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성 전투(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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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42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발발한 전투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이 백제에 대한 되돌릴 수 없는 악감정을 가지게 만든 전투이기도 하다.[1]
2. 배경
2.1. 백제의 상황
562년 대가야의 멸망이후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도 접경지역이 탄생하게 된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후, 백제의 성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추진했으나 관산성 전투에서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 위덕왕 이후 부터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나라 밖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대(對) 신라 압박정책을 추진했고 641년, 그의 사후에 즉위한 의자왕은 즉위한 후 선친인 무왕의 정책을 유지해 나가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나갔다. 의자왕은 즉위한지 2년만인 642년 7월에 직접 친정해 신라를 침공했고 미후(獼猴) 등 4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리고 1달뒤인 8월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신라 남쪽의 주요 요충지인 대야성 공격을 지시한다.
2.2. 신라의 상황
이미 진평왕 재위 말기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이 심화되었고, 진평왕의 뒤를 이어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백제에게 수많은 성과 영토를 뺏기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대야성의 도독(都督)으로 부임했다. 신라의 도독(都督)은 인근 지역의 병력을 총괄하는 관직으로 조선의 병마절도사와 비슷한 직책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야성이 신라의 주요한 군사 기지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김품석은 큰 실책을 저질렀는데, 그놈의 색욕 때문에 부하 검일의 부인을 빼앗아 원한을 사게 된 것이다.
그리고 642년 8월, 백제가 침공해왔다. 이때 《삼국사기》에는 대야성 전투 직전 기록에 "백제가 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항성을 친다는 첩보를 입수해 당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반응이 나오지 않아 실제로는 백제가 일부러 흘린 역정보 일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만약 이 기록이 대야성 전투와 연관 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백제가 블러핑을 쳐서 신라의 시선을 한반도 중부쪽으로 돌린 틈을 타 한반도 남쪽의 요충지를 기습 공격했다고 볼수도 있다.
3. 전투 상황
3.1. 내부의 배신과 지휘부의 오판
윤충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의 수로를 차단한 후 대야성에 맹공을 퍼부었고, 김품석은 그 위세에 놀라 감히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검일은 백제군과 내통해 군량창고에 불을 질렀고, 이를 본 성안 백성들과 군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모척이라는 인물도 백제군과 모의해 대야성 내부 사정을 제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훗날 백제를 멸망시킨 후인 660년 8월 2일에 열린 승전기념잔치에서 "이날 검일과 모척을 죽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검일과 공모해 성을 함락시킨 죄, 검일은 대야성에서 모척과 공모해 백제군에게 성을 내준 죄로 목을 베었다."라는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무열왕 7년 8월 2일)이날 모척(毛尺)을 잡아 목을 베었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으로, 백제로 도망쳐서 대야성(大耶城)의 검일(黔日)과 함께 모의하여 신라의 성이 함락되도록 한 일이 있었기에 목을 벤 것이다.'''
또한 검일을 잡아 죄목을 따져가며 말하였다.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 병사를 끌어들여 창고를 불질러 없앰으로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다.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다.[2]
백제와 함께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으니 그 죄가 셋이다.'''”그리고는 그의 사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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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지원군도 기대하기 힘든 데다 성 안의 곡식창고도 홀라당 불에 타버려 저항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한 상황에서 중심을 잡아줘야할 총사령관인 김품석도 안절부절 못하자, 지도부에서도 동요가 일어난다. 이 때 김품석의 측근이었던 아찬 서천(西川)[3] 이 백제 진영으로 건너가 윤충을 만나서 "만약 모두 살려준다고 약조하면 항복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에 윤충은 "만일 그렇게 한다면 공과 나에게 모두 좋은 일이 될 것이요.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리다."라는 긍정의 답을 전했고 서천은 대야성으로 돌아가 김품석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한다.
이때 사지(舍知) 죽죽(竹竹)이라는 장수가 "백제는 말을 자주 바꾸는데 그 말을 어찌 믿나. 쥐새끼처럼 삶을 구걸하느니,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김품석은 항복을 결정하고 성문을 열어젖힌다.[4]
3.2. 추위에 시들지언정 굽히지 않으리
하지만 윤충은 죽죽의 말 대로 뒤통수를 쳤다. 성문을 열고 항복한 신라의 병사들이 나서자 마자 매복해있던 백제의 병사들이 일제히 공격을 감행해 죽여버린 것이다. 이 소식에 당황한 김품석은 결국 아내 고타소와 자식을 죽인 후,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한다. 병력도 대거 증발해 버리고, 총지휘관 마저 자결해 공백이 생긴 상황에서 죽죽은 홀로 병사들을 수습해 맞서 싸우기를 결정한다.
열려있던 성문을 굳게 닫고 싸울 채비를 하자 사지 용석#s-2(龍石)이 "이미 불리한 상황이니, 차라리 항복을 해 목숨을 챙겨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죽은 다음과 같은 위엄을 내보이며 단칼에 거절했다.
《삼국사기》 제47권 열전 제7 죽죽}}}“그대의 말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차가운 날씨에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다. 어찌 죽음이 두려워 살아 항복하겠는가?'''”[5]
君言當矣 而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歲寒不凋 可折而不可屈 豈可畏死而生降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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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필사적으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죽죽과 용석 둘다 전사하고 대야성은 결국 함락당하게 된다. 비록 죽죽은 죽었으나 아버지의 뜻을, 이름의 의미를, 자신의 신념을 지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4. 전투 이후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 의자왕}}}8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성주인 품석(品釋)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도에 보냈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와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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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게 대야성이 넘어간 후, 김품석의 목은 베어져 의자왕에게 바쳐지고, 남녀 1천명을 사로잡아 백제에 편입시켰으며, 의자왕은 이 승리에 무척 기뻐함과 동시에 윤충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말과 곡식을 하사했다.
《삼국사기》 제5권 신라본기 제5 선덕여왕}}}(642년 11월) 대야성이 패배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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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정신나간 사람처럼 기둥에 선 채로 있었으며 앞에 뭔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딸을 잃었다는 충격이 물론 가장 컸겠지만 이 일은 정치적으로도 김춘추에게 큰 타격이었는데, 대야성이 함락된 가장 큰 책임이 김품석에게 있었으므로 이는 장인인 김춘추에게도 책임이 돌아갈 일이었다. 때문에 김춘추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 이후의 당나라로 군사 외교를 위해 간 것.
김품석의 시신은 나중에 김유신이 붙잡은 8명의 백제 장수와 교환해서 수습했다. 백제에 투항한 검일과 모척은 훗날 백제가 멸망하고 사비성이 함락될 때 붙잡혀 처형당했고 문무왕은 붙잡은 백제 왕자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너의 아비가 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였더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말하고 대야성의 원수를 갚았음을 천명했다. 정작 최대의 원수 격인 윤충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만약 윤충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했거나 백제 멸망 이후 신라가 윤충을 잡아다 죽였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기록이 있을텐데 그 기록이 없다.
죽죽은 그 공을 인정받아 6두품인 급벌찬으로 추증되었으며 그의 가족들을 경주로 불러들여 골품 신분을 주었다.[6]
5. 의미
한편 김춘추와 법민의 원한을 배제해도, 이 대야성의 함락은 당시 신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대야성은 백제에 대한 신라 방어선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고, 이곳이 함락되었다는 것은 신라의 서쪽 국경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 때 백제군은 대야성을 포함해서 40여개의 성을 함락하였고, 신라는 옛 가야 지역인 낙동강 서안 지역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서 서해의 당항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만약 신라가 당항성을 빼앗기면 당나라와의 교통로가 끊어지고, 한강 유역도 위태롭게 되었다. 거기다 대야성은 백제가 경주시와 대구광역시로 진출할수 있는 요지중의 요지였기 때문에 이곳이 점령 되었다는 것은 경주시 코앞까지 백제군이 들이 닥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8]대야성을 잃는 다는 것은 단지 성 하나를 빼앗기는 것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야성은 신라가 지난 100여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서 확보한 낙동강 서부지역, 그러니까 옛 가야지역을 지키는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대야성을 잃는다면 낙동강 서부지역 전체를 잃어버릴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EBS 다큐프라임 -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1부-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즉, 이 전투는 단순한 성 하나를 뺏긴 것이 아니라 신라는 국가적 위기에 처해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춘추가 발빠르게 외교길에 나선것도 개인적인 원한 및 정치적인 타격뿐만이 아니라 이 난국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는 신라-당의 동맹과 삼국통일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삼국통일전쟁의 시발점으로 이 대야성 전투를 꼽는 이들도 있다.''' 한달반 후 고구려에선 연개소문의 정변이 일어나 당나라의 본격적인 한반도 침탈 야욕이 구체화된다.
이후 백제의 신라 수도 경주 방향 공격을 방어하는 국방상 거점은 대야성에서 동쪽 압독주(지금의 경산시)로 이동한다. 이후 백제가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압독주에는 김유신, 김인문 등 신라의 거물들이 대대로 부임하면서 성을 쌓고 요새화하게 된다.660년 신라가 백제의 항복을 받은 다음에 법민이 고타소의 죽음을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대야성 전투의 패배가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정벌할 계획을 세운 계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컨텐츠진흥원 - 대야성 전투
6. 기타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의 황산벌 지역에서 던전 중 하나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