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 돔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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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획
3. 뚝섬 돔 프로젝트
4. 건립 배경과 논란
5. 무산
6. 이후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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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대 중반 LG그룹 산하의 LG돔이 계획했던 다목적 돔경기장. 한국 스포츠계에 처음으로 제시된 돔경기장이었으나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건설이 무산되었다.

2. 기획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태평양 돌핀스를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이뤄냈다. 한편 모기업 LG그룹은 그룹명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변경했으며, 구자경 명예회장이 장남인 구본무에게 회장직을 넘기면서 3세대로 경영권이 승계되었다.
당시 구 회장은 해외 출장같이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저녁 시간에 반드시 LG 트윈스의 경기를 지켜봤고, 팀 성적이 부진하면 선수단 전체에 회식 자리를 마련해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등, 야구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골수 야빠였다. 또한 그룹 내에서도 단기간의 2번의 우승을 이뤄내는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구 회장의 열정은 돔구장 계획으로 구체화되었고, 북아메리카일본 출장을 갔을 때 주변에 돔구장이 있으면 꼬박꼬박 방문 일정을 잡았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서 돔경기장은 너무 생소한 물건이었다. 본격적인 해외 야구 매니아가 존재하던 때도 아니었던지라 돔구장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구기종목을 대상으로 한 대형 돔경기장에 대한 건축 노하우를 가진 국내 전문가는 더욱 찾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돔구장으로 거둘 이익보다 손해를 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사업이었다. 그룹 내부 차원에서 진행한 경제성 검토에서 '건설하는 데 들어간 자금회수는 최소 50년이 지나야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가 나왔지만, 나중에 실무진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영원히''' 회수할 가망성 없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회장부터 굉장히 의욕을 가지고 사업을 독려했기 때문에 향후 발생할 적자를 그룹 홍보비 차원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3. 뚝섬 돔 프로젝트


초기 구상 당시 경기장 조감도[1]
1995년 4월, 언론에서 LG그룹이 돔구장 건설 구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비슷한 시기 추진되었던 롯데그룹의 잠실 제2롯데월드, 삼성그룹난지도 재개발과 함께 '서울 시내 3대 개발 계획'으로 꼽혔다.[2]
1996년 LG그룹 전략사업단 산하에 40여 명 정원의 '돔 팀'이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돔구장 계획이 착수되었다. 사업 타당성 조사 결과 3,500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돔을 지을 수 있다고 판단한 돔 팀은 1989년 한국마사회과천으로 경마장을 옮겨 공터가 된 성동구 뚝섬 일대 골프장 부지 9만 평 중 1/3을 매입하여, 6만석 규모의 돔경기장과 컨벤션 센터, 생태공원 등을 포함한 대규모 체육공원을 짓겠다는 계획을 첫 민선 서울특별시장조순 시장에게 밝히게 된다.[3]
1997년 1월, 서울시는 3만 3천여 평의 뚝섬 부지를 민간에 입찰을 붙여 매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를 위해 부지를 녹지에서 체육시설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 서울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경기를 치룰수 있는 다목적 돔구장이어야 한다" 라는 전제 조건을 붙였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월드컵 유치위원회가 뚝섬돔구장을 월드컵 경기 개최 후보 경기장으로 정한다고 요청하면서 야구 전용에서 다목적으로 바뀐 것이다.
3월 말에 이루어진 2차 입찰에서 LG는 995억 300만 원을 제출해 850억 원을 써낸 대림산업을 제치고 뚝섬 경기장 부지를 낙찰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돔 팀도 세계 곳곳에 위치한 돔구장을 방문해 돔구장 운영과 마케팅 기법을 배워 적자를 최소화할 수익모델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LG건설 등의 토목 관련 계열사에서도 직원을 돔 팀에 파견하여 경기장 부지 공사에 착수했다. 9월에는 독립법인 'LG돔'이 세워졌다.

4. 건립 배경과 논란


지난 1992년 10월, 서울시는 '정도(定都) 6백년 사업'의 하나로 서울의 5대 전략지역의 개발구상을 발표하면서 뚝섬지구를 레저.문화.스포츠 공간으로 개발한다는 기본계획 아래 1994년 12월 뚝섬의 돔구장 건설구상을 발표했다.
1995년 4월 LG는 서울시에 전용구장 건립 의향서를 제출했으며 서울시는 돔 경기장과 테마파크 건설계획을 확정했다. LG그룹이 세운 전용구장 추진계획은 5만 여평의 부지에 총 공사비 3천억을 투입해 6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 전용 돔구장 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시설과 놀이기구 등 레저시설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기사
다만 1995년 2월 월드컵 유치위가 월드컵 개최 후보도시 및 도시 내 경기장 16개를 지정하였는데 그 중 뚝섬은 없었다. 관련기사 그리고 3개월 뒤 1995년 5월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출할 유치신청서에 뚝섬 돔구장을 후보경기장으로 기입하겠다"는 월드컵 유치위의 요청이 있었고 그로 인해 축구경기 개최를 돔구장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명시했다. 야구 전용 돔구장에서 축구 경기도 가능한 다목적 돔구장으로 변경 된 것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월드컵 유치위의 요청은 당시 피파 회장이였던 아벨란제를 앞세운 일본 축구계의 파상적인 유치활동에 크게 불리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 할때 뚝섬 돔구장을 월드컵 유치에 이용했다는 의혹을 몇몇 야구팬들이 제기했다. 관련기사
서울시는 그 후 공청회를 거쳐 1995년 10월 다목적 돔구장 건설을 내용으로 한 뚝섬 개발 기본 계획을 확정했고 이듬해인 96년 7월 돔구장 건설사업자 선정계획을 수립, 시의회 의결을 거쳐 96년 12월 한 차례의 유찰을 거친뒤 LG와 999억3백만원에 부지매각 계약을 맺었다. 관련기사 #
1996년 12월 건설사 선정원칙을 만들고 1997년 3월에 엘지상사를 뚝섬돔구장 건설사로 선정하는 등 착공 직전의 준비 단계까지 진행었으나, 1997년 5월 한·일 양국이 월드컵 공동개최로 확정이 되면서부터 축구계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월드컵 개최를 위한 축구 전용구장으로 짓자고 축구계가 여론 몰이를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축구계와 서울시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조순 시장은 "서울시의 재정으로는 월드컵 전용구장을 건설할 예산이 없기 때문에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면, 뚝섬 돔구장이나 잠실 주경기장을 개보수해 사용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히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월드컵 조직위원회와 대한축구협회가 전용구장 건립의 포기를 의미하는 이 발언을 강도높게 비판한다. 그리고 축구계의 표적은 자연스럽게 당초 야구장으로 계획되었다 축구경기도 가능한 다목적 돔구장으로 공사가 진행중인 뚝섬돔으로 옮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축구계의 반대여론이 잦아들지 않은 데는 돔구장에서 축구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현대가인 정몽준 축협회장이 재계 라이벌 LG에서 지은 구장에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꼴을 보기 싫어서'''라는 루머가 있었다.
월드컵 유관단체들은 "뚝섬 돔 경기장이 당초 축구전용 구장으로 계획돼 있었으나, 서울시가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야구장 위주의 다목적 구장으로 용도를 변경했다"고 주장하면서, "운동장 시설부지이지만 주변 땅값의 3분의 1 수준인 995억원이라는 낮은 가격에 매각했고, 1,700억원의 비용을 들여 돔구장 진입로까지 서울시가 건설하기로 한 것은, 국가사업인 월드컵 축구전용구장이라는 공공성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
이러한 뚝섬돔구장의 의혹에 대해 당시 전략사업개발단의 소속이자 뚝섬돔구장 추진 팀 "돔팀"의 일원이였던 김영수씨가 이렇게 언급했다. “대지 매입가가 특혜라면 특혜였을 것이다. 평당 290만 원이었으면 많이 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땅이 상업용지였나? 체육시설 용도로만 쓸 수 있는 땅은 경제적 가치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대지 매입가를 특혜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월드컵경기장을 핑계로 엄청난 부동산 투자 이익을 취한다는 것도 말이 되느냐. 그럼 LG그룹이 그 비싼 경기장을 월드컵이 끝나면 헐고 아파트를 지으려고 했다는 말인가.” 라고 반박했다.
또한 축구계에서 LG그룹이 계획 중인 뚝섬 돔구장이 당초 계약(6만 5천 석)과는 달리 FIFA(국제축구연맹) 규격 미달인 5만 석 이하로 축소 설계돼 월드컵 개막식을 그곳에서 치를 수 없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 당시 뚝섬 돔구장 터를 항의 방문했던 전 축구협회 인사는, “축구계도 LG그룹에서 6만 5천 석으로 설계를 변경 할 수 있고 돔구장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4]나고야 돔 변신 #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그렇게 떼를 써서라도 정부와 서울시에서 축구전용구장을 지어주기를 바랐다. 거기다 야구에 대한 축구인들의 누적된 소외감과 열등감이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관련기사 #
그리고 김정남 당시 축협 전무는 1998년 1월 동아일보 사설에서 잠실 주 경기장과 뚝섬 돔 경기장 두 경기장을 월드컵 주 경기장으로 쓰는 것에 대해서 불가하다는 방침을 서울시에 통고했으며, 또 돔구장이 야구전용구장이라는 것을 구단 관계자나 관련 서류에 밝혔고 돔구장의 부지매매를 월드컵을 빌미로 내세워 축구인들의 분노를 샀으며 월드컵 유치위나 축구협회 어느 기관에서도 뚝섬 돔구장을 월드컵 경기에 사용할 의사를 공식적으로 정한바 없다고 밝혔다.관련기사 #
그러나 월드컵 유치위가 뚝섬돔구장을 처음 언급한 1995년 5월은 월드컵 유치 시기이라 월드컵 경기장 신축 계획은 커녕 언급 할 단계가 아니였고 당시 뚝섬이 월드컵 경기 개최 후보 도시의 16개에 해당되지 않았는데도 월드컵 유치위가 애초에 월드컵 개최 후보경기장이 아니였던 뚝섬돔구장을 후보 경기장으로 기입하겠다는 요청으로 인해 야구전용에서 축구경기로 할수 있는 다목적으로 용도가 바뀐 점을 생각하면 뚝섬돔구장이 월드컵을 이용해서 지원받아 짓는다거나 축구전용이며 월드컵 경기에 뚝섬 돔구장 사용을 공식적으로 정한 바 없다는 이러한 발언은 앞뒤가 맞지 않다.
1997년 8월 서울특별시의 LG그룹에 대한 특혜의혹 및 경기장 사용용도 변경 등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축구계의 반발과는 별개로, 서울시 의회에서는 LG그룹이 서울시를 상대로 로비 의혹을 제기했다. 일부 시의원은 당시 LG전자 상무로 재직하던 조순 시장의 장남 때문에 특혜를 준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조기성 상무는 그 이후 거의 그룹에서 활동하지 않고 수년간 칩거생활을 했다. “청춘을 바친 LG그룹과 아버지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5.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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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사업 백지화 직전 시점의 뚝섬 돔구장 공사 부지.
1997년 여름부터 몇몇 대기업이 연쇄부도를 맞은 데 이어, 12월에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함에 따라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외환위기가 시작되었다. 그 즈음 점점 시간이 갈수록 2002년 월드컵 광풍이 점차 거세게 불어 여론조차 서울 월드컵 경기장 신축에 관심이 기울어졌으며 대선에 관심을 가진 조순시장의 축구계 달래기로 뚝섬 돔 경기장이 아닌 서울 월드컵 경기장 신축으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서울시의 태도 변화 속에서 외환위기로 인해 LG 그룹이 서울시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돔구장 사업을 추진하기가 어려워졌고 그룹 관리팀에서조차 정식으로 구본무 회장에게 돔구장 건설계획의 연기가 아닌, 완전 취소를 건의한다. 몇백억으로 그룹 내 기업이 무너질 시기에 그룹 전체의 유동성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고 서울시의 태도 변화에 돔구장 건립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구 회장은 “꼭 철회해야만 하느냐”며 몇 번이고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결국 돔구장을 포기하고 만다.
1998년 5월, LG그룹은 돔구장 신축 계획을 전면 철회하고 'LG돔' 법인을 청산했으며, 파견되어 있던 계열사 직원들도 원 소속사로 모두 복귀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다. 그나마 서울시가 LG에 계약금을 반환한 덕분에 금전적인 손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6. 이후 반응


야구계에서는 첫 돔구장이 무산되었다는 것에 굉장한 아쉬움을 표했고 모 해설위원돔드립을 연발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후 20년간 돔구장 계획은 나오지도 못하여 돔구장 자체는 팬들 입장에서 상상 속의 존재 취급을 받다가 고척 스카이돔이 2015년 하반기에 완공이 됨으로써 국내에서도 돔구장을 볼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고척동 돔 야구장의 경우 본디 아마추어 야구장으로 추진되었던 사업이[5]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베이징 올림픽으로 인한 야구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어른들의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계획이 수정되다보니 갈수록 사업추진 비용이 늘어났고 규모도 일반 돔구장에 비해 협소해 진정한 돔구장이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한편 고척돔과는 별도로 민자유치를 골자로 하는 잠실 돔 야구장 사업의 추진이 2013년 말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6]
야구팬과 야구계 일부에서는 축구 때문에 돔구장 건립이 무산 되었다며 축구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물론 축구계의 여론몰이로 인해 돔구장 신축의 무산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만 이건 지엽적인 이유이며 축구계의 탓으로만 돌리는건 어불성설이다. 처음부터 축구 월드컵이라는 이벤트와 연관짓지 말고 LG그룹 독자적으로 야구를 위한 돔구장이란 컨셉으로 건설 관련 비용이 아무리 비싸게 나가더라도 밀고나갔으면 건설할 수도 있었지만 IMF 사태 때문에 LG그룹 스스로 건설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IMF 사태가 월드컵과 축구협회 때문에 생긴 것이면 축구계를 비판하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지만.....
월드컵 경기를 치룬 삿포로 돔의 경우 야구의 니혼햄 파이터즈 와 축구의 콘사도레 삿포로 팀이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돔구장의 경우 기후의 원인이 주된 건립 이유임을 감안하면 겸용도 가능했다는 점을 볼때 뚝섬돔구장 신축 무산에 대해 아쉬운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월드컵 경기장 중에서 가장 많은 건립 비용이 들어간 수원 월드컵 경기장의 경우 경기도의 지원 하에 수원시의 재정으로 지은 사례를 보더라도 원래의 계획대로 서울시의 지원이 있었다면 LG그룹 규모 상 충분히 지어질 수 있었고 외환위기 당시 2조원이 넘는 비용으로 10개나 되는 월드컵 경기장이 100% 신축이라는 점을 볼때 뚝섬돔구장 또한 종전의 계획대로 월드컵경기장에 포함이 되었다면 충분히 지어질수 있었으므로 IMF로 인해 돔구장 사업이 취소가 되었다는 발언은 불분명하다. 또한 월드컵 지원금을 받기 위한 말이 있는데 애초에 월드컵과 무관한 뚝섬 돔 경기장의 건립 반대 하기 보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의 건립에 사용 했어야 하는 말이 많았다.[7]
한편으로는 당시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조순이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서울 월드컵 경기장 신축에 여론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신축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월드컵 주 경기장의 신축은 1997년 9월 청와대 보고회의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총리에게 지시한 것으로[8] 실제로 서울시장 선에서 개인적 야망으로 결정할 정도의 가벼운 사안도 아니었다.
이후 이 자리에는 도심 속 녹지 공원을 컨셉으로 한 서울숲이 들어섰다.
[1] 모티브가 된 구장은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사용하고 있는 개폐식 돔 구장인 로저스 센터였다.[2] 이후 난지도 재개발은 월드컵경기장 건설 계획을 제외하고는 1996년 서울시에서 개발 계획을 폐기했고, 제2롯데월드는 서울공항의 활주로를 비트는 난리법석을 부린 끝에 건설에 착수하면서 최종적으로 완공되었다.[3] 당시만 해도 서울시청을 뚝섬 부지로 이전할 계획이 잡혀 있었다고 전해진다.[4] 사실 97년에 완공된 나고야 돔이 야,축 겸용으로 사용 할수 있는 다목적 경기장임을 일본과의 유치 경쟁 중이였던 축구계에선 알고 있었을 것이다.[5] 착각하기 쉬운데 고척 스카이돔은 동대문구장의 대체가 아니라 별도 사업이었다.[6] 그러나 이 또한 여러가지로 문제점이 많이 있어 추진에 어려움이 있다. 자세한 것은 잠실 돔 야구장참조.[7] 1억달러 지원금을 받았는데 그당시 환율로는 1100억원.[8] "결국 이 문제는 1997년 9월 청와대에서 열린 월드컵대책 보고회의에서 대통령이 축구전용구장을 서울시에 건립하되 총리가 그 방안을 강구하도록 한 연후에야 해결의 가닥을 잡기 시작하였다."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서울특별시 리포트 1509일의 대장정》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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