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밀리토

 

''' 디에고 밀리토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디에고 밀리토의 기타 정보'''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
'''이름'''
'''디에고 밀리토
Diego Milito'''
'''본명'''
디에고 알베르토 밀리토
Diego Alberto Milito
'''출생'''
1979년 6월 14일 (44세)
아르헨티나 베르날
'''국적'''
아르헨티나 [image] | 이탈리아 [image]
'''신체'''
183cm, 78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 소속 '''
''' 선수 '''
라싱 클루브 (1993~2003)
제노아 CFC (2003~2005)
레알 사라고사 (2005~2008)
제노아 CFC (2008~2009)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9~2014)'''
라싱 클루브 (2014~2016)
'''국가대표'''
25경기 4골 (아르헨티나 / 2003~2011)
1. 소개
2. 클럽 경력
2.1. 라싱 클럽
2.2. 제노아 CFC
2.3. 레알 사라고사
2.4. 제노아 CFC 복귀
2.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6. 라싱 클럽
3.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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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별명은 엘 프린시페(El principe).
빠른 달리기와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을 이용해 공간을 찾거나 확보하는 플레이를 자주 보여주었다. 헤딩을 하기 어려운 위치나 상황에서 센스있는 헤딩을 잘 구사하여 골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특히 09/10 시즌에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트레블의 주역이 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인테르에 온 후 30대라는 늦은 나이에 포텐이 터진 선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인테르 이적 전부터 꾸준히 득점랭킹 중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1]
실력에 비해 상당히 저평가를 받았던 선수다. 공간 확보능력이나 침투능력,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센스, 골 결정력 등 A급 공격수로서 충분한 기량을 보여주었으나 커리어의 대부분을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세리에, 라리가의 중위권 클럽들이었기에 주목받지 못한 경우라 할수 있다. 인테르 이적 전까지는 前 FC 바르셀로나 소속의 가브리엘 밀리토의 가족으로서 형제 축구선수를 다룰 때나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나마 인터 밀란에서 트레블을 한 이후로는 재평가를 받는 추세이다.[2]
애칭인 '엘 프린시페'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활약했던 前 우루과이의 스타플레이어 엔조 프란체스콜리와 외모가 닮았다는 연원에서 온것이다.

2. 클럽 경력



2.1. 라싱 클럽


1979년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를 닮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디에고 아르만도라고 이름 붙였지만 부인과 친척들의 반대가 심했기때문에 디에고 알베르토라는 이름이 되었다.
온 가족이 인디펜디엔테의 서포터였지만 동생 가브리엘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라싱 클럽을 응원했다고 하며 9세의 나이로 라싱 클럽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14세때 9군(유스조직의 가장 아래에 있는 카테고리)에 입단했고 1998년에 4군(1군 바로 아래의 카테고리)에서 리그 우승을 이뤄낸뒤 1군으로 승격했고 1999년 12월 11일에 1군 데뷔를 이뤄냈다. 2001년 아페르투라에서는 35년만의 리그우승에 공헌했다.

2.2. 제노아 CFC


아르헨티나의 실적으로 2003-04시즌 세리에B 의 제노아로 이적하면서 다음 시즌은 39 경기에 출전해 득점 순위 2위로 21골을 기록하여 클럽을 10년 만에 세리에 A 승격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클럽이 승부조작 사태에 연루되며 제노아는 세리에 C1 (3부 리그) 강등을 피할 수 없게되었다.

2.3. 레알 사라고사


2005년 여름에는 동생 가브리엘 밀리토가 ​​속한 스페인 사라고사로 이적했는데, 원래는 클라우디오 로페스와 합의 직전 이었지만, 개막 직전에 디에고 밀리토 영입에 초점을 맞춰 바로 이적 시장이 닫히는 2005년 8 월 31 일 이적료 200만 유로에 이적이 결정했다. 매입 옵션을 포함하여 2년간 임대했다. 이미 시즌이 개막하고, 원정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0-0 무승부를 거뒀다. 사라고사에 결정력있는 공격수가 부족한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당시 톱라인 스쿼드에는 FC 바르셀로나의 칸 테라 출신으로 아직 젊음 세르히오 가르시아 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이적해 온 에벨톤 두 명의 공격수만 재적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사라고사에 좋은 업적을 남겨, 이적료 1200만 유로에 발렌시아 C.F.로 이적 한 다비드 비야 대신을 역임해야한다는 엄격한 입장에 처하게되었다.
2005년 9월 11일의 2라운드, 발렌시아 전에서 프리메라 리가를 데뷔했을 때는 득점 이 없었지만, 4라운드 오사수나와의 경기에서 올린 득점은 사라고사의 유니폼을 입고 라고 홈 라 로마레다 스타디움에서 올린 첫 골이 되었다.
이후 2006년 코파 델 레이 첫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상대로 6 : 1 스코어로 이긴 경기 중 4골을(!) 넣으며 믿을 수 없는 잠재력을 보여줬다. 그 해 밀리토는 레알 사라고사에서 15골을 넣은 탑스코어러로 시즌을 마쳤다.
2006-07 시즌, 두 명의 아르헨티나 대표 파블로 아이마르 와 안드레스 달레산드로 영입되면서 팀이 전력이 더욱 상승, 스페인식 원하는 공격 축구를 표방하는 빅토르 페르난데스 감독 아래, 통산 23골을 기록하고 클럽을 UEFA 컵 출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2007-08 시즌, 자신은 안정된 결과를 내면서도, V 페르난데스 감독과 달레산드로과의 불화와 감독의 해임, 디펜스 라인의 불안정 등의 악조건이 겹쳤다. 2008년 4월에 왼쪽 발목을 다쳐 한때 소집 명단에서 제외했지만, 그때까지 15골을 득점해 랭킹 2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발목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복귀했을 때는 결국 이후 팀은 1점도 기록하지 못하고, 마지막 라운드의 5월 18일, 5 년만의 세군다 디비 시온(2부) 강등이 결정됐다.

2.4. 제노아 CFC 복귀


2008-09 시즌에는 제노아로 복귀해, 밀리토 본인도 강등 처분을 하고 이적 이후 제노아를 걱정했다. 장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 제노아는 공격의 중심에 밀리토를 잡고 득점을 양산했는데. 15라운드, 삼프도리아 와 제노아 더비에서 결승골을 기록. 결국 팀은 5위를 차지해 UEFA 유로파 리그 출전권을 획득했다. 2008-09 시즌에는 볼로냐의 마르코 디 바이오 와 함께 24득점을 기록,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에 이어 득점 순위 2위를 차지했다.[3]

2.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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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시즌 종료 후 티아고 모타와 함께 인테르로 이적했다.[4] 2009-10 시즌에는 주제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5], 거의 모든 경기에 스타팅 멤버로 출전. 투톱과 원톱 가리지 않고 뛰며 인테르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또한 훌륭한 승부사적 기질을 자랑했는데,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 결승전의 멀티골을 포함하여 매 라운드마다[6] 득점을 했으며, 세리에 A 우승의 향방을 결정 짓는 38라운드 시에나전,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도 결승골을 득점, 해당 시즌 인테르가 트레블을 결정짓는 모든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는 대활약을 펼쳤다. 리그에서는 22골로 득점 2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6골을 넣으며 득점 4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밀리토는 해당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UEFA 올해의 공격수와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까지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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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시즌에는 '''회광반조'''라는 단어 그대로를 보여주고 말았다. 10/11 시즌에 보여준 밀리토의 모습은 지난시즌 리그에서만 32경기 22골, 시즌 종합 52경기 30골을 넣고 UEFA 올해의 선수상과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던 폭발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즌에서는 리그에서는 23경기 5골, 시즌 종합 34경기 8골이라는 엄청난 부진을 거듭하며 2011년에는 한 해만에 비도네 도로, 우리나라에는 황금쓰레기통상으로 잘 알려진 상을 받았다. 즉, 세리에 A 에서 시즌 시작을 기준으로 기대에 가장 못미치는 선수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부진의 원인은 아무래도 같은 시기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같은 나이의 디에고 포를란처럼 노쇠화로 인한 기량 하락이 가장 큰 문제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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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몰락하는 듯했으나, 절치부심의 자세로 경기에 임하기 시작하면서 비도네 도로를 받은 직후부터 폼을 회복하며 2011-12 시즌에는 2012년에만 리그 20골을 넣으면서 이 시즌에 리그에서 24골[8]을 넣으며 팀이 몰락하는 와중에도 본인은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로는 그럭저럭 활약을 해 주다가도 부상에 시달리며 폼을 잃어갔고[9], 팀 에이스 공격수의 자리는 로드리고 팔라시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14년 6월 19일, 인테르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프로 커리어를 처음 시작했던 라싱 클럽으로 복귀한다.

2.6. 라싱 클럽


2014년 여름 10년 만에 친정팀에 복귀하게 됐다. 계약연장을 하지 않는다면 201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듯 보이며, 5월 27일 은퇴를 선언하였다.

3. 국가대표


[image]
2002년 아르헨티나 대표로 첫 소집 된 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어렸을 때부터 주목 된 동생에 비하면 형 디에고는 고생했으며, 대표소집은 잦은편이 아니지만 2004 년 , 2006 년에 다시 소집을 받고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 멤버에는 선정되지 않았지만, 이듬해 코파 아메리카 2007에 소집되어, 예선전 도중 에르난 크레스포가 부상으로 잔여 경기에 출전하기 못하게 되어 기회를 잡았으나 번번히 홈런왕에 도전하는듯한 퍼포먼스를 보이며 기회를 날려먹었다. 7월 2일 콜롬비아 전에서 간신히 1골을 넣었다.
기존 바실레 감독의 후임이 된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 하에서는 리오넬 메시, 세르히오 아궤로, 카를로스 테베스, 곤살로 이과인 등 빅 클럽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고있는 선수가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주전경쟁이 힘든 마당에 매경기 나올때마다 큰 삽질을 알아서 하면서 후배들을 위해 자진해서 벤치로 직행하는 아름다운 행보(?)를 보였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는 등번호 19번을 달며 대표팀에 소집됐는데, 조별 리그 첫 경기인 나이지리아전에 후반 34 분 교체 출전하고, 3차전에 선발 출전했다.
즉, 국대만 오면 한없이 작아지면서 클럽에서의 활약상과 거리가 먼 활약만을 선보인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디에고 밀리토가 사라고사, 인테르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만큼 국대에서 보여주었다면 아르헨티나는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에르난 크레스포-'''디에고 밀리토'''-곤살로 이과인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라인을 가졌을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볼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는 상대 수비의 빈 공간을 잘 찾아내어 빠른 스피드로 침투하는 스타일이다. 위치선정이나 골냄새를 맡는 능력이 강점으로 손꼽힌다. 측면의 빈공간을 찾아내어 미드필더로부터 공을 받는경우, 무리하게 수비를 뚫고 들어가기보다는 긴 크로스를 넣어주는 경우가 더 잦은 편인데 패스길도 제법 잘 보고, 연계 플레이도 잘하는 편이라 기회도 잘 만들어 주는 편이다. 플레이를 보면 침착함과 센스가 강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탈압박이 요구되는 상황에 처할 경우 화려한 개인기나 발재간으로 수비를 제치기보다는 간단한 바디페인팅으로 수비를 벗겨내는 플레이를 하는데,[10] 이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2009/10 챔스 결승에서 골을 만들어내는 장면[11]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상대 수비수들이 앞에 자리잡고 있을 경우 돌파하려는 시도보다는 수비와의 혼전 상황에서 반박자 빠른 슈팅으로 골을 만들어 낸다. 이는 수비의 압박이 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 이 반박자 빠른 슈팅이 상대 수비수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게, 좀 붙어서 막으려고만 하면 이미 공은 골대를 향하고 있다. 또, 이 슈팅이 마냥 엇박자일 뿐만 아니라 파워도 실려 있어서 골키퍼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막기 껄끄럽다. 슈팅의 경우 니어포스트 파포스트 가리지 않고 유리하다 싶은 위치로 냅다 차넣는 스타일로, 득점루트가 다양한 편이다. 칩슛부터 깔아차는 모습까지 다양한 슈팅을 보여줬지만 정작 커브슛은 잘 보여주지 않았다.
문전에서의 혼전 상황에서 헤딩할 기회가 생기면 기묘한(...) 자세로 골을 넣은 적이 제법 있다. 대표적으로 챔피언스리그 바르셀로나 1차전 헤딩골. 헤딩하기 어려운 각의 공중볼을 센스있는 헤딩으로 마무리짓는 경우도 많았던 것을 보면 헤딩에도 꽤나 감각이 있는 듯.

5. 기록



5.1. 대회 기록


  •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1999~2003, 2014~2015)
    •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1 A, 2014 T[12]

5.2. 개인 수상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2009-10
  • UEFA 올해의 공격수: 2009-10
  •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10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9-10
  • 세리에 A 올해의 외국인 선수: 2009-10
  • 세리에 A 올해의 최다 득점자: 2009
  • 세리에 A 올해의 가장 사랑받는 선수: 2009
  • 구에린도르: 2008-09
  •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2020

5.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9/2000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1
1
0
0
-
-
2000/01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5
2
0
0
-
-
2001/02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8
9
0
0
-
-
2002/03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35
14
0
0
11
3
2003/04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8
8
0
0
-
-
2003/04
제노아 CFC
세리에 B
20
12
0
0
-
-
2004/05
제노아 CFC
세리에 B
39
21
3
1
-
-
2005/06
레알 사라고사
라리가
35
15
8
6
-
-
2006/07
레알 사라고사
라리가
37
23
3
0
-
-
2007/08
레알 사라고사
라리가
35
15
4
2
2
0
2008/09
제노아 CFC
세리에 A
31
24
1
2
-
-
2009/10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35
22
6
2
11
6
2010/11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3
5
4
1
7
2
2011/12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33
24
1
0
7
2
2012/13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20
9
5
0
6
0
2013/14
인테르나치오날레
세리에 A
17
2
1
0
-
-
2014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7
6
1
0
-
-
2015
라싱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7
6
2
0
9
4

6. 여담


디에고와 가브리엘 형제는 레알 사라고사에서 2시즌을 보낸걸 제외하면 어린시절부터 항상 다른 클럽에서 플레이했다. 디에고가 라싱에 소속되어었던당시 동생은 라이벌인 인디펜디엔테 소속이었고 2003년 3월9일 알베자네다더비에서 형제간의 맞대결이 실현되었다. 경기중에 페널티에어리어 근처에서 동생이 형을 밀면서 유니폼을 잡아채자 형이 동생의 퇴장을 요구, 동생에게 주어진 옐로카드를 둘러싸고 형제가 격한 설전을 벌이는 장면도 있었지만 결과는 1대1의 무승부로 끝났다. 경기중에 2명이 계속해서 언쟁을 주고받으며 경기장내의 관중들과 몇 만명이나 되는 TV시청자들 앞에서 '형제대결'을 벌였기 때문에 관전하러 왔던 어머니는 화를 내며 경기장을 뒤로했다. 이때 그녀는 형제의 여자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사실 알게 모르게 콩라인 기믹이 있다. 커리어 내내 '''득점 2위만 4번''' 해봤다. 그것도 유럽 주요리그에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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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축구팬들이 느꼈지만 실베스터 스탤론과 닮았다. 구글 검색하면 짤방이 쏟아지는 수준(...) 이외에도 우루과이의 레전드 공격형 미드필더인 엔조 프란체스콜리와도 매우 닮았다.
아버지가 디에고 마라도나 팬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그가 마라도나를 닮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름을 마라도나를 따라 '''디에고 아르만도'''라고 붙이려 했으나 부인을 비롯한 친지들의 반대가 너무나도 극심해 결국 아르만도가 아닌 알베르토가 되었다고.
[1] 그 당시 한준희 해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골넣는 법을 너무 잘 아는 공격수[2] 사실 세리에A의 한국에서의 인기가 적은 것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3] 이때, 세 선수가 마지막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모두 24득점을 기록하고 있어 세 명이 동시에 수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즐라탄이 막판에 한 골을 더 추가하면서 단독으로 득점왕에 올랐다.[4] 2004-05 시즌 종료 후 인테르에서 이적 제의를 했으나, 동생과 함께 뛰어 보고 싶어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했다고 밝힌 바 있다.[5] 이후 무리뉴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할때 밀리토 영입을 시도하기도 했었다.[6] 16강 1차전 선제골, 8강 1차전 결승골, 4강 1차전 1골 2도움, 결승전 2골.[7] 실제로 포를란도 아틀레티코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노쇠화로 인한 잔부상과 기복으로 많은 고생을 하여 모든 대회 통틀어 42경기 10골 5도움이라는 과거 시즌들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골든볼을 수상한 선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부진한 기록을 남겼고, 그나마 국대에서 우승을 차지한 201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에서의 골도 결승전에서의 두 골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후 밀리토는 재기에 성공해서 아래와 같이 리그에서 24골을 넣으며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포를란은 아예 그동안 이어져왔던 하향세가 인테르에서 정점이 되어 '''리그에서 2골만 넣는''' 엄청난 부진을 모습을 보이고 그 이후에도 유럽 빅리그가 아닌데도 리그에서 10골 이상을 넣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몰락하고 만다.[8] 우디네세의 안토니오 디 나탈레에 이어 득점 2위[9] 얼마나 심각했나면 12/13 시즌은 리그 20경기 9골, 13/14 시즌은 리그 '''17경기 2골'''을 넣는 엄청난 부진을 보여주었다.[10] 메시의 그것처럼 바디페인팅으로 타이밍 빼앗는 드리블에 능하다. 자주 시도하지 않긴 하지만 드리블이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편이다.[11] 첫번째 골은 줄리우 세자르의 골킥을 받아 베슬리 스네이더르에게 헤딩으로 연결 후 다시 원투 패스를 받아 골문으로 바로 가속하여 드리블한 장면에서 나왔는데, 속도로 같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동료인 뮌헨의 센터백 마르틴 데미첼리스를 간단히 제쳐냈다. 두번째 골은 인테르의 역습 상황에서의 골로, 왼쪽 측면에서 패스를 받아 드리블 한다음 역시 뮌헨 센터백인 다니엘 반부이텐과의 1:1 상황에서 절묘한 페인트 모션으로 부이텐을 속여내고 얻어낸 골이었다. 두 골 모두 밀리토의 장점을 보여준 대표적인 장면이었다.[12] A: 아페르투라(Apertura), T: 트란시시온(Transició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