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왕

 



'''시호'''
'''신덕왕(神德王)'''
'''성씨'''
박(朴)[1]
''''''
경휘(景暉) / [2]
'''왕후'''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3]
'''왕태자'''
박승영(朴昇英)(912 ~ 즉위)
'''왕자'''
박위응(朴魏膺), 박효렴(朴孝廉)
'''부왕'''
선성대왕(宣聖大王) 박예겸(朴乂兼/朴銳謙)[4]
흥렴대왕 박문원(朴文元)[5]
'''모후'''
정화태후(貞和太后)
'''생몰년도'''
음력
???년 ~ 917년 7월[6]
'''재위기간'''
음력
912년 ~ 917년 7월 (6년)
1. 개요
2. 출신
3. 즉위
4. 치세
5. 신덕왕릉
6. 삼국사기 기록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53대 국왕. 시호는 신덕왕(神德王). 경명왕 대에 지은 태자사 낭공대사 비문에는 '성고대왕(聖考大王)'이라고 불렸다. 고(考)는 족보상 아버지를 이르는 말인데 임금의 아버지라 거룩할 성(聖) 자를 붙혀 성고(聖考)라고 부른 것.
휘는 경휘(景暉). 신라 초기의 마지막 박씨 왕이었던 아달라 이사금의 먼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7][8]
아버지는 선성대왕으로 추증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花夫人)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이찬 문원(文元)이라고도 한다. 신덕왕의 왕비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김씨이다.

2. 출신


사실 박씨라는 점이 중요하기보다는 신덕왕 자신은 효공왕의 매부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인데 자신이 왕위 계승권 1위임에도 매부로서 왕위에 오른다고 하면 정통성에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아달라 이사금은 왕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에 의문이 생긴다. 아달라 이사금이 딸이라도 있었으면 사위에게 왕위가 계승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점도 그렇다. 이렇게 된 이유를 보면 《삼국유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왕력편〉에 따르면 신덕왕이 대왕으로 추봉한 사람은 아버지, 양아버지, 외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닌 양아버지가 《삼국사기》에서 그냥 아버지로 나와있고 친아버지 문원은 관등이 2등급인 이찬, 할아버지 문관은 관등이 3등급인 파진찬으로 의붓아버지 예겸, 외할아버지 순홍, 외증조할아버지 원린이 전부 1등급인 각간인 것과 대비된다. 더불어 외가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일 뿐 친가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박씨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일단 자신의 아버지는 물론 양아버지에 외할아버지까지 추봉하고 아들인 경명왕 또한 자신의 장인갈문왕도 아닌 대왕에 추봉한 것을 보면 왕권의 정당성이 약하기는 했던 모양.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하자면 석씨, 박씨, 김씨는 신라의 국성으로써 한 집안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서로 통혼을 매우 많이 했다. 박씨는 김씨부인, 김씨는 박씨부인 이런 식으로 근친 간 통혼을 한 것이 1천여 년간 몇 백번은 족히 될 것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같은 성씨끼리의 근친혼도 덤이다. 이 정도면 두 집안의 유전자가 하나로 합쳐진 수준인데 예외는 1천년 신라사 전체를 찾아봐도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성왕의 딸인 소비 부여씨와 같이 제한적이다. 이는 신라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고구려백제와는 많이 다른 부분인데 권력을 하나로 모으기에 효율적인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족 혹은 귀족들끼리의 분열을 막기 위함이라 추정되고[9]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같은 성씨 쪽에서 일어난 것이라 한 쪽이 진압되어 처형되고 재산이 몰수되더라도 가문 전체의 재산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김씨 중에 1명이 박씨를 칭한다 하더라도 유전자상으로나 정통성으로나 별다른 문제는 없다.
신라를 연구역사학이노우에 히데오에 의하면 신덕왕은 원래 김씨인데 여동생이 효공왕왕비가 되면서 박씨를 칭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원래 김씨였는데 박씨를 칭하게 되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김씨였어도 왕위 계승에 별 어려움이 없었을텐데 왜 굳이 박씨를 칭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10]

3. 즉위


신덕왕의 즉위는 신라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데 바로 신라 후기의 박씨 왕조로써 아달라 이사금이 승하하고 728년만에 신라에서 박씨 왕이 다시 즉위한 것이다.[11][12]
신덕왕은 경문왕계가 4대 연속으로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신덕왕이 헌강왕의 사위로 경문왕가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신덕왕은 효공왕의 처남이기도 했는데 신덕왕의 아버지 혹은 의부로 보이는 예겸의 딸이 효공왕의 왕비로 들어갔다. 과거 석탈해김미추가 전왕과 성씨가 다른데도 왕위에 올랐던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13]
김춘추에 의해 성골이 폐지되고 진골 왕위 체제가 독점적으로 세습되면서도 박혁거세 시조묘와 신궁나정 주변에서 박혁거세와 하늘신에 대한 제사는 계속해 지내오고 있었고 박씨가 신라의 시조로써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며 계통이 꾸준히 이어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덕왕은 신덕왕 본인에 그치지 않고 박씨 계승이 신덕왕의 아들에게 이후 계속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신덕왕 시대에는 박씨가 신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박씨 왕조를 회복했다고 볼 수 있고 그동안 박씨가 숙청되지 않았고 귀족으로써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왕이 되었던 때가 이미 700년 전이나 된 박씨를 칭하며 왕위를 계승하여 계통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서 후삼국시대 신라의 난맥상을 추측할 수 있기도 하다.

4. 치세


후삼국시대의 신라 왕들 중에서는 경애왕과 함께 나름대로는 선전했던 모양으로, 916년 대야성에 처들어온 견훤을 막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 뭐, 사실 이 때 신라는 영토가 더욱 작아져 나라 꼴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었으므로 능력이 웬만큼 있어봤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긴 하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신라가 현 경상남도 일대인 강주 지역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이지만 불과 4년 뒤인 경명왕 때 낙동강 이서지역이 죄다 털린다(...).
특이한 이변으로, 915년 6월에 참포(槧浦, 현 포항시 흥해읍의 곡강(曲江) 추정)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물결의 높이가 20장(丈) 쯤이나 되었는데 3일만에 그쳤다는 기록이 있다. 참포는 당시 신라사독의 하나로,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중요한 하천이었다. 그 외에도 916년 10월에 큰 지진이 났다는 기록도 있다. 일반적으로 백두산 폭발에 따른 영향으로 보고있는 듯.[14]
슬하에 승영(昇英)·위응(魏膺)·효렴(孝廉) 등이 있었는데, 승영은 54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55대 경애왕이 되었다. 4남 1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상 아달라 이사금의 바로 옆에 묻혔고 나중에 아들도 옆에 묻혀 지금의 배동 삼릉이 됐다.

5. 신덕왕릉


[image]
배동 삼릉 중 가운데 있는 능이 신덕왕릉이다. 아래쪽은 먼 조상인 8대 아달라왕릉, 위쪽은 아들인 54대 경명왕릉.
1963년 7월 19일에 도굴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래 왕릉으로 지목된 능은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후손들[15]의 영 좋지 않은 시선도 감안해 발굴조사하지 않는 게 대부분이지만, 도굴로 훼손된 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3개의 능 모두 돌로 방을 만들고 문이 있는 전형적인 굴식 돌방무덤이며, 왕과 왕비의 합장묘이며, 능 내부에서는 신라 왕릉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채색 벽화의 흔적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원래는 사신이 그려져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으며, 벽화 외 다른 유물은 이미 없었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덕왕'''
一年夏四月 신덕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아버지를 추존하다
一年夏五月 아들 승영왕태자로 삼다
一年夏五月 이찬 계강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리다
三年春三月 궁예연호를 정개로 고치다
四年夏四月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치다
五年秋八月 견훤대야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春一月 태백이 달을 범하다
六年秋七月 왕이 죽다
자연재해에 관한 이야기와 궁예, 견훤 이야기를 제외하면 아버지 추존, 아들을 태자로 삼은 거 밖에 없다.
[1]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에 의하면 신덕왕은 원래 김씨인데 이후 즉위하는 고려 왕실이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박씨로 바꿨다고 주장한다.[2] 삼국유사 왕력편에서의 표기지만 이건 흥덕왕의 이름이다. 다만 발음 자체는 중고한어 기준으로 둘 모두 kiängx hüei로 동일하다.[3] 헌강왕의 딸[4] 왕족인 양아버지.[5] 친아버지.[6] 장인헌강왕인데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위를 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승하할 당시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40대 중후반 정도일 듯하다.[7] 밀양 박씨 세보에 따르면, 아달라 - 벽방(碧芳) - 무영(武英) - 판득(判得) - 광흠(光欽) - 미일(美一) - 내물(乃物) - 상건(相建) - 인엽(仁燁) - 계보(啓輔) - 명신(明信) - 정환(貞環) - 노겸(露兼) - 남선(楠善) - 금산(金山) - 응찬(應燦) - 덕흥(德興) - 대녕(大寧) - 이순(尼淳) - 융검(隆劒) - 지곤(之坤) - 성순(成順) - 2남 예겸(乂兼) - 신덕왕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24세손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선 아달라가 후손이 없다고 못박았고, 아달라와 예겸 사이의 인물들 21명 모두 역사서에 행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오직 족보에만 나오는 이 가계는 후대에 '''창작'''된 것이다. 딱 보기에도 신라시대에 쓰였을 법한 이름들이 아니다.[8] 신라사 곳곳에서 보이는 박씨 가문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왕위를 계승해야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박씨 가문의 마지막 임금인 아달라 이사금을 끌어다 썼을 가능성이 높고...[9] 고구려나 백제도 외척 가문 때문에 국력을 낭비하고 나라가 망할 뻔했던 적이 있다. 고구려는 안원왕 문서, 백제는 대성팔족 참고. 반면 신라는 이런 외척간 이유로 난리가 났던 적은 별로 없는 편인 대신에 혜공왕 때부터 그야말로 왕족간 왕위 쟁탈전으로 무려 100년 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10] 신라 하대에서 박씨를 달고 있는 사람들의 계보는 익성대왕(김헌정)의 아내 순성태후 박포도 → 선강대왕(김충공)의 아내 선의태후 박귀보 → 성덕대왕(김균정)의 아내이자 헌덕왕의 맏며느리 헌목태후 박정교신무왕의 아내 정종태후 박정종 → 의공대왕(김계명)의 아내 광의왕태후 박광의로 이어진다. 한 가지 특이사항으로는 이들이 제43대 희강왕부터 제48대 경문왕까지 6번 연속으로 태후 자리를 꿰찬다는 점이 있다.[11] 이 시간차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 즉위부터 위키러가 이 문서를 보는 2021년 사이의 간극보다도 100년이나 긴 시간이다. 1392년 왕족의 지위를 잃어버린 고려왕씨가 2120년 다시 나라의 권력을 쥐었다고 생각해보라. 딱 그만큼의 시간이다.[12] 유사한 경우로는 오초칠국의 난에서 반역자인 초왕 유무의 후손인 송무제가 유송을 세운 경우가 있지만 이조차도 6세기 남짓이었다.[13] 생각해보면 신라의 왕위 계승은 사망한 왕의 자녀 모두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남녀간의 차이보다는 출생의 순서가 계승 순서가 된 것 같다.) 따라서 효공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인 신덕왕이 즉위하는 것이 결코 이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경순왕의 아버지인 김효종도 신덕왕과 마찬가지로 헌강왕의 사위인데 여기서는 헌강왕 딸의 출생 순서가 작용하여 박씨인 신덕왕이 즉위하였다. 만약 부계 혈족으로만 왕위 계승을 했었다면 문성왕의 후손인 김효종이 즉위했어야만 한다.[14] 다만 최근에 백두산 폭발이 일어난 것은 946년 전후로 파악하고 있기에 신빙성이 꽤 떨어진다. 그러나 일종의 전조였을 확률은 있다.[15] 한국에 존재하는 박씨의 80%를 차지하는 밀양 박씨의 시조 밀성대군 박언침이 신덕왕의 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