''
3위
히바우두

''' 루이스 피구의 기타 정보 '''
'''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1999년
크리스티안 비에리
(4650만 €)

<color=#373a3c> '''2000년
루이스 피구
(6000만 €)'''

2001년
지네딘 지단
(7750만 €)





[image]
'''UEFA 기술 고문'''
''' 이름 '''
'''루이스 피구'''
'''Luís Figo'''
''' 본명 '''
루이스 필리프 마데이라 카에이루 피구
(Luís Filipe Madeira Caeiro Figo)
''' 출생 '''
1972년 11월 4일(51세)
포르투갈 리스본
''' 국적 '''
[image] 포르투갈
''' 신체 '''
180cm | 체중 79kg
''' 직업 '''
축구선수 (윙어 / 은퇴)
축구행정가
''' 주발 '''
오른발
''' 소속 '''
''' 선수 '''
스포르팅 CP (1989~1995)
'''FC 바르셀로나 (1995~2000)'''
'''레알 마드리드 CF (2000~2005)'''
인테르나치오날레 (2005~2009)
''' 국가대표 '''
127경기 32골[1] (포르투갈 / 1991~2006)
1. 소개
2. 클럽 경력
2.1. 스포르팅 CP
2.2. FC 바르셀로나
2.2.1. 레알 마드리드 이적 비화
2.2.2.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폭풍
2.3. 레알 마드리드
2.4.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5. 은퇴 후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FIFA 회장 선거 출마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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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포르투갈의 前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윙어였다.
축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이적의 주인공[2]이자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를 호령했던 전설적인 윙어다.

2. 클럽 경력


포르투갈 리스본 출신으로 어릴 적에는 육상을 배웠지만,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종목을 바꾸었다.

2.1. 스포르팅 CP


고향 연고팀인 스포르팅 리스본 유스팀에서 축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호날두의 팀 선배가 된다.
유스시절 스포르팅에 입단할 때 벤피카와 이중 계약을 한 것이 들켜 45일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 우승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후 4시즌 동안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뛰게 되는데 세계의 내로라하는 빅 클럽들이 노릴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2.2. FC 바르셀로나


[image]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활약한 후 빅 클럽들이 노리기 시작했고, 피구 또한 해외의 빅리그로의 이적을 모색했다. 원래 당시 최고의 리그로 자타가 인정했던 세리에 A로 진출을 모색했지만, 선수와 에이전트가 각각 유벤투스, 파르마와 이중 계약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2년간 세리에 진출 금지라는 처벌을 받게 된다. 이후 피구는 라 리가의 바르셀로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1995년 애증의 팀이 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바르셀로나에서 피구의 활약은 눈부셨다. 히바우두-호나우두/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함께 3톱에 서서 프리 롤과 윙어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며 팀이 2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호날두처럼 괴물 같은 득점력을 보여주는 타입이 아니라,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다비드 실바처럼 공격진에 활기와 파괴력을 불어넣는 타입이었다. 당연히 피구의 인기는 바르셀로나에서 최고를 자랑했다. 그때 바르셀로나 팬 클럽들 중 하나가 이름이 '피구'였고 당시 칸테라에서 올라와서 바르셀로나의 상징이라고 떠받들어진 펩 과르디올라의 부재시 주장 완장은 늘 피구가 차고 다녔을 정도.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을 4강에 올리게 되지만, 이후 바르셀로나와 보드진과의 불화설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사실 피구는 활약에 비해 많은 주급을 받지 못했고, 피구와 피구의 에이전트는 그것에 불만이 많았다. 결국 피구의 에이전트는 유로 대회가 끝난 후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을 추진하게 된다.

2.2.1. 레알 마드리드 이적 비화


어떻게 '''상식적으로 구단이 절대 불허할 이적'''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답은 이적시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바이아웃 제도 때문이다. 프리메라 리가는 선수의 권익 보호를 위해 A 팀 계약시 일정 금액을 현금 지불하면 원 소속팀의 방해 없이 선수와 접촉하여 이적을 추진할 수 있는 바이아웃 제도가 있다. 이는 계약 갱신시 새로 지정이 가능하며 금액 자체는 얼마를 써도 문제가 없다. 피구의 경우 바르셀로나 입단 시절부터 헐값의 장기 계약에 묶여 있었고, 이 때문에 바이아웃 가격도 6000만 유로로 실력과 팀에서의 위상에 비해 턱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는 피구를 싼 주급으로 최대한 오래 써먹을 생각만 했지 바이아웃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바이아웃 제도는 구단 간 신사 협정 차원(약팀 보호의 기능도 있다.)에서 거의 시행되지 않던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알 마드리드가 갈락티코스 정책의 시작으로 피구의 바이아웃 금액을 덜컥 현금으로 내놓자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피구 이후로 프리메라 리가 선수들의 바이아웃 금액이 비정상적으로 상향되어 사실상 사문화되다시피 했다.[3] 이를테면 리오넬 메시의 경우 바이아웃을 행사하려면 7억 유로(약 9200억원)를 일시불 현금으로 질러야 한다. 또한 메시의 라이벌 호날두의 바이아웃 금액은 10억유로, 그러니까 약 '''1조 3200억'''을 지불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이 금액을 지불하고 선수를 살 구단은 아직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초유의 이적을 계획한 것은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에서 밀리고 있던 플로렌티노 페레스. 2008년 피구와의 인터뷰 겸 보스만 룰 특집 기사를 낸 포포투 영국판에 따르면, 피구 자신도 바이아웃 조항을 주급 인상에 미온적이었던 바르셀로나를 압박하려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지 마드리드로의 이적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 당시 마드리드의 회장이었던 로렌소 산스는 전 해 챔스 우승을 해서 지지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에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당선 가능성은 낮게 점춰졌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페레스 측은 피구에게 비밀리에 접근, '100만 달러를 줄 테니 자신이 당선되면 마드리드로 반드시 이적해 달라'는 계약을 제안한다. 페레스가 낙마하더라도 피구가 선금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조건과 함께. 페레스 낙선을 기정사실로 보던 피구 측은 당연히 얼씨구나 하고 그 계약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1998-1999 시즌 우승을 차지한 FC 바르셀로나가 도심 퍼레이드를 나갔을 때 피구는 도청 테라스에서 카탈루냐와 포르투갈 국기를 몸에 두르고선 마드리드를 까는 구호까지 외쳤을 정도.
문제는 페레스가 피구와의 이 비밀 계약을 흘리면서 결국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당선이 되어 버렸다는 것. 페레스는 곧바로 바이아웃을 질렀고 피구는 페레스와의 계약에 의해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겠지만 마드리드에서 계약 확인 기자 회견을 한 피구의 얼굴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한편 피구는 인터뷰에서 FC 바르셀로나 측이 피구에게 그다지 애정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적을 결심했다고 말하고 있다.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 근데 이적하기 싫었다 쳐도 이미 이적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법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5년 동안, 팀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열린 유로 2000 대회 당시에 포르투갈 대표팀은 4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클럽으로 이적할 할 기회가 생겼어요. 그런 기회에 대해 바르셀로나에게 이야기를 했죠. 바르셀로나에 책임을 다하고 싶었으니까요. 그 당시 이야기에 대해 많은 소문이 있었죠. 제가 최고액의 계약을 원했다고요. 많은 돈을 원했다는 거죠.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난 바르셀로나에 남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바르셀로나에서 뭘 해줄 수 있는지, 뭘 원하는지 듣고 싶었죠. 그런데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좋아. 떠나도 좋아. 이적료만 많이 남겨주고 넌 가도 좋아.” 난 클럽이 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느꼈고, 이적을 결정했죠. 계약 조건도 더 좋았죠. 레알 마드리드의 멤버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팀의 명성을 끌어올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행운을 잡은 겁니다.


2.2.2.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폭풍


어쨌든 간에 라이벌 팀으로 이적을 했기에 바르셀로나 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피구 이전에도 바르셀로나에서 바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사례는 제법 많았는데, 주젭 사미티에르 같은 고전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80년대말부터 90년대 사이에 베른트 슈스터, 루이스 미야, 미카엘 라우드럽, 호나우두 등 여러 선수들이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바 있었다. 루이스 엔리케처럼 반대로 레알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사례로 있었다. 앞의 사례들을 보면 바르셀로나에 뛰다가 구단과의 갈등으로 엿 먹으란 뜻에서 레알로 이적한 케이스가 많았다.
피구가 레알로 이적하자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의 비난은 엄청났다. 거리 곳곳에서 피구의 사진이 불태워진건 물론이요, 피구가 엘 클라시코 날이 되어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으로 오면 피구에게 온갖 쓰레기와 욕설이 날아들었다. 코너킥 차러가던 피구에게 양주병을 던질 정도. 유명한 바르사 팬의 돼지 머리(...) 투척 사건[4] 그 욕설로 인해 피구가 제대로 뛰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바르셀로나의 주장 과르디올라가 팬들에게 이러면 안된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피구는 엘 클라시코가 열리기 전 시합에서 고의로 퇴장을 당해 엘 클라시코 더비를 일부러 빠질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어차피 계약의 세부 상황이 일반에 알려질 일은 없겠지만 배신감으로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날뛴 바르셀로나의 울트라들에 비해 피구 자신은 조용히 처신했다. 바르셀로나에 대한 적의감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그나마 비난을 했던 것은 자신의 가치를 정당히 평가해주지 않았던 당시의 보드진과 회장인 호안 가스파르트.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바르셀로나에 대한 호감은 그대로 드러냈던 모양. 실제로 2003년 당시로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보다 더 먹어주는 특급 유망주였던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기자 회견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피구가 자신에게 갈 수 있다면 바르셀로나를 가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가 피구의 이적시 선수 본인과 상호 동의하에 내걸었던 바이아웃 조항에 적혀 있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금액을 어찌 됐건 받게 됐다.
그래도 돈 보고 이적했다는 말은 듣기가 거북한지 상기 서술한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축구 선수의 커리어는 결코 길지 않다. 누구든지 선수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게 쳐 주는 클럽으로 이적하는 것에 대해 딴죽을 걸어서는 안 된다'라고 발언했다.

2.3. 레알 마드리드


[image]

레알 마드리드 이적을 확정지으면서 참가한 유로 2000에서는 포르투갈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았고,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5]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후 2000-01 시즌에도 대활약을 펼치며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활약하며 4강까지 올라갔지만 바이에른 뮌헨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다음 시즌인 2001-02 시즌엔 지네딘 지단이 새로 합류하게 되었는데, 지단이 뛰어난 플레이로 맹활약하면서 에이스의 자리가 지단에게 차츰 넘어갔지만 피구 역시 여전히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2001년 연말에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2002년 월드컵에도 출장했지만, 잘 알다시피 미국과 '''대한민국'''에게 의외의 일격을 당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6] 월드컵 이후 2002-03 시즌에도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다.
2003-04 시즌 이후로 점차 피지컬의 하락과 30을 넘긴 나이에서 오는 하락세 등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2004-05 시즌은 룩셈부르고 감독이 부임하면서 피구는 주전 경쟁에서도 완전히 밀려 후보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피구는 불만을 품고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자유계약으로 팀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2.4.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image]
자신의 포지션에 젊은 피들이 들어오고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자 2005년 여름 자유계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의 인테르나치오날레로 이적하였다. 또한 그해 포르투갈 대표팀에 복귀하여 2006 독일 월드컵에 출전하여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에 나서 4위를 차지하였다.
월드컵 이후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은퇴한 피구는 2006-07 시즌 도중 호나우두데이비드 베컴 등 많은 수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연이어 이적을 확정지은 가운데 피구 또한 차기 시즌 타팀으로의 이적을 기정사실화했는데, 놀랍게도 새로 입단하게 될 팀은 '''사우디아라비아알 이티하드'''. 당시 구단 유니폼 인증 사진까지 찍으면서 이적이 사실상 확정적인 상황이었으나, 이적 시장이 열리기 직전 피구 측에서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알 이티하드를 FIFA에 제소한 뒤 이적을 무효화했다.
그 이후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다가 2008-09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7]
이후 2011년 부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홍보 대사를 맡고 있는 중.

2.5. 은퇴 후


2011년 말에 '''"바르사를 떠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레알 마드리드는 고급스러운 구단이라서'''"라는 인터뷰를 하면서 또 바르셀로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2013-2014 챔피언스 리그 16강 추첨식에서 바르셀로나의 상대로 조별 리그 2위를 차지한 팀 중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맨체스터 시티를 뽑은 후 "나이스 매치"라는 발언을 해 수많은 꾸레들을 충공깽 상태로 빠뜨렸다. 물론 그냥 재미로 축구보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꿀잼매치일 것이지만서도…
2014년 10월 26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 더비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승리하자 이런 멘션을 남겼다. 2020년에는 바르셀로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메시가 팀을 떠나겠다고 해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 와우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이적이군 이라는 멘션을 남겨 안그래도 초상집 분위기인 바르셀로나 팬덤의 속을 긁었다. 다만 메시는 자신처럼 팀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의 피구보다도 더 천문학적인 메시의 바이아웃 때문.

3. 국가대표 경력


청소년 대회에서 낸 엄청난 퍼포먼스때문에 국대에도 일찍 소집되었지만 포르투갈 자체가 부진하며 제대로 된 메이저 성적이 초반엔 없었다. 그러나 '골든 제너레이션'이라는 포르투갈의 축구에도 황금기가 찾아왔다. 후이 코스타, 파울레타, 비토르 바이아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성장했고 그 중에는 피구가 당연 돋보였다. UEFA 유로 2000에서는 잉글랜드, 독일, 루마니아라는 죽음의 조에 속하지만 하나하나 다 박살내며 3승으로 8강에 올랐고 터키를 2-0으로 승리한다. 기세는 좋았으나 4강에서 지단앙리에게 골을 먹히며 2-1로 패배한다. 당시 프랑스 선수단과 엄청난 신경전을 벌였으며 경기 종료 후에도 피구의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생하게 중계되었다. 허나 피구 자신은 대회 내내 독보적이었고 올스타팀과 함께 그 해 발롱도르까지 수상한다.
그런 좋은 기세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참가한다.(당시 지역 예선에서 루드, 클루이베르트, 다비즈, 스탐, 반데사르 등 초호화 멤버였던 네덜란드를 아일랜드와 협공으로 탈락으로 몰아넣는다.) 폴란드, 대한민국, 미국과 같이 한조가 된 포르투갈은 첫 경기에서 어이없게 미국에게 3-2로 패배한다. 그리고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파울레타해트트릭으로 4-0으로 승리하지만 한국과의 경기에서 송종국에게 피구는 꽁꽁 묶였고 결국 박지성의 골로 1승 2패 예선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사실 말이 꽁꽁 묶인 거지 경기를 보면 말그대로 처참하게 압도당해버렸다. 본인 커리어에 있어서 최악의 굴욕적인 경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
UEFA 유로 2004 때는 이미 나이가 30줄에 들어섰다. 주장완장까지 찬 피구는 예선에서 그리스, 스페인, 러시아를 상대로 2승 1패로 올라온다. 8강에서는 승부차기잉글랜드를 꺾었고 4강에서는 네덜란드를 2-1로 꺾는다. 그렇게 결승에서 만난 팀이 돌풍의 그리스...결과는 그리스의 기적적인 1-0 승리였다.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 + 황금 세대의 찬란한 결말을 기대했던 포르투갈 포함 전 세계 축구계는 그야말로 멘붕이었고 피구는 다시한번 좌절해야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은 유럽 강호의 모습을 보이며 4강까지 올라갔는데 당시 '''지네딘 지단'''이 이끌던 프랑스와 맞대결을 펼치며 결국 '''지단의 페널티 킥 결승골''' 한방을 맞고 패배했다. 이 경기는 국내외 축구 팬들에게 지단과 피구의 마지막 맞대결로 상당한 관심을 끌었으나, 결과는 고작 1:0으로 좀 싱겁게 끝났다.[8] 이어 독일과의 3, 4위전에서도 패하며 4위를 차지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에는 클래식 윙어로 뛰었고, 말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러닝 크로스에 매우 능한 월드클래스 드리블러이나 클래식 윙어였음에도 날카로운 패스와 플레이메이킹 능력까지 갖췄고, 파워풀한 중거리 슛도 곧잘 넣었으며 날카롭게 감아 차는 프리킥 능력까지 훌륭했다.
특유의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측면과 중앙을 넘나들며 활동 범위를 폭넓게 가져감으로 플레이의 유연함을 살렸고, 크로스, 패스, 슈팅을 잘 선택하여 측면을 지배하였다. 윙어로써 한순간에 치고 나가는 속도 및 발밑 스킬과 트릭, 완급 조절을 통한 짧게 치는 돌파에도 능했다.[9]
키는 180으로 보통의 체격이었지만 바디 밸런스가 뛰어났고, 사진만 봐도 다리 근육이 있어 몸빵이 상당한 수준이라 상대 수비수와의 경합에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는 포르투갈 선수들, 특히 플레이메이킹을 해 줘야 되는 후이 코스타의 신체 조건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상당히 커버해 줬다.
무엇보다 피구는 꾸준했는데, 은퇴하기 직전까지 큰 기복 없이 리그 최정상급 플레이를 보여줬다. 30을 넘긴 이후에는 전성기 시절의 스피드와 드리블 돌파 대신 상대의 템포를 뺏는 움직임으로 효과적인 드리블을 성공시키는 모습이 늘어났다. 10년이 훌쩍 넘도록 꾸준한 출장수를 보여주면서도 리그 탑급의 플레이를 유지했다는 측면에서, 이만한 선수를 찾기 어렵다.[10]

5. FIFA 회장 선거 출마


2015년 1월 27일 FIFA 회장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블라터의 부패와 스캔들을 강력히 비판하며 나섰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000
  • FIFA 올해의 선수: 2001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6
  • UEFA 올해의 팀: 2003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2004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4-05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11]: 1998-99, 1999-00, 2000-01
  • UEFA U-21 챔피언십 MVP: 1994
  • ESM 올해의 팀: 1997-98, 1999-00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0
  • FIFA 100: 2004
  • 옹즈 드 옹즈: 2000, 2001, 2002
  • 포르투갈 골든볼: 1994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 인터 밀란 올해의 선수: 2005-06
  • 스포르팅 올해의 선수: 1993-94
  • 골든풋: 2011
  • IFFHS 레전드: 2016

7. 기타


음악(팝, 록)을 좋아하며 특히 음악을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한다. 휴식 시간에는 자주 직접 기타 들고 퀸 노래들을 부르기도 한다.
각국의 축구선수들을 모아 '러브 유나이티드'라는 곡을 발표했다. 당시 2002년 월드컵에서 상대했던 이영표가 한국 선수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노래를 들어보면 도중에 이영표의 한국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곡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출시한 공식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위 문단에서도 한 차례 서술한 적이 있지만, 피파 2002 게임에서 능력치가 전부 만렙인 7이다. 이 당시에는 능력치가 세분화되지 않아서 항목도 적었고 최고치가 7이었다.
빈곤 퇴치 활동을 위한 피구 재단을 만들어서, 매년 자선 경기를 벌이고 있다. 유니세프와 연동하여 경기를 하기도 하고, 벤피카와 붙기도 하고, 7대 7로 풋살에 가까운 형태의 경기를 하는 등 다양하다. 피구의 인맥에 자선 경기라는 것도 엮여서 은퇴한 선수건 현역 선수건 꽤나 유명한 선수들이 출장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TV 중계를 하기도 한다. 친선 경기이므로 피구와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미하엘 슈마허가 참가한 경우도 있다.
일식 매니아다. 한때 바르셀로나에서 일식집을 경영한 적도 있다. 그래서 2002 월드컵 때도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경기하게 된 것을 아쉽게 여겼다고 한다.
2013-1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대진 추첨식에 홍보 대사로 나왔다. 레알 마드리드는 16강부터 4강까지 모두 독일 팀이 뽑혔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전이 끝나고 유상철이 유니폼 교환을 제의했는데, 속이 상했는지 거절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포르투갈전에서는 송종국이영표의 전담 마크에 처참하게 지워졌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MLT-19김성주와 함께 나온 안정환은 이날 송종국이 잘한 것도 있지만 피구의 컨디션이 안 좋기도 했다는 말을 남겼다.
마시모 모라티 당시 인테르 구단주와 함께 칼치오폴리의 최초 고발자였다. 루치아노 모지 당시 유벤투스 FC 단장이 심판 대기실에 들어가는 걸 봤다고 말했다고. 안 그래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말이 많던 유벤투스는 피구의 구체적 증언으로 인해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뛰던 당시 골 때리게도 펩 과르디올라와 열애설이 있었다고 한다(...). # 두 사람 다 주장단이기도 했고 숙소에서도 룸메이트였기 때문에 터진 루머라나. 두 사람 다 결혼하고 나서는 열애설이 사그러 들었다고 한다..

[1]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출장 2위.[2] 팀 동료였던 호나우두도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경력이 있긴 하지만 피구에 비하면 그리 파장이 큰 편은 아니었다. 활약한 시기도 한 시즌이었고 인테르로 이적한 뒤에 다시 스페인으로 리턴한 것이었다. 하지만 피구는 바르셀로나의 '''부주장'''인 데다가 바이아웃, 즉 돈 때문에 이적한 사례라 후폭풍이 아주 폭발적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메시 혹은 이니에스타가 레알 마드리드로 간 것과 비슷한 것이다. 혹은 호날두바르사로 이적했다면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이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선수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전 바르샤 감독이던 루이스 엔리케는 반대로 레알에서 바르샤로 다이렉트 이적했지만 레알에서의 활약이 미미했고 계약만료로 이적한 경우라 피구만큼의 파장은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서포터들이 곱지 않게 봤지만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주장까지 선정되고 은퇴 후에는 감독이 되는 영예까지 누렸다.[3] 헌데 말도 안되는 바이아웃을 지불하여 선수를 영입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2017년 8월 바르셀로나 선수였던 네이마르를 PSG가 바이아웃 2억 2200만 유로(약 2900억)을 지불하여 영입한 것. 1억 5백만 유로(1300억)으로 역대 1위였던 폴 포그바의 기록을 단숨에 2배 이상 넘겨버렸다.[4] 뒤의 푸욜을 보면 관중들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고있다.[5] 루이스 피구가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은 4강까지 올리는 뛰어난 활약을 하긴 하였으나, 무관이었기 때문에 유로 2000 우승을 이끈 지단 쪽이 좀 더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지단이 챔스 조별 함부르크 전에서 박치기를 하고 퇴장 당하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여론이 피구쪽으로 쏠리게 되었다고 한다.[6] 당시 피구가 송종국에게 관광당한 모습은 2002 한일 월드컵을 본 세대들에게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 대표팀 선수이던 안정환은 훗날 마이 리틀 텔레비전 MLT-19에서 송종국이 잘 막고, 피구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도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7] 여담으로 이 시절 마시모 모라티와 함께 루치아노 모지와 심판진들의 관계에 의혹을 제기했고, 이후 이것은 이탈리아 축구계 최고의 흑역사 중 하나로 이어졌다.[8] 이 이전에도 UEFA 유로 2000에서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와 붙었으나, 그 경기에서도 '''지단의 페널티 킥 골든 골''' 하나 때문에 '''4강'''에서 멈춰야 했다. 피구는 결정적인 순간에서 결국 지단을 넘어서지 못했다. [9] 피구가 얼마나 만능이었는지에 대한 근거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2000년대 초반 피파 시리즈는 지금의 축구 게임처럼 세부적인 스탯 배분이 없었기에 각종 항목을 7점 만점으로 계산했는데, 피구는 여기서 '''모든 항목 7점'''을 받은 선수였다. 호나우두지네딘 지단도 몇 개는 6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10] 동시대 선수 중 라이언 긱스, 하비에르 사네티, 프란체스코 토티정도를 제외하면 저만큼 오랜기간 동안 클래스를 유지한 선수가 없다.[11] 돈 발론 어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