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1928)

 


'''조순의 역임 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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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강원 강릉시 을)'''
15대
최욱철
,당선무효,

제15대(재보궐)
''' 조순 '''

''선거구 개편''
최돈웅,(제16대 / 강릉시),




<color=#fff> '''제30대 서울특별시장
조순
趙斗淳 | Cho Doo Soon'''
<colbgcolor=#ae1932><colcolor=#fff> '''출생일'''
음력 1928년 1월 10일 (96세)
'''출생지'''
강원도 강릉군 구정면 학산리[1]
'''거주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본관'''
풍양 조씨[2]
'''학력'''
경기중학교 (졸업 / 45회)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 / 졸업)
보든 대학 (경제학 / 학사)
UC 버클리 (경제학 / 석사·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만기제대
'''가족'''
1남 2녀 중 첫째, 배우자, 슬하 4남
'''신체'''
166cm, 69kg
'''종교'''
무종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5
'''경력'''
육군사관학교 교관
뉴햄프셔 주립대학 조교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보든 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한국은행 총재
도산서원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서울특별시장
통합민주당 총재
한나라당 총재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1. 개요
2. 생애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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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전 서울특별시장, 정치인. 호는 소천(小泉). 백미#s-2(白眉) 로 유명하다.

2. 생애


1928년 2월 1일 강원도 강릉군 구정면 학산리[3]에서 아버지 조정재(趙正載)와 어머니 강릉 김씨 김한경(金翰卿)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강릉중앙국민학교를 졸업 후 당시 작은아버지 조평재가 판사로 근무하고 있던 평양평양고등보통학교[4]에 잠시 다니다 경기중학교에 편입했다. 1946년 경성경제전문학교[5]에 입학하여 194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6]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보든 대학에서 학사[7],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서 영어를 강의했고,[8]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케인즈 학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학문적 업적과 제자를 남겨 한국의 경제학계에서 "조순학파"라고 일컬어질 정도의 인맥을 구축하였다.[9] 조순·정운찬 공저(현재는 전성인, 김영식도 공저자) '경제학원론'은 한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제학원론 교과서였다. 이 때문애 조순을 '한국의 케인즈'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다.
육군사관학교 교관 시절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1988년 노태우 정부에 입각하여 1990년까지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다. 이후 1992년부터는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image]
대한민국 사상 두 번째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으며,[10] 당시에 유명했던 포청천을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기도 했다.[11] 서울 시장 취임 전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해서 취임식을 현장에서 했다... 유서 깊은 여의도광장을 갈아 엎고 여의도공원을 조성한 것도 조순의 공적이다.
이후 무난하게 서울 시정을 이끌며 1997년에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주자로 거론되다가 9월에 사퇴한 후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지만, 지지율이 답보 상태에 놓였고 이후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을 창당해 총재에 올랐다.
1998년에는 최욱철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음에 따라 치러진 강원도 강릉시 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친여 무소속 최각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월에 서울 종로 출마를 선언하고 정인봉 등의 다른 예비후보들의 추대를 받아 공천을 받았지만, 이회창 총재가 당내 중진들을 계속 낙천시키는 행보를 보이자 이에 반발하여 공천을 반납한 후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이 당이 완벽하게 실패하면서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2003년 참여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직을 맡았다.
중국은 금융업이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대한민국일본은 금융업이 발달하기 어렵고 제조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택대출을 꺼리는 중국인의 특성상 부동산버블[12]이 발생하기 어렵다고도 했는데, 과연?[13]
이 사람의 외모를 떠올리면 왠지 그 '''하얀 눈썹'''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초창기 딴지일보에서는 그를 스모 선수(…)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또한 한창 서울시장으로 전성기를 달리던 1996년에 소년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삼국지 패러디 만화에서 조조가 여장을 하고는 자기 이름을 '''조순'''이라고 하자 옆에 있던 인물이 '''"조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라고 나오기도 했다.(...)
어릴 때 선친으로부터 배운 한문을 바탕으로 '''한문 고전을 혼자서 독파'''한 먼치킨이기도 하다. 한학을 깨치고 신학문의 대가가 되었기 때문인지 1993년부터 1년간 도산서원 원장을 맡았고, 2002년부터 5년 간 민족문화추진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가끔 고전번역원으로 특강을 하러 온다고 한다. 그 외에 2002년 안중근의사숭모회 7대 이사장을 7개월 간 맡았다.
아내는 같은 강릉 출신의 김남희이며, 슬하 4남을 두었다. 장남인 조기송은 강원랜드의 사장을 지낸 바 있는데 하이원 리조트를 만든게 이 사람이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5
정계 입문

1995 - 1997
탈당

1997
복당

1997 - 2000
합당[14]

2000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

2000
창당

2000 -
탈당
정계 은퇴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민주당
'''2,501,441 (42.4%)'''
'''당선 (1위)'''
'''초선'''[15]
1998
상반기 재보궐선거 (강원 강릉 을 국회의원)
한나라당
'''28,181 (61.1%)'''
'''당선 (1위)'''
'''초선'''[16]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국민당
695,423 (3.7%)
낙선 (5번)


5. 둘러보기





6. 기타


바둑을 둘 때 바둑돌을 왼손으로 집는다. 물론 왼손으로 바둑을 두는 전문기사#s-5있다. 두 손을 다 잘 쓰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대국#s-2복기에서 서로 다른 손을 쓴다(대국은 왼손으로 하면서 복기는 오른손으로 한다).
잠을 엄청 빨리 잔다고 한다. 심지어 대선후보 시절에도 어지간한 성인들은 아직 깨어있을 10시쯤에 이미 취침중이라 보좌관들이 언론 대응이 안 돼서 급한대로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1989년 부총리 시절 조순의 자택에 강도가 침입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1] 강원도 곳곳에 풍양 조씨 평장사공파 집성촌이 있다.[2] 평장사공파 21세손 돈(敦) 항렬이다.[3] 출판사 학산문화사의 정욱 회장이 이 마을 출신이고, 출판사의 이름을 출신지명에서 따왔다.[4] 교수, 정치인 김동길과 동기[5] 전신은 1920년 설립된 경성고등상업학교이다. 1944년에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바뀐 교명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인터뷰를 보면 이전 교명인 '고등상업학교'라고 언급한다. 경성경제전문학교는 경성경제대학으로 교명을 바꿀 예정이었으나 국대안에 따라 해체되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으로 통합되었다.[6]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설립된 서울대학교 초기에는 3년제/4년제가 섞여 있어서 3년제를 전문부로 구별하였다.[7]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문부는 학사 학위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학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며 4년 과정을 3년만에 마쳤다.[8] 조순 본인이 육군 장교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육사 출신은 아니고 서울대 학군장교 출신.[9]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정운찬이다.[10] 서울특별시장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은 제 11대 김상돈 시장이다.[11] 사진 좌측에 앉은 이해찬 의원이 선거를 적극 도왔고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포청천'은 자원봉사자의 아이디어. 이때 선거 운동에 관련한 일화가 나는 꼽사리다 7화에서 목사아들돼지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데, 전유성이 조순 선거 운동을 돕다가 로고송을 듣고는 황당해 했다는 일이다. '아아~ 아아~ 우리의 조순 우리의 조순~'(이용이 부른 '서울'을 개사)[12] 부동산버블은 주택부채비율이 극도로 높아야 발생할 수 있는데, 중국인은 돈을 고정자산에 묶어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부동산버블의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13] 차이나머니가 건드리는 도시마다 집값이 폭등하는 지금에야 헛웃음이 나오지만, 당시 중국은 제사해운동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앙에서 벗어난지 30년도 안 됐음을 상기하자. 중국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모두가 몰랐다.[14]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15] 1997.9.9 사퇴 (대통령선거 출마) 민주당 후보로 추대되었으나 상술했듯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후 후보직을 사퇴했다.[16] 전임자 최욱철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