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밀리토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21년부터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감독이다.
경기를 지휘하는 카리스마가 대단해 '마리스칼(mariscal, 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패스와 볼 컨트롤 능력이 수준급이다.
디에고 밀리토의 동생으로 유명하다.
축빠들 사이에서는 본좌급 유리몸 선수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교하자면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의 오언 하그리브스 정도.
2. 클럽 활약
2.1. CA 인디펜디엔테
1997년 CA 인디펜디엔테에서 데뷔했으며, 2002년 아페르투라 우승에 공헌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1] 인디펜디엔테에서의 기록은 123경기 3골.
2.2. 레알 사라고사
이러한 활약으로 유럽 여러 구단의 러브콜을 받아 2003년 4년 계약으로 페르난도 이에로의 대체자를 구하던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의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을 추진했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무릎 인대에 이상이 발견되어 이적이 무산되었다.[2]
하지만 본인은 스페인에 남기로 했으며, 일주일 뒤 받은 레알 사라고사의 메디컬 테스트에서는 아무런 문제점이 나타나지 않아 레알 마드리드의 갑작스런 영입 포기에 강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우여곡절끝에 레알 사라고사에 합류한 이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으며 팀의 핵심 선수로 중용되었으며, 2005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형인 디에고 밀리토가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해 밀리토 형제는 팀의 공수의 핵으로 자리잡았다.사라고사에서의 2003년부터 2007년간 4시즌 총기록은 137경기 5골.진짜 수비의 핵심이었다.
2.3. FC 바르셀로나
이러한 활약으로 2006-07 시즌 종료 이후 이전에 영입 직전에 취소했던 레알 마드리드나 같은 리그의 FC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C.F.,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유벤투스,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의 리버풀 FC 등의 관심을 받았으며,[3] 이들 중 처음에는 유벤투스로의 이적이 유력했으나 영입 협상 과정에서 2000만 유로의 이적료를 원하던 사라고사와 이적료에서 이견을 보여 결렬되었다. [4] 이후 사라고사에서 원하는 것과 근접한 이적료에 추가 옵션을 제시한 FC 바르셀로나로의 이적이 확정되었으며,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한 뒤 4년 계약에 400만 유로의 연봉, 9000만 유로의 바이아웃 금액에 합의한 뒤 이전까지 티아고 모타가 달았던 등번호 3번을 배정받았다.[5]
이적 이후 2007년 9월 2일 아틀레틱 빌바오를 상대로 경기 종료 직전에 교체로 투입되며 데뷔전을 치렀으며, 11월 24일 레크레아티보 데 우엘바를 상대로 데뷔골을 넣었다. 이적 이후 맞는 첫 시즌인 2007-08 시즌에는 빠르게 주전 자리를 차지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2008년 4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 2차전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당초에는 6개월 정도의 결장이 예상되었으나, 과거 2001년에도 같은 부위에 부상을 입어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경력이 있는데다가 관절경 수술 과정에서 왼쪽 무릎에서 힘줄을 일부 절제해 오른쪽 무릎에 이식하는 재건 수술을 받을 정도로 예상보다 부상 정도가 심각해 결국 9개월동안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결국 시즌 아웃된 채 2008-09 시즌 후반기에 복귀가 예상되었으나, 2009년 6월 모국인 아르헨티나에서 재수술을 받아 '''시즌 동안 단 한경기도 뛰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이후 2009년 9월에는 수술을 받은 지 1년 5개월만에 처음으로 공을 사용한 훈련을 시작했으며, 2009년 11월에는 볼리비아의 축구팀인 볼리바 CF와의 친선 경기에서 전반 45분동안 선발 출전하며 수술을 받은 지 '''1년 7개월'''만에 그라운드에서 활약했다. 2010년 1월에는 세비야 FC와의 코파 델 레이 16강전 1차전에 뛰며 수술을 받은 지 '''1년 9개월'''만에 공식 경기에 나올 수 있었으며, 5일 뒤 CD 테네리페와의 리그 경기에서 후반 카를레스 푸욜과 교체되며 리그에서도 복귀하였다. 복귀 이후에는 히카르두 코스타가 떠난 자리를 메우려던 독일 분데스리가의 VfL 볼프스부르크로의 이적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팀에 잔류했는데, 예전의 기량을 되찾지 못하며 전 시즌 트레블을 이룩한 중앙 수비 라인인 카를레스 푸욜과 헤라르드 피케 및 라파엘 마르케스 등에 밀린 후보 선수 처지에 머무르며 2009-10 시즌에는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2010-11 시즌 시작 전 K리그 올스타팀과의 친선경기에서 출전하기도 했는데, 당시 상황은 여기 참조. 시즌 시작 이후에는 10월 팀 훈련 도중 내전근 부상으로 2주 동안 결장했으며, 복귀 이후 11월 AD 세우타와의 코파 델 레이 경기에서 1골을 넣으며 팀의 5:1 대승에 일조했지만 전반전에 햄스트링 부상을 입어 다시 6주 동안 경기에 뛰지 못했다.(...) 결국 팀의 주축 전력에서 사실상 배제되어 겨울 이적시장에서 자신의 친정팀인 레알 사라고사 및 같은 리그의 말라가 CF, 안드레아 라노키아의 공백을 메우려는 세리에 A의 제노아 CFC나 SSC 나폴리, 프리미어 리그의 아스날 FC와 맨체스터 시티 FC, 분데스리가의 FC 샬케 04로의 이적설이 있었지만 펩 과르디올라의 만류로 결국 잔류하게 되었으나,[6] 2011년 5월 왼쪽 종아리 근육 부상으로 다시 4주 동안 결장하게 되었다.(...) 결국 사라고사에서 뛸때와 똑같이 4시즌동안 뛰었지만 총 성적은 48경기 1골. 거의 1년에 10경기 뛴 수준이다.
2.4. 다시 CA 인디펜디엔테로로, 그리고 은퇴
이후 2011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자신의 친정팀인 CA 인디펜디엔테로의 이적에 합의해 아르헨티나 무대로 복귀했으며, 계약 기간이 1년 남아있었으나 바르셀로나가 밀리토가 원하는 팀을 찾으면 계약을 해지해주겠다는 방침이어서 FA로 이적할 수 있었다. 밀리토는 구단과 3년 계약을 맺었으며, 모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연봉 삭감까지 감수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과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2012년 6월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2000년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데뷔전을 치렀으며,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선발되었다. 이후 2006 FIFA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해 네덜란드와의 조별 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밀란 바로시와 교체되어 출전한 것 이외에는 활약이 없었다. 그 뒤 2007년 코파 아메리카 당시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결승전에서 숙적 브라질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으며, 그 해 10월 베네수엘라와의 2010 FIFA 월드컵 지역 예선 경기에서 A매치 첫 골득점을 기록하였다.
이후 무릎 부상으로 한동안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으며, 부상 회복 이후에도 계속된 부진으로 2010 FIFA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팀의 수장이 된 세르히오 바티스타에 의해 스페인을 상대로 3년여만에 다시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
[1] 재미있게도 형인 디에고 밀리토는 인디펜디엔테의 더비 라이벌 팀인 라싱 클럽에서 데뷔했다. [2]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레알 마드리드가 밀리토 대신 영입했던 선수가 바로 미들즈브러의 조나단 우드게이트였다.(...)[3] 당시 유벤투스는 로베르토 코바치와 이고르 투도르가, 발렌시아는 로베르토 아얄라가 이적한 상황이었으며, 레알 마드리드는 파비오 칸나바로를 맞트레이드 대상으로 내놓기도 했다.[4] 재미있는 사실은 밀리토의 영입 협상 결렬 이후 유벤투스가 밀리토 대신 영입했던 선수가 바로 포르투갈의 조르제 안드라데이다.(...)[5] 바르셀로나가 제시한 기본 이적료는 1700만 유로였으며, 여기에 트레블을 달성할 시에 300만 유로를 추가 지급한다는 옵션을 포함시켰다.[6] 참고로 제노아 CFC는 형인 디에고 밀리토가 인터밀란으로 이적하기 전에 활약했던 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