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명왕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시호'''
'''경명왕(景明王)'''
'''성씨'''
박(朴)
'''휘'''
승영(昇英)
'''왕후'''
왕비 김씨
'''부왕'''
신덕왕
'''모후'''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1]
'''형제'''
경애왕
'''생몰년도'''
음력
899년? ~ 924년 8월[2]
'''재위기간'''
음력
917년 ~ 924년 8월 (8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신라의 제54대 국왕. 시호는 경명왕(景明王). 휘는 승영(昇英). 제53대 신덕왕의 아들로 뒤에 왕위에 오르는 제55대 경애왕의 형이다.

2. 생애


경명왕 2년(918년) 김현승(玄昇)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했는데 신라 초기의 왕족으로써 왕위를 회복한 박씨와 오랜 기간 신라의 왕족이었다가 왕위를 빼았긴 김씨와의 알력을 알 수 있다. 치세 중 역사적 사건이 하나 터지는데 태봉에서 왕건쿠데타가 일어나 궁예가 축출되고 고려가 건국된 것. 경명왕은 잘 나가던 견훤을 제쳐두고 고려 내부 반란에 시달리던 왕건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결과적으로 경명왕의 친고려 정책은 이후 동맹으로 굳어져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지만 후삼국 통일 이후 신라 왕가인 진골 박씨와 김씨들이 고려가 500여 년 후 멸망할 때까지도 고려의 귀족으로 남을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김씨들은 고려 왕가와의 통혼을 통해 주요 파벌 세력 중 하나가 되었고 경명왕의 손자인 박욱은 고려에서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개국공신 신숭겸의 딸과 혼인하였다. 한편 만약의 지원 가능성을 대비해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등 난국을 타개하려 시도했던 모습이 보이지만 당시 후당 또한 쇠락해가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도움은 되지 못했다.[3]
경명왕 4년(920년) 신라 최후의 보루였던 대야성이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선덕여왕 재위기 때도 의자왕의 맹공으로 한 차례 빼앗긴 적이 있었다지만 삼국통일전쟁 당시의 신라와 후삼국시대의 신라는 여러모로 사정이 달랐다. 이건 사실상 신라의 수도서라벌로 향하는 마지막 장벽이 사라져버린 격인데 대야성이 신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김춘추 항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4] 대야성이 후백제에게 넘어간 이상 서라벌로 향하는 관문은 소규모 성들밖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927년 경애왕이 경주 포석정에서 후백제군의 기습을 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5]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은 매사냥을 즐겼다. 일찍이 이 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리고는, 신모에게 기도를 하였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께 작위를 봉해드리겠습니다.”

금세 매가 날아와 책상 위에 앉았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으로 봉하였다.

삼국유사 선도성모조의 기록. 진평왕처럼 사냥이 취미였던 듯하다. 신라 토착 여신 선도성모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홍륜사(興輪寺)의 남문과 좌우의 낭무(廊廡, 궁궐이나 종묘의 정전(正殿) 아래에 동서로 붙여 지은 건물)가 불에 탔지만 미처 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화(靖和)와 홍계(弘繼) 두 승려가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고 하였다. 정명(貞明) 7년 신사(서기 921년)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물렀는데 전각과 전탑, 풀과 나무, 흙과 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뒤덮었고 남쪽 연못의 물고기와 용이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면서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옥과 비단과 곡식 등의 시주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장인들도 제 스스로 찾아와 공사를 하니 며칠 만에 완성하였다.

공사가 다 끝나 천제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두 승려가 아뢰었다.

“천제께서 만일 궁으로 돌아가려 하신다면, 거룩하신 천제의 얼굴을 그려 지성으로 공양하여 천제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또한 천제의 진영을 여기에 모셔 두어서 길이 인간 세상을 보호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천제가 말하였다.

“나의 원력(願力, 부처에게 빌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마음의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오묘한 교화를 두루 펼치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모습을 그려서 경건하게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승려는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의 상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이 화상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흥륜사 벽화보현조의 기록. 불교 설화적인 성격이 강한 기록이나 보현보살 등 불교계를 왕실이 힘을 실어줘 종교권위를 통해 당시 신라의 어려운 상황을 좀 완화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선덕여왕 때 불교계를 밀어줬던 것과 비슷한 것.

918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가 울어 사흘 동안이나 독경을 하며 쫓아냈지만 반나절도 못되어 다시 울었다고 하며,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다. 또한,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갔다.'''

기록에는 위와 같이 믿기 힘든 기록이 나오는데 모두 망조의 기운이다. 924년에 승하해서 황복사 북쪽에 장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교식으로 화장했다는 설도 있다. 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이 경명왕의 왕릉으로 전해진다.
경명왕이 독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게 있다면 별로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아들이 무려 8남이나 있었다는 부분이다. 다만 왕위는 아우 경애왕에게 이어졌는데 많은 아들을 두었음에도 아우한테 왕위를 물려준 것 때문에 쿠데타나 왕위 계승 문제가 엮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6] 사실상 신라의 실권이 있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는 동생 경애왕은 한때 암군의 결정판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나름대로 신라를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재평가받기도 한다. 동생에게 물려준 건 아들들에게 물려주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는지 혹은 불행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경명왕의 여덟 아들들은 사실상 현대 박씨(朴氏)의 근간이 된다. 경명왕의 장남인 밀성대군 박언침은 밀양 박씨, 차남인 박언성은 고령 박씨, 3남은 함양 박씨, 다음 4남부터 8남까지 죽산 박씨, 무안 박씨, 춘천 박씨, 순천 박씨, 충주 박씨, 상주 박씨, 월성 박씨 등 수많은 박씨들의 시조가 되어 오늘날의 박씨를 한국 3대 성(姓)에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경명왕이다.[7]

3. 기타


대한민국의 보물 제 363호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의 비문은 경명왕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게, 당시 고승비(高僧碑)의 비문을 쓰는 일은 최치원 같이 한문에 능숙한 지식인들한테 부탁하는 게 보통이었다. 경명왕이 한 거 없는 무능한 왕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 개인적으로는 꽤나 학식이 있긴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물론 지식이 많다는 것과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기도 하고[8] 즉위할 때부터 나라가 막장이었는데다 본인은 요절하기까지 했으니 답이 없긴 했다.
기록에서 그의 왕비는 장사택(長沙宅)이라고 적혀 있는데, 역사학계에선 이게 시호가 아니라 '장사택 출신'이라는 의미로 보고 있다. 장사택은 금입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 각간 김대존이 금입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력한 진골 가문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
一年秋七月 경명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위응을 상대등으로 삼고, 유렴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현승이 반역하여 사형을 당하다
二年夏六月 태조가 즉위하다
二年秋七月 아자개가 태조에게 항복하다
三年 사천왕사 소상의 활줄이 끊어지다
三年 김성을 각찬으로 삼고, 언옹을 사찬으로 삼다
三年 태조가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기다
四年春一月 왕과 태조가 우호를 닦다
四年春二月 윤웅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四年冬十月 태조에게 원군을 요청하다
五年春一月 진평왕의 보대를 찾다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
五年春二月 견권이 말갈족을 물리치다
五年夏四月 경도에 강풍이 불다
五年秋八月 황충과 가뭄이 발생하다
六年春一月 원봉과 순식이 항복하다
六年春一月 홍술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七年秋七月 성달과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七年秋七月 김락과 김유경을 보내 후당에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八年春一月 왕봉규가 후당에 공물을 바치다
八年夏六月 후당에 조공 간 김악이 조의대부시위위경에 제수되다
八年秋八月 왕이 죽다
[1] 헌강왕의 딸.[2] 효공왕의 아버지 헌강왕신덕왕의 아버지 박예겸이 겹사돈지간이므로, 신덕왕의 결혼 날짜가 효공왕과 같다고 가정할 경우. 어머니 의성왕후 김씨가 870년대 중반에 출생했다고 가정할 경우 924년 당시 경명왕은 많아봐야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3] 비슷한 시기 후백제일본에 옛날 백제 시절 인연을 거론하며 동맹을 제의했지만 일본 역시 한중만큼은 아니라도 왕권이 바닥에 떨어진 혼란스러운 시대여서 도와주고 어쩌고 할 여건이 안 되었기에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다.[4]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대야성이 뚫림으로써 광주대구고속도로 선상에서 대구와 경주를 방어할 수 있는 산맥이 사라졌다. 대야성이 있던 경상남도 합천군 지역은 지리산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는 소백산맥 최고봉 뒤쪽인데 여기가 뚫림으로써 소백산맥 일대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전선이 경주 바로 앞에 있는 태백산맥 일대까지 밀려버리는 것이다. 전투기폭격기가 없는 전근대 시절에 전쟁에서 산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5] 대야성의 존재는 신라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였다. 일단 철광석 산지이고 대야성을 지나서는 경상도 지역의 주요 교통로인 낙동강 유역이 전부 공격받을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요충지였다. 그러나 대야성이 함락되었다고 바로 경주까지 공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낙동강이 달구벌 지역을 바탕으로 방어하고 북으로 안동 지역, 서남으로 부산 지역까지는 경주의 자체적인 교통으로 연결이 가능하다. 이는 대야성을 빼앗긴 이후에도 몇 년 동안 신라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였다.[6] 경명왕 사후에 동생 경애왕이 즉위한 것에는 확실히 큰 의혹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밀성대군 박언침은 밑에 동생들이 7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였을 것인데도 즉위하지 못했다. 또한 상주 박씨의 시조인 5남 사벌대군 박언창은 숙부인 경애왕이 즉위하면서 후사벌국으로 독립하였다라는 내용을 생각해 보면 경명왕이 정상적으로 경애왕에게 물려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후사벌국 자체가 당대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족보상에만 나타나므로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기에 쿠데타의 근거로 들기에는 부적합하다.[7] 물론 영해 박씨 등 고대의 파사 이사금이나 울산 박씨경주 박씨 같이 경애왕계에서 갈라져 나온 박씨들도 있다.[8] 명 4대 암군만 해도 무슨 암군 끝판왕처럼 희화화되지만 관심있는 학문에 한해서는 유식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