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유키코
1. 개요
1980년대에 이름을 알렸던 일본의 아이돌 중 한 명이자 최후의 정통파 아이돌.[1] 만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2][3] 활동 시기는 2년 남짓으로, 현재 살아있다면 57세에 접어든,[4] 생존해있던 기간보다 사후의 시간이 훨씬 더 오래 지난 아이돌임에도 아직까지 충성심 높은 당시의 팬들과 사후에 인터넷 매체 등으로 새롭게 알게 된 팬 세대가 존재할 만큼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언제까지나 곁에 있어줘, 멋진 나라에서 온 프린세스'''
소속사는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선뮤직 프로덕션으로 80년대 대표적인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직속 후배이자 사카이 노리코의 직속 선배였다. 깨끗하고 청순한 모범생 이미지로 활동하며 크게 성공했다. 사망으로 끝난 활동 기간이 총 2년 정도이고, 수많은 소녀 아이돌 스타들이 활동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데뷔 초부터 큰 인기를 모은 그녀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참고로 1967년생들 중에는 일본 연예계 상 나름 족적을 남긴 대스타들이 여럿 있는데, 오카다 유키코는 그들보다 데뷔도 빨랐으나, 여전히 아리따운 소녀일 시기에[5] 세상을 떠나면서 그 끝도 더 빨랐다. 대부분의 동갑내기들이 현재는 나이가 들어 대선배가 되었음에도[6] 그녀는 영원한 10대 소녀로 대중들에게 각인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2. 데뷔 이전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출생이나 자라난 곳과 고등학교 때까지 생활한 곳은 일본의 3대 신사 중 하나라 불리는 아츠타 신궁이 있는 나고야시 아츠타구이다. 제왕절개에 이른 난산으로 태어나 태어난 직후엔 47cm, 2700g의 미숙아였다. 유소년기에는 언어장애까지는 아니었으나 '사(さ)행'을 발음하지 못해 '선생님(센세)'를 "텐테"라고밖에 발음하지 못했다.[7]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기 전에는 독서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업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았던 평범한 소녀였다. 초등학생 때는 그림 그리는 직업을 동경하여 수채화, 중학생 때부터는 유화와 일본화를 배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평소 동경하던 여성 아이돌 카와이 나오코의 초상화를 그려 본인에게 직접 보내려고 하였다.(이는 데뷔 후에 방송에서 공개되었다.) 한편 연예계 또한 동경하던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연극부에 가입, 학예회에서 옛날 이야기 모모타로의 오토히메역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극은 교장까지 보러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을 계기로 중학생이 되어 유수한 아이돌을 배출한 '호리프로 탈렌트 캐러반' 등의 오디션에 응모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인 1981년 니콘에서 주최한 '프레쉬 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준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8]
그러던 중 1982년 8월, 가수가 되기 위해 니혼 TV의 예능 신인 발굴 프로그램 '''스타 탄생[10] '''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대회에 나갈 생각이라면 학생기록부를 써주지 않겠다."'''라고 학교 선생님에게 반대 당했으나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나고야 지역 예선 대회에 나가 결승 티켓을 손에 넣는다. 그러나 선생님 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 또한 결사반대하여 12월에 열린 결승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식사도 거르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자 보다 못한 가족들이 3가지 조건을 걸고 이 조건을 전부 해내면 출전을 허락하기로 한다.
그 조건이란,
'''1. 교내 테스트로 학년 1등급을 딸 것'''
'''2. 중부지역 통일모의고사에서 전교 5등 안에 들 것'''
'''3. 나고야 시립 코요고등학교에 합격할 것'''(유키코의 고향에서 높은 학군의 학교였다. 그러나 한 학기만 다니고 연예 활동을 위해 도쿄로 상경해 호리코시 고교로 전학했다.)
상기한 세 가지 모두 대단한 조건이지만 특히 두 번째는…어떤 의미로 '''엄친딸'''이었다. 부모님으로서는 일부러 무리한 조건을 걸면 딸이 하다가 지쳐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 했지만 유키코는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새벽 2~3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에 전념하여 놀랍게도 '''세 가지 조건을 전부 해내고''', 이듬해 1983년 결승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합격. 저명한 여러 개의 소속사의 오퍼를 받았으나 선뮤직 프로덕션의 후쿠다 전무의 눈에 띄어 부모님에게 각고의 설득을 한 끝에 계약을 맺고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 때 결승전인 '스타 탄생'에서 부른 노래가 나카모리 아키나의 슬로우 모션.
참고로 이 영상에서 함께 인터뷰하는 여성들은 모두 아이돌 데뷔가 결정된 사람들이지만 유키코를 제외하면 모두 묻혔다.(...)
3. 데뷔 이후
'''오카다 유키코'''라는 예명은, 고향인 나고야의 저명한 영능력자이자 성명판단가(성명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일)에게 의뢰한 '오카다 하루코(岡田晴子), 오카다 카요코(岡田佳代子), 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라는 이름이 후보에 올랐으나, '하루코'는 선뮤직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와 한자가 비슷하고 '카요코'는 성격적으로 약한 이름이라 격한 연예계 생활에 버틸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탈락하여, '''희망을 가지다('''希'''望を'''有'''する)'''라는 의미로 현재의 예명이 결정되었다. 연예계에서의 목표는 '마츠다 세이코와 야마구치 모모에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는 것'이었다.
레이블인 포니 캐년의 프로듀서는 오카다 유키코의 이미지를 '''6대학 야구(도쿄를 소재지로 한 유서깊은 고교 야구 리그)를 보러 다니는 야마노테(도쿄 15구의 명칭)의 아가씨'''로 정하고 아이돌 활동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아이돌로써의 캐치프레이즈는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줘(いつまでも、一緒にいてね)''', '''멋진 나라에서 찾아 온 리틀 프린세스(ステキの国からやって来たリトル・プリンセス)'''였다.
1984년 일본을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타케우치 마리야가 작곡한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로 데뷔, 그 해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노래와 연기 모두 좋은 반응을 얻으며 활동했다. 데뷔하고 나서는 줄곧 사무소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며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 '''제2의 마츠다 세이코'''라고 칭해져 왔으나 본인은 '''"역시 자신은 자신일 뿐이니까, 마츠다 세이코를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였다.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오카다 유키코'라고 자신을 들기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프로듀서 등에게 좌지우지되는 일이 많은 연예계에서 확고한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늘 근면성실한 타입인데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고된 연예인 생활 동안, 또래의 아이돌에 비해 자신을 굉장히 몰아붙이면서 일을 했다고 한다.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어서 다이어트의 긴장을 늦출 새가 조금도 없었고, 시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콘텍트 렌즈의 부작용을 염려하여 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12] 게다가 빠듯한 스케줄의 연속으로 하루에 3~4시간 정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을 무렵, '''"요즘은 하루에 20시간 정도는 일하고 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고 1985년 12월에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가운데가 유키코 본인이며 그녀가 속한 반에는 미나미노 요코, 혼다 미나코[13] , 나가야마 요코[14] , 이시노 요코 등 이미 아이돌로 데뷔한 학우들이 많았다.[15]
데뷔 2년 째가 되는 1986년의 그녀는 3월 경 막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주연으로 발탁된 TBS 테레비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가 성공적으로 종방, 직전 발매한 싱글 '입술 Network(くちびる Network)'[16] 가 오리콘 첫 1위를 획득했으며, 사건 하루 전에는 사진집인 '비너스 탄생'이 막 발매되는 등, 가파르게 오르는 인기에 박차를 가하던 참이었다.
4월에 접어들어서 5일에는 전국 콘서트가 시작되었고, 10일에는 TV아사히의 '가출소녀(家出少女)'라는 드라마 촬영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야말로 커다란 인기를 얻으며 톱 아이돌로 향하는 계단을 착실히 밟고 있었던 촉망받는 아이돌이었다. 그녀는 일본의 톱스타가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또한, 당시 스타 아이돌이였던 마츠다 세이코와 나란히 서는 것도 이제 시간 문제라고도 하였다. 그렇게 유키코의 최전성기가 시작되려던 바로 그 순간...
4. 사망
4.1. 미디어에서의 취급
그녀의 사후는 여러모로 대우가 안 좋았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잡지에 싣거나 아스팔트에 뇌수와 피가 흥건한 광경을 화면에 그대로 내보내는 등의 미디어의 보도 태도[17] 가 매우 지탄을 받았다. 기자 뿐만 아니라 흩어진 뇌수를 담아가는 엽기적인 행인들도 있었고 그중 일부는 가져간 살점을 먹었다는 흉흉한 소문도.
오카다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몇 년 후에 죽었다느니, 평소 유키코를 귀여워하던 선배인 나카모리 아키나의 심야 라이브 영상에 그녀의 유령이 찍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진실 혹은 거짓''''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방영(2002년 12월 1일)하였으며 여기서는 '진실'로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다. 사진기자는 죽지 않았으며, 유령의 경우 실제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뒤에 앉아있던 다른 출연가수[18] 가 어둡게 비춰져 유령처럼 보인 것 뿐이다. '''한마디로 저 소문을 유키코가 들었다간 저승에서 펄펄 뛸 소리라는 것'''.
사망 후에는 그녀가 맡고 있거나 예정 중이었던 모든 스케줄이 중지되었다. 사건의 악영향을 우려해 사망 전 발매한 사진집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유키코가 집필하여 실릴 예정이었던 연재 소설도 게재가 중지되었다. 4월 12일 고향인 나고야에서 열린 전국 콘서트는 소속사 선배이자 동세대 아이돌 하야미 유가 미국 스케줄을 캔슬하고 대역을 맡았고 시즈오카에서는 소속사의 최고 선배인 모리타 켄사쿠가 아이돌인 이토 츠카사와 함께 대역으로 진행되었다. 오사카의 콘서트는 중지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사망 후에도 인기의 바로미터로 불리웠던 브로마이드 포스터의 판매는 계속 되었으며 한동안 판매 인기 순위에서도 5위 이하로 떨어진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의 존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방송계에서 '''터부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추억의 80년대 아이돌을 자주 다루는 일본 방송계에서 유키코의 얘기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건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며, 상기한 베르테르 효과로 인한 영향 때문에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것이 이유인 듯 하다. 하지만 근년에 들어, 사건 현장에서 매년 이루어지고 있는 추모 행사를 취재하거나 과거 함께 활동했던 왕년의 아이돌들과 함께 추억을 회상하는 방송도 나오는 등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녀를 재조명하는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4.2. 사후의 이야기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 그녀의 어머니는 유키코의 일기와 메모, 그림 및 사진 등을 엮어서 '''오카다 유키코 - 사랑을 주세요(岡田有希子 愛をください)'''라는 책을 출간하였다.[19]
사망 후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유키코는 연예계를 꿈꿨던 중학교 2학년 시절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유키코가 니콘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합격한 것과 학교 성적이 좋아 선생님들께 예쁨을 받았던 걸 주변 학생들이 질투하여 고민하고 있었을 당시에 일어난 것으로 어느 날 집에 혼자 있을 때 고기 만두같은 것을 데워 먹으려고 가스에 올려놓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 나중에 가스 냄새를 알아채고서야 껐다는 유키코 본인의 증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한 후 유키코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으면 자살이 아니고 그냥 죽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죽지 못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유키코가 그 때부터 죽음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게 된 계기라고 여긴 어머니는 '''혹시 자살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어림짐작했다고 밝혔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하나 더 얘기하면 유키코의 아버지는 그녀 사후 주식에 투자했다 잘못되어서 그녀의 유품까지 모두 버려야 했고, 화병으로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생전 그녀의 연고지였던 아츠타 시에는 그녀의 언니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생전에 작업을 같이했던 작사가 강진화, 작곡가 타케우치 마리야 같은 경우는 이것이 거짓일 것이라고 얘기하였으나, 몇 년 전에 다시 이야기 한 바에 따르면 기억이 오래돼서 사실여부를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어머니가 유키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 5년 후인 1991년 병으로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사망 이후에도 줄곧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 동세대 아이돌이자 절친한 동창생이었던 미나미노 요코는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았고 노화할 일도 없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영원한 18세이기 때문이다."'''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데뷔 곡부터 11곡 연속으로 유키코의 작곡을 담당한 타케우치 마리야는 '''"싱글 판매 호조에 한정하면 훨씬 더 잘 나갔던 사람은 몇 명이나 있다. 그러나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여겨졌을 데뷔 3년 째에 사라져버린 가수는 전무후무하다.[20] 팬에게 꿈을 안겨주고 순수하게 아이돌을 응원하는 기쁨도 주었지만 동시에 아이돌이 아이돌로써 존재하는 고난과 고통도 던져주었다. 없어지고나서 더욱 더 존재가 커진 존재다."'''라고 평하였다.
타케우치 마리야는 유키코를 기리는 의미로 2019년 발매한 40주년 기념 앨범의 발매일을 유키코의 생일 전날로 정하고, 본인이 써주었던 데뷔곡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를 셀프 커버하였다. 동년 3월에 방송한 NHK의 특집 방송에서 타케우치 마리야는, '''"몇 번이나 그녀의 곡을 불러보려 했지만 생각이 너무나 깊어져 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유키코의 멜로디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며 마음을 밝혔다.
데뷔 동기이자 같은 시기 아이돌로 활동했던 타나카 쿠미는 생전 유키코와 특히 사이가 좋았었는데, 그녀가 2012년부터 수년 간 방송했던 후쿠오카의 로컬 라디오 방송에서는 매회 반드시 유키코의 곡을 틀었다. 그 계기는 유키코의 27주기였던 2012년 4월 8일, 추모 현장인 요츠야의 추모 이벤트에 참석해 그곳에서 100명이 넘는 팬들이 유키코를 그리워하며 묵념하는 것을 보며 '''"유키코는 팬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고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방송은 전 세계의 웹에서도 들을 수 있어, 해외에 거주하는 열성적인 팬들에게도 유키코에 대한 사연이 날아오기도 했다고.
2016년 12월 2일에 오카다 유키코 특집 방송이 나오기도 했다. 영상 링크 자살 당시 보도된 방송들과 호리코시 동창생들이 유키코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 등이 자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이 방송에서 소속사 선뮤직에 보관되어있던 유키코의 자료를 훔쳐간 '리처드'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외국인이 나온다. 이 외국인은 유키코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녀의 열광적인 팬이었고, 그녀의 사후 반 년 뒤 직접 일본으로 날아와 당시 다니던 죠치 대학교의 학부생이자 유키코와 같은 소속사 아이돌이었던 하야미 유와 친해져 1989년 선뮤직에 입사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마츠다 세이코의 미국 진출에 관련해서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나 1991년 우연히 유키코의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던 다른 직원들이 '''"쓸 일 없으니 창고에 넣어두라."'''는 대화를 나누는 걸 듣고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회사가 보관한 유키코의 굿즈를 훔쳐 달아남과 함께 퇴사했다. 30년 만에 공개된 굿즈는 총 194점이며, 데뷔 초기의 생사진과 브로마이드, 직접 그린 의상 스케치, 광고 필름과 레코드의 오픈릴, 육성이 담긴 미공개 영상 등이었고 모두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2016년 4월부터 시직한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인 토카이 라디오에서 생전 유키코가 진행을 맡았던 '도키도키 라디오(ドキドキラジオ)'라는 방송명을 본따 'ドットーレ山口의 도키도키 라디오 84(ドットーレ山口のドキドキラジオ'84)'라는 트리뷰트 방송이 시작되었고, 이 방송을 계기로 생전 유키코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도쿄의 포니캐년 사내와 나고야의 토카이 라디오 회장에서 '오카다 유키코 팬미팅'을 개최하여 수많은 팬들이 응모하여 참석했다. 이 이벤트는 반응이 매우 좋았는지 2017년과 2018년, 2019년에도 열린다. 해당 기획은 유키코의 고향인 나고야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전부터 그녀의 팬이었던 의사이자 진행자 야마구치 사토루(47)가 시작한 것으로, 나고야에서 유키코의 50주년 생일인 8월에 열었던 이벤트가 대반향을 일으켜 유키코의 생전 첫 팬미팅 날짜에 근 30년 만에 재차 팬미팅이 열렸다. 이벤트는 당시의 굿즈와 포스터, 미발표 사진 감상과 관계자들의 토크쇼와 가라오케 대회 등으로 차려졌다.
기일인 4월 8일 정오 12시에는 매년마다 신주쿠의 요츠야 구 선뮤직 사무소 앞에서 수많은 팬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이 추모 행사에는 이 행사를 위해 멀리 외국에서 온 오카다 유키코의 팬들도 상당수라고 한다. 당시 중고등학생이나 20대였을 팬들은 4-50대 중장년이나 60대 초반(오카다 유키코가 활동할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경우)이 되었고 당시 삼촌팬이었던 이들은 노인이 되었는데(일부는 천수를 누리고 병이나 노환으로 사망하기도 함) 사진 속의 유키코는 10대 후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참 짠하다. 참고로 이 행사는 유키코의 33주기인 2019년을 끝으로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소속사 선뮤직 프로덕션의 후배 아이돌 산뮤(さんみゅ~)가 데뷔 싱글로 오카다 유키코의 8집 싱글 '입술 Network'를 리메이크하여 발매했다. 영상
유키코가 자살한 날이 사와지리 에리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해서, 한때 에리카는 '''오카다 유키코의 환생'''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그러나 에리카가 마약 혐의로 체포되면서 고인드립 취급될지도 모른다. 사실 그전에도 팬들이 여기에 대해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사실, 포니캐년에서 유키코의 라이브 영상이 담긴 DVD 박스를 발매하는데 그녀의 남은 가족(들)이 이를 반대해 무산됐다고 한다.[21]
어떤 사람들은 만약 그렇게 특종에 미쳐있던 기자들이 조금이라도 그녀의 극단적인 행동을 말리고 위로해줬었으면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매스 미디어로 인해 많은 팬들과 국민들이 충격을 받고, 미디어는 충격적인 시체 사진은 모자이크(블러) 처리를 하게 된다.
좀비 랜드 사가의 콘노 준코가 그녀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추정되고 있다. 생전에는 현실의 오카다 유키코가 살았던 시대의 아이돌이었다는 점, 투신자살을 했는지 여객기 추락사고를 당했는지의 차이가 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한 게 비슷하다는 점, 사망 당시의 나이·키·좋아하는 색깔 등의 프로필이 오카다 유키코와 같다는 점, 그리고 콘노 준코의 헤어스타일이 데뷔 초의 오카다 유키코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오카다 유키코가 모티브인 캐릭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5. 에피소드
- 1984년 발매한 데뷔곡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의 음악 방송 더 베스트 텐에서의 첫 무대에서 동기인 키쿠치 모모코와 함께 출연했는데, 소개하는 장면에서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이름을 '오카다 우키코'라고 부르며 곡명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잘못 설명하였다.
- 생전 팬이라고 밝힌 연예인은 같은 나고야 출신 연예인 타치 히로시(舘ひろし)였는데, 드라마 '서부경찰'을 보고 관심이 생겼고 음악방송에서 실제로 만나고는 바로 팬이 되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이때문에 사인이 타치 히로시의 아이를 가졌기때문이라는 루머가 생겼다.[22]
- 데뷔를 위해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한 공부법으로 '교제와 문제집을 통째로 외우는 방법'을 소개했다. "카메라맨이 셔터를 누르듯 정신을 통일하여 1페이지 1페이지 진지하게 머릿속에 넣어가면 떠올릴 때 신기하게도 하나의 사진같이 머리에 되살아난다."라며 공부 방법을 얘기하였다. 또한 열심히 공부를 하고있으면 어머니가 매일같이 빠짐없이 야식을 챙겨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야식을 먹여 돼지로 만들면 오디션 결승에 떨어질 것이라 생각한 어머니의 계략(?)이었다고 한다.
-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였음에도 체형을 신경 쓰며 "좀 더 마르고 싶다. 가슴은 너무 발육해버렸으니까 좀 더 작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수영복 화보 촬영 때는 배가 나오는 걸 싫어해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않았다.
- 평소 시력이 양쪽 0.1 이하일 정도로 매우 나빴기 때문에 촬영 이외의 시간엔 테가 커다란 안경을 착용했다. 동료였던 코이즈미 쿄코는 "일 이외에는 언제나 우유병 밑뚜껑 같은 두터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렌즈를 통해 보이는 작아진 눈이 왠지 너무 귀여웠다", 친구였던 다나카 쿠미는 "안경은 마치 우유병 밑뚜껑 같은 모양. 안경을 쓸 땐 귀엽다고 할지 웃기다고 할지..."라고 회상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촬영 때는 콘텍트렌즈나 안경을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 소속사 선뮤직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 자택에서 함께 합숙했던 선후배와 동료들은 유키코에 대해 "연예 활동도 물론이며 공부 또한 소홀히 하지 않고 시험 기간엔 거의 자지 않았다. 일하고 늦게 귀가한 날에도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과 잡다한 일을 하고나서 어느샌가 바닥 위에 자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연애에 대해선 남자와 사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동경하던 사람은 있었지만 사귀지는 않았다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한 타치 히로시는 정말로 좋아해서 TV에 나올 때마다 들떠 있거나 함께 대담한 것을 매우 기쁘게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유키코가 사망 전까지 고민하던 일들은 아무도 몰랐었다고 한다.
- 90년대 J-POP을 평정했던 코무로 테츠야가 작곡가로써 처음 만들어 유키코에게 주었던 곡이 1984년 발매한 '시월의 인어(十月の人魚)' 수록곡인 'Sweet Planet', '水色プリンセス'이다.
- 교우관계는 1984년 데뷔 동기였던 키쿠치 모모코, 오기노메 요코, 다나카 쿠미를 포함해 호리코시 고등학교의 동급생이었던 미나미노 요코, 이시노 요코, 나가야마 요코 등의 아이돌로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과 사이가 좋았다.#
- 생존해 있다면 현재 57세. 동갑내기로는 1990년대 초반 활약했던 일본의 축구선수 미우라 카즈요시, 나카야마 마사시 선수, 90년대 중후반을 풍미했고 현재까지도 숱한 명곡들을 내는 밴드 Spitz의 멤버들, 90년대 초반 청춘스타 배우 오다 유지, 전설의 성우 이시다 아키라와 하야시바라 메구미, 그리고 아마미 유키 등이 그녀와 동갑이다. 유키코의 남아있는 자료들이 다 10대 시절의 것들 뿐이라 "유키코가 진짜 이 사람들이랑 동갑이라고?"라며 놀라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아무래도 여기 나열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오카다 유키코의 사후에 데뷔했음에도[23] 현재 각 업계의 대선배이자 어른들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녀는 워낙 빨리 세상을 뜬 탓에 아직까지도 아이돌 소녀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24] 다르게 생각하면, 유키코의 생전 모습은 위의 분들도 한 때는 젊고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도 있다.
- 일기를 최소 6개월에 한 번씩은 썼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일기 쓰는 걸 좋아했으며, 사후 그녀의 일기가 공개되었다. 최초 인터뷰에 응한 것, 오디션 프로그램에 합격통보가 온 것 등의 여러가지의 그녀의 생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6. 음악
6.1. 발매된 싱글 목록
마지막 싱글인 '꽃의 이미지(花のイマージュ)'는 사망 직전 녹음한 싱글이며 발매일인 5월 14일 컴백할 예정이었지만 그녀의 자살로 발매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비운의 곡이다. 이 때문에 팬들에겐 환상의 곡으로 불려져있었다. 이 곡은 1999년 3월 17일 발매된 오카다 유키코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13년 만에 세상에 공개되었다.[26]
6.2. 오리지널 음반 목록
6.3. 베스트 앨범
오카다 유키코/베스트 앨범 문서 참조.
7. 관련 링크(팬 사이트)
'''혐오스러운 사진(자살 직후라든가...) 관련한 사이트는 올리지 말 것.[27] '''
그 밖에도 구글[28] 에 오카다 유키코 생전 또는 오카다 유키코 팬클럽이라 검색하면 생전의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연관 이미지로 자살 직후 현장 사진이 나올 수도 있으니 주의.
- 유키코의 유년시절
- Inogashira's Diary - 팬 블로그.
- http://kanon822.sakura.ne.jp/yukiko01.htm - 팬 사이트
- 실록 만화 오카다 유키코
- http://cafe.naver.com/koreaokadayukiko - 국내 팬카페[29]
- BLASTER822R - 유키코의 뮤직비디오나 노래들을 볼 수 있는 유튜브 계정.
8. 관련 문서
[1] 그래서 만약 오카다 유키코가 실제와 달리 20대 이상의 연령대까지 살았다면 일본 정통파 아이돌의 전성기는 더 오랫동안 이어질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해당 대체역사에서 오카다 유키코는 모종의 이유로 빨리 은퇴하지 않는 한 실제보다 훨씬 많은 명곡들을 남겼을 것이며, 그에 따라 오카다 유키코의 영향을 받은 후배 아이돌들이 많이 생겨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2] 그러나 동시기에 더 안습한 아이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엔도 야스코(遠藤康子). 1968년 10월 21일생. 그녀는 스케반 데카 출연으로 인지도를 쌓으며 음반 데뷔를 앞두고 있었으나 소속사에서 남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강요, 계속되는 마찰로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0일 뒤 대형 아이돌 오카다 유키코의 자살로 그녀의 죽음은 완벽히 묻혔다.[3] 우리나라 가요계로 비유하자면 성별은 다르지만 서지원과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듯. 실제로 두 가수는 2년의 짧은 시간을 활동했지만 큰 인기를 얻었고 꽃다운 스무살 남짓한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둘 다 본명이 아닌 예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차이점은 서지원의 경우는 자살의 원인이 명백히 밝혀졌던 것이고(소속사 문제와 2집 활동에 대한 압박감이 원인이었다.) 이쪽은 현재까지도 미궁인 상태이다.[4] 미국의 전설적인 밴드 너바나의 보컬이자 리더 커트 코베인과 동갑이다. 두 가수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비슷하다.[5] 그러니까 후에 나올 스타들이 발을 막 들이거나 들이기도 전에 말이다.[6] 물론 일본의 뒷세대 아이돌들에게는 오카다 유키코 또한 대선배격 존재다. 다만 오래 전에 고인이 된 탓에 그 후배 아이돌들과 친분을 쌓지도, 그들에게 선배 아이돌로서 가르침을 전하지도 못했을 뿐이다.[7] 어린 아이들이 가장 발음하기 힘들어하는 발음이 /s/ 계열 발음이다. 재밌게도 이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반대로 /m/ 같은 입술소리는 가장 쉽게 발음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언어에서 '엄마'에 해당하는 단어에는 /m/이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간다.[8] 이 상은 82년 잡지에 게재되어 특대 포스터가 제작되어 각 지에 붙여질 정도였고 부상으로 괌 여행까지 주어진 상이었다.[9] 이 때는 '사토 카요'라는 본명을 사용했다.[10] 모리 마사코를 시작으로, 사쿠라다 준코와 야마구치 모모에와 이와사키 히로미와 핑크레이디와 코이즈미 쿄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도 이 프로그램 출신이다. 유키코가 이 프로그램 최후의 우승자(스타 탄생 후반기의 합격자일 뿐 마지막 합격자는 아니다.)였고, 이후 스타 탄생은 종영된다.[11] 동기인 키쿠치 모모코와 함께 출연했는데, 소개하는 장면에서 사회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이름을 '오카다 우키코'라고 부르며 곡명도 '퍼스트 레이디'라고 잘못 설명한다.[12] 대중에 모습을 비치지 않을 때에는 높은 도수의 안경을 착용하고 생활하였다고 한다.[13] 1967~2005. 맨 오른쪽 위의 사진의 인물이다. 2004년에 이름 뒤에 고의로 온점을 붙였다.[14] 아이돌 시절에는 비너스 등을 번안하여 히트를 쳤으나 대박을 내지는 못 했다. 이후 1993년에 엔카 가수로 전향하면서 다수의 히트를 내면서 NHK 홍백가합전에도 연속 출전하는 중견 여가수가 되었다.[15] 심지어 직속 선배인 마츠다 세이코와 데뷔 동기인 오기노메 요코와 직속 후배인 사카이 노리코도 유키코와 같은 고교 동문 출신이다.[16]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해주고 직속 선배이자 톱 아이돌인 마츠다 세이코가 작사해준 노래이다.[17] 전술했지만 특종에 매달려 시신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기자의 자질은 둘째 치고 고인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추태를 보여줬다. 시신의 수습이나 병원으로의 연락도 주변의 기자나 행인이 아니라 매니저가 했을 지경.[18]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가요 프로그램인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는 원래 출연자가 무대 뒤쪽에 나란히 앉아있다.[19] 이 도서는 현재 절판되었으나 일본 아마존닷컴 등지에서는 구할 수 있다. 오카다 유키코에게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사보는 것도 괜찮을 듯.[20] 실제로 오카다 유키코는 첫 싱글 1위를 하여 탑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려던 참에 세상을 떠나버렸으며, 따라서 인지도에 비해 생전의 성적이 무언가 저조해 보인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살아 있었다면 더욱 전설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수들은 여럿 있으나, 물 들어올 때 노도 저어보기 전에 떠난 경우는 연예계에서 극히 보기 드문 사례.[21] 5월 발매될 예정이었던 9집 싱글 ‘꽃의 이미지’도 처음에는 반대되었다고 한다. 그 후 13년 뒤인 1999년에 그녀의 메모리얼 박스에 수록되어 발매되었다. 이것도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 현재 팬들은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다.[22] 아이러니하게도 타치 히로시는 1983년, 즉 유키코의 데뷔 싱글이 나오기 1년 전에 이사하라 군단의 멤버로 들어갔다.[23] 심지어 앨범 세 장 내고 27살 이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커트 코베인조차 그녀의 사후에 데뷔했다.[24] 한 시대를 이미 휩쓸고 지나간 모리타카 치사토, 쿠도 시즈카, 나카야마 미호가 50을 이미 넘겼지만 전부 유키코보다 2, 3살 연하인걸 생각하면 더욱 세월무상이다. 그리고 안 믿기겠지만 배우 우치노 세이요, 가수 마키하라 노리유키가 유키코보다 각각 1, 2살 연하다...[25] 1986년에 출연했다. 물론 출연의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애초에 프라이데이와 포커스에 연예인이 좋은 일로 출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봐도 된다(...).[26] 곡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키코가 생전에 발표한 싱글 중에서 '''최고 수작이라는 평이 대부분이다.''' 만일 자살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사후에 예정된 일정대로 발매되었다면 그녀의 곡 중에 두 번째로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한 노래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27]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서는 이 문서에서 자살 직후 사진을 올리고 지우는 수정전쟁이 난 적이 있었다. 착한 위키러들은 제발 올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한다. 본문의 내용만으로도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모든 연령대가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런 류의 사진을 올리는 것은 다수의 이용자들에 대한 민폐일 뿐더러 고인에 대해서도 실례다.[28] 구글의 경우 오카다 유키코만 검색하면 맨 첫 줄부터 잔혹한 사진이 표시되니 특히 주의. 한국어로는 무엇으로 검색하든 그 사진이 뜨는 판국이니 가급적 일본어로 검색하자.[29] 한국 대표 팬클럽이지만 오래전부터 대표 운영자의 성격이 정말 이상하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팬클럽의 활동성은 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