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모리

 


'''게닌 BIG 3'''
'''타모리'''
아카시야 산마
비트 다케시
[image][1]
'''예명'''
'''タモリ'''|'''타모리[2]'''
'''본명'''
'''森田一義'''|'''모리타 카즈요시'''
'''출생'''
1945년 8월 22일 (78세)
일본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 미나미 구
'''신체'''
161cm, O형
'''직업'''
게닌, 사회자, 배우
'''소속사'''
다나베 에이전시
'''데뷔년도'''
1975년
'''혼인여부'''
기혼[3]
'''현재 진행 중인 프로'''
뮤직 스테이션 (TV 아사히), 타모리 클럽 (TV 아사히), 기묘한 이야기 (후지 TV), 브라 타모리 (NHK)[4]
1. 개요
2. 학창 시절
3. 후쿠오카 시절
4. 연예계 진출
5. 사회자로
6. 기타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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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국민 MC'''이자[5], 아카시야 산마, 비트 타케시와 함께 일본 게닌 BIG 3로 일컫어지는 인물.

2. 학창 시절


1945년 8월 22일 후쿠오카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타모리가 어릴때 이혼했고 그는 조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하교 중 철조망에 눈을 부딪히는 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 한 쪽 눈을 잃고부터 요리[6]와 무선에 관심을 가지게 된 타모리는 후쿠오카 현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기 통신 대학'을 노렸지만 물리학 점수가 안돼서 낙방, 1년간 재수를 하였다. 수험생 시절, 공부를 하면서 틈틈히 한국과 중국의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이것은 훗날 타모리의 트레이드마크인 '6개 외국어 흉내'의 기초가 되었다.
1965년와세다대학 제2문학부[7] 서양 철학 전공[8]에 입학한 타모리는 모던 재즈 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 트럼펫을 맡았지만 실력이 안되어 동아리 매니저와 공연 사회자를 겸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회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TBS의 라디오 프로그램 '대학생들의 밴드 대결'이라는 프로에서 학생층 사회자로 나와 프로그램 사회자였던 오오하시 쿄젠(1934~2016)[9]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곧 등록금을 미납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제적당했다. 2학년 5월 골든위크 때 친구 2명과 여행을 계획했는데, 돈이 부족하자 부모님이 학비로 쓰라고 송금한 돈을 여행용으로 유용했다고(...).[10] 하지만 제적당한 후에도 동아리 매니저로 계속 일하면서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3. 후쿠오카 시절


1968년 매니저를 그만둔 타모리는 아사히 생명에서 3년 정도 보험 설계사로 근무했으며, 이때 동료였던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 1971년, 타모리는 부인과 함께 아사히 생명에서 퇴사하고 고향 하카타로 돌아와서 재즈에 조예가 깊은 것과 평소 특기였던 요리 실력을 살려서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1972년, 타모리의 인지도를 높인 계기가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 날, 타모리는 대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고 지금은 재즈 연주자 와타나베 사다오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회사의 직원인 친구와 그가 묵고 있던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만취한 타모리는 막차 시간대가 가까워가자 친구와 헤어지고 호텔 복도를 거닐다가 열려있는 방 안에서 와타나베의 콘서트에 동행한 재즈 연주자 그룹인 야마시타 요스케 트리오(야마시타 요스케, 나카무라 세이치, 모리야마 타케오)가 가부키 춤을 흉내내거나 콩트 등을 하며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을 목격, 그곳에 난입하여 나카무라 세이치 주변에 있던 휴지통을 가면 삼아 가부키를 추기 시작했다. 곧 나카무라가 재치있게 타모리의 무례를 어설픈 한국어로 지적했고 타모리는 더 잘하는 어설픈 한국어로 이를 받아쳤다. 이윽고 타모리와 나카무라의 엉터리 외국어 대결이 시작되었다. 타모리가 표정까지 흉내내며 엉터리 아프리카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야마시타는 호흡 곤란이 될 정도로 웃었다고 한다. 첫차가 나오는 시간까지 신나게 논 타모리는 자신의 성씨인 '모리타'만 말해주고 돌아갔다.
이후 자신의 얼굴을 알아봤으니 타모리가 재즈 팬이 틀림 없다고 확신한 야마시타는 하카타의 재즈 바에서 '모리타'라는 이름의 남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어떤 재즈 바에서 '주인이 4차원인 것으로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그 카페 주인 이름에도 모리타가 들어간다.'라는 정보를 듣고 둘은 재회한다.[11] 재회 후 야마시타 트리오는 큐슈에 갈 때마다 타모리의 카페를 방문하여 같이 놀게 되고, 트리오의 소개로 타모리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해져서 급기야는 타모리가 한 달에 한번 도쿄로 상경하여 '전설의 큐슈 남자 모리타를 만나는 모임'이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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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츠키 후지오, 쿠로야나기 데츠코, 타모리
1975년 야마시타 트리오의 추천으로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가 모임에 참여하였고 소문으로만 듣던 타모리의 즉흥 개그를 직접 보고 감탄한 아카츠카는 그해 8월 말 생방송이 있었던 자신의 프로그램에 그를 출연시키기로 결정, 타모리는 <만화 대행진 아카츠카 후지오 쇼>(1975년 8월 30일 방송)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난생 처음 TV에 출연하게 된다. 운좋게도 이때의 그를 아카츠카 후지오의 절친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쿠로야나기 테츠코[12]가 보고 "저렇게 웃긴 사람이 왜 여태 개그맨으로 데뷔하지 않았지?" 하고 생각하여 타모리를 자신의 토크쇼에 게스트로 섭외, 2번째로 TV에 출연하게 된다. 해당 방송에서 타모리는 엉터리 외국어 흉내를 TV에 최초로 선보였고 일약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너무 이질적이라고 판단한 예능전문 기획사들은 타모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13] 타모리 본인도 이미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별 미련없이 하카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개그 만화의 1인자로 불리는 만화가인 아카츠카는 '자신이 한달에 2~30만엔씩 생활비를 줄테니 카페를 처분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자기 집에 머물면서 연예인 데뷔를 준비하자'며 타모리를 설득하였고 결국 타모리는 심사숙고 끝에 아카츠카의 제안에 응하여 자신의 부인과 함께 도쿄로 이주하게 된다. 아카츠카 후지오는 왜 타모리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봤냐는 질문에 타모리가 웃기기도 했지만 자신의 어머니처럼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도와야한다는 사명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아카츠카는 타모리의 매니저를 자처해서 약 9개월 동안 소속사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타나베 에이전시와 계약에 성공한다. 타나베 에이전시는 1973년 호리프로 매니저 출신의 타나베 쇼지가 호리프로 소속 연예인들 일부를 데리고 독립하여 설립한 회사로 본래 The Alfee, 나츠메 마사코 등 가수와 배우들이 중점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회사였지만 타모리를 시작으로 예능 분야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참고로 타모리는 연예계 데뷔가 확정되고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진출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4개의 계명을 스스로 만들었다고 한다.
1.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14]
2. 조직에 속하지 않는다.
3. 방송 출연시에는 항상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4. 사인을 해줄때는 사인 외에 다른 말을 적지않는다.

4. 연예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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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타모리의 이미지
타모리는 1976년 4월 도쿄 12 채널(現 TV 도쿄)의 심야 프로그램이자 영국 BBC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Monty Python's Flying Circus>의 일본어 번역판인 <하늘을 나는 몬티 파이선> 중간에 삽입된 "타모리 코너"에서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한다. 데뷔 당시 나이는 30세로 시무라 켄, 비트 타케시, 아카시야 산마보다 나이는 연상이지만 후배였다.
이후 타모리는 니혼 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금요일 10시! 소문의 채널!!(金曜10時!うわさのチャンネル!!)>에서 레귤러로 출연하는 동시에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타모리의 올 나잇 일본(タモリ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을 진행하기 시작, 특유의 개성적인 컨셉으로 점점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이 때의 타모리는 '전후 최대의 아마추어 연예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해적이 쓰는 안대를 착용한채 프로그램 중간 중간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코너에서 혼자 개그를 하는 형태로 TV에 출연하였다. 1978년 부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선글라스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구사했던 개그로는 이구아나 흉내, 그럴듯한 외국어 묘사, 엉터리 지식을 가르치는 4차원 교수[15], 타모리 신부[16] 등이 있었고 개그를 펼치는 중간에 뜬금없는 섹드립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당시 대중들에게는 심야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섹드립을 자주 구사하는 괴짜에다 비호감인 개그맨으로 취급받았으며, 타모리 본인도 이 시기 자신의 모습을 "방송가에서는 내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나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에가시라 2:50 같은 느낌이었다. 은퇴 직전의 야마구치 모모에가 내 이구아나 흉내를 보고 기겁하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17]

5. 사회자로


1981년 10월, 타모리는 TV 아사히에서 <타모리 클럽>이라는 심야 버라이어티의 사회자로 발탁된다. <타모리 클럽>은 '덕후들을 위한 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매니아들이 있기만 한다면 어떤 주제도 가리지 않고 방송으로 내보낸 프로그램으로, 이러한 전략이 먹혀 들어가서 해당 방송은 서서히 일본 전역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타모리 클럽>은 2020년 현재까지 39년째 계속 방영 중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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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모리 클럽>이 방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82년 10월 4일, 타모리는 후지 TV의 프로듀서였던 요코자와 다케시의 새로운 프로그램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森田一義アワー 笑っていいとも!)>(통칭 와랏테이이토모/이이토모)'''의 사회자로 발탁된다. <와랏테이토모>는 '''주 5일 낮 12시부터 1시까지 생방송'''으로 방영된 프로그램으로 매 요일마다 다른 코너와 다른 레귤러 멤버들이 출연했고 타모리는 프로그램의 전체 진행을 맡았다. 비록 방영 초기, 와랏테이토모의 시청률은 부진했지만, 텔레폰 쇼킹[18]이 인기를 얻자 '친구처럼 편하고 아무 부담없이 볼 수 있는 방송'이라는 모토로 그간 예능 방송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사회의 각종 유명 인사들이나 아이돌이 레귤러 멤버로 출연하여 시청자들과 함께 소통하는 코너들을 지속적으로 신설, 마침내 1989년부터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점령했고, 2014년 3월 31일 종영 될때까지 무려 '''26년동안''' 동시간대 시청률 수위방송기록을 지키며 일본을 대표하는 예능 방송으로 성장하였다.
<타모리 클럽>과 <와랏테이이토모>로 사회자로써 두각을 나타낸 타모리는 1983년 34회 홍백가합전에서 종합 사회를 맡게 되는데 NHK 아나운서 이외의 사람이 홍백의 종합 사회를 맡은 것은 타모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1985년에는 아카시야 산마와 함께 제1회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사회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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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타모리는 1987년 4월 3일 부터 TV 아사히의 신설 음악 프로그램 뮤직 스테이션(통칭 엠스테)의 2대째 사회자로, 1989년부터 방영을 시작한 기묘한 이야기에서는 중후한 이미지의 스토리텔러로 발탁되어 국민 MC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19] 1987년 7월 18일 ~ 7월 19일까지 생방송된 제 1회 FNS의 날 'FNS 슈퍼 스페셜 1억명 텔레비전 꿈의 열기'와 1989년, 「FNS 슈퍼 스페셜 1억명 텔레비전 꿈 열도 '89」의 종합 사회를 아카시야 산마와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1990년 요트 사고[20]로 잠시 활동을 중지했다가 복귀한 뒤에는 그간 사회자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개그맨으로서의 정체성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한 반동으로 <타모리의 보카부라 천국>, <정글 TV - 타모리의 법칙> 등에서 기존보다 거칠고 웃음에 초점에 맞춘 진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스펀지의 원조격인 트리비아의 샘에 평가단 위원장으로 출연하였다.

2008년 세상을 떠난 개그 만화가 아카츠카 후지오의 장례식에서 직접 조제문을 읽어 그를 추모한 바 있다. 이는 아카츠카 후지오가 그를 연예계에 데뷔시켜주고 일본의 국민 오와라이로 만드는데도 기여해주는 등 많은 인연을 쌓았던 것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아카츠카 후지오의 장례식에서 "역시 타모리 답다"라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조제문을 부탁받긴 했는데 장례식 전날 술을 진탕 마시는 바람에 귀찮아져서 제문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아카츠카 선생이시라면 이럴 때 차라리 개그를 치시겠지"'''라는 생각에 칸진쵸[21]를 흉내내 백지를 들고 나섰다고 한다. 즉, '''거의 8분에 달하는 조제문은 전부 타모리가 즉석에서 한 말.''' 결국 개그는 날려버리고 진심을 담아 고인에 대한 추모를 했는데, 즉석에서 말을 만들어 내면서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게 8분간이나 이야기를 해서 그의 말발을 대표하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마무리 지을 때의 말은 '''저도 당신의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여담으로, "칸진쵸가 개그라면 오치(이야기의 결말)는 뭔가요?"라는 질문에 '''"내 매니저 성이 토가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고로 토가시는 칸진쵸 이야기에서 요시츠네 일행을 풀어준 수비대장의 성이라고.
2014년 3월 31일자로 와랏테이이토모가 종영되었다. 참고로 와랏테이이토모 마지막회에 등장한 게스트들이 후덜덜한데, 오프닝부터 타모리와 함께 아카시야 산마가 출연, 이후 일본의 거물급 연예인들이 차례로 등장[22][23][24]하다가 무려 아베 신조까지 텔레폰쇼킹의 게스트로 등장. 방송 마지막에는 게스트로 비트 다케시가 등장하여 방송불가용어로 점철된 축사를 생방송으로 읽는 위엄을 뽐내면서 종영되었다, 이 외에도 야후 재팬에서는 이이토모의 종영을 맞아 첫 페이지의 디자인을 바꾸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방송답게 전국적인 스케일의 반응들이 이어졌다.

6. 기타 여담


  • 좌우명은 <모든일은 적당히, 의욕이 넘치지 마라>이며 좋아하는 말은 <망상>이라고 한다.
  • 타모리의 전담 개인기는 역시 외국어 흉내. 직접 들어보자.(1988년 12월 <테츠코의 방>에서)[25] 순서대로 한국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아프리카어, 중국어 순. 일본인들은 이를 좋은 한국어 '흉내'로 쳐준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수근이 엉터리 중국어로 유명한 것과도 같다. 한국어만 흉내내는 영상 여기서 북한말은 마치 비방선전 방송을 연상케한다.
1984년에 올라온 이구아나를 흉내낸 사진이 최근에 화제 되면서 이구아나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2017년 도우부츠 비스켓과의 인터뷰에서 이구아나 프렌즈라고 언급이 되었다. 타츠키가 그린 뮤직 스테이션 출연 기념 짤에서도 이구아나가 뒤에 있다.
  • 1970년대 후반, 타모리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타모리의 올 나잇 일본(タモリの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에서 웃음의 소재로서 나고야 사람들을 "허풍이 많고 구두쇠면서 말끝마다 먀먀거려서 듣기 싫다. 심지어 그 동네 사람들은 에비후라이(새우 튀김)를 에비후랴라고 하더라" 라면서 깠는데 해당 방송의 인기가 높아서 나고야 이미지가 진짜로 안좋아졌고 에뱌후랴 라는 말은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2017년 5월 브라 타모리에서 나고야 편의 방송이 결정되고 타모리가 나고야에 와서 화해를 하였다.
  • 1980년대 후반기 즈음 <와랏테이이토모>의 코너 중 하나인 "텔레폰 쇼킹"에 뮤지션인 오다 테츠로가 출연했을 때, 오다가 학창 시절에 탁구를 하던 것을 밝히자 타모리가 "탁구는 어둡다"라고 발언. 당시 탁구 인구가 줄어드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타모리의 발언 영향이 적지 않아 이듬해의 중 고등 학교 탁구부원이 급감하는 등 탁구 인구 감소에 박차를 가했다. 이후 일본 탁구 협회는 컬러 볼의 개발이나, 형형색색의 유니폼의 사용 허가, 탁구대를 녹색에서 푸른색으로 바꾸는 등 이미지 재고에 나섰다. 나중에, 타모리가 일본 탁구 협회에 1000만엔을 기부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 흡연자였으나 건강을 위해 금연 프로그램을 신청하여 1988년 새해부터 금연에 도전, 성공했다고 한다. 또한 건강을 위해 하루 일만보를 목표로 매일 산책을 한다고 한다.
  • 한참 후배인 록 밴드 블랭키 젯 시티의 팬이라 한다. 멤버들과 같이 술마시러 가는 꿈도 꿨고 재결성해줬으면 하는 밴드에 블랭키를 올렸다고.
  • 철도를 좋아하는지라 <타모리 클럽>에서 철도 관련 아이템이 매우 많이 나온다. 타모리 자신이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올때 침대열차 타고 왔다갔다 했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침대열차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보인다.
  • 일본을 대표하는 개그맨, MC다보니 이곳 저곳에서 패러디가 많이 된다. 오덕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패러디 캐릭터라면 은혼의 타모. 또한 페르소나 스토커 클럽의 타이틀은 <타모리 클럽>의 노골적인 패러디다. 인기 코너 페르소라 미미극장 또한 타모리 클럽의 코너 소라미미 아워를 베ㄲ...벤치마크한 것.
  • 타모리의 이름을 달고 슈퍼패미컴 게임 타이틀이 나온적이 있다. 제목은 '웃어도 좋다고! 타모린픽크(笑っていいとも!タモリンピック)'
  • 미국 TBS 코난쇼에서 일본 특집을 진행했을 때, 돗토리 공항에서 코난쇼 스태프가 한 일본인을 인터뷰했는데 그 일본팬이 코난쇼 진행자인 코난 오브라이언을 미국의 아카시야 산마나 타모리 같은 재밌는 MC라며 말하였다.
[1] 타모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철조망에 얼굴을 부딪혀서 오른쪽 눈을 실명했기 때문에 선글라스를 쓰고 방송에 출연한다. (요미우리 석간 1986년 11월 7일자에서) 본인 왈 실명도 실명이지만 눈이 실눈이어서 컴플렉스라고.[2] 자신의 성씨 '森田(모리타)'를 '田森(타모리)'로 뒤집은 것[3] 2살 연상의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으며 자녀는 없다.[4] 타모리가 전국을 순회하는 여행 프로그램.[5] 와랏테이토모 출연료만으로도 1회 200만엔이었고 다른 프로그램까지 합치면 1년에 통산 7억엔의 개런티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86년 ~ 2006년 까지의 추정 재산은 약 330억엔이고 2003년 이후부터 2013년까지 약 135억엔을 벌었다고 한다.[6] 타모리의 할머니가 타모리에게 "부인이 요리를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남자도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일찍이 요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덕분에 왠만한 음식은 다 만들 수 있다고 하며 요리를 하는 동안에는 온전히 요리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이 때의 기분이 좋기 때문에 동료 연예인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도 자주 열었다고 한다.[7] 주간 대학에 합격한 것은 아니었고 야간 대학이었다.[8] 훗날 타모리는 와세다 대학, 그것도 철학 전공에 진학한 이유에 대해 딱히 철학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고 단지 당대 유명 여배우인 요시나가 사유리(타모리와 동갑이다.)가 와세다 제 2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타모리는 요시나가 사유리의 열성팬이라고 한다.[9] 70~80년대에 명MC로 활약했으며 민주당 출신 전 참의원이기도 하다. 비례대표로 2001년에 당선되었다.[10] 출처는 요미우리 석간 1986년 11월 7일자.[11] 상술하다시피 이 시기 타모리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비엔나 소시지를 곁들인 커피를 메뉴판에 비엔나커피라고 적는 등 괴짜 주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12] 1933년생으로 1953년에 데뷔한 일본 최초의 TV 탤런트 중 하나. 유명한 책으로 <창가의 토토>가 있다.[13] 당시 유명 배우로 시작하여, 버라이어티의 진행자나 개그 방송의 레귤러로 활약했던 "사카이 마사아키"도 타모리의 개그 스타일이 과연 방송에서 먹힐까 의문을 가졌기 때문에 타모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나을것이다"라고 쓴소리를 했다고 한다. 후에 타모리가 엄청난 인기를 얻게되자, 그 이후로 타모리를 만날때마다 존칭으로 부른다고.[14] 다만, 1982년. 타모리는 아키츠키 후지오와 함께 <스타 탄생>의 자매 프로그램인 <개그맨 스타 탄생>의 심사위원으로 출연, 자신들은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심사위원들은 톤네루즈의 개그에 악평을 하자 톤네루즈를 그랑프리 수상자로 적극 추천하며 이들을 본격적으로 방송가에 데뷔시켰다. 훗날 톤네루즈는 <개그맨 스타 탄생>에 출연하기 전부터 타모리를 '동경'하고 있었지만 이 때부터는 타모리를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발언했다.[15] 나카스 산업대학이라는 가공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라는 설정. 원래는 라디오 프로그램 <타모리의 올 나잇 일본>에서 사용한 캐릭터였으나 큰 인기를 끌어서 TV 프로그램 <금요일 10시! 소문의 채널>에서도 해당 캐릭터로 공연하게 되었다.[16] 타모리는 학창시절에 교회를 잠깐 다닌 적이 있었다. 기독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 교회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의 말투가 재미있어서 다녔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타모리 신부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고 타모리는 훗날 이를 바탕으로 <와랏테이이토모> 신년 특집에서 '타모리 신부의 설교'란 꽁트를 연기했다.[17] 당시 타모리와 함께 양대 비호감 개그맨으로 취급받던 사람이 다름아닌 비트 다케시(투비트). 비트 다케시와 타모리는 실제로 70년대 후반에 잠시 교류를 가졌지만 다케시가 타모리의 예풍을 "술 마신 후에 하는 실없는 농담처럼 진지한 면이 결여되어 있다."며 좋아하지 않았기에 멀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두 사람이 모두 게닌 Big3로 취급받게된 후부터는 친해졌고 여러 특방에 같이 출연하였다. 어느 날은 타모리가 비트 다케시에게 "은퇴할거면 우선 나에게 말해줘 네가 은퇴해버리면 나로서도 방송에 더 이상 흥미가 없을 것 같으니까"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18] 코너에 초대받은 연예인과 타모리가 토크를 하는 코너. 게스트는 코너 막바지에 다른 연예인에게 전화를 걸고, 타모리는 전화를 받은 연예인에게 프로그램 섭외 요청을 한다. 만약 요청이 승낙될 경우 해당 연예인은 바로 다음 회 게스트가 된다.[19] 한국에서는 일본 개그프로그램이나 버라이어티가 잘 소개되지 않지만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끌어 선글라스를 쓰고 해설하는 강렬한 인상의 타모리의 인지도도 크게 높아졌다.[20] 요트는 타모리의 대표적인 취미 활동으로 실제로 타모리는 1급 소형 선박 조종 면허를 갖고 있다고 한다.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타모리 컵>이라는 요트 레이스를 개최하기도 했다.[21]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도망, 그리고 죽음' 항목 참조.[22] 특히 화재가 된 부분이 아카시야 산마의 토크중에 다운타운과 웃쨩난쨩이 난입하고, 다음으로 톤네루즈와 폭소문제, 나인티나인 등이 차례로 난입하는 장면. 이 중 나인티나인을 제외하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톱뉴스급인 사람들 뿐이고 그 중에서도 다운타운과 톤네루즈는 불화설과 함께 "절대 함께 방송하지 않는 라이벌" 취급이기에 이후로도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23] 여러 방송에서 나온 뒷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원래는 저 사람들이 각자 15분씩 맡아서 따로따로 촬영하고 서로 만나지는 않을 예정(특히 다운타운과 톤네루즈)이었는데 타모리와 산마 세대에서 자주 하던 난입 개그를 해 보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다운타운과 웃쨩난쨩이 난입(원래는 제작진 쪽에서 추진했는데 산마가 "타모리씨 방송인데 내맘대로 할 수는 없지"라며 거절했었다고 하는데 다운타운과 운난이 눈치채고 쳐들어간 거라고)하고, 이 때 마츠모토 히토시가 "이 방송 보면 SNS가 난리난다"라는 말을 하자 톤네루즈가 "그래? 기왕에 그렇게 될 거면 우리도 가자"라고 해서 폭소문제에게 말하고 바로 난입(원래 다운타운, 웃쨩난쨩 차례인 30분을 채운후에 나올 예정)을 했다고 한다. 산마는 이걸 보고 "(약간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우리세대의 개그를 잊지않고 해 준 후배들에게 고맙다"라고 언급.[24] 무엇보다,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절대 함께 공연하지 않을 사이라고 하던 톤네루즈와 다운타운은 사실 별로 소원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렌드 피날레는 축제다"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방송국에서 말리는 걸 뿌리치고 뛰쳐나갔지만, 다운타운(특히 마츠모토 히토시)과 폭소문제(중에서도 오오타)는 '''진짜로 사이가 험악했던 관계'''였던지라(실제로 다운타운과 톤네루즈는 간간히나마 함께 나온적이 있지만 다운타운과 폭소문제는 함께 나온적이 없다) 후배들도 모두 놀랐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톤네루즈가 "어이 폭소문제 너희들도 함께 나가자"라고 권하자 오오타가 엄청 당황했었다고. 결국 톤네루즈가 먼저 나가서 분위기를 잡아주자 폭소문제는 나중에야 나왔고, 방송이 끝난 후에 마츠모토가 "(우리에게 맞춰줘서)고맙다"라고 오오타의 어깨를 두드려주자 오오타도 선배와 화해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25] 타모리는 연말이면 항상 테츠코의 방에 고정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