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안사
到彼岸寺
1. 개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화개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대주도금이 오라버니 견훤에 대한 의리와 박술희의 구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이곳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됐다는 설정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절 자체는 실존하나 대주도금이 비구니가 됐다는 것은 극중 창작이다.
2. 역사
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신도 1,000여 명을 동원해 창건했다. 이후 1898년(대한제국 광무 2) 화재를 입어 당시의 주지 법운이 재건하였고, 1914년 다시 개수하였다.
8.15 광복 후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철원군이 북한 치하에 넘어가게 되면서 북한의 행정구역으로 들어갔다가, 6.25 전쟁 때 철원군이 격전지가 되면서 절도 함께 완전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1959년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제15보병사단에서 재건하여 군종 승려(軍僧)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
3. 문화재
경내 문화재로는 3층석탑(보물 제223호)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이 있다.
3.1.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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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년(신라 경문왕 5년)에 만들어진 철제 불상이다. 불상 뒷편에 이와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어서 만들어진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 소개되어 있는데, 철불에 금을 덮어씌운 것을 아쉽다고 평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때 도피안사가 불타고 절 자체가 폐허가 되면서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이 불상도 함께 폐허 속에 파묻혔었다. 그러다가 불상이 발견된 경위가 상당히 극적인데, 1959년 이명재 당시 육군 15사단장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내가 지금 땅속에 묻혀 있어서 너무 답답합니다. 나 좀 꺼내 주시오"라고 해서 꿈에서 들은 곳을 장병들을 데리고 가서 파보니 불상이 나왔다고. 이런 인연 덕분에 철불이 다시 도피안사에 모셔지고, 절의 재건도 이명재 장군이 지원했다고. 지금도 도피안사 대적광전 안에는 이때 발견했던 철불과 함께 이명재 장군 그리고 당시 불상을 처음으로 발견했던 장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런데 다시 개금을 벗겨내고 보존처리했다고 한다. 유홍준의 책과는 상관없이 보존처리를 한듯하다.[1]
3.1.1. 바깥고리
3.1.2. 국보 제63호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1] 원래 불상은 보존 및 미관상의 이유로 새로 도금을 한다. 참고로 이런 도금, 혹은 금칠을 하는 과정을 '개금 불사'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