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약조
己酉約條
1. 개요
광해군 1년이던 1609년에 임진왜란 이후 10년 동안 단절되었던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선 조정과 쓰시마 다이묘 사이에서 맺어진 조약. 그 실상은 두 나라의 빠른 관계 회복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 義智)가 멋대로 국서를 바꿔치기해서 맺은 조약이었지만, 결과는 좋았다.
2. 내용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약 체결에 대해 포괄적으로 평가하고 세견선만 밝히고 있으며, 조약의 내용이 수록된 문헌으로는 《통문관지》·《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변례집요》·《고사촬요(攷事撮要)》·《접대왜인사례》·《대마도문서(對馬島文書)》 등이 있는데 명칭과 내용 등이 문헌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조약의 내용은 세종대왕 시기 체결된 계해약조와 비교하면 일본 측의 권한이 축소된 편이었다. 또한 이후 광해군 때부터 순조 때까지 조선 통신사가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에도로 파견되기 시작한다.1. 쓰시마 번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2. 쓰시마 번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3. 일본인으로써 조선 조정에게 관직을 제수받은 자는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한다.
4.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을 지녀야 한다.
5. 쓰시마 번주에서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6.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7.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쓰시마 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밖에는 55일로 한다.
3. 전개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씨를 제압하고 정권을 잡은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1] 는 외교적 고립 타파 및 자신의 권위 확립을 이루기 위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재개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관계 재개를 위해 이에야스가 물밑작업을 맡긴 것은 일본 내에서 누구보다도 조선을 잘 아는 쓰시마의 영주. 덕분에 쓰시마 영주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 편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사실 서군 편에 선 것도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에 그냥 딸려간 것이므로 본인 책임도 아니라고 볼 수 있었기에 이런 처분이 가능했다.
일본에게서 외교 관계 재수립 요청을 받자 처음에 조선 조정은 당연히 냉담히 반응하였다. 불과 10년 전에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는데 조선이 이걸 넙죽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 실력자로 등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정보 수집의 필요성과, 명나라가 몰락하고 만주족의 비상이라는 국제질서의 재수립 속에서 조선도 무조건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기는 곤란했다. 결국 치열한 찬반논란 끝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재수립하기로 의정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던 만큼 전제조건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조선의 조건에 비상이 걸린 것은 쓰시마 측. 특히 1번과 2번 항목이 문제였다. 1번 항목의 경우 도요토미 정권을 멸한 도쿠가와 정권이 이전 정권의 소행을 사죄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이 상식이 없어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니고 조선 입장에서는 도쿠가와가 이전 도요토미 정권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는지 분명히 알아야 했다. 즉, 과거에 저지른 일들을 확실히 사죄해서 일본이 이전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 2번 항목의 경우 전쟁이 끝난 지 이미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범인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국교 재개가 실패하면 쓰시마는 생존 자체의 문제가 걸려 있었다. 때문에 쓰시마 영주인 소 요시토시는 어떻게는 이 난관을 돌파해야 했는데 막부와 조선 사이에서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바로 '''조작'''(...)이었다.'''①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즉 공식 사죄할 것)'''
을 도굴한 일본인들을 압송할 것''''''③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3]
를 송환할 것'''
소 요시토시는 막부의 도장을 위조하여 조작한 국서를 만들어 보내는 것과 함께 조선이 요구한 대로 민간인 잡범 두 명을 도굴범으로 둔갑시켜 조선으로 보내는 패기(?)를 보여줬다. 도굴범 송환은 불과 6개월 만에 이루어져 송환을 요청한 당사자인 조선 조정 조차도 '이렇게 빨리 잡았어?'라며 놀랄 정도였다.일본국(日本國) 원가강(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서계(書契)는 다음과 같다.
수년 동안 의지(義智, 소 요시토시)와 조신(調信, 야나가와 시게노부) 등에게 명하여 천고(千古)의 맹약(盟約)을 다지도록 하였으나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한 채 조신이 죽었으므로 지난해부터는 그의 아들 경직(景直, 야나가와 가게나오)에게 명하여 그 일을 주선토록 하였습니다. 요전에 의지가 비품(飛稟)하기를 ‘여러 번 귀국에 화친을 청하였으나 귀국에서는 혐의를 풀지 못하여 지금까지 지연시키고 있으니, 친히 서계를 만들어 청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므로 이같이 통서(通書)하는 것입니다. 한 건의 일에 대해서는 다행히 죄인(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도굴한 범인)이 대마도에 있는 터이므로 의지에게 확고하게 명령하였으니 의지가 반드시 결박하여 보낼 것입니다. 또 누방(陋邦)이 전대(前代,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잘못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해 승(僧) 송운(松雲, 유정)과 손 첨지(孫僉知, 손문욱) 등에게 모두 이야기하였으니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내도록 쾌히 허락하여 우리 60여 주(州)의 인민들이 화호(和好)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여 주시면 피차에 다행일 것입니다. 계절에 따라 나라를 위해 자중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1606년) 11월 12일
일본국 대마도의 왜인 마다화지(麻多化之)는 나이 27세인데 공초하기를,
"나는 대마도의 왜인인데 도주 평의지 등이 일본 국왕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결박하여 포로로 바치기 위해 앞세워 보낸 이상, 나와 나의 숙부라는 평조윤(平調允) 등이 능침을 도굴하였다는 것은 의심이 없는 사실로 굳혀지게 되었습니다. 평조윤의 생존 여부나 그 당시 능침을 범한 것으로 된 곡절을 명백하게 직초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초사에,
"나는 본래 대마도 사람으로 도주 평의지에게 소속되어 포수(砲手)가 되었는데 도주가 매 사냥을 나갔을 때 수행하였다가 마침 명령을 어긴 잘못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득죄하게 되어 좌고촌(佐古村)에 쫓겨나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는데, 평경직(平景直)이 나의 건장함을 애석하게 여겨 몰래 식량을 갖다 주었으므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박하여 배에 실어보냈기 때문에 오긴 했습니다만 조선 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능침을 범한 절차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고 평조윤이라고 하는 자도 모릅니다. 부모는 다들 형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4∼5촌 이내에 전혀 친족이 없습니다."
하고, 조금 뒤에 또 말하기를,
"잊은 것이 있는데 다시 기억하여 보니, 아비의 아우 요소여문(要所汝文)이 지금 생존하여 좌고촌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으나 별로 종군(從軍)했던 일은 없습니다. 귤지정(橘智正, 대마도의 사신 타치바나 토모마사)이 나를 달래면서 ‘네가 조선에 가서 허튼소리 하지 않고 모양좋게 공사(公事)를 받든다면 너의 어미와 아내는 내가 양료(糧料)를 주어 후하게 보살피겠다.’고 하였는데, 나는 여기와서야 그 일이 바로 추문당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1606년) 11월 17일
쓰시마에서 보내온 두 사람의 운명이 참으로 고약한데 사소한 일로 잡범이 되어 어려운 처지에 있던 중 조선에 가서 말만 잘하면 네 가족들을 잘 보살펴주겠다는 말만 믿고 왔다가 무지막지한 고문과 혹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인지 설명하면서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자 조정에서는 아무래도 대마도주가 무고한 사람을 보내온 것 같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대신들이 모여 두 사람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의논하기에 이르렀는데, 결론은 조정의 대신들도 이들이 진짜 도굴범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대마도주에게 낚인 것 같으니 죽일 때 죽이더라도 쓰시마에 사람을 보내 확인을 해보자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일본국(日本國) 대마도의 왜인 마고사구(麻古沙九)는 나이 37세인데 공초(供招)하기를,
"나는 대마도 왜인인데 도주 평의지(平義智) 등이 일본 국왕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결박하여 포로로 바치기 위해 앞세워 보냈으니, 내가 능침을 범한 죄인으로 이미 굳혀졌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임진년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였을 때 어느 진(陣)의 누구를 따라왔었는데 내가 무슨 연유로 선릉(宣陵)·정릉(靖陵) 두 능침을 도굴하여 훼손한 죄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는지 그 곡절을 명백하게 직초(直招)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초사에,
"나는 본래 대마도에 살았습니다. 임진년 왜적이 침구하여 왔을 때 연소한 사람으로 도주 군관(軍官)의 노자(奴子)가 되어 나와서 부산의 선소(船所)에 머물렀을 뿐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능침을 범한 연유를 전연 알지 못합니다. 다만 대마 도주에게 득죄(得罪)하게 되어 촌가(村家)에 쫓겨나 있었는데, 지난 10월 8일 야간에 결박되어 이곳에 보내진 뒤로 이와 같이 추문을 받게 되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죽을지언정 어찌 감히 없는 말을 꾸며 공초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에 맹세한다면 반드시 믿어주지 않을 것이니 내가 조선에 맹세하는 것을 허락하여 준다면 사흘 내로 죽겠다는 맹세라도 굳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대저 나의 사정이 매우 애매하니 대마도로 돌아가서 변정(辨正)한 뒤에 다시 나와서 죽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9년(1606년) 11월 17일
하지만 왜 이런 사람을 보냈냐면서 두 사람을 다시 쓰시마로 돌려보내거나 대마도주와 대질 심문을 할 수도 없었는데, 그렇다고 인정을 베풀어 놓아주자니 그것도 이상했다. 또 두 사람의 억울하다는 주장을 그대로 믿어주기 어려운 데다, 애초에 쓰시마에서 범인이라며 보내온 사람을 확인도 안해보고 받은 실책이 있으며, 이미 고문까지 해버려 돌이킬 수 없고, 진위가 어떻든 어차피 왜적일 뿐이라는 이유들이 모여 두 사람은 결국 참수당한다. 안습(...).
또한 일본이 수습해서 보냈다는 중종의 시신 역시 생전의 중종을 본 적이 있는 궁녀들이 키나 체격을 볼 때 중종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는데, '어차피 이제와서 진짜 시신을 되찾기도 틀렸고, 왜놈들을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이대로 일을 끝내자'는 논리로 장례를 치르고 유야무야 끝냈다.
한편 위조한 도장으로 국서를 조작해 만들어내는 것은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해야 하는 악순환의 시작점이었다. 에도 막부의 국교 재개 요청에 대해 조선 조정이 답장을 보내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 답장이 그대로 전달되면 중간에서 쓰시마가 계속 장난을 친 것이 밝혀질 테니 조선 조정의 답장도 쓰시마가 조작해야 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양국의 교류 과정에서 계속 이 내용을 토대로 국서가 오갈 테니 이것도 조작해야 하고...... 그나마 조선 조정에서는 처음부터 쓰시마가 국서를 위조해가며 장난을 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4]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됐고 괜히 문제 삼았다가 사건이 엉뚱하게 커질 수도 있어 눈감아 준 반면, 일본의 막부에서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쓰시마의 조작을 알게 된다.
3.1. 야나가와 잇켄
한국에서는 국서개작사건, 유천사건이라고도 한다.
쓰시마의 다이묘 가문 소(宗)씨를 보좌하던 가신 가문인 야나가와(柳川) 가문은 쓰시마와 에도 막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절충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막부 내에 상당한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소 요시토시가 죽고 그의 아들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당주가 되었을 때 야나가와 가문은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가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소 가문과 막부와의 이중적인 주종 관계를 끝내고 막부에만 직속하기 위해 막부를 통해 소 가문과 송사를 벌인다. 즉, 소 가문을 가이에키 시키고 스스로 하타모토가 되는 일종의 하극상이었던 것.
소송전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인 1626년[5] 에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주종간의 알력 다툼으로 보였으나 시게오키가 그동안 조선과 주고 받은 문서들이 사실은 소 가문이 막부의 도장을 위조해 조작한 것이었다며 폭로하면서 사건이 전혀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이제부터는 막부에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국정과 외교 차원의 문제가 된 것. 결국 1635년, 쇼군 이에미츠가 직접 요시나리와 시게오키를 불러 대질 심문을 하게 된다.
요시나리는 자신의 선대인 요시토시 때의 일이며 자신은 어렸을 때라 몰랐으며 사실이라면 가신인 야나가와 가문이 주도했을테니 오히려 잘못은 야나가와 가문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시게오키는 소 가문은 더 오래 전부터 국서를 위조해왔으며 자신들은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막부의 결론은 요시나리는 용서해주고, 시게오키만 처벌하는 것으로 나게 된다. 반대의 결과도 가능하고 둘 다 처벌할 수도 있었겠지만 쓰시마가 조선과의 외교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그곳의 다이묘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패소한 시게오키는 그 자리에서 할복하는 것으로 처벌받아야 했지만 이에야스의 시동 출신이고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겨 알현할 권리까지 받았던 사람이라 유배보내는 것으로 대체된다. 시게오키 입장에서는 히데타다가 살아있었을 때 빠르게 승부를 봤어야 했는데 10년이나 시간이 걸린 것이 패착이었다. 반면 소 가문은 이 사건으로 조선과 막부 사이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특수한 역할을 인정받게 되어 가문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6]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소 가문이 유리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1년 뒤인 1636년에 조선 통신사가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그 전에도 세 번에 걸쳐 사절단이 오기는 했었지만 당시에는 포로를 데려가는 것에 중점을 둔 만큼 '''회답 겸 쇄환사'''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네 번째인 이때는 '''통신사'''라는 이름을 쓰는 첫 방문이었다. 쓰시마는 통신사 행렬의 첫 방문지인만큼 소 가문은 접대에 극진한 노력을 했고 도주가 직접 짐꾼과 호위 인력을 대동해 사절단을 에도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막부는 조선과의 무역 독점권을 준다.
아무튼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재개된 지 몇 십년이 지난 상황이고 조선 조정과 에도 막부 모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쓰시마의 소 가문은 양국 교섭 전문가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게 된다. 당시 위조한 문서와 도장은 현재 이즈하라 항 부근에 있는 대마도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포로 송환 문제의 경우, 이후 조선에서 사명당이 사신으로 가서 실무 협상 후 포로들을 송환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어쨌든 쓰시마의 기지(?) 덕분에 조약은 순조롭게 체결된다.
4. 여담
조선만 통신사를 파견한 것을 가지고 일본 우익 및 혐한은 조선이 조공을 하러 왔다는 주장을 하지만, 조공을 위한 사신이었으면 처음 통신사가 파견됐을 당시 오고쇼라는 경칭으로 불리면서 여전히 실권을 유지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몇 백 km를 달려나와 통신사 일행을 마중했겠는가. 심지어 통신사 일행에게는 그 당시 일반인들은 통행이 금지되고 오로지 쇼군만이 쓸 수 있던 길을 통해 에도로 갈 수 있는 특권까지 주어졌으며, 통신사 접대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일본 측이 모두 부담했다. 조선만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어디까지나 임진왜란 직전 해에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들이 각종 염탐행위를 해서 이것에 데인 조선 조정이 스스로 일본 사신들을 거부한 것일 뿐이다.
다만 일본 내부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조선 통신사 시설을 조공사절이라고 언플했을 가능성은 높다. 당시 무역하던 네덜란드도 번국이라고 언플했던 사실이 있다. 1617년 2차 통신사때 당시 영국 동인도회사 일본 지부 히라도 상관으로 있었던 영국인 리처드 콕스(Richard Cocks)의 회고에 따르면 "풍문에 따르면 조선 신민들이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일본 왕의 보호를 부탁하려고 왔다고 한다"고 하며 일본 내수용으론 조선이 '조공을 바치러 왔다'고 선전했다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도 간간이 조-일 관계가 안정적이었던 18세기에도 뒷사정은 쥐뿔도 모르는 지방 사족들이 조선 통신사 접대를 두고'''"왜 우리 '속국'인 조선의 '조공 사절단' 따위를 대접하는데 이리 돈을 많이 써야 하냐"'''며 막부 입장에선 뒷통수 잡을 불평을 한 기록이 있고, 훗날 정한론자 일부들도 이 시절 순 일본 내수용 선전을 그대로 믿고 조선을 쳐야 한다니 설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혐한들 주장이 맞다는 건 아닌 것이, 구한말에 결국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에도 막부 시절 내수용 선전을 그대로 믿고 주장한 1860-70년대의 정한론자들이 구상했던 것과 방식이나 주도한 세력도 판이하게 다르게 이루어졌고, 무엇보다 여전히 유신 직후 일본의 대조선 정책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고, 신정부가 사이고 다카모리를 필두로한 저 정한론자들과 오히려 훗날 조선 병탄을 주도하게 된 조슈번 출신 파벌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절 바로 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후자 인물들 스스로가 "그 시절 막부가 순 정치적 이유로 혼자서 뻔한 거짓말 유포한걸 덥썩 믿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 바가 있다.[7] 오히려 통신사 파견 협상, 조율 과정에선 조선 측은 쓰시마에서 시작해서 쿄토, 오사카에서 에도까지 다 쭉 가며 온갖 대접을 다 받고, 쇼군이 직접 치루는 대사인데 반대로 일본 쪽에서 보낸 사절단은 뭐 한양은 개뿔 동래도 못 넘고 접객하는 정부 부처도 본인들 입장에선 일개 다이묘 수준에서 입구컷당하니 이건 자신들의 일방적인 굴욕이라고 항의한 일본 측 인사들도 있었고, 실제로 조선통신사 맞이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보면 결코 자국우선주의에 빠진 비현실적 불평만도 아니었다. 애초에 실제로 조선 통신사가 '조공사절'이었다면 중개인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막부, 조선 양측 모두 기만하며 서로 입맛에 맞는 동상이몽을 꾸게할 국서를 위조할 필요도 없었고, 바로 그 프로파간다의 대상인 일본 서민들 제외하고 에도 막부와 조선 왕실 실제 양 정부간에는 시종일관 서로를 대등 관계로 인식하고 통교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1860-70년대의 정한론자들과 이보다 한 20-30년 뒤 조선 침략을 주도하게 되는 정치인들은 파벌 자체가 달랐다. 전자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사츠마 무사들이나, 토막 혁명에 공헌한건 많은데 막상 돌아온건 쥐뿔도 없었던 토사번, 아님 재야세력화된 구 막부 출신 무사들이 많았고, 후자는 이토, 기도 다카요시 같은 조슈번 중심에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가세했던 형국. 여기서 전자 정한론자 파벌은 결국 사이고 탄핵과 서남전쟁을 기점으로 몰락하고, 훗날의 실제 조선 침략은 전자가 구상했던 것처럼 신체제에 감정 많은 구 사족 계층의 불만을 물리적으로 쏟아낼 군사적 '정한'보단 경제적, 외교적 침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우리 입장에선 남의 나라 궁궐 복판에 폭력배들 보내 왕비를 참살하고, 군대를 맘대로 파견해 국내 문제인 농민군, 의병들을 학살하는 게 뭐가 '외교적'인 접근이냐 황당한 논리겠지만 진짜로 전자의 정한론자들이 원한 건 외교관들이 뒷공작이나 하는게 아니라 전직 사무라이들이 군대 이끌고 쳐들어가는 임진왜란식 전면전이었다. 참고로 여기서 근대 일본의 첫 대규모 대외 정책 관련 정치적 대립에서 패배한 정한론자들은 재야 정치세력이 되면서 가끔 오히려 자유민권운동, 사회주의 같은 성향은 정 반대인 다른 반체제 인사들과도 공감대에 교류도 하고, 현양사 같은 '''그 제국주의 하는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도 너무 극단적인''' 초팽창주의, 제국주의 정치깡패 세력을 배출하기도 하며 먼 훗날 쇼와 시대와서도 황도파니, 통제파니 하는 관외 극단주의 세력의 시초가 된다. 메이지-다이쇼 시대 역사에선 막상 성향이나 이데올로기는 정 반대로 서로 웬수여야 할거 같은 고토쿠 슈스이 같은 극좌 인사들이 기타 잇키, 도야마 미쓰루 같은 극우 '운동권'들과 의외로 교류가 많고, 사적으론 친구 관계도 많았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리고 사이고 같은 메이지 정부 초기의 정한론자부터 이토나 야마가타 같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던 정치인들의 발언이나 기록은 보면 '''일본이 강대국이라서 약한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일본은 이제야 막 근대화한 약소국이니깐 힘은 좀 달려도 오버라도 해서 식민지를 만들어야 강대국이 되고 국권을 서구 열강한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오히려 더 자주 보인다. 전세계적으로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기들 기준에서 '빈 땅'만 있으면 갈라먹으려고 호시탐탐 눈에 불을 켰던 시대, 이와쿠라 사절단 같이 직접 서양을 보며 연구를 한 사람들은 이런 미쳐돌아가는 제국주의 시대의 논리에선 '국권의 종류' 자체가 자기도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열강 중 하나가 되던지, 아님 걍 식민지 신세로 양극화 되고 있다는 점을 그대로 간파했기에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제국주의 시대의 뒤틀린 논리에 따라 '자기를 보호하려고' 체급에 걸맞지도 않은 팽창을 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 옹호, 일본도 이 길을 따라야 했다고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런 의미에서 오히려 지극히 주류적인 주장을 편 샘이다.
참고문헌:
Ronald Toby, State and Diplomacy in Tokugawa Japan
Peter Duus, The Abacus and the Sword: The Japanese Penetration of Korea, 1895-1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