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브리스트의 난
1. 개요
'''Decembrist revolt(Восстание декабристов)'''
19세기 러시아 제국에서 높으신 분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기를 시도한 보기 드문 운동. 이후로 끊임없이 진행되는 러시아 개혁 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에서 기인한 것이다.
2. 발단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와 파리 점령이 데카브리스트 난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1814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황제를 따라간 청년 장교들은 발전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과 자유주의의 향기를 맛보고 조국 러시아의 낙후된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신음하고 있는 러시아의 모습이었다. 청년 장교들은 지배층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아래의 농노들로부터 언젠가 들고 일어나 결국 지배층들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이게 된다. 따라서, 지배층이 먼저 개혁을 선제적으로 해나가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개혁'''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로 삼게 된다.
3. 전개
1816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에서 알렉산드르 무라비요프(Алекса́ндр Н. Муравьёв)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개혁을 꿈꾸며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이라는 결사를 조직한다.[1]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견이 생겨 공화정을 꿈꾸는 남부 결사(Южное общество), 입헌군주제를 꿈꾸는 북부 결사(Северное общество),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 슬라브 연맹 등으로 분리된다.
그러던 1825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영웅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하고 난 뒤, 후계자가 분명하지 않아 일대 혼란이 발생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니콜라이 1세가 황위를 물려받았는데, 이에 혁명가들은 알렉산드르의 동생이자 니콜라이의 형인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파블로비치(1779~1831)를 옹립한다는 명분으로 니콜라이의 즉위식 날인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켜 원로원 광장에 집결했다.
옹립 대상이었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는 원래 니콜라이보다 계승 순위가 앞섰다. 또, 나이 차이가 나는 니콜라이 1세와 달리 나폴레옹 전쟁에서 군인으로 활약해 추종자가 많았다. 하지만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새 아내인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한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 재혼했는데, 아내의 신분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가 제정한 귀천상혼에 걸려 콘스탄틴의 후손은 계승권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본인도 황위에 뜻이 없어서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한 직후 순순히 니콜라이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정작 니콜라이는 이 사실을 몰랐고, 계승권에서 형을 건너뛸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 콘스탄틴 본인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폴란드를 오가며 꽤나 고생했고, 결국 니콜라이가 계승을 받아들인 것. 데카브리스트들은 이 공백과 혼란기 때 봉기했다.
그러나 데카브리스트들의 준비와 조직이 충분치 않았고, 사령관을 맡기로 했던 사람들은 도망쳤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식날부터 피를 보기 꺼려 유화적으로 나왔지만, 결국 반란군 3천 명은 총격 끝에 포병까지 동원한 충성파 군대 9천 명에게 진압당했다.
결말이 이랬기 때문에 훗날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서 있는 혁명', '소리만 내는 혁명'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전원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살아남은 장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체포된 자들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져 다시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후 니콜라이 1세는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비밀경찰을 운용하고,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 콘스탄틴은 처벌을 받지 않고 폴란드 총독직을 계속 맡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00여년 뒤 결국 러시아 제정이 혁명으로 몰락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모조리 숙청당함으로써 특권을 내려놓지 않으면 결국 다 같이 망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맞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4. 여담
이후 이 사건으로 장교,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많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이르쿠츠크다. 이르쿠츠크는 이들의 영향으로 문화, 예술 등이 상당히 발전해서 오늘날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름이 불릴만큼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다. 이르쿠츠크 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들 중 한명 (볼콘스키 공작)이 살았던 저택을 복원한 박물관이 있으니 한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보여준 순애보도 유명한데,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 택하라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한다. 다만, 남편들은 실의에 빠져 술에 취해 살거나 현지 여자들과 바람난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별거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 시대에 강한 여성상을 나타내는 캐릭터들로 많이 띄워졌다.
2019년 개봉한 러시아 영화 《구제동맹(Союз спасения, Soyuz spaseniya. 영어 제목은 Union of Salvation)》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트레일러
[1] 이어 1818년에는 복지동맹(Союз благоденствия)으로 이름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