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시몬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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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니나 시몬
NINA SIMONE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8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ffd700 후보선정 연도}}}'''
'''}}}#ffd700 2018년}}}'''


'''Nina Simone'''
[image]
'''이름'''
Nina Simone (니나 시몬)
'''본명'''
Eunice Kathleen Waymon (유니스 캐슬린 웨이먼)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33년 2월 2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image]
'''사망'''
2003년 4월 21일 (70세), 프랑스 [image]
'''직업'''
싱어송라이터, 피아니스트, 가수
'''장르'''
재즈, 블루스, 가스펠, 알앤비

'''예술가의 의무는 그가 살아가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It's an artist's duty to reflect the times in which we live.'''


'''High Priestess of Soul'''

'''소울의 제사장'''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유니스 웨이먼, 니나 시몬이 되다
2.3. 흑인민권운동의 전사가 되다
2.4. 방황, 그리고 음악계로의 복귀
2.5. 말년 및 죽음
3. 평가 및 영향력
4. 여담


1. 개요


미국블루스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 가수. 미국 흑인 블루스 음악 역사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며, 특히 흑인민권운동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 생애



2.1. 유년시절


1933년 2월 2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Eunice Kathleen Waymon (유니스 캐슬린 웨이먼)으로 태어났다. 이미 3살때 부터 귀로 들은 음악을 피아노로 칠 수 있었을 정도로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감리교 교회의 장로였고, 아버지는 인부이자 전도사였다. 자연스럽게 니나 시몬 또한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교회에서 찬송가 반주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첫 콘서트는 12살 때 열렸는데, 1940년대 미국답게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때여서 백인 관객들이 앞에 앉고 정작 흑인인 니나 시몬의 부모는 뒷줄에 앉아야 했다. 니나 시몬은 이때 부모님이 앞줄에 앉을 때까지 연주하기를 거부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험이 그녀의 차후 흑인민권운동 참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콘서트에서 우연히 니나 시몬을 보게 된 피아노 선생 Muriel Mazzanovich (뮤리엘 마자노비치)는 니나의 음악적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니나의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니나 시몬의 가족은 뼈저리게 가난했지만 이 선생님의 도움으로 니나는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이 당시 니나의 꿈은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2.2. 유니스 웨이먼, 니나 시몬이 되다


195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니나는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 지원하는데, 떨어지고 만다. 비록 커티스 음악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니나는 죽는 그 날까지 자신이 음악원을 떨어진 이유가 자신이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믿게 된다.[2] 비록 학교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니나는 좌절하지 않고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음악 공부를 이어나간다. 레슨비가 필요했던 니나는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등 돈을 벌게 되는데, 우연히 Midtown Bar & Grill이라는 바에서 피아노를 치게 된다. 하지만 피아노만 치면 돈을 벌수 없다는 바 사장의 말을 듣고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한다.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바라던 부모님이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유니스 웨이먼은 니나 시몬이라는 예명을 짓게 된다. 니나 시몬이라는 이름은 당시의 남자친구가 자신을 부르던 별명인 Nina와 프랑스의 배우 Simone Signoret (시몬 시뇨레)의 이름을 합한 것이었다. 이렇게 유니스 웨이먼은 니나 시몬이 된다.
니나 시몬은 이때부터 작은 바 등에서 공연하면서 점차 인기를 얻게 된다. 1958년에 녹음한 I Love You, Porgy가 빌보드 20위권에 진출하면서 니나 시몬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데뷔앨범 Little Girl Blue를 발매한다. 이 당시 니나 시몬이 연주하던 음악들은 모두 대중음악이었는데, 이때 그녀에게는 음악이 생계유지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I Love You, Porgy는 니나 시몬의 유일한 빌보드 20위권 진출곡이다.

1961년 니나 시몬은 뉴욕 경찰로 일하던 앤드류 스트라우드(Andrew Stroud, 1925 ~ 2012)를 만나 결혼하고 이듬해 딸 리사를 출산한다. 앤드류는 이후 경찰 일을 그만두고 니나의 매니저로 일하게 되는데, 니나와는 평생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다. 앤드류는 니나를 구타하고 심지어는 강간하기도 했으며, 후에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대중음악과 다른 노선을 걷게 되는 니나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이는 후에 니나의 조울증 발병에 큰 영향을 미친다.

2.3. 흑인민권운동의 전사가 되다


1964년, 니나 시몬은 미국 콜픽스 레이블을 떠나 네덜란드의 필립스 레이블로 소속사를 옮긴다. 이는 미국 시장을 떠나 세계 시장을 노려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니나에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도 했다. 필립스에서 발매한 첫 앨범 Nina Simone in Concert에서 니나 시몬은 인종차별에 대한 첫 노래인 Mississippi Goddam을 발표한다. 이는 1963년 앨라배마에서 네 명의 흑인 소녀들을 죽이고 한 명의 부상을 입힌 교회 테러 사건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이 노래로 니나 시몬은 흑인민권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고, 본격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른다. 한 예로, 그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셀마 시위에서도 연설을 했고 노래를 불렀다. 다만, 니나는 마틴 루터 킹과 같은 비폭력주의자는 아니었고, 흑인 해방을 위해서는 폭력도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말콤 엑스를 지지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니나의 정치적 참여를 달갑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많은 공연 기획자들이 니나가 너무 정치적이 된 나머지 일반 공연을 하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때 당시의 니나는 오직 정치적인 곡들만을 연주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자 매니저인 앤드류는 니나가 대중음악을 하기를 원했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앤드류의 가정폭력이 시작된 것도 이때를 전후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이때부터 니나 시몬은 자신의 아프리카계 혈통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음악에도 아프리카의 리듬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고, 옷도 아프리카의 강렬한 색깔과 문양을 넣은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2.4. 방황, 그리고 음악계로의 복귀


1974년, 니나 시몬의 상황은 최악에 다다른다.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던 니나는 앤드류 및 기획사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딸을 데리고 라이베리아로 훌쩍 떠나버린다. 그곳에서 니나는 음악이나 공연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오직 쉬는 일에만 집중했다. 니나는 후에 라이베리아에서 체류하던 이 기간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나날로 회고했다.
하지만 돈을 아예 벌지 않고 있던 니나에게도 경제적 위기가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무대로 복귀할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방황하던 니나는 친구들과 기획사의 설득 끝에1976년 무대로 복귀하는데, 이 복귀 공연이 그 유명한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이다. 이때부터 니나는 유럽을 근거지로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고 공연하게 된다.



2.5. 말년 및 죽음


1993년, 니나 시몬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 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 지방에 정착한다. 10년 간의 투병 끝에, 그녀는 2003년 4월 21일 프랑스에서 자던 중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 후 아프리카의 전역에 뿌려졌다.

3. 평가 및 영향력


엘튼 존, 마돈나, 존 레논, 호지어, 비욘세, 밴 모리슨,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카녜 웨스트, 데이비드 보위 등 수없이 많은 가수들이 니나 시몬을 자신에게 영향을 준 가수로 꼽는다. 특히 니나 시몬 이후 음악을 하는 흑인 여성 아티스트들은 모두 니나 시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튼 존은 니나 시몬의 장례식에 꽃을 보내기도 했으며, 아예 자신의 피아노 중 하나를 그녀의 이름을 따 붙였다고 한다.[3] 호지어 또한 잘 알려진 니나 시몬의 팬인데,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어릴 적 니나 시몬의 음악을 들은 것이라고 하며 인터뷰 때마다 영향을 받은 가수를 언급할 때 니나 시몬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호지어의 싱글 Nina Cried Power의 Nina가 바로 니나 시몬을 가리키는 것인데, 가사 또한 니나 시몬의 대표곡 Sinnerman에서 따왔다.
니나 시몬의 매력이라면 단연 일반 남성 못지않은 깊은 저음과 음색이다. 거칠면서도 깊은 울림을 지닌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유려한 피아노 연주와 아름다운 궁합을 보여준다. 또한 독특한 음악 스타일이나 구성을 자주 이용하기도 하는데, 단적인 예로 그녀의 곡 중 Be my husband를 들어보면 악기 구성이 보컬, 하이햇이 끝이다. 이런식의 극단적으로 미니멀한 구성부터 Sinnerman처럼 빠른 속도감에 코러스까지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한 구성까지 상당히 넓은 스펙트럼의 음악성을 보여준다.

4. 여담


  • 2016년 조 샐다나를 주연으로 한 니나 시몬의 전기 영화 [니나]가 개봉되었는데, 여러모로 욕을 많이 먹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 샐다나의 피부색 때문인데, 매우 검은 피부색을 가진 니나 시몬을 연기하기에 조 샐다나의 피부색은 너무 밝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니나 시몬이 평생을 흑인민권운동에 헌신하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흑인 정체성(blackness)를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미스 캐스팅이라는 평이 많았다. 이에 대한 조 샐다나의 대응도 문제였는데, 자신의 캐스팅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은 건 알지만 상관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넘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개된 트레일러에서 조 샐다나는 검은 메이크업을 하고 인조 코를 붙인 모습이었으며, 많은 팬들의 공분을 샀다. 당연히 평은 망했어요. 로튼 토마토에서 무려 2%라는 경이로운 평을 기록했다.

  • 니나 시몬의 삶에 대해 알고 싶다면 [니나]보다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인 [니나 시몬: 영혼의 노래(What happened, Miss Simone?)]를 보자. 니나 시몬 평생의 굴곡진 삶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 외동딸 리사 스트라우드(Lisa Stroud)는 Simone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및 배우 활동중이다.
  • 콘트랄토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니나 시몬의 노래를 듣고 남자로 착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커티스 음악원은 니나 시몬의 사망 직전에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3] 니나 시몬과 엘튼 존 모두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바탕으로 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이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