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실버슈 1998'''[21]


'''베스트팀'''




'''1999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히바우두
2위
데이비드 베컴
3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기타 정보'''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
[image]
''' 이름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Gabriel Batistuta'''
''' 본명'''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
(Gabriel Omar Batistuta)
''' 출생 '''
1969년 2월 1일 (55세) / 레콘키스타
''' 국적 '''
[image] 아르헨티나
''' 신체'''
185cm | 체중 73kg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소속 클럽 '''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88~1989)
CA 리버 플레이트 (1989~1990)
CA 보카 주니어스 (1990~1991)
'''ACF 피오렌티나 (1991~2000)'''
'''AS 로마 (2000~2003)'''
인테르나치오날레 (2003 / 임대)
알 아라비 SC (2003~2005)
''' 국가대표 '''
77경기 54골[1][2] (아르헨티나 / 1991~2002)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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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천사[22], 사자왕 (Re leone)[23], 바티골 (Batigol)
'''주발'''
오른발
'''통산 득점'''
308골
'''SNS'''


1. 소개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평가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어록
7. 바티스투타에 대한 말, 말, 말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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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ACF 피오렌티나AS 로마 등에서 활약했으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도 큰 활약을 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CA 리버 플레이트CA 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199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함께 득점왕을 차지하며 세계의 명문구단들의 주목을 받았다. 바티가 택한 팀은 세리에 AACF 피오렌티나.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였던 후이 코스타와 함께'''
이적 첫 시즌에 13골을 기록하며 순조롭게 리그에 적응했고, 이후 줄곧 절정의 골 결정력을 보인다. 2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지만, 오랜 세월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1994년 팀이 세리에 B로 강등당하기 까지 했다. 당연히 여타 명문팀에서 유혹이 따랐지만,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를 위해서 모든 이적 제의를 거절하고 세리에 B에서 16골을 넣어 다음해 피오렌티나의 재승격을 이끌었다.
피오렌티나 시절 특히 주목할 만한 기록은 세리에 A 11경기 연속골. 이 당시 감독이 바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또한 1999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3위를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바티스투타가 남긴 훈훈한 미담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90년대 후반 세리에 A는 이른바 칠공주시대였다.[3] 일곱 팀이 한발만 삐끗해도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고, 피오렌티나도 그중 한 팀이었다. 하지만 끝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피오렌티나는 재정 문제로 팀의 간판이었던 바티스투타와 후이 코스타를 떠나보낸다. 바티스투타는 2000년 AS 로마로 이적해[4], 00-01 시즌을 치룬다.
이 시즌 AS 로마는 피오렌티나와 벌인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는데,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바로 바티스투타였다. 평상시 기관총을 난사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유명했지만, 이날 만큼은 골을 넣고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렸다. 이날 한 신문은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란 찬사를 바쳤고, 바티스투타가 흘린 눈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국내축구든 해외축구든 이적 문제를 놓고 온갖 잡음을 일으켜 끝내 팬들이 뒷목을 잡게 만드는 사태에 비한다면 실로 동화같은 이야기다.
후에 포포투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른 리그에서 오퍼가 왔음에도 피오렌티나와 맞붙게 될 로마로 이적을 택한 이유를 밝혔는데 당시 오퍼가 왔던 맨유는 자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우승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로마라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켜줄수 있기에 로마를 선택하였다고 밝혔다. 피오렌티나의 재정문제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는데 우승컵 하나쯤은 제대로 들어보고 싶었고 이미 트레블을 달성한 세계적 강팀이었던 맨유보다는 북부팀에 줄곧 밀려온 언더독 로마에 더 마음이 갔다는 이야기.
피오렌티나에서는 자신과 후이 코스타 만으로는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했었기에 떠났다고 밝혔다. 강등된 후에도 팀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전성기를 온전히 바쳤음에도 우승하지 못했으니 그런 생각이 들만하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바티스투타가 우승한 그 시즌. 피오렌티나는 천문학적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며 무너져 7공주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첫번째 주자가 되었다.[5]
이러한 사연을 뒤로 하고 바티스투타는 20골을 기록하며 AS 로마 우승(로마 역사상 3번째이며, 또 한 명의 위대한 스타 프란체스코 토티의 유일한 리그우승)을 견인해낸다.
그러나 우승컵을 든 그해 그는 이미 32세의 노장이었다. 노쇠화로 다음 시즌엔 6골밖에 기록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02-03시즌에 4골을 기록하던 시즌 중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 2골을 추가하는데 그친다. 결국 2003년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카타르의 알 아라비 클럽으로 이적했다.[6] 이적한 첫해 18경기 25골을 기록해 카타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다음 시즌 3경기만을 뛴 채 2005년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축구 관련 일에서 모두 손을 떼고,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2.2. 국가대표


[image]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던 바티스투타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부터였다. 최전방 공격수로 출장한 바티스투타는 베네수엘라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고, 칠레, 파라과이, 브라질, 콜롬비아전 등 중요한 고비마다 골을 터뜨리며 6경기 6득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르헨티나에게는 1959년 우승 이후 32년만의 우승. 득점왕은 당연히 바티스투타의 몫이었다.
2년 뒤인 1993년 코파 아메리카. 이번에도 주전으로 출장한 바티스투타는 볼리비아전 결승골과 결승전 멕시코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조국에 또다시 우승컵을 안겼다[7]. 특히 결승전의 두 골은 각각 바티스투타의 뛰어난 운동능력과 간결한 볼트래핑을 잘 살린 골이었다.

'''그리스와의 경기 中'''
대망의 1994년 미국 월드컵. 첫 경기인 그리스전에서 바티스투타는 무려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무대에 데뷔했다.[8]
득점뿐만 아니라 투톱 파트너였던 클라우디오 카니자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로도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는 승승장구, 하지만 디에고 마라도나도핑 테스트에 걸려 퇴출되며 예상밖의 전력 손실과 팀 분위기 저하 등의 악재를 만나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16강전 상대는 게오르게 하지가 이끄는 루마니아. 바티스투타는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절묘한 개인기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고 침착하게 성공시켰다.

'''루마니아와의 경기 中'''
그러나 경기는 난타전 끝에 루마니아의 3-2 승리로 종료. 그렇게 바티스투타의 첫번째 월드컵도 마무리됐다.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맹활약. 볼리비아, 칠레, 브라질을 상대로 골을 넣으며 4득점을 기록, 개인적으로는 또다시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팀은 8강전에서 브라질과 2대2로 비긴 후 승부차기 끝에 패배, 코파 아메리카 3연패의 꿈이 좌절됐다.

'''자메이카와의 경기 中'''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자메이카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과시했지만, 16강을 거치고 나서 8강이 문제였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만나게 된 것. 결국 네덜란드에게 패해 8강에서 탈락한다.
[youtube]
'''네덜란드와의 경기 中'''
이 때 통한의 슛이 하나 있었는데, 바티스투타 스타일로 원터치 슈팅을 날린 것이 그만 골 포스트에 맞고 만 것. 위 영상의 7분 40초 즈음에 나온다.[9] 최종 개인 득점은 이탈리아크리스티안 비에리와 동률인 5골이다. 재미있는 기록이긴 하지만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조별리그에서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여유롭게 이겼는데 네덜란드는 3/4위전에서 그 크로아티아에게 덜미를 잡혀버린 것이다. 마치 가위바위보같은 전적이 나왔다.
어지간한 공격수는 리그에서 좀처럼 기록하기 힘든 해트트릭을 월드컵 무대에서, 그것도 2개 대회 연속 기록하는 괴수였지만 그가 참여한 대표팀은 그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10]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처음 열리는 땅에서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마지막 투혼을 다짐했지만, '''아르헨티나 정부가 돈 없다고 배를 쨌다.'''
이는 우승 포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비행기표 값도 마련해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경제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바티스투타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선수들이 '''자비'''로 월드컵에 참가하며 일본에 입국했다.[11]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속한 F조 편성이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 ''' 바로 '''죽음의 조'''였다. 게다가 영원한 맞수인 잉글랜드까지 포함된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
운이 없게도 경기를 치룬 일본 열도는 데이비드 베컴 광풍이 일며 베컴과 그의 동료들인 잉글랜드 국가대표들은 거의 국빈 취급을 받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는 찬밥 취급을 받는 등 전반적으로 여건이 불리했다. 일본이 잉글랜드를 일방적으로 응원했으니 절반 정도는 홈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상황.[12] 정작 잉글랜드는 이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실력이 별볼일 없었는데, 아르헨티나와 스웨덴 모두가 이긴 나이지리아와 유일하게 비겼고, 스웨덴과도 비겨 아르헨티나 하나만 이렇게 이기고 16강에 올라왔다.
그래도 당시 아르헨티나 스쿼드와 남미예선 과정이 워낙에 좋았기에[13] 수많은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는 거의 100% 조별 예선을 통과하리라 예상했고 심지어 프랑스를 제치고 우승후보 0순위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결과는 결코 아르헨티나에 닥친 경제 상황처럼 낙관적이지 않았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 中'''
F조 첫번째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와 0:0 팽팽한 싸움을 벌이다 결국 바티스투타의 극적인 결승골로 어렵게 1승을 얻는다. 반면 잉글랜드와 스웨덴이 1:1로 비기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듯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전에서 시뮬레이션에 의한 통한의 페널티 킥[14]을 내주며 통한의 패전을 겪었다. 이는 오언이 아르헨티나 수비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15]에게 꾀병을 부린 결과였다.[16]
마지막 경기인 스웨덴전은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던 중, 경기 막판 크레스포의 동점 골로 마지막 희망을 이어갔지만 끝내 1:1로 비기며 1승 1무 1패로 예선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경제난에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월드컵 개최기간 단 한달 동안이라도 희망을 선사하고자 했던 선수들은 결국 그라운드에 쓰러져 통곡한다. 후반전 발목 부상으로 교체된 바티스투타 역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당시 많은 축구팬을 가슴 뭉클하게 했다. 물론 이걸 지켜보던 바티빠들 또한 함께 눈물을 흘렸다. 결국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경력을 쓸쓸히 마무리하였다.
일세를 풍미했던 실력에 비해 정작 바티스투타 개인이 얻은 수상 기록은 부족했을지언정, 모두가 인정했던 절정의 기량과 그보다 감동을 주던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축구팬들에게 사랑받는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룬 때는 아마도 AS 로마에서 우승한 때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전성기 시절은 피오렌티나에 몸을 담았을 때였고, 지금도 피오렌티나의 레전드로 존경을 받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축구사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부를 만 하다.

3. 플레이 스타일





그의 슈팅에 대한 철학은 '''"왜 슛을 약하게 쏘는가?"'''라고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대포알같은 강슛을 날린다. 단순히 대포알 슈팅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가슴을 뻥 뚫게 만드는 시원스러운 강슛은 소위 말하는 클래스가 남달랐다. 그의 각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쎄기 때문에 가능한 강슛이었다. 강슛으로 유명한 선수지만 항상 강슛만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골키퍼 다리 사이를 노리는 정교한 슛팅이나 키를 넘기는 칩샷도 자주 보여줬다. 슛팅에 있어서는 완전체.
바티스투타의 특기 중 하나는 원터치로 수비를 벗겨내는 움직임이었다. 아래에 서술되어있지만 공 다루는 기술이나 볼 터치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님에도 스루패스나 크로스를 받음과 동시에 상대의 수비를 벗겨내고 슛팅으로 연결하는 움직임이 굉장히 빨랐다. 그래서 그가 넣는 골을 보면 터치 횟수가 많지 않고 슛 타이밍도 굉장히 빨랐으며, 당연히 골키퍼는 한 박자 빠른 슛에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고 멍하니 골을 먹기 일쑤였다. 보는 이들은 그 간결한 터치에 이어지는 강력한 슈팅으로 캐스터가 그의 이름을 '바티'까지밖에 부르지 못했는데 골네트를 강하게 흔드는 골에 대한 관중들의 환호가 들려오게 하는 선수였다.
강한 슈팅 이외에도 직접 프리킥도 준수하게 잘 찼으며, 헤더 또한 엄청났다. 정통 스트라이커의 표본이자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라는 별명은 다른 이유로 붙은 거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현대축구의 흐름이 바뀌기 이전, 스트라이커의 로망을 마지막으로 보여준 선수다.
사실 어렸을 때는 범생이로 축구는 취미로만 했었으며, 한국 나이로 중학교 때 축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볼 다루는 기술은 남미 선수임에도 그렇게 정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바티스투타의 현역 시절 경기를 보면 빠르게 드리블을 할 때 공이 발에서 몇 미터씩 떨어지기 일쑤였고, 공을 발에 딱 붙이고 드리블 할 때면 스피드가 죽었다. 이는 공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 스트라이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었으나, 바티는 이 단점을 타고난 주력(走力)과 각력(脚力)을 살린 돌파와 드리블, 슈팅으로 극복했다. 타고난 피지컬과 스피드가 좋았고, 드리블 시 급격한 방향 전환이나 급 가속에 능숙해서 이를 믿고 상대 수비를 앞에 두고 한 두번 공을 툭툭 차며 전진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급하게 가속을 하는 식으로 상대를 따돌렸다. 심지어 이런 급 가속이나 급 방향 전환을 연속해서 여러 번 사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상대 수비가 느리다면 바티스투타는 공을 길게 차넣으며 스피드로 뚫어버렸고 상대 수비가 순발력이 없다면 급 가속 및 급 방향전환으로 뚫어버렸다.
다만 이런 드리블은 "아 저건 보기만 해도 무릎이 아파 보인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릎 뿐만 아니라 다리 관절에 부하를 가하게 되는데, 하물며 강슛까지 난사해 댄 그의 무릎에 걸리는 부하는 엄청났을 것이다. 은퇴 후 그가 다리 관절 문제로 고생하게 된 것도 이런 플레이 스타일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고전적인 스트라이커의 마지막 계보로 일컬어지는 만큼 패스는 그렇게 주목받는 능력도 아니었고, 실제로 킬패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탐욕왕이라고 불릴 만큼 패스를 안 하거나 못 하는 선수도 아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클라우디오 카니자와 보여준 콤비 플레이, 피오렌티나에서 후이 코스타, 에드문도와 보여준 연계를 본다면 한국 인터넷 상에서 떠돌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플레이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록상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바티스투타는 카타르 리그 시절을 제외하고 남미와 유럽에서 뛴 88~03 시즌 동안 클럽에서 89어시스트, 국가대표에서는 1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바티스투타를 비판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크레스포보다도 더 많은 수치다.#

4. 평가


공격 자원이 많다 못해 흘러 넘치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공격 자원이다. 특히 원톱 자원으로 활약했던 선수 중에서는 아르헨티나 역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 FIFA가 제작한 2018 월드컵 본선진출국 프로필에서는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2인으로 선정되었다. (현역인 리오넬 메시는 제외)
훌륭한 피지컬과 역대 최고 수준의 슈팅 능력으로 당시 독보적인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를 평정했으며 호나우두, 호마리우, 로베르토 바조, 마르코 판 바스턴, 데니스 베르캄프, 앨런 시어러, 위르겐 클린스만 등과 함께 1990년대 축구팬들에게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렸다.[17] 특히 바티스투타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수와 열심히 싸우고 아군의 패스를 받아 어떻게든 골을 넣는 데에 주력하는 정통파 스트라이커의 정수와도 같은 선수였다.
국가대표팀에서는 메시 이전의 A매치 최다골 기록을 보유했으며 동포지션 라이벌이었던 크레스포와의 주전 경쟁에서 판정승을 거두었다. 월드컵 무대에서도 팀의 간판 스타이자 주포로 활약했다. 켐페스발다노처럼 월드컵 우승팀의 공격수가 되지는 못했으나 무관에 그친 이과인, 아궤로와 달리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인 코파 아메리카 2연패를 이끌었고 커리어 후반기엔 침체에 빠진 팀을 이끌고 대부분의 득점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위대한 스타로 칭송받는다.
고등학생 나이가 되어서야 축구를 시작해서 볼터치와 기본기가 투박하고 경기를 읽는 시야에 다소 한계가 있었지만, 그만의 스타일로 단점들을 극복해 1990년대 아르헨티나 축구의 심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물론 동시대의 다른 스타급 선수들에 비해 기술의 완성도 측면에서 한계가 있었다는 뜻이지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을 만큼의 기본기는 갖추었기에 스타급 활약을 보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1991, 1993
    • 킹 파드컵[18]: 1992
    •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 1993

5.2. 개인 수상



6. 어록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나 바티스투타는 나의 뿌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귀화하기엔 나의 조국 아르헨티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포르투갈로 귀화하라는 후이 코스타의 말에

'''여전히 내 영혼은 피오렌티나에 있다. 비록 지금은 다른 팀이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 또한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해줄 것이다.'''

AS 로마 이적 후


7. 바티스투타에 대한 말, 말, 말


'''나는 많은 팀의 감독을 맡아봤지만 바티스투타만큼 훌륭한 골잡이를 본적은 거의 없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내 생애 바티스투타같은 공격수는 본적이 없다. 그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카타 고지

'''바티스투타의 위대함은 그와 같은 팀에서 뛰게 되면 100% 깨달을 수 있다.'''

프란체스코 토티, 2000-01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한 이후 인터뷰 중에서

'''바티스투타와 크레스포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고의 선수를 갖고 있어도 기용하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디에고 마라도나, 2002 월드컵에서 바티스투타와 크레스포를 투톱으로 기용해야 한다며

'''바티스투타는 정말 놀라운 선수다. 그는 항상 어떻게 하면 골을 넣을 수 있을지 깊게 생각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 더욱 놀라운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티스투타의 컨디션이 불과 2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란체스코 토티, 바티스투타가 AS 로마로 이적해온 직후 기자들이 바티에 대한 소감을 묻자

'''바티스투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다. 하지만 나 역시 지난 몇년간 유럽 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왔다. 나와 바티가 함께 뛸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으며, 투톱으로 뛰게 된다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에르난 크레스포

'''내 소원이 하나 있다면 바로 바티스투타를 포르투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

후이 코스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본선 진출에 실패한 이후)


8. 여담


  • 바티골이란 애칭은 중계를 하다 보면 '바티ㅅ...골!'할 정도로 빠른 슛팅 때문이라는 통설이지만, 사실 유래는 아르헨티나 중계진이 당시 유행어에 맞춰 애드립을 친 것이라고.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그럴싸해서 팬들에겐 바티골로 굳어버렸다.
  • 피오렌티나 시절 100경기 출장 기념으로 홈구장 앞에 실물 사이즈 동상을 세워준 일화도 유명하다. 현재 이 동상은 공식적으로는 '철거'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AS 로마로 이적한 뒤 상심한 팬들이 부숴버렸다고도 한다.
  • 최근 월드컵 해설을 위해 남아공에 갔다가 강도를 당해 가진 돈을 싸그리 털렸다고 한다. 지못미.
  • 최근 은퇴 직후 오랜 선수생활로 다리 연골과 인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집안에서 다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여 절단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철심을 박는 수술을 통해 다행이 절단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와전된 이야기로, 바티스투타의 아들에 따르면 치료 과정중에 고통이 심해 바티스투타가 차라리 확 잘라버릴까라는 식으로 한 마디 툭 던진 것이라고 한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쳐 축구를 다시 시작했을만큼 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 옆동네 공격수인 루이스 수아레스의 첫 번째 우상이 바티스투타로, 수아레스는 어렸을 적 골을 넣은 뒤 항상 그의 이름을 외쳤다고 한다. [19] 수아레스의 국가대표팀 동료 에딘손 카바니 역시 그의 열렬한 팬이라 장발을 고수하고 있다고.
  • 요한 크루이프가 가장 싫어하는 축구 선수로 유명했다. 본인이 아르헨티나 감독이였으면 절대 바티스투타를 안쓰고 크레스포를 썼을것이며 원맨팀보단 조직력을 하나로 모아서 경기를 진행해 당연히 압도적으로 우승했을거라는 비난을 상당히 했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은 했지만 어정쩡한 공격력으로 바티스투타 원맨팀이라 조롱받으며 충격적이게도 조별예선에서 광탈했다.
  • [20]
  • 축구잡지 포포투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은퇴후에는 폴로를 즐기는 듯 하다. 다만 여기선 포지션이 공격수가 아니라서 축구선수 시절만큼 골을 많이 넣지는 못하는 듯.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공격수들 중 4위에 이름을 올렸다.

[1]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였지만 2016년 6월 22일에 후배 리오넬 메시가 그 기록을 경신하였다. 바티스투타는 메시가 자신의 기록을 깨서 약올랐지만 넘사벽에 이은 2위 자리라 나쁘지 않다고 말했고, 메시가 자신이 넣은 골의 두 배를 넣을 거라는 덕담도 덧붙였다.#[2] 바티스투타가 2골을 기록했던 1995년 슬로바키아와의 A매치를 공식 A매치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56골에서 54골로 수정되었다[3] AC 밀란, 인테르, 유벤투스, AS 로마, 라치오, 피오렌티나, 파르마[4] 이적료가 약 400억원으로, 당시 축구 역사상 두번째로 높은 이적료였다. 노쇠화가 시작될 나이인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금액이다.[5] 2번은 2002년 구단주가 회계조작으로 구속된 라치오, 3번은 2003년 모기업이 파산한 파르마. 3팀 모두 눈앞의 성적만 보고 방만한 재정운용을 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렀다. 그나마 피오렌티나와 라치오는 팀을 추슬러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칠공주 시절에도 가장 약했던 파르마는 사기꾼 구단주 만나 한번 더 파산하고 세리에D로 굴러떨어져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했다.[6] 당시 세대교체의 일환으로 이때 카푸AC 밀란으로 이적시켰다.[7] 그러나 이것이 현재까지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이 돼버렸다.[8] 이전 글에서 "마라도나가 발만 대면 골인 어시스트를 해줘서 바티스투타가 해트트릭을 했다."라는 식으로 적었는데, 경기를 안 보고 상상으로 적은 글이다. 이 날 바티스투타가 마라도나에게 받은 어시스트는 단 하나. 그것도 하프라인 부근에서 받은 패스를 몰고 들어와서 넣은 데뷔골이다.[9] 이전 서술에는 골대를 강타한 초강력슛이 하프라인 가까이 까지 날아갈 정도였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쌔게 맞긴 했어도 맞고나서는 비실비실하게 코너킥 부근쪽으로 굴러갔다. 슈팅을 골키퍼가 맞았으면 기절했을 거라는 서술도 있었는데, 당연하지만 절대 그정도는 아니었다.[10] 그러나 이 해트트릭 기록을 당시 월드컵에서 처녀출전한 그리스자메이카와 같은 약체를 상대로 양학했다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지만 월드컵 무대에서는 아무리 명망있는 월드클래스 선수들도 양학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들도 허다하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선수인건 맞다.[11] 사실 이것도 확인이 필요하다. 월드컵은 FIFA가 본선 출전국에 지급하는 배당금에 참가 준비금과 체제비 명목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다 항공권은 협회 스태프 몫까지 FIFA가 직접 지불하게 되어 있으며, 또한 이건 실제로는 대회별 파트너 항공사가 부담한다. 당장 2002년 대회의 경우 전해 12월에 팀당 100만 스위스 프랑(당시 환율로 약 7억 3천만원) 규모로 준비금이 집행되었다. 기사. 대표팀 멤버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대회전 소집훈련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아예 선수들이 유럽에서 자비로 직접 일본으로 간 것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아르헨티나에 소집된 선수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데 지장이 생길 이유가 없다.[12] 사실 아르헨티나도 열렬한 응원을 받았으나, 잉글랜드에 비하면 새발의 피. 참고로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인들은 응원단을 둘로 짤라서 양쪽 모두를 응원했으나 일본인들은 일방적으로 인기있는 팀들을 응원했다. 당시 잉글랜드,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의 경기들을 보면 이게 일본인지 응원받는 나라의 홈인지 구별이 안 되는 상황이다. 심지어 에콰도르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국가연주 때 일본인들의 야유를 받았고 덴마크도 경기 내내 야유를 받았다. 스웨덴과 세네갈의 16강전 때는 유명한 선수가 더 많은 스웨덴을 일방적으로 응원했고, 심지어 일본인들은 잉글랜드의 국가를 따라불렀다! 마치 2018년의 중국과 같았다. 중국 축구팬들도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에 나갈 실력이 도저히 안 되니까 독일이나 브라질 같은 강하고 인기 많은 팀을 응원하는 문화가 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F조 한국과 독일 경기에도 독일인의 탈을 쓴 중국인들이 정말 많이 왔다. 그리고 토토에 돈까지 꼴아박고 자살한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일본처럼 대놓고 독일 국가를 따라부르거나 한국에게 야유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지금이야 아시아의 4강 취급받는 일본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월드컵 겨우 한 번 나가본 일본이었다.[13] 라이벌 브라질을 쳐발라버리고 조 1위로 예선통과. 반면에 브라질은 감독까지 교체하는 어려움 끝에 악전고투하며 3위로 겨우 본선행 티켓을 얻었다.[14] 확실히 마이클 오언의 시뮬레이션이다. 이를 2006년에 데이비드 베컴이 인정했다. 베컴이 이것을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인정하면서 같이 한 말이 '''"내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입장이였어도 손으로 공을 넣었다."'''라고 대놓고 말했다.[15]파리 생제르망 FC 감독.[16] 이 월드컵 이후,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는 두 번 다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시뮬레이션을 인정한 백암선생은 1998년 월드컵 당시 디에고 시메오네의 다리를 걷어 찬 것으로 국가대표에 다시는 못 승선할것 같았지만 4년 후 이 악연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17]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도 있지만 그는 윙어 포지션에서의 출전 경험도 매우 많으므로 정통 스트라이커로 분류하기에는 애매하다.[18]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의 전신.[19] 사실 우루과이랑 아르헨티나의 외교 관계나 국민 감정은 매우 좋기 때문에 우루과이 국민이 아르헨티나 선수를 응원하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20] 정확하게는 축구선수 바티스투타의 이름을 딴 이한철의 애견에 대한 노래이다. 가사중에 '내가 공을 던지면 너는 어느샌가 내 앞에 있어' 라는 표현만 봐도 이는 명확하다. 골든 리트리버였다고 하며 아마 바티스투타의 긴 금발에서 이름을 따온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