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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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노 전투 상황을 그려낸 병풍.[1]
1. 개요
2. 전쟁 전
2.1. 신겐의 죽음
2.2.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반
3. 전쟁 발발
3.1.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우주방어급 농성
3.2.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군의 도착
3.3. 결전의 맛보기, 도비노스 산 전투
3.4. 카츠요리의 공격 명령과 다케다 군 괴멸
4. 전쟁 이후
5. 다른 매체에서


1. 개요


長篠の戦い
덴쇼 3년 5월 21일(1575년 6월 29일), 미카와 북쪽의 나가시노 성(현재 아이치현 신시로 시 나가시노)을 둘러싼 다케다 카츠요리의 1만 5천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만 8천의 군사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 연합군이 대승하였다. 이 전투의 본격적인 결전 장소가 성 앞의 벌판이었던 시타라가하라(設楽原, 設楽ヶ原)였기 때문에,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전투(長篠設楽原の戦い)'라고도 부른다.

2. 전쟁 전



2.1. 신겐의 죽음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도오토우미 북쪽의 지배권을 확보한 다케다 신겐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공략하며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렇게 도쿠가와 가문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주력 병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끝이 나는 듯했는데...
신겐이 1573년, 52세의 나이로 급사한다.[2] 신겐의 죽음으로 다케다 군은 발이 묶이게 되었고, 도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은 그 사이에 오다 포위망을 정리하고 다케다와 결전을 벌일 전력을 모을 수 있었다.

2.2.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반


1573년 8월, 다케다 가신단 중에 하나였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奧平定昌)는 아버지 사다요시의 제안으로 다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항복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크게 기뻐하여 장녀인 가메히메를 주어 사위로 삼고 다케다 가문으로부터 함락시킨 지 얼마 안된 키타미카와(北三河)의 나가시노 성에 사다마사를 파견하고 다케다 군의 침략에 대비케 했다. 이에 다케다 카츠요리는 2년 뒤인 1575년에 1만 5천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3. 전쟁 발발



3.1.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우주방어급 농성


당시 나가시노 성 안에서는 500명의 군사밖에 없었으나, 성의 구조가 3중 해자를 설치한 난공불락이라 다케다 군도 성을 포위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당시 다케다 군에는 땅굴을 파는데 능한 부대가 있어 성밑으로 굴을 파서 침입하려고 했으나 사다마사는 그것을 예측하여 수비병도 굴을 파서 땅속에서 양군이 마주쳤다는 소문도 있다.
사다마사는 부하인 아시가루 토리이 스네에몬을 도쿠가와 측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파견했다.[3]
이에야스는 동맹군이었던 오다 가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오다 노부나가 역시 5월 13일 3만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미노(美農)의 기후 성을 떠나 도쿠가와의 본성 오카자키 성에 도착했다.

3.2.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군의 도착


오다 군 3만과 도쿠가와 군 8천은 나가시노 앞 시타라가하라 평원에 도착했다. 노부나가는 이 곳을 결전지로 정하고, 철포대를 중심으로 수비하면서 다케다 기마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짜고, 3중 울타리를 치고 다케다군을 기다렸다.
새롭게 발견된 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평원에 울타리를 친 것이 아니라, 지형을 이용해 산에 해자를 파고 다케다 군을 유인할 요새를 만들었다.
이를 들은 다케다 가문은 군사 회의를 열었다. 다케다 4명신이라 불리던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 등은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카츠요리는 결전을 강행한다. 사실 신겐의 미카와 진공 당시는 오다가 전체적인 가용 병력 면에서는 신겐보다 우세했으나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불리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신겐의 거의 올인에 가까운 대군을 막을 병사가 없었다. 그러나, 교토와 오우미를 모두 정리한 후에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결전을 걸고자 가용 병력을 모두 끌고 왔고, 반대로 연합군과의 결전을 예상못한 다케다 군은 수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철수가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카츠요리는 굳이 결전을 선택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4]

3.3. 결전의 맛보기, 도비노스 산 전투


5월 20일 밤, 도쿠가와 군 사카이 타다츠구의 동미카와 무리, 오다 군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500 철포 부대로 이루어진 3000명의 군사[5]가 은밀히 도요 강을 도강하여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들어가, 새벽녘에는 다케다 군의 나가시노 포위의 요점 도비노스 산의 성채를 기습 공격하였다, 도비노스 산 성채는 본성과 4개의 성채로 이루어진 요새였으나, 농성하던 사다무사 군대 + 후방의 4000명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 공격을 당해 농성하던 다케다 병력 모두가 전멸한다. 이로 인해 다케다 군은 주요 무장인 다케다 노부자네를 포함, 여러 유명한 무장들을 많이 잃고, 퇴로까지 차단당하고 만다.

3.4. 카츠요리의 공격 명령과 다케다 군 괴멸


5월 21일 이른 아침, 도비노스 공방전 결과 퇴로를 차단당한 것을 인지한 다케다 군은 전방의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을 선제 공격하여 일대 결전을 벌인다. 전투는 낮 즈음까지 계속 되었고, 연합군의 압승이었다. 연합군도 6,000명의 희생자가 생겼지만 다케다 군은 무려 12,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대부분 하급 졸병인 아시가루(足軽)들이었던데 비해(특히 오다 군), 다케다 군은 다케다 4천왕 중 3명(바바, 야마가타, 나이토), 사나다 노부츠나, 마사테루 형제(사나다 유키무라의 큰아버지), 쓰치야 마사쓰구 등 다케다 24장으로 일컬어지는 유력 무장과 사무라이들을 거의 잃게 되었고, 이 손실은 괴멸적인 것이었다. 카츠요리는 간신히 퇴로를 뚫어 고후로 퇴각하는 데 성공하지만 나가시노의 패전은 곧 다케다 가 멸망으로 이어진다.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3,000명 철포 부대를 1,000명씩 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발사하여 재장전의 시간차를 없애는 삼단 발사 전법을 시전하여 다케다 기마대를 전멸시켰다는 속설이 있으나 당시 3,000정이라는 철포수[6]와 3단 발사 전법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사실로 확인 가능한 것은 '''철포를 중점적으로 운용했다'''는 것과 '''다케다 군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해 울타리가 사용되었다'''는 것 정도. 3천명의 철포 부대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도 오다 군은 그들이 활약해야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은 없다. 최근에는 3천명의 철포 부대의 3단 쏘기나 다케다 가의 기마 군단도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7][8] 그리고 히데요시가 가신한테 쓰게 한 신장공기에 쓰인 1만명 이상 다케다 군이 죽었다는 기록도, 제3자의 기록에 의하면 천 여명 정도로, 도쿠가와 가문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주도한 쪽은 도쿠가와 측이고 오다 노부나가 군은 거들 뿐이었다라는 등 지금까지 알려진 나가시노 전투 자체에 대한 의문점이 많다.
애초에 나가시노 전투에 임하는 양군 간의 전력에는 꽤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쪽의 천재적인 전략으로 승리한 것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결전을 택한 카츠요리가 어리석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차피 한판 붙어야할 상대와 가장 유리하다 생각되는 타이밍에 붙은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이제는 사실상 폐기된 통설이지만, 기병대를 잘 운영했다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정도의 전력차였으니... [9]
이후 극소수의 병사로 일만여 다케다 대군을 막아내며 나가시노 성을 끝까지 지킨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포상으로 이름 한 자(信)를 하사받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信昌)라 이름을 고치게 되었다.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훗날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이케다 소뉴의 사위인 모리 나가요시[10]와 대회전을 펼쳐서 승리하기도 한다.

4. 전쟁 이후


카츠요리는 이후 궁지에 몰린 나머지 철천지 원수였던 에치고(越後, 오늘날의 니가타 현)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동맹이었던 사가미의 호죠 가문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11]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가신 간의 단결이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었던 다케다 가에서는 많은 소속 무장들이 모두 오다, 도쿠가와 가문 측에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으며 (다케다는 중앙 집권이 아닌 호족 연맹 맹주), 기대했던 우에스기 측에서도 다케다 가의 신의 문제를 들어 별다른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결국 키소(매제), 아나야마, 오야마다 등의 다케다 소속 장수들이 하나하나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배신해서 카츠요리를 추적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카츠요리는 덴모쿠 산으로 쫓겨 들어가 향년 36세로 가족들과 함께 할복,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하며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다케다는 멸망했다.[12]

5. 다른 매체에서


  • 노부나가(信長) KING OF ZIPANGU, 1992 NHK 대하드라마
  • 태합입지전5에서 이벤트로 구현되어있다. 전투 전에 나가시노 성 공성전과 토리이 스네에몬이 책형에 처해지는 이벤트가 일어나고, 처형 때는 CG까지 나온다. 이후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 나가시노에 도착해서 전투 개시. 다케다 부대는 5부대가 모두 기마대고, 도쿠가와 - 오다 연합군은 족경대와 철포대가 혼합되어있는데 병력차부터가 5000명 ~ 6000명 : 14000명 ~ 20000명 정도로 일방적. [13] 도쿠가와나 오다로는 손쉽게 이길 수 있지만 카츠요리로는 그저 암울하다. 모두를 조종할 수 없는 부하 장수로 승리하는 건 말도 안되고, 카츠요리로 할 경우 팁이라면 1575년 시나리오로 시작했을 경우 첫 평정을 열 때 이벤트가 발생하므로 평정을 열지 말고 잠자코 사나다 마사유키를 찾아가서 군학을 4까지 올리고 풍림화산을 배워야한다. 이후 평정을 열면 나가시노성에서 공성전이 펼쳐지는데 이벤트성 전투라 2턴 후 바로 공성전은 종료되는지라 에딧을 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승리는 일단 불가능,[14] 이후 야전에서 풍림화산을 첫턴에 쓰고 적을 유인하든지[15] 빙 돌아가든지 해서 설치되어있는 함정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총대장인 이에야스에 접근해 적비 돌격 러시로 털어버리는 게 답. 아군 병력 자체가 적은 편이고 노부나가의 철포 난사는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카츠요리는 풍림화산만 써주고 얌전히 후방으로 튄다음 나머지 4명이서 특기로 이에야스를 일점사해야한다. 다케다 4명신중 3명이 들어가 있고 이들은 모두 기마 기능 4에 적비 돌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이 개별 병력 500명 ~ 1000명 정도를 보존하고 이에야스에 붙을수만 있다면 한턴에 이에야스를 보내버릴 수 있다. 패배할 경우 같이 참전한 명장들이 모두 전사하지만, 승리할 경우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전사하고 아들들이 뒤를 잇는다. 아들들은 관직이 없기 떄문에 영토엔 변동이 없으나, 세력치가 깎인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게 더 힘들겠지만 노부나가나 이에야스로 플레이시 패하면 전사하면서 게임 오버가 된다. 토리이 스네에몬으로 플레이할 경우 노부나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다케다 군에 발각되는데 개인전에서 승리할 경우 포위망을 뚫고 나가시노성에 들어와 이후 나가시노 전투에서 아군이 승리하면서 무난히 죽음을 피할 수 있지만 개인전에서 패할 경우 예의 책형 이벤트가 나오고 게임 오버가 된다.
  •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역사 시나리오나 이벤트로 플레이할 수 있고, 혁신처럼 인트로에서 나올 때도 있다.창조에서도 전국전과 시나리오가 구현됐다. 오리지널 판에서는 오다가 전국전이 존재하며, 무장록으로 나이토 마사토요, 바바 노부후사,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부대를 격파 시 각 무장의 최후가 이벤트씬으로 나오며 각 무장마다 특기를 입수하게 된다. 파워 업키트 판에서는 이벤트 회전으로 전국전이 변화하며 이벤트 회전 돌입 시, 역사대로 오다가는 3만에 가까운 대병력이며 다케다 부대는 그에 훨씬 못미치는 숫자로 이기는게 당연한 싸움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이겨야한다는 노부나가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이벤트 조건이 붙어 약간은 까다로운 편. 이벤트 조건은 1. 목책 앞으로 오다 가 부대가 나가지 말 것, 2. 1부대도 퇴각하지 말 것, 3, 노부나가 부대를 움직이지 말 것인데 좌익 쪽의 사쿠마 노부모리가 능력치가 낮아 바바 노부후사의 부대의 닥돌에 휘말려 쉽게 전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좌익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해당 조건을 클리어한 채로 이기면 전국전 클리어. 해당 조건을 1개라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전국전 실패가 된다. 해당 조건을 틀리는 경우, 전투에서 패하는 건 아니며 새로운 방식으로 이기는걸 실패했다며 아케치 미츠히데가 비웃으며 원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 파워 업키트 판에서는 다케다 가문 쪽에도 해당 전국전이 생기게 되며, 나가시노 전투 시나리오는 다케다 카츠요리가 처하게 된 현실 (스와 가문 혈통으로 인한 정통성 부재, 오다 가와의 경제력 차이로 인한열세, 오다가와의 화평을 원하는 가신들과의 갈등) 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카츠요리가 나가시노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입장을 보여주게 된다. 실제 역사하고는 다르게 사나다 마사유키가 우에스기가와 호죠가와 일시 화평하며 우에스기 군을 막고 있었던 코사카 마사노부의 군대를 동원하자는 계책을 내놓으며 이벤트 회전에서 조건 클리어 시, 코사카 마사노부와 사나다 마사유키의 부대가 원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벤트 회전 승리 시, 나가시노 성이 다케다 영지로 변경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가문에 종속된다.
  • 센고쿠(만화)에선 천정기 5권, 6권에 걸쳐 그리고 있다. 그야말로 다케다가 무장들이 처절하게 죽어나간다. 온몸에 총알을 맞았으면서도 기어이 돌격을 감행하여 적들을 베어 넘긴 후, 다시 총격을 받아 전사한 야마가타 마사카게나 자신을 찌른 오다 군을 껴안으며 죽은 바바 노부하루, 동생인 사나다 마사테루가 죽자, 그 시체를 몸에 묶고 싸우다 전사한 사나다 노부츠나 등... 그리고 나이토 마사토요는 1줄로 사망 처리 되며 끝까지 안습을 못벗어난다...
  • 영화 카게무샤에서는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전투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호수 아래 가라앉은 풍림화산 군기는 다케다 가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노부나가의 셰프에서는 14,15권에서 다루고 있다. 새롭게 발견된 사실을 많이 도입하고 다케다 카츠요리가 만만치 않은 상대로 묘사된다. 카츠요리가 전투에 임한 이유도 직접 시찰해보니 주전장인 시타라가하라가 의외로 좁아서 3만에 달하는 오다 군이 전부 포진할 수 없고 양군이 각각 1만 정도 투입이 가능하니 동수의 병력의 야전이면 다케다가 유리하다고 본 납득할 만한 이유. 기존의 3단 철포는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철포 사용의 동서간 지역 격차를 승패의 원인으로 두고 있다. 즉 무역항을 가지고 있어서 철포와 화약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운용하기에 철포의 숙련도가 월등한 관서 지역에 비해 다케다가 위치한 관동 지방은 총포와 화약의 입수가 제한되었고 당연히 총기의 대량 운용 경험도 없고 사수의 숙련도가 떨어지니 철포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 차이로 인해 충분히 돌파가능하리라 보였던 거리에서 예기치 못한 철포의 명중율과 화망에 당황하게 된 것.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알고도 그 운용에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의 경우와도 비숫한 감이 있다. 그래도 그정도면 돌파가 불가능하진 않았는데 노부나가가 준비한 술책이 울타리와 해자를 이용한 일야성. 시타가라하라가 의외로 굴곡이 많은 지형이었고 이를 이용해서 언덕 경사면에 삼단 목책과 발이 빠지는 함정등을 설치해서 평지에서의 야전이 아닌 공성전 양상으로 바꿔버렸다. 가뜩이나 전날 비로 진창이 된 지면에 경사면이 겹쳐지니 돌파력이 격감한 다케다 군은 총포의 절호의 과녁이 되버린다. 간신히 돌파한 몇몇 병사들도 올라오는데 힘을 다 써서 간단히 발리고... 그리고 전투가 치열한 상황에서 노부나가가 최후로 꺼낸 카드가 매복해있던 2만여 병력의 과시. 물론 지형 문제로 주 전장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 산을 포위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압박으로 작용하여 다케다 군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거기다 카츠요리의 다케다 가문에서의 미약한 정통성 문제가 발목을 잡아 전세가 불리해지자 본래라면 최후까지 주군을 수호해야 할 다케다의 친족 무장들이 먼저 도망가버리면서 승패가 결정난다.
  •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유키무라가 주연급이다보니 매번 다루고 있다. 고증 자체는 과거의 해석에서 큰 변화는 없지만 최신작인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선 초반부의 주인공인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후 행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1] 오른쪽이 다케다 군, 왼쪽이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다. 유명한 그림이지만, 나가시노 전투 100년 후인 에도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라, 현대에 새로운 발견된 학설과는 맞지 않는다.[2] 지병의 징후가 있긴 했지만 전쟁터에 나설 정도의 건강은 유지했기에 병사라는 이야기와 함께 전투 중에 적군이 쏜 유탄에 맞아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적의 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감상하였는데 며칠간 비슷한 장소에서 감상하다가 그를 노린 총탄에 당했다는 전개를 취하였다.[3] 토리이 스네에몬은 어찌어찌 포위망을 탈출해 도쿠가와 군까지는 당도했지만, 아군에게 지원군이 온다고 알려주러 다시 돌아오는 도중에 다케다 군에게 잡혀 끔살당한다. 다케다 군이 그를 잡아서 "나가시노 성에 대고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 오쿠다이라 군을 항복하게 만들면 살려준다."라고 하자 오히려 나가시노 성 앞에서 큰 소리로 "지원군이 곧 온다!"라고 외쳐 책형에 처해지는데, 일본에서는 전형적인 무사도 미담으로 이름높다. 한편 이런 행동에 감격한 '''다케다 군'''의 무사인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가 사형대에 묶인 스네에몬을 그린 깃발을 자신의 가문의 하타지루시로 삼았는데, 실물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4] 국정은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은 가츠요리가 굳이 결전을 택한 이유는 어차피 장기적인 경제력, 군사력으로 너무 밀려있어 여기서 철수하더라도 전황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봐야 더 불리해지니 여기서 올인해 뒤집어 보려는 시도였다.[5] 신장공기(信長公記)에 의하면 4000명[6] 당시 철포는 엄청나게 비쌌다. 철포 1정의 가격은 아시가루 1년치 봉급과 비슷.[7] 당시 일본에서 많이 군마로 쓰인 키소 지방의 말은 제주도 조랑말보다도 작은 품종이고 지구력이 어떻든 뛰는 속도가 어린 애가 뛰는 속도 정도의 속터지는 속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대규모 기병부대를 만들 가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는 한국은 '파발마'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저 북쪽 몽고에서 유래한 기마민족답게 말을 타고 소식을 알렸지만, 일본은 에도 시대 내내 메이지 이후에도 제대로 된 우정 사업이 실시되기 전까지도 비각(飛脚)이라고 해서 사설 택배업자들이 고용한 사람이 발로 달려서 전국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일본에 본격적인 기병대가 등장한 시기를 서양의 큰 말이 수입되어 들어온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8] 단, 일본에 제대로 된 기병이 없었다는 말은 스즈키 마사야의 연구결과만이 인터넷에 떠돌기 때문에 나온 섣부른 결론이다. 스즈키 마사야가 기마대 불가론의 주요 논거로 내세운 근거 중 하나가 일본의 군마가 일반적인 돌격용 군마에 비해 작다는 것인데, 크기 자체는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했던 몽골의 군마라든가 스웨덴의 전설적인 돌격 기병 하카펠의 군마도 비슷하게 작다. 또한 '정예 무사를 임시로 모아서 싸운 것'이 기병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왕국에도 기병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중세의 기사 역시도 편제가 아니라 엄연한 지위기 때문. 아직까지 일본 전국시대에서 기병의 비율은 미지수이며, 이래저래 말은 많지만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편제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마의 퍼센테이지가 다른 문명권에 비해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것도 고급 병종인 기병을 펑펑 뽑을 만큼의 돈이 없던 전국시대의 이야기이고, 남북조 말기만 해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정규군도 아닌 해적들이 네자리수의 기병대를 이끌고 기동전을 펼칠 정도였다. 당장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일본 무사들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었으며,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되자 일본에도 말을 탄 채로 칼과 창 같은 무기를 들고서 적에게 돌격하여 육박전을 치르는 기마 전술이 널리 퍼졌다. 한 예로 1370년에 나온 일본 남북조시대의 무용담을 다룬 책인 태평기(太平記)에 따르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우는살을 발사한 후, 막부군 쪽에서 먼저 함성을 외치며 깃발을 들고 전진했는데, 최초에는 활의 명인들을 늘어세워놓고 서로 활을 쏘아댔으나, 적아군 모두가 용맹한 무사들이었기에, 이윽고 도검太刀과 장도長刀를 빼든 후, 말에 탄 채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링크즉, 기마군단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정예 기병은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9] 실제로 임진왜란 때 투입된 명나라 기병대한테 일본군은 야전에서 붙을때마다 박살이나서 명나라 기병대와의 야전 전투를 기피할 정도였다. 그리고 기병대는 지형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데 나가시노 전투 전날 비가 와 지형이 질척여 기마대를 움직이기 힘들었다는 점도 나가시노 전투의 다케다 군의 패인으로 보고 있다. [10]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 유명하며 혼노지에서 사망한 모리 란마루의 형[11] 우에스기 가문은 겐신 사후 두 양자 카게카츠, 카게토라(호조 우지야스의 아들)이 에치고 수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다케다 가문은 카게토라를 지지하지 않고 카게카츠를 지지하여, 결국 카게카츠가 승리했으니, 호죠 가문의 뿔이 돋힌 건 당연한 일.[12] 다케다 가문 자체는 전국시대 이후에도 명맥이 이어졌다. 다케다 신겐의 차남이 살아남아 그 후손이 에도 시대에 다이묘로 복권되어 영지를 받았고, 현재 야마나시현에 있는 다케다 신사는 그 후손들이 운영하고있다.[13] 다케다, 도쿠가와, 오다 어느 진영으로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양측 병력이 달라진다. 가령 오다로 플레이할 경우 도쿠가와 6000명 + 오다 8000명 = 14000명 vs 다케다 6000명.[14] 여기서 일부러 카츠요리의 병력을 1로 둔뒤 첫턴에 사격받고 져버리는걸로 나가시노 전투를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는는 꼼수도 있다.[15] 사실 적에 철포대가 있고 아군은 붙어야되는 기마대인지라 유인도 그다지 효율적이진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