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성 전투
1. 개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대야성에서 있었던 전투.
대야성은 원래 반파국의 영역이었지만 이사부 장군에 의해 신라에 편입됐다. 전라도 방면에서 오는 군세를 경상도 쪽에서 방어하기에 적합한 난공불락의 형세였던 덕분에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모두 주요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후삼국 통일 이후로는 영호남이 같은 나라에 줄곧 통합되었으므로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기지 못 했다.
2. 삼국시대
진흥왕이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군사적 요충지이니 만큼 무왕 때에 41년 동안 대야성을 수차례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다만 정확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전투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642년의 전투로, 김춘추가 백제에 악감정을 가지는 계기가 된다.
대야성 전투(642년) 항목 참조.
이후 백제군이 수비하고 있다가,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648년 김유신이 대야성 앞에서 백제군과 한 번 대치한 후, 김유신이 중과부적으로 퇴각하는 척 하며 백제군을 옥문곡 계곡까지 유인해 승리를 거뒀는데 이 때 신라군이 대야성을 탈환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아무튼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20여년 동안은 대야성 대신 지금의 경산시인 압독주가 백제 방면 수비의 거점도시였다. 아무리 늦어도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대야성을 신라군이 다시 수복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661년에 주의 중심지를 다시 대야성으로 옮겼다.
3.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에 여러 차례 벌어진 전투. 총 5차례 벌어졌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한 직후인 901년 대야성을 공격했지만 성을 수비하는 김억렴의 신라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끝내 물러났다. 이후 916년에 다시 공격하지만 또 실패하고, 920년에 세 번째 공격 만에 대야성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대야성을 차지한 후백제는 이후 서라벌 인근까지 직접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한 후에는 장수 추허조가 지키고 있었는데 927년에 고려의 장군 김락과 재충에 의해 함락되었다. 928년에 후백제 장군 관흔이 왕충이 이끄는 고려군을 북쪽으로 유인한 후 신속히 남하해 대야성을 다시 점령한 뒤 후백제 멸망까지 후백제 땅으로 남았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자연스레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3.1. 관련 기록
>가을 8월,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금성(錦城, 전남 나주) 남쪽으로 군사를 이동하여 인근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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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효공왕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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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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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효공왕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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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920년
>겨울 10월, 후백제 군주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진례(進禮)로 진군하였다. 임금이 아찬 김율(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이 이 말을 듣고 바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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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920년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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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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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 제12 경명왕
>920년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키자 견훤은 이를 듣고 물러갔다.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듯하였으나 속으로는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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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924년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 문소(聞韶)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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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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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928년
>가을 8월에 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 왕충(王忠)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자 관흔이 물러가 대야성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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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
>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제10 견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