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포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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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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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의 축구인. 현역 시절 라리가에서 2차례나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정상급 공격수로 활약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하며 우루과이의 두 번째 황금기를 이끌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대활약으로 유명해졌다.[1]'''당신과 함께한 모든 시간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대표팀은 물론 그라운드 안팎에서 엄청난 동료였다. 우루과이 국가대표팀의 역사와 우루과이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줘 고마웠다.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도 고맙다. 포를란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선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다. 나의 우상과 플레이할 수 있던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당신은 우루과이의 전설이다.'''
'''포를란과 함께 뛴 경험은 내 커리어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는 골을 정말 잘 넣었고 항상 팀을 위해서 뛰는 선수였다.'''
'''루이스 수아레스'''
2.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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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CA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1부 리그 팀인 CA 인데펜디엔테에서 성인리그 데뷔를 했고, 팀의 주전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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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002년, 당시 포워드 자원을 찾고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딱 내가 원하는 타입의 공격수!'라고 하며 8m의 이적료를 들여 데리고 왔다. 지금의 트레이드 마크인 폭풍간지골도 가끔 넣어주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워낙 들쑥날쑥한 실력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2] 결국 2003-04 시즌을 마지막으로 비야레알로 이적했다.
이 시기 포를란이 실패했던 이유를 분석해보면, 아무래도 선수 특성과 당시 맨유의 상황, EPL 의 특징 등이 하나같이 안 좋은 시너지를 냈다. 당시 맨유는 긱스, 베컴이라는 존재로 인해 전 유럽 축구팀 중 페널티 박스 안으로 공을 투입해 줄 수 있는 능력만큼은 최고 수준인 팀이었다. 여기에 스콜스까지 있었으니 뭐...
하지만 포를란은 경기를 읽는 눈이 좋고, 당대 최고의 슈팅 스킬에 나름의 발재간을 가진 다재다능한 선수였지만 수비수와 몸싸움을 해가며 박스 안에서 버텨주거나 수비수를 압도할 수 있는 주력을 갖춘 선수는 아니었다. 아래에도 나오겠지만 포를란은 스트라이커로 활약할 때에도 박스 안쪽 보다는 살짝 바깥쪽에서 가장 무서운 선수였는데 당시 맨유가 가진 자원을 생각하면 이렇게 박스 바깥에서 활약해 주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롤이 겹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었다. 당시 맨유에게 가장 필요했던 포지션은 박스에서 머물면서 베컴과 긱스가 뿌려주는 크로스와 스콜스의 롱패스를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선수였는데 이건 반 니스텔루이를 따라갈 수가 없으니...
아이러니하게도 퍼거슨 감독은 반 니스텔루이처럼 '나는 공격수!'같은 마인드를 가진 선수를 싫어했고, 포지션 분업화를 싫어했다. 포를란과 반 니스텔루이의 플레이 스타일만 놓고 보면 퍼거슨은 포를란의 스타일을 더 좋아했을수도 있다.
아마 퍼거슨은 포를란의 준수한 드리블, 최상급 슈팅 능력, 경기를 읽는 눈을 보면서 최종적으로는 맨유 시절 전성기 호날두와 같이 파괴적인 프리롤 공격수로 성장해 주길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포를란은 주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드리블도 호날두처럼 파괴적이지 않았으며 EPL 의 거친 수비들 사이에서 볼 키핑을 할 능력도 부족해 반 니스텔루이에게 밀려나고 만다.
2004-05 시즌 개막전 첼시 FC와의 경기 전 퍼거슨은 포를란에게 비가 내리니 긴 스터드의 축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설 것을 임했다. 하지만 짧은 스터드를 선호하는 포를란은 퍼거슨의 말을 듣지 않았고 전반전에 결정적인 골 찬스를 날리게 된다. 하프타임 라커룸에서 포를란의 짧은 스터드의 축구화를 본 퍼거슨은 분노하며 포를란의 축구화를 땅바닥에 내팽겨쳤고, 이것이 포를란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뛴 마지막 경기가 된다.
2.3. 비야레알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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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비야레알에 새 둥지를 튼 포를란은 프리메라리가 데뷔 시즌부터 기량이 만개하여 사무엘 에투, 호나우두, 히카르두 올리베이라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38경기 25골로 피치치(득점왕)를 차지[3] , 자신이 본래 먹튀급 실력이 아니란 것을 톡톡히 증명한다. 그 뒤 2시즌을 더 뛰면서 비야레알의 주포로 활약한다.
맨유에서 실패를 겪은 포를란이 비야레알에서 성공한것은, 비야레알이라는 팀의 매우 보기 드문 특징에서 기인한다. 비야레알에는 후안 로만 리켈메가 있었고, 리켈메같은 클래식한 10번 스타일의 플레이메이커는 그 선수가 팀의 중심이 되어야 기량을 100% 발휘할 수 있었다. 이에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은 리켈메를 팀의 주축으로 활용하면서 과장 좀 섞어 리켈메의 비야레알이라고 할만한 전술을 짰고, 그 결과 조금 과장하면 비야레알이 공을 갖고 있는 시간의 90% 정도가 리켈메가 공을 끌고 다니는 시간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리켈메의 볼 점유를 극한으로 높였다. 거기다가 리켈메가 이렇게 자신을 위해 짜여진 전술을 바탕으로 기량을 120% 발휘하며 볼 키핑에 탈압박에 킬패스나 중거리 슛 등등 온갖 플레이를 다 하다보니 수비수들의 온 신경은 리켈메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러다보니 페널티 에어리어든 그 밖이든 포를란에게 여유 공간이 많이 생겨났다. 여기에 라리가의 전반적인 플레이스타일 자체가 EPL에 비해 거친 파울이나 몸싸움보다는 기술축구를 하는 점도 포를란에게는 더 편했다.
그러나 수비수들이 이젠 포를란에게도 공간을 내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중 견제를 시작하자 성적이 급락하며 두 번째 시즌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45경기 13골로 파괴력이 현저히 줄어든 모습을 보였고, 결국 포를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리켈메 빨로 득점왕 한 번 먹은 슈팅 셔틀' 정도가 되어버렸다. 안습. 그 때문인지 비야레알도 포를란이 그 다음시즌 리그에서 36경기 19골을 넣으며 반등의 기미가 보이자 21M 유로를 받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팔아버린다.
2.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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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띠 최후의 득점왕'''
2007-08시즌을 앞두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페르난도 토레스를 리버풀 FC로 이적시키며 공격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그 자리에 포를란을 영입해 공백을 메우려고 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포를란은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투톱을 이뤄 뛰었고, 07-08 시즌 모든 대회를 통틀어 53경기 23골 5도움을 기록하며 좋은 기세를 이어나간데 이어 08-09시즌에는 리그에서만 '''33경기 32골 10도움'''이라는 미친 퍼포먼스를 과시하며 생애 2번째 피치치를 수상했다. 두 시즌동안 포를란-아구에로 투 톱이 리그에서 기록한 골이 무려 84골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과 바르샤 바로 다음가는 수준의 공격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붙은 별명이 '''불꽃 남자'''.
09-10 시즌에도 모든 대회를 통틀어 56경기 28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코파 델 레이에서도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으나 끝내 세비야에게 2대0 패배 준우승했고, 챔피언스 리그는 플레이오프를 통과하여 D조에 들어갔지만 첼시와 포르투에 밀려 3무 3패를 기록했고 포를란은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침묵했다. 그나마 골 득실차에서 앞서 아포엘 FC를 4위로 밀어내고 유로파에는 갈 수 있었는데, 꿩 대신 닭이라고 유로파에서 승승장구하며 우승을 거두었고 포를란도 결승전에서 풀럼을 상대로 2골을 넣는 등 9경기 6골의 활약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종료 후 2010 월드컵에 참가하였고 알다시피 월드컵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다. 이 즈음 전성기를 구가하던 포를란은 FC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유수의 빅클럽들과도 링크가 떴었다.
10-11 시즌 리그 1라운드에서 멀티골, 2라운드에서도 골을 기록했으며 11라운드에서 2골 1도움을했지만, 이 시즌부터 잔부상과 기복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이에 따라 당시 다비드 비야와 리오넬 메시, 페드로 로드리게스의 롤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던 백업을 찾던 바르셀로나와의 링크 역시 사라진다. 결국 모든 대회 통틀어 42경기 10골 5도움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기고 시즌 종료 후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게 되었다.
알레띠 시절 포를란은 그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모든 조건이 포를란이 뛰기에 최적인 조건이었다. 세르히오 아구에로는 포를란에게는 없었던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의 볼 운반과 돌파 능력이 있었고 거기에 마무리도 할 수 있었으며, 사이드나 조금 처진 위치에서 이 둘을 보조하던 시망 사브로자는 아구에로만큼의 결정력은 없었지만 주력과 테크닉을 이용한 우수한 돌파능력과 크로스 능력을 갖췄다. 덕분에 수비수들의 주의가 이 두 선수에게 쏠리며 상대적으로 포를란을 향한 압박의 강도가 낮아졌고, 그러면서 포를란은 한 박자 빠른 논스톱 원터치 슈팅이나 좋은 위치선정을 이용한 세컨볼 선점을 통해 달리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도 다른 시즌에 비해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포를란 본래의 장기인 중거리 슛의 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기서 때리겠나' 싶은 위치에서 때려버리는, 그리고 골을 넣는, 웬만한 캐논 슈터들도 잘 해야 한 시즌에 한 번이나 보여줄까 말까한 골을 시즌마다 네다섯번 씩은 보여줬다. 여기에 온더볼 상황에서도 드리블을 해가며 상대 수비수에게 중거리 슛 아니면 아구에로/시망을 향한 스루패스를 통한 침투라는 강제적 이지선다를 걸 수 있었다. 상대가 후방의 침투를 우려해 소극적으로 수비하면 빈 공간에서 포를란은 환상적인 중거리 슛을 꽂아버렸고, 이 때문에 포를란을 향해 가깝게 붙으면 반 박자 빠른 침투 패스로 아구에로와 시망에게 찬스를 만들어줬다.
다만 이 셋 모두에게 없는 능력치 때문에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크로스를 잘 받아먹는 선수가 없었다는 점. 전성기 포를란의 골들을 모은 영상을 보면 아군의 돌파 후 크로스에 의한 골은 별로 없고, 흘러나온 공을 집어넣거나 도박과도 같은 원 터치 슛 아니면 강력한 중거리 슛이 대부분이다. 당시의 아구에로는 부족한 신체조건 때문에 높은 크로스에 대응할 수 없어 주로 측면으로 빠지며 돌파한 뒤 가운데로 볼을 투입했으며, 시망도 애초에 득점에 특화된 중앙 공격수가 아니었다. 대신 아구에로나 시망이나 둘 다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라서 측면 돌파에 이어 중앙으로 볼을 투입해줄 수 있었지만, 정작 최전방의 포를란이 안정적으로 받아서 버텨주거나 연계를 못 하고 도박적인 원터치 슛이나 흘러나온 공 주워먹기 에 주력했다는 건 당시 아틀레티코 공격진의 크나큰 단점이었다. 일부러 박스 바깥으로 나가서 공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무리 중거리 슛 성공률이 좋아도 결국 중거리 슛이다. 박스 안에서의 슛과 비교하면 성공률이 현저히 낮다.
포를란이 공을 잡고 들어올 때도 문제가 있었다. 포를란은 스킬이나 패싱 센스는 갖췄지만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 수비를 떨치거나 철벽의 볼키핑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포를란이 공을 잡고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아구에로가 공을 잡고 있을 때에는 박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이드로 밀어붙이고 크로스를 강요, 시망이 공을 잡고 있을 때에는 좋은 크로스 툴을 제대로 살릴 수 없도록 나머지 둘을 집중 마크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파훼법이 나왔으며 결국 시간이 지나며 공격력이 약화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그나마 수비력이라도 뛰어났으면 모르겠는데 당시 알레띠는 이 세 명의 공격력에 승부를 거는 팀이었기에...
한편으로는 포를란의 노쇠화가 시작된 것 역시 이 즈음이다. 피치치를 달성한 이후 포를란의 골 기록, 경기 내용은 하락 일로를 걸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2011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이후의 커리어는 이게 과연 라리가 득점왕 2회, 유러피언 골든슈 2회, 2010 남아공 월드컵 골든볼,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된 선수와 같은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폼 하락을 보여주었다.
2.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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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30일 FC 안지 마하치칼라로 떠난 사무엘 에투의 대체자로 인터 밀란으로 이적했다.
리그 데뷔전인 US팔레르모 원정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리그 데뷔골을 득점하였지만 팀은 4대3 패배
하지만 이적 후에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하면서 인테르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사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마지막 불꽃이었고, 30대에 접어든 포를란은 저물어 가는 별이었다. 인터 밀란에서의 그는 기복도 심했고, 전체적인 기량 저하가 왔다. 애당초 그가 전성기를 보낸 비야레알과 ATM 시절은 25~30세로 선수로써 최전성기를 달릴 때였고 남아공 월드컵때는 이미 31세였으니 인테르로 이적한 시점엔 32이 넘어가는 노장으로 분류되었다. 인테르 또한 주축 선수들을 연속해서 팔려가면서 팀 전력이 급격하게 하락하면서 포를란도 여기에 휩쓸리면서 부진에 빠져들었다. 또한 이는 같은 팀의 동갑 선수인 디에고 밀리토도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그나마 밀리토는 2011-12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4골을 넣어주며 트레블 시절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포를란은 애초에 그런 것도 없었다.
2011-12 시즌 성적은 20경기 2골 3도움. 그야말로 완벽한 먹튀로 낙인 찍혔고, 시즌 후 인테르를 떠나게 된다.
2.6. SC 인테르나시오나우
2012년 7월에 브라질 리그의 인테르나시오나우로 이적했다. 두 시즌을 뛰면서 34경기 10골을 기록했다.
2.7. 세레소 오사카
2014년 1월에 일본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와 계약을 맺었다는 오피셜이 떴다. J리그로서는 오랜만에 월드스타급 네임드를 영입한 셈. 주목할만한 점은 포를란이 세레소 유니폼을 입고 뛰는 공식경기 데뷔전이 한국에서 열린다는 것. 2014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첫 경기를 포항 스틸러스와 갖게 되는데 이 경기는 포항의 홈경기장인 스틸야드에서 2월 25일 열렸다.
후반 18분 교체출전하여 30분 동안 그라운드를 누볐는데 단 한번도 슈팅을 하지 못했다. 아직 팀에 적응이 덜 된 듯 하다. 그리고 세레소 안방에서 포항에게 0-2,산둥에게 1-3으로 참패할때 별다른 활약도 못하며 예상되었던 거랑 달리 그다지 큰 도움이 못되었다. 그나마 최약체라던 부리람 유나이티드와의 안방경기에서 드디어 첫 AFC 챔피언스리그 골을 기록하며 4-0 승리에 기여는 했지만. 정작 중요한 고비인 산둥과 포항전에선 '''조깅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 6차전 산둥 원정에서 막판 역전골을 넣으면서 2-1 팀 승리에 기여, 아슬아슬하게 팀의 16강진출을 도우며 모처럼 이름값을 했다.
리그에선 7경기 출전해서 감바 오사카전에서 2골을 기록한 걸 비롯하여 3골, 아챔리그 골까지 2014년 4월 중순까지 4골을 기록 중이다. 그러나 2014년 말에 들어서 팀은 최하위권으로 추락, 강등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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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팀이 강등당하고 찍힌 사진이다.
결국 세레소 오사카는 강등당했다. 연봉 6억 엔(약 54억원)을 받은 포를란의 최종성적은 리그에서 26경기 7골, 컵대회까지 포함하면 34경기 9골. 그래도 계속 일본에서 뛰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소원대로 재계약을 했는데 6개월동안 27억원이다. 한달 월급이 4억 5천만원인 셈인데 2부리그에서 쓰기에도 엄청난 돈이고 무엇보다 폼 떨어진 벤치멤버한테 쓴다는 게... 어쨌든 6개월 연장 계약 후 2015시즌 2부리그에서 16경기에 출전해 팀 내 최다인 10골을 터뜨리면서 그나마 활약은 했지만, 당연히 세레소 오사카 팬들에게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2015년 6월 7일, 소속팀에서 방출되며 자유계약 대상자가 되었다.
2.8. CA 페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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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자신이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조국 우루과이의 클럽인 페냐롤에 24년만에 돌아와 뛰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1년 6개월.
2.9. 뭄바이 시티 FC
2016년 8월 13일 트위터를 통해 뭄바이 시티 입단을 정식으로 알렸다. 2017년 1월 1일에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려났다.
2.10. 킷치 SC
2018년 1월부터 6개월간 단기 계약을 맺었다고 아르헨티나의 온라인 신문 '인포바에(Infobae)'가 보도하면서 페냐롤로 복귀하는 듯 했으나 끝내 홍콩의 킷치로 이적했다.
2018년 2월 20일, 소속팀이 대한민국의 축구단인 전북 현대 모터스와 대결하게 되면서 꽤나 흥미로운 빅매치라 생각했지만 정작 전북에 6골이나 헌납하고 포를란은 아무것도 못했다 안습...
2.11. 은퇴
킷치를 떠난 지 1년이 넘은 2019년 8월 7일, 자신의 SNS를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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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처음 알려진 때는 2002 한일월드컵. 우루과이 국가 대표로 참가했는데 당시 우루과이의 간판 공격수는 알바로 레코바, 다리오 실바[4] 였기 때문에 그리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대신 세네갈 전에 출전하여 폭풍간지 만회골을 하나 넣었다.
그리고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파라과이에게 두골을 넣는 미친 활약을 펼치면서 우루과이의 코파 최다 우승을 이끌었다! 이번 시즌 부진 했다지만 역시 클래스는 어디 안 간다.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의 운명인 '주워만 먹는 선수'라는 비난들을 뒤로 하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우루과이의 플레이 메이커로 활약.[5] 5골을 터트리는 기염을 보이며[6]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골든볼의 주인공에 등극했다. 준우승국도 아닌 4위 팀에서 골든볼 수상자가 나오기는 포를란이 역대 최초. 오오 찬양하라 오오. 잘 감기지 않고 반발력이 심하다고 온갖 욕을 다먹었던 자블라니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다뤄내며 팬들에게 '''자블라니 마스터'''라는 칭호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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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전에서 나온 원더 골'''
5골 중 4골이 폭풍간지+순도100% 골. 첫 번째 골은 개최국 남아공을 상대로 문전에서 쏜 중거리슛, 두 번째 골도 남아공을 상대로 넣은 PK골, 세 번째 골은 가나를 상대로 넣은 프리킥 골, 네 번째 골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터뜨린 중거리슛, 다섯 번째 골은 독일 수비진들을 모두 벙찌게 만든 발리슛. 이 때문에 월드컵 16강전 당시 메시와 함께 자웅을 이루며 한국 대표팀에게 두려움을 선사하였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감동한 우루과이 축구협회에서 그의 업적을 기려 앞으로 우루과이 리그 득점왕 타이틀 별명을 디에고 포를란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도 출전했다.다만 나이 때문인지 별다른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우선 포를란이 출전한 경기를 보면 루이스 수아레스가 부상, 혹은 징계로 나오지 않은 경기다. 코스타리카 전에서도, 콜롬비아 전에서도 제대로 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조기에 교체당했다. 그리고 팀도 16강에서 콜롬비아에 2:0으로 지고 탈락했다.
2015년 3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4. 지도자 경력
4.1. CA 페냐롤
2019년 12월 20일 CA 페냐롤에서 포를란을 총감독으로 영입하겠다고 발표했다. 2020년 1월 1일 취임했으나 코로나 19 여파로 3경기밖에 치르지 못하고 리그가 중단되었다. 중단된 시점 기준으로 페냐롤은 리그 8위였다. 리그 재개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며 8개월 만에 경질 당하였다. 그 유명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가 생각나는 대목.
5. 플레이 스타일
대한민국에서는 과소평가와 과대평가가 공존하는 선수이다. 현역 시절 전성기를 맞은 팀이 유명하거나 인기 있었던 팀이 아닌 점, 선수로써 말년이 그렇게 잘 풀린 편은 아니라는 점 때문에 과소 평가를 받지만, 반대로 단순한 스트라이커 뿐만이 아니라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모습도 보여준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과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과대평가에 대한 반감이 다시 과소평가를 낳고 과소평가에 대한 반감이 과대평가를 낳는 등 선수 위상에 있어서는 총체적 난국... 과거 이 항목이 중구난방이었고 사실관계도 틀려있듯이 포를란의 플레이 스타일을 잘 아는 사람이 얼마 없는 게 한국 축구 팬들의 현실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포를란은 전성기에는 분명히 세계 최고급 스트라이커였으며 전성기의 포를란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스트라이커는 얼마 없다.
플레이 스타일은 분명 스트라이커이긴 한데 약간 변칙적인 타입. 위치는 최전방인데 중앙 지향적인 타겟맨은 아니고 최전방 공격수 치고는 약간 측면 후방에 치우쳐서 왕성한 활동량을 가져간다. 물론 그렇다고 중미 위치까지 내려왔던 건 아니다. 체격과 바디 밸런스가 좋은 편이고 주력도 괜찮았다. 하지만 체격과 스피드를 살려 상대 뒷공간을 파고드는 포쳐는 또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 수비를 앞에 두고 일정 거리를 두고 드리블을 치는 플레이를 더 즐겨했다. 어느 정도 발재간이 있어서 수비수 한 둘쯤은 달고 드리블을 할 수 있고 탈압박 능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볼운반을 하면서 화려한 탈압박을 보여주던 드리블러도 아니었다. 패스도 곧잘 찔러넣어 주고 연계도 잘 했지만 올리비에 지루나 카림 벤제마처럼 좁은 박스 안에서의 연계에 정말 뛰어난 스타일도 아니었다.
뭐든 다 일정 이상이긴 하지만 최고 수준은 아니면 대체 뭘 잘하나 싶을 수 있는데, 포를란의 진짜 무서운 점이자 최고의 장점은 바로 슈팅 능력이었다. 슈팅의 세기는 물론이고 정확도, 타이밍 등 슈팅과 관련한 능력에 있어서는 가히 당대 최고의 선수였다. '아, 저 거리에서는 안 차겠네', '아, 지금 타이밍은 안 차겠네' 싶은 게 존재하지 않는 선수였다. 포를란이 우리 진영에 공을 가지고 있다? 골대와의 거리가 얼마가 되든 그 순간 수비진과 골키퍼는 긴장을 타야만 했다.
때문에 포를란이 중앙/전방 지향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공격수에 비해 측면/후방 지향적인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축구계는 2010년대 초중반에 비해 압박이 좀 덜했던 것도 있지만 수비수들이 밀집한 페널티 박스 안 쪽이 아니라 약간 압박이 느슨한 박스 바깥, 중앙 쪽에서 중거리를 호시탐탐 노렸던 것. 실제로 중거리슛으로 골을 많이 넣었던 선수였다.
당연히 포를란을 마크하기 위해 수비수들이 라인을 다소 높여 포를란에게 압박을 가하는 선택지도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지만 포를란이 전성기를 보낸 비야레알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이 선택지에 대한 공략이 또 존재했다. 일단 비야레알에서는 후안 로만 리켈메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리켈메가 포를란보다 더한 어그로를 끌었기 때문에 포를란에게 압박을 할 수도, 할 이유도 없었다. 포를란을 압박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서 비야 레알을 상대하며 리켈메를 놔둔다는 선택지를 가져갈 순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는 포를란을 압박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수비수들이 올라오면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시망이 이를 응징했다. 국가대표에서는 루이스 수아레스가 이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보여주었듯이 포를란은 스트라이커치고 이 처진 지역에서의 판단능력이나 시야가 나쁘지 않아 아구에로와 시망, 대표팀에서는 수아레스 등 침투해 들어가는 다른 공격수들에게 연결을 잘해줬다. 한 마디로 말해 축구/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을 약간 농구의 3점 슈터처럼 소화해냈던 선수. 자신의 강력한 슈팅 능력을 무기로 중원~박스 외곽 사이에서 상대를 위협하며 이로 인해 상대가 포를란을 압박하러 나오면 그 빈 공간을 발빠르고 드리블 잘치는 다른 선수들이 공략해 들어가는 플레이가 주 무기였다. 안 나오면? 그냥 그 거리에서 자기가 중거리 때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이런 플레이가 돋보였다는 거지 포를란이 박스 안 플레이를 못한 것은 아니다. 박스 안쪽의 포를란도 당연히 무서운 존재였다. 특히 박스 안쪽에서는 칩 킥, 방향만 바꾸는 원 터치 슛 등 한 박자 빠른 슈팅이 두려운 스트라이커였다. 한 템포 빠른 타이밍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를 잘 읽고 허를 찌르는 게 아주 능수능란했다. 그래서 칩슛도 자주 구사했었다. 킥 자체도 굉장히 정확하고, 흘러나온 볼을 처리하는 데에도 강점이 있었다.
무섭도록 차분한 멘탈도 강점. 리그에서나 월드컵에서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승부에는 항상 첫 키커를 맡는다. 무표정하게 나가서 무표정하게 골을 넣고 들어온다. 페널티 킥을 찰 때에는 골키퍼와 심리전을 일절 안 하는 스타일. '그래 넌 너 대로 해라 난 나대로 구석에 강하게 차넣을 테니'하는 식이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남아공 골키퍼가 페널티 킥 직전 도발을 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으며 골대 상단에 전력으로 공을 차 꽂아 넣었다.[7]
단점은 정석적인 스트라이커들에 비해 스트라이커 본연의 플레이, 박스 안쪽에서 볼을 키핑하면서 버티다가 슈팅 기회를 만들거나 팀원에게 연계를 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볼 키핑이 나쁜 건 아니지만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고 탈압박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포를란 본인도 박스 안 쪽에서는 흘러나온 공 넣기, 압박이 채 붙기 전에 타이밍 빠른 슈팅을 주로 시도했고 실제로 이것만으로도 위력적이긴 했으나, 박스 안의 압박을 견디면서 활약하기를 꺼려한다는 약점을 완전히 지우긴 힘들었다.
그리고 농구의 3점슛이 그럿듯 축구의 중거리 슛, 원터치 슈팅, 흘러나온 공 넣기도 모두 과감하고 도박적인 공격 수단이었기에 필연적으로 포를란은 기복이 꽤 심한 선수였다. 마치 양궁 농구처럼 퐁당퐁당 징크스가 매우 심했다, 기복왕이었다 라는 평가는 약간 억울한 게 맨체스터 시절은 그냥 못했고 (...) 전성기인 비야 레알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의 7시즌을 보면 20골 아래의 골을 기록한 시즌이 05-06 시즌과 10-11 시즌 뿐이다. 10-11 시즌부터 포를란의 노쇠화와 침체기가 시작됐다는 걸 감안하면 전성기 포를란은 '''생각보다는''' 꾸준한 선수였다. 다만 비슷한 클래스이자 라이벌로 자주 언급되었던 에투나 비야에 비해 기복이 심했던 것은 사실이고, '''터진 시즌의 극단적인 화력'''과 침체한 시즌의 모습이 확연히 대비되는 건 사실이었다. 포를란의 전성기인 04-05 시즌부터 09-10 시즌까지의 6시즌 간 경기 당 득점수를 나열하면 각각 0.64, 0.28, 0.5, 0.43, 0.78, 0.5 이다. 0.28 을 기록한 시즌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즌의 경기당 득점 수는 아무리 못한 시즌도 최전방 공격수로써 준수한 편이지만, 터진 시즌의 0.64, 0.78 이라는 화력에 비하면 부족하긴 하다.
그래서 박스 안쪽에서의 전형적인 공격수 역할을 원한 맨유에서는 다소 부진한 감이 있다. 맨유에 워낙 짧게 있기도 했고 맨유의 작전이 그것뿐인 건 당연히 아니지만 당시 맨유는 공격을 대체로 강력한 윙에 의지하는 경기가 많았다. 이 경우 스트라이커는 당연히 윙이 주는 패스를 잘 받아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박스 안에서 수비와 경합하고 그를 이겨내야 하는데, 이런 역할은 포를란과 잘 맞지 않았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퍼거슨은 자서전에서 전형적인 포처였다며 반 니스텔루이에게 아쉬움을 표한 부분도 있을 정도로 공수가 딱딱 분리되고 포지션이 분업화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포를란의 다재다능함을 보고 영입을 했을 터이고, 퍼거슨은 포를란에게 전형적인 공격수 역할을 바랬다기보다는 위에서 말했듯 프리롤 크랙으로 성장해주길 바랬을 것이다. 허나 말했듯이 드리블의 파괴력과 볼 키핑, 몸싸움이 부족한 포를란은 이런 역할로 성장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면 공격수로서 결국 박스 안에서 마무리를 짓는 역할로 성장해야 했는데 이거는 포를란과 안 맞는 옷인데다가 그 역할은 반 니스텔루이가 잘 해주고 있었으니 성장할 수가 없었던 것.
또 포를란에게 여유있게 압박을 할 수 있는, 한 마디로 자신을 받쳐주는 동료가 없는 팀에서는 활약을 잘 못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은 프로 리그에 갔을 때, 전성기 이름을 떨쳤던 것이 비해 활약을 못한 감이 있다.
사실 본인이 보여준 재능을 봤을 때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는 처진 스트라이커로 갔다면 더 대성하지 않았을까 싶은 면도 있다. 위협적인 중거리로 상대 선수를 끌어내는 것은 공미나 처진 스트라이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며 특유의 시야를 활용해서 좀 더 중원에서 활동하며 타 팀원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에 투자했다면 프랭크 램파드나 현세대 케빈 더 브라위너, 하메스 로드리게스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 마냥 공상만은 아닌 게 실제로 2010년 월드컵에서는 이러한 스타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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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블라니는 내 맘대로.
2010 월드컵을 계기로 어느정도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모양새. 꾸준한 득점은 물론이고 비가 내리는 수상전에서 자블라니를 완벽하게 다루고 발리 슛까지 때리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2~2004)
- 프리미어 리그: 2002-03
- FA컵: 2003-04
- FA 커뮤니티 실드: 2003
- 비야레알 CF (2004~2007)
- UEFA 인터토토컵: 2004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07~2011)
- UEFA 유로파 리그: 2009-10
- UEFA 슈퍼컵: 2010
- SC 인테르나시오나우 (2012~2013)
- 캄페오나투 가우초: 2013
- CA 페냐롤 (2015~2016)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2015-16
- 킷치 SC (2018)
- 홍콩 프리미어 리그: 2017-18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2011
6.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골든볼: 2010
- FIFA 월드컵 드림팀: 2010
- FIFA 월드컵 토너먼트의 골: 2010
-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10
- 라리가 득점왕: 2004-05, 2008-09
- 캄페오나투 가우초 득점왕: 2013
- 유러피언 골든슈: 2004-05, 2008-09
- 트로페오 EFE: 2004-05
- 우루과이 올해의 축구 선수: 2005, 2009, 2010
6.3. 통산 기록
7. WAGs
1988년생 아르헨티나 출신 모델 사이라 나라[10] 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녀는 포를란을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의부증도 엄청 강하고 질투도 엄청 세며, 포를란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16일, 결혼식이 취소되면서 스캔들이 튀어 나왔다. 포를란의 약혼녀가 포를란이 바람피는 현장을 목격했는데, 상대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는 것. 당시 우루과이 축구팬들이 둘로 갈라져 다투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사실은 결혼 취소에 분노한 약혼녀가 포를란에게 한국 돈으로 3억원을 요구하며 돈을 주지 않으면 게이설을 퍼트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라고 한다. 포를란은 그저 내버려 두었고 찌라시 잡지사에서 덥석 떡밥을 물어 포를란 게이설을 만들어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그리고 포를란은 2013년 파즈 카르도주라는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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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게임 1골이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가 오면서 뜬금없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계 마지막 득점왕. 그리고 같은 우루과이 출신 후배 루이스 수아레스가 2015-16시즌, 신계로부터 득점왕을 탈환하게 된다.
- 바스크계 선수로 알려져 있다.
- 덧붙여 축구 웹툰 작가 칼카나마가 사랑하는 선수로 사실상 웹툰의 마스코트. 예명은 표능란... 비야보다도 많이 출현하는 듯하다. 사실 개그 캐릭터 된 이유는 얼마 전까지 과거 보여주던 골 넣는 머신 급의 활약에서 벗어나, 똥볼을 차며 팀을 패배의 나락으로 이끌던 경기가 종종 있었기 때문. 칼카나마 웹툰에서도 '내가 부진하니까 작가가 계속 나를 개그 캐릭터로 내보내지'라는 식으로 말했다. 최근 활약과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보면 이제 지금처럼 개그 캐릭터 화 될일은 적을 지도.
- 여담으로 前 아르헨티나 감독인 디에고 마라도나와의 인연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인 파블로 포를란은 마라도나와 친구 사이였다. 디에고 포를란은 어릴 적 테니스 유망주였는데, 그의 누나 알레한드라 포를란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자 거액의 수술비를 그의 가족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라도나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금을 모은 끝에 그의 누나는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길로 그는 축구선수로 전향했고, 인데펜디엔테에 있던 그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도 마라도나였다. 현재 그의 누나는 교통안전 비영리 재단을 만들었다.
- 사실 테니스만 하다가 축구선수로 전향한 것은 아니고, 우사인 볼트가 육상과 축구를 병행했던 것처럼 축구와 테니스를 병행하고 진로를 고민하다가 테니스로 조금씩 쏠리고 있을 때 마라도나의 도움이 결정적으로 그를 감동시켜 축구로 전향했다. 그래도 여전히 테니스를 좋아해서 친해지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테니스를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 맨유에서 뛰던 시절 골을 성공시키고 상의를 벗는 세레모니를 했는데 경기가 재개 될때까지 유니폼을 착용하지 못해 그냥 손에 쥔채로 잠시 뛴 에피소드가 있다.[12]
- 인테르를 좋아하지만, 자신이 인테르에 갔을 때는 시기가 영 아니어서 아쉬웠다고 얘기한다.
[1] 국내에서 인지도는 다소 낮지만 CA 페냐롤 전성기의 일원이었던 파블로 포를란의 아들이기도 하다.[2] 이동국(...), 토마스 브롤린과 함께 더 선에서 선정한 역대 EPL 최악의 공격수로 뽑혔다. 사실 이런상은 유명도가 없거나 출전이 적은 선수 중에서 뽑는게 아니다. 더 못한 선수가 많지만 (보슈코 발라반이나 세르게이 레브로프 라든지...) 맨유라는 유명팀에서 기대를 많이 걸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아먹지는 않았는데 포를란이 뽑혔다.[3] 사실 에투도 25골로 동률이었지만 피치치 시상을 주관하는 마르카에서 에투의 1골을 무효처리함에 따라 포를란이 단독으로 수상하게 된 것. 그래서 시즌이 끝나고 '포를란의 단독수상이냐 에투와의 공동수상이냐?'를 두고 논란이 생겼었다.[4] 200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5] 그런데 당시 포를란을 잘 아는 팬들은 경악할 만한 것이 월드컵에서 포를란은 플레이메이커로 뛰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포를란은 전혀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월드컵 예선전에서도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월드컵에서 플레이메이커로, 그것도 세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니 이건 뭐..[6] 마지막 독일과의 3,4위전 결정전에서 후반 종료 직전 얻어낸 프리킥이 골대에 맞는 바람에 아쉽게 득점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당시의 대활약상 때문에 국내에서 포를란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이 프리킥이 골대에 맞자마자 전 축구커뮤니티에서 탄식이 게시판을 뒤덮었다고(...)[7] 스티븐 피에나르에 따르면 골키퍼가 자기에게 말하길 포를란의 페널티킥은 남아공 리그에서의 페널티킥과는 차원이 달랐다고...[8] FA컵 + 기타 컵대회[9] FA컵 + 리그컵[10] 막시 로페스의 아내였다가 마우로 이카르디와 맞바람피고 재혼한 완다 나라의 친동생이다. 이후에는 하콥 얀 플레센이라는 남자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 헌데 완다가 자신의 병크로 궁지에 몰려놓고는 입페미가 되자 지지 선언을 했다. 한마디로 그 언니에 그 동생.[11] 이제 그 위치는 루이스 수아레스가 가져갔다.[12] 당시 나이키 선수용 유니폼은 언더셔츠가 심하게 유연하여 착용이 굉장히 어려웠다. 2002 한일월드컵에선 이비차 올리치가 골을 성공시키고 역시 상의를 벗었는데 1분이 넘도록 착용을 못해 결국 가위로 언더셔츠를 자르고(...) 착용했을 정도. 물론 선수들도 언더셔츠에 대한 불만이 폭증했고, 바로 다음해 킷부터 언더셔츠를 없앴다. 맨유같은 경우는 동일 디자인인데 언더셔츠가 있는 버젼이 있고 없는 버젼이 있게 되었다.
분류
- 1979년 출생
- 우루과이의 축구선수
- 우루과이의 축구감독
- CA 인데펜디엔테/은퇴, 이적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비야레알 CF/은퇴, 이적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SC 인테르나시오나우/은퇴, 이적
- 세레소 오사카/은퇴, 이적
- CA 페냐롤/은퇴, 이적
- 뭄바이 시티 FC/은퇴, 이적
- 킷치 SC/은퇴, 이적
- 바스크의 축구선수
- 우루과이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선수
- 축구 선수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