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난 크레스포

 



''' 에르난 크레스포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실버슈 2006'''


'''베스트팀'''





'''클루브 소시알 이 데포르티보 데펜사 이 후스티시아'''
'''Club Social y Deportivo Defensa y Justicia'''
'''이름'''
'''에르난 크레스포'''
'''Hernán Crespo'''
'''본명'''
에르난 호르헤 크레스포
(Hernán Jorge Crespo)
'''출생'''
1975년 7월 5일 (49세) /
아르헨티나 플로리다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
184cm | 체중 78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축구경영인
'''소속'''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93~1996)
'''파르마 FC (1996~2000)'''
SS 라치오 (2000~2002)
인테르나치오날레 (2002~2003)
첼시 FC (2003~2008)
AC 밀란 (2004~2005 / 임대)
인테르나치오날레 (2006~2008 / 임대)
인테르나치오날레 (2008~2009)
제노아 CFC (2009~2010)
파르마 FC (2010~2012)
'''감독'''
파르마 FC (2014~2015 / 유스)
모데나 FC (2015~2016)
CA 반필드 (2018~2019)
데펜사 이 후스티시아 (2020~2021)
상파울루 FC (2021~)
'''경영'''
파르마 칼초 1913 (2017~2018 / 부사장)
'''국가대표'''
64경기 35골 (아르헨티나 / 1995~200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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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발다니토 (Valdanito)[21]
'''SNS'''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여담
7. 크레스포에 대한 말말말
8. 시종일관 콩라인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축구선수 출신 감독. 2021년부터 상파울루 FC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93-94 시즌 리버 플레이트에서 데뷔해 25경기 13골을 넣으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고 199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1996년 여름 파르마에 입단하였다. 입단 당시 파르마에는 파비오 칸나바로, 릴리앙 튀랑, 잔루이지 부폰 등 훗날 월드클래스급으로 발돋움 하는 촉망받는 선수들이 있었으며, 이후 절친이자 최고의 도우미로 활약하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 합류하며 이들과 함께 유에파컵과 코파 이탈리아를 들어올렸다. 파르마에서 꾸준하게 리그 두자릿수 득점을 올리던 크레스포는 마지막 시즌에 22골을 넣으며 24골을 넣은 안드리 셰브첸코와 23골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에 이은 득점 3위를 기록했다.
2000년 여름 당시 사상최고의 이적료인 4850만 파운드에 세리에A 디펜딩 챔피언 SS 라치오로 이적,[1][2] 라치오에서 자신보다 1년 먼저 파르마를 떠났던 절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과 재회하며 베론과 파벨 네드베드카렐 포보르스키라는 체코의 황금세대 윙어진의 지원을 받으며, 26골로 전년도 득점왕이었던 안드리 셰브첸코를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하며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떠오르게 된다. 다만 이듬해에는 잦은 부상으로 한풀 꺽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02년에 호나우두를 떠나보낸 인테르에 입단했으나 라치오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이은 잦은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시절 리그에서는 단 18경기에서 7골을 넣는 등 활약은 저조했으나 ,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팀의 주포로 활약했다.
''' 새로운 무대 적응에 애먹었던 첼시 시절'''
2003년에는 크레스포는 정든 이탈리아를 떠나 1680만 파운드에 첼시로 이적하면서 낯선 잉글랜드 무대를 밟게 된다. 두번째 리그 경기였던 울버햄튼전에서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를 대신해서 교체출장으로 2골을 넣으며, 첼시에서의 행보가 밝아보이는가 했지만, 라치오와 인테르에서의 마찬가지로 잦은 부상을 겪으며, 스쿼드를 이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리그 19경기에서 10골을 총 31경기에서 13골을 넣으며 적응기라고 감안하면 나쁘다고는 볼수 없는 첫시즌을 보냈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하여 주전은 커녕 스쿼드를 자주 이탈하면서 월드클래스 공격수로서의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포르투에서 빅이어를 들어올린 명장 주제 무리뉴가 첼시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에게 있어 악연으로 기억될지도 모르는 무리뉴와의 첫만남이 이때 이루어진다. 경쟁자였던 하셀바잉크가 이적하기는 했으나, 직전시즌 리그 1 올해의 선수를 차지한 마르세유의 주포 디디에 드록바에레디비시를 그야말로 씹어먹은 PSV의 득점기계 마테야 케즈만 두명의 뛰어난 센터포워드들이 영입되면서 더욱더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
'''빅 이어를 눈앞에서 놓친 크레스포'''
이에 파르마 시절 은사였던 카를로 안첼로티의 부름을 받고 안첼로티가 사령탑으로 있는 AC 밀란으로 1년간 임대되면서 이탈리아 무대로 돌아왔다. 밀란에서 합류한 크레스포는 부상으로 이해 15경기 밖에 뛰지 못한 필리포 인자기를 대신해서 '무결점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의 파트너로 시즌을 소화했다. 리그에서는 겨우 두자릿수 득점을 간신히 득점하는 수준이었으나, 2004-05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16강전 알렉스 퍼거슨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1,2차전 모두 결승골을 넣으며 침몰시키기도 했으며, 리버풀 FC와의 결승전에서는 전반전에 2골을 집어 넣었다. 하지만 결국 후반전에 리버풀이 투혼을 발휘하며 3:3 동점까지 따라잡았고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이스탄불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었다.[3] AC 밀란에서 크레스포를 완전영입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않아 크레스포는 일단 첼시로 복귀하게 되었다.
첼시에 복귀한 크레스포는 등번호 9번을 받았다. 복귀하고 첼시에서 보냈던 두번째 시즌이었던 05-06 시즌 역시 크레스포의 활약은 결코 못 했다고만 볼 수는 없으며[4] 반면 드록바는 이적 초기부터 그 피지컬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하고 다이빙 논란에 휩싸인 탓에 무리뉴를 제외하고 팬들마저 그를 신용하지 않았기에 크레스포가 더 낫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신임을 잃으면서 드록바에게 밀리게 되었다. 크레스포는 영국 문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언어 문제 및 아내의 유산 등 악재가 겹치며 우울증 증세까지 찾아왔다. 이 당시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했었을 정도. 축구적인 측면보다도 개인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겪게 되면서 실패를 거뒀다. 하지만 은퇴 후의 인터뷰에선 무리뉴와의 관계가 환상적이었다고 밝혔다.
2006년 여름, AC 밀란에서 한솔밥을 먹었던 셰브첸코가 첼시에 합류했고, 이미 드로그바에게 주전자리를 빼앗겼던 크레스포는 또 다시 임대이적으로 전 소속팀이었던 인테르 밀란으로 복귀한다. 임대기간은 2년. 임대라고는 하지만 임대기간이 그의 계약만료기간이었기에 사실상 첼시와의 완전한 이별. 첼시에서의 활약상을 요약하자면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쁘지도 않은 활약을 했다.(리그 49경기 20골, 총 73경기 25골)
하지만 인테르에서도 주전자리를 장담할수 없어보였다. 당시 인테르에는 칼초폴리 사태로 강등된 유벤투스에서 합류한 리그 최고의 재능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팀의 에이스 아드리아누라는 강력한 투톱이 팀의 주전으로 뛸 것으로 기대되었으니 말이다.[5] 게다가 직전시즌 아드리아누를 제치고 인테르 최다 득점자로 활약했던 훌리오 크루스[6]라는 준수한 베테랑 공격수가 그들의 로테이션 자원으로 버티고 있었고 유리몸화 되었지만 왼발의 마술사라 일컬어지는 알바로 레코바는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는 아니었지만 처진 공격수로서 아드리아누나 즐라탄을 받혀주는 듀오로 활약할수 있을만큼 인테르의 공격진은 리그 최고의 뎁쓰와 질을 자랑했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들어서자 2006년 기점으로 아드리아누가 멘탈이 터져버리면서 크레스포에게 주전 자리를 내줘야 했다. 크레스포는 즐라탄과 함께 좋은 모습을 보이며 2007년 5월 13일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팀내 최다득점자로서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하며 성공적인 이탈리아 무대 복귀를 알렸다.
하지만 문제는 임대 2년차인 그 다음 시즌부터였다. 07/08 시즌 아드리아누는 실상 전력 외로 취급되었지만 칼리아리에서 미친 활약을 보인 다비드 수아조가 합류하였고, 이때 커리어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커리어내내 장발을 고수했던 크레스포가 완전히 삭발하며 삼손처럼 기량까지 잃었는지 몰라도 직전 시즌 로테이션자원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던 훌리오 크루스가 더 좋은모습을 보이며, 부진에 빠진 크레스포마저 밀어내고 이브라히모비치와 투 톱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도 이 때까지만 해도 크레스포가 완전히 밀렸던 것은 아니고 크루스의 슈퍼 서브 역할을 대신 이어받은 것이기에 출전 기록이 나쁘지는 않았고 크레스포 본인도 인터밀란에 만족해 첼시와의 계약이 끝난 뒤에도 인터밀란 이적을 택했다. 그런데 08/09 시즌에 평소 자신과 묘한 악연이 있던 무리뉴가 있었다. 이에 스태프들과 불화를 겪으며 13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본인도 2골밖에 넣지 못하는 등 영 좋지 못한 활약을 펼치면서 제노아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기량저하가 이미 뚜렷했기에 제노아에서도 그리 좋지 못한 모습으로 단 한시즌만을 보낸뒤 2009년 여름, 자신의 고향팀인 파르마로 이적해서 3시즌간 활약하며 유로 2012 직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골목대장'''
1993년 U-20에서는 아르헨티나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대회에서 후안 에스나이더가 큰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징계를 받았고 그것 때문에 크레스포는 U-20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해서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나이지리아에게 패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 때 크레스포는 대회 득점왕으로 뽑혔다.[7]
1998 프랑스 월드컵은 6살 많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19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멤버들로 구성되어 출전했다. 아직 전성기였던 바티와 포지션이 겹치는 크레스포는 계속 벤치신세였다. 딱 한 번 그라운드에 나올 기회가 생겼는데 잉글랜드전에서 승부차기.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 다른 선수들은 다 성공한 페널티 킥을 크레스포 혼자 실축하고 만다. 다행히 잉글랜드에서 2명이 실축해서 8강 진출에 성공하나 크루이프 이후 가장 강력한 스쿼드라는 히딩크네덜란드를 만나 데니스 베르캄프의 쓰리터치 결승골로 패배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은 그야말로 아르헨티나 전체의 '''흑역사''', 또한 그에게는 더더욱 흑역사. 조국이 디폴트#s-2 선언[8]한 터라 본선경기가 치뤄지는 대한민국&일본으로 올 때도 선수들의 본인들 사비를 털어 왔으며[9] 같은 조에는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가 묶이며 죽음의 조에 배치됐다. F조에 배치된 아르헨티나는 일본에서 경기를 하게되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던 잉글랜드데이비드 베컴, 마이클 오언 등의 스타들을 앞세워 일본 팬들의 열성적 응원을 받은 데에 비해 아르헨티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야유뿐이였다.[10] 결국 마이클 오언의 할리우드 액션이 속은 주심이 페널티 킥을 주었고 베컴이 성공시키며 1대0으로 패한다.[11]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크레스포는 경기 종료 직전 기어이 득점을 올렸고 그 경기는 마지막 경기인 스웨덴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기장에 주저 앉아 울어야만 했다. 이겨야 할 경기를 이기지 못해 최종적으로 조별리그를 탈락했기 때문이다.[12]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죽음의 조인데도 불구, 코트디부아르를 격파하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6:0으로 격파하는 등 선전했으나 8강에서 독일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만다. 비록 팀은 8강에서 탈락했으나 활약을 인정받아 실버슈를 받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절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지만 자신의 자리에는 곤살로 이과인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차출되지는 못했다. 그걸로 대표팀 여정은 끝이 났다.

3. 플레이 스타일




양발잡이에 공중볼 장악, 테크닉, 드리블, 피지컬, 패스, 슛, 프리킥, 주력(走力), 활동량, 수비가담 모두 뛰어난 완성형 스트라이커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라인 브레이킹과 헤딩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공수 전반을 넘나들며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이었다. 격투기 선수를 연상케 하는 당시로써는 큰 키(184cm)와 단단한 몸(78kg)에서 비롯되는 뛰어난 몸싸움 능력으로 상대 수비수를 몸빵으로 우겨넣는 플레이에 매우 능해 상대 수비수들에게 크레스포는 공포 그 자체였다. 게다가 덩치에 비해 테크닉도 꽤 갖추고 있었으며 당시 정통 타게터와는 다르게 연계능력 또한 준수했다.
크레스포가 선수 시절 전성기를 보냈던 90년대와 2000년대 초는 대부분 투톱을 운용하며 원톱을 쓰는 팀이 희귀했던 시대로 그때와는 달리 2000년대 이후 축구 시류는 변화하여 4열 전술에 원톱이 기본이고 갈수록 원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역할을 요구받게 되어 해리 케인,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같은 선수가 귀중한 자원으로 취급받는 추세를 볼 때 크레스포가 10년 정도만 늦게 태어났으면, 그러니까 리오넬 메시와 같은 세대였으면 더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을 것이다.[13]

4. 지도자 경력


2014년 8월 9일 파르마 칼초 1913의 유소년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4]
2015년 6월 30일 세리에 B 모데나 FC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모데나는 리그 21위를 기록, 3부리그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크레스포는 성적부진으로 한시즌만에 모데나를 떠나게 되었다.
2017년 파르마 칼초 1913 부사장으로 부임하며 친정팀 프런트로 돌아온다.
2018년에는 CA 반필드 감독을 역임했으나, 2019년에 경질당했다.
2020년부터 데펜사 이 후스티시아 감독을 맡고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G조에 속했으나 3위로 코파 수다메리카나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후로 승승장구하며 무패로 5승 3무로 결승까지 달렸고 결승전에서 2대0으로 승리하며 구단에게 첫 우승컵이자 본인 감독 커리어에서의 첫 트로피를 안는 영예를 얻게되었다. 이후 2021년 2월 8일자로 후스티시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차기 행선지로는 브라질 세리 A 명문 클럽인 상파울루 FC가 유력하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CA 리버 플레이트 (1993~1996)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93 A, 1994 A[15]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6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3/94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5
16
0
0
3
0
1994/95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8
4
0
0
4
2
1995/96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1
4
0
0
13
10
1996/97
AC 파르마
세리에 A
27
12
1
0
-
-
1997/98
AC 파르마
세리에 A
25
12
2
0
8
2
1998/99
AC 파르마
세리에 A
30
16
7
6
8
6
1999/00
AC 파르마
세리에 A
34
22
2
0
5
3
2000/01
SS 라치오
세리에 A
32
26
1
0
6
2
2001/02
SS 라치오
세리에 A
22
13
4
4
7
3
2002/03
인터 밀란
세리에 A
18
7
0
0
12
9
2003/04
첼시
프리미어 리그
19
10
0
0
10
2
2004/05
AC 밀란
세리에 A
28
11
1
1
10
6
2005/06
첼시
프리미어 리그
30
10
5
1
5
2
2006/07
인터 밀란
세리에 A
29
14
4
4
6
1
2007/08
인터 밀란
세리에 A
19
4
5
2
5
1
2008/09
인터 밀란
세리에 A
14
2
3
0
0
0
2009/10
제노아 CFC
세리에 A
16
5
1
0
4
2
2009/10
AC 파르마
세리에 A
13
1
0
0
-
-
2010/11
AC 파르마
세리에 A
29
9
2
2
-
-
2011/12
AC 파르마
세리에 A
4
0
2
2
-
-

6. 여담


당대에는 꽤 유명한 선수였지만 후대에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 했는데 첼시 FC에서의 실패[16]와 선수시절 경력 대부분이 세리에 A인점과, 대표팀 동료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존재 때문이다. 국내에서 해외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청하기 시작한 2007년이 전성기 끝물이라서 파트너였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더욱더 주목받았다. 매니아층 사이에서는 '큰외숙모'로 불리고 있다.(...)
2001년에는 이적료 서열 3위였다. 1위가 지네딘 지단, 2위가 루이스 피구였다. 당시 크레스포가 파르마에서 라치오로 이적할 때 세르지우 콘세이상 + 마티아스 알메이다 + 역대 3위에 해당하는 이적료로 이적했다.
남미 지역예선 역사상 최다득점자가 크레스포로서 9골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 11라운드 베네수엘라전에서 국가대표 후배인 곤살로 이과인이 연속 두골을 넣고 동률을 찍었다. 조만간 깨질 듯. 하지만 정작 이 기록을 깬건 국가대표 후배들인 메시나 이과인이 아니라 옆동네루이스 수아레스였다. 수아레스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에서 혼자 11골을 넣음으로서 남미 지역예선 역사상 최다득점 기록을 갱신했다.
주제 무리뉴와 묘한 악연이 있다. 첼시 FC시절 적응에 힘들어 하던 시기엔 무리뉴가 전력외 선수 취급을 하며 출장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고, 인테르로 완전이적한 08-09시즌에는 또 무리뉴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결국 제노아로 이적하게 된다. 제노아에서도 인테르와 맞붙게 되었을때 골을 넣고싶어했다고. 근데 정작 은퇴하고 나선 무리뉴는 승리자라고 인터뷰하는 거 보면 사감없이 프로페셔널한 관계였던 모양. 이 글을 보면 무리뉴와 관계는 좋았던것 같다.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선수는 많으나 딱히 후계자라고 불릴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17] 메시는 대표팀에서는 프리롤로 뛰는데다가 이미 누구의 후계자를 논할 클래스를 벗어났으며 무엇보다 스타일이 처음부터 달랐다. 이과인은 이타적 플레이라는 점에서 떨어지며 중요 경기에서의 활약이 너무 저조하다.[18] 일부에서는 메시, 아궤로, 이과인, 라베시와 같은 유형의 선수는 넘쳐나는데 크레스포와 같은 정통 타켓 스트라이커가 나오지 않는것이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진짜 문제점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막시 로페스로헬리오 푸네스 모리, 루카스 비아트리 등이 언급되고 있다. 현재로썬 전부 실패작이고 공격에 한해선 메시 원맨팀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세대인 1990년대 초반 선수들 중 파울로 디발라, 마우로 이카르디, 루시아노 비에토가 주목을 받았는데 비에토의 경우 침체기를 보내고 있고, 디발라는 2선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프리롤, 트레콰르티스타로서의 경기력을 뽐내고 있어 크레스포와는 유형이 다르다. 이카르디의 경우 초창기엔 전형적인 포쳐 스타일의 선수였으나 점차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서의 여러 재능을 만개하고 있어 전형적 센터포워드의 전형이 될 잠재성을 보이고 있다.
바티스투타에게 밀려 불행한 국대 커리어를 보냈지만 둘의 사이는 좋은 편이다. 마라도나가 '''"그놈들은 골방에서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며 한 명이 죽을때까지 가둬놔야 한다"'''라고 한 발언 때문에 사이가 안좋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티스투타는 2014년에 한 인터뷰에서 2002년엔 우리가 투톱으로 뛰어야 했고 이 사실은 비엘사만 몰랐다 에르난은 경기에서 뛰고 싶어했다 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둘은 세리에 시절 해도 단 둘이 기념사진도 찍었었고 2018년에 기념 사진도 찍는 등 은퇴 후에도 잘 지내고 있다.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이탈리아 여자와도 결혼했다. 이때문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 잠정적으로 은퇴하게 된다.
앙헬 디마리아같은 경우는 팀내에 크로스를 올려도 받아먹을 선수가 없다면서, 크레스포 유형의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축구팬들이 '''크레스포가 1990년생이었으면 아르헨티나가 지금보다 우승을 2번은 더 했을 것이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너무 일찍 태어난 게 문제였다.[19]
축구 이외에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는데 유럽의 인기 종목 중 하나인 'F1' 레이싱이다. 이러한 취미때문인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으며 푸른색의 페라리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로 꼽기도 한다. 락밴드 롤링 스톤즈를 좋아하며 그들의 음반을 자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자신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비롯해 이탈리아어,영어를 구사할줄 안다.
피파 온라인 4에선 준수한 스피드와 강한 몸싸움과 뛰어난 침투, 헤더 능력, 좋은 약발을 갖춰 게임 내 대표적인 만능형 공격수로 꼽히며 호날두, 호나우두와 함께 소위 말하는 대장급 스트라이커중 한명으로 뽑힌다..
아르헨티나 직속 후배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의 이적설에 적어도 3년은 더 인테르에 있으라고 충고했다.

7. 크레스포에 대한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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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은 어느 골목에 가도 대장을 할 것'''

디에고 마라도나

'''이런 훌륭한 선수를 놔두고 겨우 바티따위를 중용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바보다. 8강 이상 못가도 싸다.'''

요한 크루이프

'''크레스포는 2인자로 썩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 1인자가 바티라면 더더욱 아까운 재원이다. 내가 1998년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다면 크레스포를 주전으로 기용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승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을 것이다.'''

요한 크루이프

'''탁월한 기량을 지닌 선수를 팔아서는 안된다. 인테르 밀란이 에르난(크레스포)을 판다면, 나와 인테르 밀란은 서로 얼굴도 마주 보지 않는 사이가 될 것이다.'''

크리스티안 비에리


8. 시종일관 콩라인


에르난 크레스포는 아예 축구선수로서의 그 자체가 '''콩라인'''이다. 물론 1군으로 우승을 했던적또한 많았으나 2등과 2군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 [20]
  •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레스포는 바티스투타에 밀려 2군이였다.
    •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16강에서 만난 잉글랜드와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크레스포는 여기에서 2번째 주자로 승부차기를 했으나 실축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역시 바티스투타에 밀려 2군이 되었다.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넣은 골의 합은 2골.
  • 그가 2골을 넣은 2005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리버풀 FC에게 역전당하며 팀은 준우승
  •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매 경기마다 1골씩 넣어서 팀의 승승장구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미로슬라프 클로제에 밀려서 실버슈를 획득했다.
  • 그가 국가대표 마지막으로 뛴 대회인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는 결승까지 전승을 달렸으나 결승에서 브라질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다.
  • 2012년에 이 양반이 갱신하기 전까지는 축구선수 개인 누적 이적료가 2013년 기준 1억 2100만유로로 역대 2위였다. 현재는 3위. 1위는 1억 6910만 유로의 이 양반, 2위는 1억 2966만 유로를 기록한 이 사람.
[1] 당시 가격은 세리에가 얼마나 뛰어나면서도 거품이 많은 리그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2] 단 이 금액은 오롯이 라치오측의 선수 두명과 현금이 오간 트레이드이며 아닌 금액 역시 라치오측에서 보낸 세르지우 콘세이상마티아스 알메이다의 몸값과 현금을 합한 금액이다.[3] 이해 밀란은 챔피언스리그 '''준우승'''뿐만 아니라 리그 '''2위'''에 머무르면서 '''콩더블'''을 이룩했다.[4] 당시 첼시에서 5경기당 2골이라는 높은 득점력을 보여줬다. 지금이야 메시, 호날두 덕에 저 정도가 빈약해 보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저 정도면 충분히 뛰어난 득점력을 가진 공격수로 평가받을 만 했다.[5] 물론 아들탄 듀오는 이러한 기대치만큼 게임속에서는 환상의 듀오였지만, 실제 아들탄 듀오가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며, 06/07 시즌 즐라탄의 파트너로 가장 많이 소화한 것은 크레스포였다.[6] 빅클럽 선발로 뛰기에는 부족하지만 교체로 나와서는 뜬금골을 잘 넣어주는 맨유의 슈퍼서브라 불리던 솔샤르와 같이 준수한 백업 공격수 정도의 위치였던 선수였지만 이를 계기로 단숨에 주전선수로 급부상하면서 본인의 커리아하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7] 와일드카드였던 브라질의 베베투와 공동수상[8] 국가가 망했어요. 재정적 파산을 선언하는 것이다.[9] 축구협회도 당연히 돈이 없었다. 애초에 국가에 외환이 없는데 축협에 돈이 있을리가....[10] 저때 아르헨티나는 한국과 일본의 유치경쟁에서 한국을 지지했기에 공만 잡으면 항상 야유소리밖에 못 들었다.[11] 이때 오언의 할리우드 액션에 당하며 페널티 킥을 내준 선수가 바로 토트넘 핫스퍼의 전 감독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국대에선 영구퇴출되며 다시는 국대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이때 페널티 킥을 선언한 주심도 축구계 최고의 명심판으로 불리는 피에르루이지 콜리나 주심. 그야말로 시뮬레이션 한 방에 여러 사람의 흑역사가 생겨났다.[12] 정확히 상황을 설명하자면 잉글랜드전에서의 패배로 아르헨티나는 F조 3위로 처져있었다. 결국 스웨덴전에서 승리해야지 16강 확정이었는데 아르헨티나는 이 경기에서 가장 강력한 공격 축구를 선보이며 스웨덴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골을 넣지 못했고 되레 후반 14분 프리킥으로 실점을 내줬다. 후반 43분에 얻은 페널티 킥도 실축했으나 크레스포가 세컨볼을 집어넣은 것. 그렇게 추격의 불씨를 살렸으나 결국 무를 캐며 최종적으로 승점 4점으로 조별리그를 마쳤다. 그리고 스웨덴과 잉글랜드가 승점 5점으로 각각 조 1위와 2위를 차지하며 조 3위로 밀렸다.[13] 크레스포가 메시와 같이 뛰었으면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을 2번은 더 했을 것이란 말도 있다. 특히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독일과의 결승전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득점 기회가 꽤 있었음에도 결정력 부재로 인해 골을 넣지 못하고, 연장에서 마리오 괴체에게 한 방 맞고 패했는데 만일 크레스포가 있었다면 연장까지 갈 필요없이 정규시간 내에 끝내 아르헨티나가 우승했을 것이다.[14] 이시기에 파르마가 파산직전에 빠졌을때 유스팀의 처참했던 상황에 대해 증언한바가 있다. 당시 성인팀도 비참한 상황인데 유스팀은 스포츠 음료, 생수도 살 돈이 없었고 식사도 굶은채경기를 했으며 전기고 수도고 뭐고 다 끊겨서 샤워도 한겨울에 차가운 물로 했어야만 하니 이때문에 선수 대부분이 감기에 걸리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 것.[15] 아페르투라(Apertura)[16] 먹고 튄건 아니다. 출전수 대비 공격포인트는 준수한 편이였으나, 무리뉴가 선택한 선수가 드록바였기에 밀려났다. 플레이 스타일은 둘다 비슷하지만, 피지컬에서 드록바가 한수 위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밀란에서 같이 뛰었던 동료인 셰브첸코역시 첼시에 와서 먹튀화가 되고 말았다. 주제 무리뉴와 크레스포는 2009년 인터 밀란에서 다시 조회한다. 이게 운명의 장난인지...[17] 사라고사, 제노아, 인테르에서 맹활약을 펼친 디에고 밀리토가 그나마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세대차가 얼마 안나는데다, 국대만 오면 부진해서 이내 밀려났다.[18] 특히 브라질 월드컵 결승에서는 패배의 원흉이었다.[19] 굳이 1990년생일 필요도 없다. 1985년생이었어도,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는 뛸 수 있다. 특히, 브라질 월드컵은 크레스포와 바티스투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대회였다. 메시 혼자서 팀을 이끌고 그나마 디 마리아가 도움이라도 됐는데 8강전 부상으로 4강전부터 뛰지못했고 아르헨티나는 4강부터 승부차기를 제외하면 한골도 못넣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득점찬스때 공을 잡은게 팔라시오와 이과인이 아닌 크레스포와 바티스투타였다면 괴체의 결승골이 나오기 전에 승부가 났을것이다.[20] 국가대표 데뷔전이라고 할 수 없는게 애초에 올림픽은 정식 A매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