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팔선
1. 개요
'''삼팔선'''(三八線)은 대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대한민국이 8.15 광복을 맞은 직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 남북의 경계선 역할을 한 북위 38도 위선을 이른다.
2. 유래
2.1. 프로토타입?
삼팔선은 러일전쟁 직전에 처음에는 일본이 제정 러시아(로마노프 왕조)에게 조선을 38도로 갈라먹자고 한 것이 유래였다. 동방의 작은 섬나라 정도로 일본을 생각하던 러시아는 이를 무시했다.[2] 일본은 제1차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었다. 이번엔 위기의식을 느낀 러시아 쪽에서 39도선으로 재분할을 제의했으나 기세등등해진 일본은 무시했고, 그 후 러일전쟁이 터졌다.
1945년 5월, 일본군은 38도선 이북은 관동군이, 38도선 이남은 조선주재 일본군(17방면군)이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이 남북분단을 유도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명확한 인과관계가 부족한데다 위에서 나왔듯이 한반도를 특정 위도선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러일전쟁 시절부터 나왔던 것이므로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다만 38도선이 한반도를 반으로 가르는 경계선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 수 있다. 38도선 이남 지역은 이북 지역에 비해 면적이 좁지만 인구는 2배 정도 많은 데다 수도 서울을 포함하고 있고 대신 이북 지역은 면적이 더 넓으면서 북부지방의 요충지인 평양이 있기 때문.
2.2. 본격적 발효
실제 경계선이 된 것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본토 진공에 따른 병력 손실을 우려한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원인이었다.
38선의 기원을 설명하는데에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첫 번째는 준비부족설이다. 예상과 달리 만주에 100만 명이 넘는 일본 관동군은 일주일 만에 무너졌고 이에 따른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에 놀란 미국이 한반도의 반이라도 먹기 위해서 부랴부랴 설정했다는 얘기다. 당장 8월 15일의 쇼와 덴노의 항복 때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이에 반대로 사전계획설이 있다. 전쟁부 작전국 3대 국장이었던 존 헐 중장이 1949년 전직 미 군사실 직원 해리스 대령과 전화통화를 한 녹취록이다. 녹취록에서 헐 중장은 “38선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마련됐다”며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 항구[3] 를 주목했으며, 그 가운데 2개의 항구(인천과 부산)는 우리 지역에 포함해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38선을 따라서가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38선 획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1945년 8월 11일 새벽이 아니라 7월 25일 무렵 이미 착안됐다는 얘기다.
어쨌든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겠다고 하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를 38도선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고 소련과 협의함에 따라 설정되게 되었다. 경계선으로서의 삼팔선은 6.25 전쟁으로 사라지고 휴전선이 대신하게 된다. 또한 애초에는 단순한 군사적 분리선에 불과했기 때문에 미군이나 소련군이나 삼팔선 자체를 완전히 틀어막지는 않았고 주요 도로에 검문소 정도를 만들고 팻말을 설치한 정도로 경비했다. 그래서 삼팔선이 성립된 후에도 한동안 통행이 자유로웠던 시기가 있었으나,남한과 북한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되면서 점점 통행이 힘들게 되었다.
3. 삼팔선이 경유한 지역
서해 - 황해도 옹진군 - 벽성군 - 해주시[4] - 벽성군 - 연백군 - 경기도 개풍군 - 개성시 - 장단군[5] - 연천군 - 포천시 - 가평군 - 강원도 화천군 - 춘성군 - 화천군 - 양구군 - 인제군 - 양양군 - 동해
4. 문제점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경계선으로 대충 만들어진 까닭에 지형이나 행정경계, 교통로 등과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 고립된 지역 발생
예를 들어 황해도 서남단의 옹진반도는 남한 땅이지만 옹진반도에서 개성 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해주는 북한 땅이라서 육로 교통이 차단된 월경지가 되었다. 또 38선 이북에 위치한 해주의 경우 해주항이 위치한 용당포 일부 지역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해주항 일부가 월경지가 될 판국이었다. 때문에 해주의 경우 용당포를 포함한 해주 전체를 소련이 관할하고 38선 이남의 해주만은 미국이 관할하는 것으로 미군정과 소군정이 합의를 해서 월경지가 생기는건 피했으나 해주항과 서해를 연결하는 해주만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6.25 이전까지 해주는 이름처럼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정작 바다를 쓰지는 못하는 무늬만 항구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다.[6]
- 강제 분리되는 행정구역
삼팔선은 자연지물 (하천, 산, 호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의 면(面)이나 리(里)가 삼팔선에 의해 분리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당국 간에 마을의 관할권을 두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쪽에 귀속될지를 놓고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충돌이 발생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7]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과 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때문에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 1946년사이 미국과 소련 군정 당국은 삼팔선 이남의 황해도(옹진, 연백)는 북한으로, 삼팔선 이북의 경기도(개성, 장단, 개풍, 연천)는 남한으로 완전 귀속시키고 강원도의 경우는 군(郡) 경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재분할하자는 의견을 두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하였다.[8] 결국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않으려고 맞서던 양국의 회담 결렬로 무산되었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7]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과 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때문에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 1946년사이 미국과 소련 군정 당국은 삼팔선 이남의 황해도(옹진, 연백)는 북한으로, 삼팔선 이북의 경기도(개성, 장단, 개풍, 연천)는 남한으로 완전 귀속시키고 강원도의 경우는 군(郡) 경계선을 따라 남북으로 재분할하자는 의견을 두고 진지하게 논의하기도 하였다.[8] 결국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않으려고 맞서던 양국의 회담 결렬로 무산되었다.
- 방어상의 문제점
이는 특히 남한 측이 심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삼팔선 인근에 고지대를 형성한 곳이 많아서[9] 쉽게 방어진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북한의 고지가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평지에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니 유사시 방어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덤으로 앞서 언급한 옹진, 연백, 개성 지역은 조금만 밀려도 바로 바다나 강이 나오기 때문에 자연적인 배수진이라서 유사시 일단 포기하는 지역으로 선정되고[10] 실제로 이 지역들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결국 북한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부 때 신성모 국방장관이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대책없는 강경 연설로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됐으나 근거 없는 북진 연설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은 오히려 남한에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삼팔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삼팔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남북의 경계가 38선보다 북쪽에 있기 때문에 남한 강원도에서는 38선을 쉽게 넘어다닐 수 있으며 도로에는 38선 안내 표지판이 있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부 때 신성모 국방장관이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대책없는 강경 연설로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됐으나 근거 없는 북진 연설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은 오히려 남한에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삼팔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삼팔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남북의 경계가 38선보다 북쪽에 있기 때문에 남한 강원도에서는 38선을 쉽게 넘어다닐 수 있으며 도로에는 38선 안내 표지판이 있다.
5. 군사분계선과의 차이
'''흔히 38선을 휴전선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다만, 한국의 역사와 6.25 전쟁의 경과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외국 사람들에게는 일반명사인 군사분계선보다 38선이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그런 일반인들을 위해서인지 외국 언론에서도 (잘못된 용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38선이라는 단어로 휴전선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휴전선은 1953년 휴전회담 이후에 설정된 선으로 38선과 비교해 보면 개성을 포함한 경기도 서북부와 황해도 연백평야, 해주 이남의 옹진반도 부분은 북한이 좀 더 남하하였고 거꾸로 연천, 포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설악산, 간성, 거진 등을 포함한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지역은 남한이 북상했다. 때문에 혹자는 태극기의 태극 모양이 되었다고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평지는 북한이 더 많이 먹었고 남한은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와 영토 자체를 더 많이 먹은 셈이다. 남한 입장에서는 수도 서울특별시가 38선 때보다 최단거리가 북한에 약간 가까워졌지만 방어에는 더 유리해졌다.[12]
6.25 전쟁 직전에 개성시 지방에서는 "1950년은 단기 4283년인데 4283을 거꾸로 하면 3824 여서 이 해에 38선이 이사간다" 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런 복잡한 괴소문이 자연스레 생겼다기보단 아마도 북한 정권의 프로파간다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6. 대체역사
6.1. 북위 39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한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의 참모였던 로우니의 회고록 《Smoky Joe and General》에 따르면, 일본의 공식 항복(1945년 9월 2일) 직전 조지 마셜 장군이 참모들에게 남북 분단선 설정안을 건의토록 제의했을 때 딘 러스크 대령 등 영관급 장교들은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오갔던 '''북위 39도선 분할'''을 주장했으나, 그들의 상관이었던 조지 아더 링컨 장군이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인 스파이크만이 1944년 저술한 '평화의 지리학'을 인용하면서 38도선을 주장[13] 했다고 한다. # 참고로 '''북위 39도선은 평양을 관통한다.''' 이에 관해서는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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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경우 북위 39도선이 도시 중심부를 정확히 관통한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진남포시는 39도 이남, 원산시는 39도 이북이 된다.[14] 대략 통일신라의 영토와 비슷해진다. 이 경우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포함해, 평양 도심의 1/4이 남한령이 된다. 다만 남한령 평양 시내가 39도선과 대동강 사이에 갇혀 사실상 고립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북위 39도선이 분단선이 되었을 경우에는 대동강을 따라서 경계조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38도선에 아슬아슬하게 남한령으로 걸렸던 해주시 남쪽 끝 반도지역이 결국 북한령으로 조정된 것처럼. 경계조정이 되지 않더라도 방어상의 어려움 때문에 남한에서 남한령 평양 시민들을 대동강 이남으로 이주, 대동강 이북 지역을 비무장지대화 시켜 평양급의 대도시가 '''유령 도시가 되는''' 아스트랄한 상황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평안남도에서는 남포시를 포함한 용강군과 중화군 전체, 강서군 일부, 대동군과 평양시 일부, 강동군과 성천군 극일부가, 황해도에서는 곡산군 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강원도에서는 통천군 일부와 이천군 극일부를 제외한 전역이, 그리고 함경남도에서 문천군 극일부와 안변군 2/3 정도가 남한령으로 들어오게 된다.
아예 간단하게 그냥 평안도와 함경도 전체를 북한에 내주는 방법도 있다. 왜냐하면 39도선은 평안도와 함경도 남쪽 경계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15] 이렇게 되면 함경남도와 평안남도 남쪽 행정구역 경계가 그대로 자연적인 남북 분할 경계가 되었을테니 오히려 큰 고민 없이 선택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러일전쟁 직전 일본과 러시아의 39도선 분할안도 이렇게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통째로 러시아가 갖는 안으로 하려고 했다.
6.2. 북위 40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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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북위 40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평안북도에서는 용천군 대부분, 의주군 극일부, 구성군 과반, 태천군 대부분, 운산군 일부, 영변군 대부분, 정주군과 박천군 전부가, 평안남도에서는 영원군 절반 정도를 제외한 전역, 함경남도에서는 정평군 대부분, 함흥시와 흥남시를 포함한 함주군 대부분, 홍원군 극일부와 영흥군 이남 전역이 남한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40도선으로 분단 시 남한의 서쪽지역이 중국과 살짝 맞닿게 되어 철도나 교통이 중국이나 유럽 등지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39도선, 38도선으로 분단되는 것과는 역사가 차원이 달라지게 된다. 통일을 안 하더라도 중국과 남한이 국경을 직접 맞닿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휴가나 이런 때 중국으로 차타고 해외여행하는 것도 가능해질 수가 있다.
대략 공민왕 이전의 고려의 영토와 비슷해진다. 함흥은 아슬아슬하게 40도선 이남, 신의주와 신포, 그리고 묘향산은 아슬아슬하게 40도선 이북이며 특히 신포는 시가지는 40도선 이북인데 항구를 막고 있는 남쪽의 섬인 마양도 대부분이 40도 이남이 된다. 북위 40도선이 기준이 됐다면, 쓸 만한 황해도와 평안도의 평야 지대와 평양, 진남포, 해주, 사리원, 원산, 함흥 등의 알짜배기 도시들[16] 은 모조리 남한이 가져가고 그나마 가져가는 신의주는 항구와 서해 바다를 이어주는 압록강 하구가 남한 관할인지라 항구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고자 상태가 되어(실제로 6.25 전쟁 이전의 해주가 그랬다.) 결국 북한이 가지는 건 척박한 개마고원과 함경도의 동해안밖에 없다(...).
좀 과한 시나리오로는 북한은 반 고자 상태가 되어[17] 중국과 소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위성국 신세로 살다가 동구권 붕괴 시 남한에 흡수당하는 형태로 멸망했을 것이다.[18] 이런 경우는 판도가 남한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해지지만 북위 40도 선에서 분단된 상태에서 주변 국가, 특히 중국의 눈치 때문에 북한이 남한에 완전 흡수까지는 곤란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반대로 중국이 국가로서 지탱하기 어려운 북한을 아예 병합시키는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6.3. 북위 37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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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북위 37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강원도[19] 와 경기도[20] 의 사실상 전역이 북한에 속하게 되며 서울특별시도 당연히 북한에 속하게 된다. 게다가 충청북도[21] , 충청남도[22] , 경상북도[23] 의 일부도 북한에 속하게 되며 울릉도, 독도도 북한이 가져가게 된다.
이경우 남한의 범위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지역에 국한되며 대전을 비롯한 충청권 지방이 남한의 수도권이 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다만 충청권 자체가 북한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평야가 많은 김제평야 일대(김제시, 군산시, 익산시, 전주시, 부안군 일부, 정읍시 일부, 논산시 일부) 일대가 수도권이 되었을 확률도 있다.[24] 거기다 새만금까지 완공되면 수도권의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이러면 전라권이나 충청권 남부 쪽이 엄청나게 발전할 것이다. 위에 충청권 지방이나 김제 군산 익산 일대가 수도권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되어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 역사를 되돌아볼 때면 저 37도선이 군사분계선이 되어도 부산광역시가 수도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일단 부산항문서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부산 자체가 항구로써는 천혜의 요새이며, 일본과의 거리가 가깝다. 당시 일본은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했다가 미국에게 도전장을 내민 나라였고, 맥아더의 뜻과는 다르게 냉전 정국이 되면서 미국은 일본에게 수많은 경제 지원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경제는 자연스레 발전했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시 가까운 일본의 기술을 많이 차용하고, 미국에게서 신기술을 배운 것에 대입하면, 37도선 분단 시에도 수도는 큰 항구가 있고 경제발전이 유리한 부산광역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수도권도 자연스레 오늘날의 부울경권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6.4. 북위 38도 30분선으로 분단되었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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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휴전선 남한 최북단인 북위 38도 30분선을 기준으로 했다면 황해도에서는 송화군 대부분, 은율군 일부, 신천군 사실상 전역, 안악군 일부, 재령군 대부분, 봉산군 대부분, '''사리원시''' 일부, 서흥군 일부, 신계군 일부가[25] , 강원도에서는 이천군 일부, 평강군 일부, 회양군 극일부가 남한에 속하게 된다. 다만 고성군에서는 현내면의 일부가 북한령이 된다. 동사리원역이 남한의 역이 되며 제진역은 북한의 역이 된다. 그리고 금강산 지구는 최남단 봉우리인 국사봉까지 모두 아슬아슬하게 이 선 북쪽에 있어 전부 북한령이 된다.
이 선은 구월산과 사리원시를 관통한다.
[1] 3,900km2로 적혀있는 신해방지구는 실제로 2,500km2 정도이며, 4,300km2로 적혀있는 수복지구는 실제로 5,800km2 정도이다. 또한, 1953년 휴전 당시 북한의 면적은 122,400km2가 아닌 123,900km2, 남한의 면적은 98,900km2가 아닌 96,900km2 정도였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농업부지 확보 등의 이유로 간척에 적극적이었기때문이다. 국가통계포털 자료[2] 몇몇 사람들은 이때 러시아가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의 상황이 좀 나았을거라는 말을 하는데, 국권피탈이 조금 빨라질뿐, 적백내전때 일본이 점령했을 가능성이 크다.[3] 부산, 인천, 원산[4] 다만 해주 시가지의 거의 전체는 북위 38도선 이북이고, 해주항의 남쪽으로 돌출된 일부분만이 38도선 이남이라 딱 이 작은 부분만 따로 관리하기 너무 힘들어 그냥 남북간에 합의해서 해주 전체를 북쪽이 관할했다.[5] 남한령 장단군은 한국전쟁 이후 파주군 및 연천군에 분할 편입.[6] 이 점을 이용해서 해주시 자체가 북한 주민들의 주요 탈북루트가 되기도 했다. 항구를 경비 중인 경비대만 따돌려서 배만 띄우면 바다가 미군정 관할이라 경비대가 잡을 겨를이 없으므로.[7] 정확하게는 38선이 송악산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 사면을 지났다. 육탄10용사도 이러한 지리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8] 화천, 홍천, 평창, 삼척, 정선, 원주, 춘천, 횡성, 강릉, 울진(당시에는 강원도 소속이었음), 영월은 이남으로, 통천, 평강, 철원, 고성, 인제, 회양, 이천, 김화, 양구, 양양은 이북으로 분할하는 안이었다.[9] 위에서 언급한 송악산이나 옹진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감제고지인 국사봉 등등.[10] 그래서 전쟁 이전에 개성박물관의 고려청자 문화재 등 옮길 수 있는 건 미리 남쪽으로 피난시켰다. 유사시 개성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건 전쟁 이전부터 예상되고 있었다.[11] 육안으로도 면적 차이가 많이 나고 다음지도에서 면적계산을 해보면 수복지구가 신해방지구(38선 이남인 북한 영토)보다 2배 이상 넓게 나온다. 통계연감에 따르면 남한의 영토는 1949년 때 93,634제곱킬로미터였던 것이 1954년에는 96,929제곱킬로미터로 증가했다. 해당 지도에 표기된 면적에는 오류가 있다. 지도 동쪽 경계선을 보면 유난히 붉은색이 두껍게 칠해진 곳이 있는데 금성 전투에서 중공군이 획득한 곳이다.[12] 38선 때는 개성 대신 현재 남한땅인 연천, 포천 북부가 북한이었는데 개성은 한강과 임진강이라는 방어선이 있지만 연천, 포천은 별다른 자연의 방해 없이 서울로 침투할 수 있다. 실제로 6.25때 서부의 파주축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비교적 잘 방어했는데 포천-의정부 축선에서 구멍이 나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여담으로 38선 돌파비가 있는 연천 한탄대교 사거리에서 수유역까지 마라톤 풀코스 거리가 나온다.(3번 국도 평화로-도봉로 루트) 그만큼 서울 강북지역이 38선과 상당히 인접해 있다는 것이다.[13] 심지어 그 평화의 지리학에 나오는 38도선은 한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위대한 인물과 사상과 발명의 대부분이 38도선 이북에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14] 북위 38도선이 도시를 관통했던 개성도 도심 뒷산인 송악산을 관통했지 시내 자체를 둘로 나누진 않았다. 39도선은 원산시 경계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안변군 석왕사면, 신모면 일대를 지나고, 당시 원산 행정구역 안쪽은 단 1cm도 지나지 않는다.[15] 게다가 당시 원산은 강원도가 아니라 함경남도 소재였다.[16] 공장들 또한 도시에 있으니 공업지대도 함북 및 단천 지역을 제외한 절반 가량을 남한이 가져간다.[17] 땅을 뺏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해도 인구와 공업지대의 대부분이 남한에 있으니 전쟁을 일으킬 능력조차 없다![18] 그런데 이런 경우는 남한, 미국이 월등한 전력으로 아예 북한 땅까지 싹 다 차지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19] 울진군은 1945~1950년 당시 강원도[20] 평택시, 안성시 일부 제외.[21] 음성군,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 일부[22] 당진시 북부 극일부. 하지만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기에 이 부분은 그냥 남한령으로 귀속시킬 가능성이 클 것이다.[23] 예천군 극일부, 봉화군 일부[24] 만약 이 지역에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선다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를 만들 정도로 평야가 넓다.[25] 황해도의 대부분을 남한이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