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공왕

 



'''시호'''
'''효공왕(孝恭王)'''
'''성씨'''
김(金)
''''''
요(嶢)
'''왕후'''
왕비 박씨[1]
'''부왕'''
헌강왕(憲康王)
'''모후'''
의명부인(懿明夫人) /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김씨
'''자매[2]'''
의성왕후 김씨[3], 계아태후 김씨[4]
'''생몰년도'''
음력
(885년 ~ 886년) ~ 912년 4월(25세 ~ 27세)
'''재위기간'''
음력
897년 6월 ~ 912년 4월 (15년 11개월)
1. 개요
2. 생애
3. 기록된 자연재해
4. 삼국사기 기록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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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52대 국왕. 제49대 헌강왕서자이자 제50대 정강왕과 제51대 진성여왕의 조카.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사냥을 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어떤 여자[5]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 나가 동침하여 태어났고 장성하여 입궁했다. 삼국사기 진성여왕 조를 보면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태자인 효공왕이 태어난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진성여왕이 대신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고 효공왕의 친모인 의명왕태후가 헌강왕의 정비인 의명부인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기록상 모순되는 부분이 보인다. 의명부인도 다른 왕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있는 가계 배경에 대한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의명부인=헌강왕의 후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헌강왕에게 아들은 효공왕 뿐이었지만 당시 법도상 서자가 왕위를 잇는 것은 맞지 않고[6] 나이가 너무 어려서 대신 동생 정강왕, 정강왕도 여동생 진성여왕에 물려줬으나 3남매가 모두 아들이 없었다. 후에 진성여왕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비록 서자라도 헌강왕의 유일한 아들이고 조카라는 점에서 893년 효공왕을 태자에 봉하였고 897년 왕위를 물려주었다.[7]
재위 내내 신덕왕을 위시로 한 박씨 족단의 위세에 휘둘린 점을 봤을 때 진성여왕이 양위를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박씨로의 왕위 이양은 기정사실화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골에서 태종 무열왕계로 이양할 때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이양할 때 선덕왕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던 것처럼 내물왕계에서 아달라왕계로 이양할 때 효공왕이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

2. 생애


효공왕은 즉위 후 사면을 내리고 문무백관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준 후 898년 정월 친모를 추존하면서 높여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라 칭했다. 서불한 준흥(俊興)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계강(繼康)을 시중으로 삼았다. 899년 3월 이찬 박예겸(朴乂謙)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하지만 효공왕의 재위 초기는 이미 신라가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고 신라의 지방에서는 훗날 후고구려후백제가 될[8] 궁예견훤 두 양대 세력, 양길 및 패서의 군소 호족들 등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군웅할거의 형세가 펼쳐지고 있었다. 898년부터 궁예에게 한반도 중부 지방인 한주삭주의 성을 대거 빼앗기는 기사가 나온다. 899년 궁예와 양길이 격돌하여 결국 궁예가 승리했다.
900년에 이미 892년부터 사실상 왕을 칭하던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고 901년에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서 이른바 후삼국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한때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던 신라 조정은 오늘날 경상도 일대만 겨우 다스리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901년에는 견훤이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인 대야성을 공격하지만 겨우 지켜낸다. 대야성은 과거 삼국시대백제군이 신라를 공격할 때 막아내는 최전선이었는데 삼국통일평화기가 오면서 쓰이지 않다가 다시 국경 방어선이 된 것이다. 망국의 징조는 예전부터 보였지만 이때까지는 신라의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였기에 견훤의 공격을 막아낸 것.
904년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905년 국호도 마진으로 바꿨으며 궁예의 부하 왕건해군으로 후백제 영토 후방 금성을 쳐서 빼앗았다. 905년 8월 죽령 동북쪽까지 궁예의 군대가 이르렀지만 건국 초기의 진취적 활력이 넘치던 태봉에 비해 힘이 없던 신라였기에 고작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하여 지키라"라는 명만 내릴 수 밖에 없었다. 910년의 나주 공방전 등 이미 상황은 궁예와 견훤의 대결 사이에서 신라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9]
이런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효공왕 역시 자포자기로 사치와 향략을 즐길 수 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대신 은영이 후궁들과의 향락을 중지하고 마음을 다잡을 것을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은영이 후궁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왕의 의사에 정면으로 반하는 짓을 했는데도 처벌 기사가 없다는 게 이미 신라 조정 내부에서도 왕권이 크게 떨어져 있던 듯. 사실 효공왕은 기록상 미천한 출신의 여자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진골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애매한지라[10] 귀족 대신들이 효공왕을 무시했을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효공왕은 두려워하다가 912년 4월 승하했다. 한편 시호에 恭이라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어서 폐위당했거나 적어도 이에 준하는 형태로 임기를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럴만도 한 것이 효공왕의 왕비는 신덕왕의 남매인데 왕비가 아닌 천첩을 가까이 하면 신덕왕을 위시로 한 박씨 족단의 위세가 약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 은영 역시 친-박씨 족단과 연관된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것을 포함한 효공왕 말년의 기록들을 쿠데타의 징후로 파악하여 훗날 성씨가 다른 신덕왕이 즉위한 것도 정변 형식으로 효공왕을 폐위한 뒤에 즉위한 것이 아니냐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가정하에 폐위되었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것을 근거로 정변 과정에서 시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기록에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없으니 순전히 추측의 영역일 뿐이다.
한편 본인이 서자 출신임에도 다른 적자가 없어 왕위를 이은 것인데 효공왕조차도 후사가 없어서, 원성왕 때부터 혈연으로 내려 온 신라 하대 왕통은 결국 끊기고 말았다. 동시에 '''550년 경주 김씨 왕성의 왕위 독점이 끝났음'''을 사실상 고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처남인 박예겸의 아들 박경휘가 뒤를 이으니 이것이 신덕왕이다.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 때의 신라는 이미 망국의 테크를 밟는 안습한 상황이었는 데다 기껏 돌아온 박씨 왕조도 견훤의 침공 때 무너져 겨우 3대 15년밖에 가지 못했다.
효공왕 이후 15년 뒤에 김부가 김씨 왕 경순왕으로 다시 등극하긴 하지만 이 때는 외부 세력인 견훤의 강압에 의해 거의 타의로 왕위에 오른데다 주체적 권력도 거의 없었고[11] 신라의 마지막 왕이라는 망국의 군주에 가까우니 사실상 효공왕이야말로 김씨 왕성에서 나온 마지막 임금이나 다름없다.
어쨌든 이 왕도 재위 15년차인 912년 승하한 후 화장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사자사(師子寺)의 북쪽에서 화장하고 뼈를 구지제(仇知堤)의 동쪽 산허리에 묻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 효공왕릉으로 전해지는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14번지에 있는데 신라가 몰락한 말기 왕릉이라 높이 약 5m의 규모,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일부 노출된 것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이 무덤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자사로 추정되고 있다.

3. 기록된 자연재해


자연재해가 매우 버라이어티하다. 점점 망해가는 나라답게 혼란했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 902년 3월엔 서리가 내렸다.
  • 905년 2월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4월에 서리가 내렸다.
  • 906년 4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 907년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 908년 2월에 살별(=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3월에 서리가 내렸다. 4월에 우박이 내렸다.
  • 911년 정월 초하루 병술에 일식이 있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효공왕'''
一年冬十二月 효공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대사면을 하고 관작을 한 계급씩 더하다
二年春一月 어머니를 의명왕태후로 삼다
二年春一月 준흥을 상대등으로, 계강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秋七月 궁예송악군에 도읍하다
三年春三月 예겸의 딸을 비로 삼다
三年秋七月 양길궁예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다
四年冬十月 청길과 신훤이 궁예에게 투항하다
五年 궁예가 왕을 칭하다
五年秋八月 견훤대야성 공격에 실패하고, 금성 남쪽 부락을 약탈하다
六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六年春三月 대아찬 효종시중으로 삼다
七年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다
八年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연호를 제정하다
八年 패강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다
九年春二月 별이 떨어지다
九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九年秋七月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다
九年秋八月 궁예가 침략하자 성주에게 수비를 명하다
十年春一月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다
十年春三月 입당 급제한 김문울이 책명사로 귀환하다
十年夏四月 4월에서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十一年 봄,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一年 일선군 이남의 성을 견훤에게 빼앗기다
十二年春二月 동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다
十二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三年夏六月 왕건이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견훤이 나주성에서 후퇴하다
十五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一月 왕의 천첩을 은영이 죽이다
十五年春一月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다
十六年夏四月 왕이 죽다
효공왕의 치적보다 되려 궁예, 견훤, 왕건의 활약과 기상에 관한 기사가 훨씬 더 많다.
효공왕부터 삼국사기 12권이 시작된다.

5. 기타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짤막하게 등장했다. 다만 실존 인물은 소년기에 왕위에 올라 20대 후반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담당배우는 제4공화국에서 정호용, 야인시대에서 경성제국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 역으로 나왔던 중견 연극배우 한근욱이다(...)[12]
비빈과 함께 풍악 속에서 연회를 즐기다 대야성에서 김효종을 비롯한 신라 장수들이 견훤을 막아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신라의 영토를 다시 되찾으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사치 및 향락에만 빠져 지내는 것으로 묘사된 것.
[1] 박예겸(朴乂謙)의 딸, 신덕왕의 누이.[2] 어머니가 같은지는 알 수 없다.[3] 신덕왕의 아내.[4] 경순왕의 어머니.[5] 일단 헌강왕에게 후궁이 있었다는 것은 금석문상 확실하다. 수원 권씨라는 인물로 헌강왕 사후 출궁 조치되었다고 한다.[6]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로 유명한 홍길동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서자와 적자는 전근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했다. 당장 신라 하대의 상황에서도 여자(진성여왕)보다도 대를 이을 우선 순위에서 밀린 원인이 서자기 때문인 셈이다. 조선 때도 공주들보다는 서자가 우선이기는 했지만 역시 적자와는 넘사벽서열 차이가 있었다. 다만 삼국사기의 다른 단락에서는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늦게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7] 이는 골품을 중요시하던 신라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였다. 동시대 중국의 경우 비록 궁인 출신 후궁의 에서 났을지라도 황제의 자식이라면 계승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는 오직 정실 왕후의 소생만이 계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효공왕은 엄격하게 따지자면 서자도 아닌 사생아였다.[8] 효공왕 즉위 시점에서는 둘 다 사실상 독립 상태 군벌이기는 했는데 정식으로 건국한 상태는 아니었다.[9] 나중에 경애왕고려와 연합해서 후백제를 견제하는 외교술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왕건 이전의 궁예는 신라 조정에 적대적이어서 그러기도 어려웠다.[10] 골품이 나뉘는 정확한 기준은 아직도 명확하지 않고 연구 대상이기는 하지만 하위 골품 사이에서 난 자식은 골품이 낮아진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당대에 서출 효공왕을 진골로 인정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왕족 혈통에 하자가 있다고 여겨졌을 가능성은 있다.[11] 경애왕 시대까지는 신라 조정이 어쨌든 독자적으로 왕건을 돕거나 군사적 행동을 좀 할 수도 있는 상태였지만 경순왕 시대에 비로소 망국만 남은 식물 정부가 되었다.[12] 여담으로 태조 왕건에 나오는 신라 왕들은 대부분 미스 캐스팅인데, 진성여왕의 경우는 골격이 흡사 장부와 같다고 기록되었지만 비교적 단신인 노현희가 배역을 맡았고, 견훤의 신라 침공 당시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경애왕을 당시 '''만 56세'''의 문회원이 맡았고, 경순왕은 한술 더 떠 정태우가 연기했던 최응과 동년배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만 62세'''였던 신귀식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