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모트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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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루아의 혈통
2.1. 출생과 어린 시절
2.2. 로앙 대주교와의 만남
3. 사기극
3.1. 1차 사기, 왕비 알현 사건
4. 희대의 재판
5. 중상모략의 폭풍
6. 최후
7. 기타


1. 개요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1등 공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주모자. 결과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발발의 신호탄을 쏜 사기꾼.
라모트 백작부인 혹은 잔느 드 라모트라고 불린다. 1756년 프랑스의 바르 쉬르 오브(Bar-sur-Aube) 부근인 퐁넷(Fonette) 출생. 1791년 영국 런던에서 사망. 슬하에 자녀는 없다. 군인인 오빠 자크와 수녀였던 여동생 안느가 있다.
결혼 전 이름은 잔느 생 레미 드 발루아(Jeane Saint Remy de Valois)로, 앙리 2세의 후손이다.[1] 그녀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떠들고 다닌 얘기 중에서 발루아 왕가의 후손이라는 것만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2. 발루아의 혈통



2.1. 출생과 어린 시절


잔느는 발루아 왕가의 후손인 아버지와 집안 하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1756년 7월 22일 출생하였다. 잔느가 태어날 무렵 이미 영락했던 아버지 자크 생 레미 드 발루아(1717~1762)는 잔느가 어릴 때 죽고 말았다. 잔느의 어머니는 잔느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켰는데, 이때 강요한 멘트가 바로 "불쌍한 발루아 왕실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불랭빌리에 후작부인이라는 귀부인이 지나가다가 잔느의 외침을 듣고 문득 의구심을 느꼈다. "아니, 발루아 왕조의 후손이 어떻게 저런 구걸을?" 부인은 곧 잔느의 출생 신고서를 조사해 보았고 잔느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2] 동정심이 든 부인은 잔느를 데려다가 왕가의 후손답게 월 1,000프랑의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3]해 주고 잔느와 여동생인 안느를 롱샴 수도원 여학교에 넣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잔느와 여동생은 공부를 마친 다음 수녀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4]
잔느는 여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다음 수녀가 되지 않고, 고향인 바르 쉬르로 가서 자신에게 먼 친척 뻘인 여관 주인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1780년 6월 6일에 니콜라스 드 라 모트(1755~1831)라는 청년과 결혼하는데, 이 청년은 바로 여관 주인의 조카였으며, 루이 15세 치하에서 왕실 일가의 경호를 맡았던 경력이 있었다.
잔느는 비록 가난했으나 자신이 발루아 왕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생활을 갈구하고 있었다. 곧 라모트 부부는 합심하여 드 라모트 백작부부[5]로 사칭하기 시작했다.

2.2. 로앙 대주교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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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앙 대주교. 본명은 루이 필립 르네 에두아르 드 로앙'''[6]
1783년 경, 후견인이었던 불랭빌리에 후작부인을 통해 잔느는 당시 왕실 전임 사제였던 로앙 대주교를 만난다. 당시 로앙 대주교는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매우 사이가 나빠서 궁정 내의 입지가 매우 위태로웠는데[7] 그녀와 화해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잔느는 로앙에게 "나는 왕비와 매우 절친한 사이이며, 왕비의 별궁인 트리아농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불나방이 불에 달려들 듯이, 로앙은 잔느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잔느는 왕비와의 교제를 핑계로 로앙에게 금품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잔느는 자신의 애인인(...) 마르크 레토 드 빌렛에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필체를 흉내내어 편지를 쓰게 시킨다.
왕비와 편지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로앙은 잔느에게 돈을 대주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밀리에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잔느는 이런저런 거짓말로 차일피일 미뤘지만, 로앙의 독촉이 심해지자 드디어 왕비와의 알현을 주선하기 시작한다.

3. 사기극



3.1. 1차 사기, 왕비 알현 사건


잔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얼굴과 몸집이 비슷한 니콜 돌리비아라는 처녀를 물색해서, 1784년 8월의 어느 날 밤 11시 30분 경에 베르사유 궁전의 뜰 한구석에서 로앙과 만나도록 한다. 이때 니콜은 얼굴을 베일로 반쯤 가리고 로앙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는데, 로앙은 그녀를 왕비라고 믿고서 니콜의 손을 잡은 다음 장미꽃을 바쳤다고 한다.[8] 이에 니콜은 "과거의 일은 모두 잊으시오." 라고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로앙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왕비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3.2. 2차 사기,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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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복제품. 진짜는 분해해서 팔아먹었으니 남아 있을 리가 없고, 사진은 제조했던 보석상이 남긴 스케치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 시각으로는 물론이고 당시 수준으로도 후진 디자인이라, "진짜 저런 모양으로 팔아먹으려고 했겠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본래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루이 15세가 애첩 뒤바리 부인을 위해 파리보석 세공사인 뵈머와 바쎈즈에게 만들게 한 보석으로써, 당시 돈으로 160만 리브르[9] 지금 돈으로 얼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에 전열함 2척을 구입할 수 있는 거액의 물건이었다.
그러나 전재산을 털어 보석을 마련해 온 세공사들이 목걸이 제작에 착수하자마자, 루이 15세는 붕어하고 만다. 뵈머와 바쎈즈는 계속 목걸이를 제작하지만, 판로를 찾지 못해서 고심하고 있었다. 이 목걸이는 당대의 귀족사회와 사교계에서도 화제가 되었지만, 너무 값이 비쌌기 때문에 웬만한 대귀족이나 왕족들도 탐내기만 할 뿐, 사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10] 그러나...
목걸이를 보고 감탄한 잔느는, 남편과 애인을 충동질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꾀를 낸다. 당시 바쎈즈와 뵈머는 판매를 목적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귀족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다녔는데, 왕비와 절친한 사이라는 소문이 난 잔느에게 그들이 들를 수밖에 없었다.
1785년 1월, 잔느는 그 목걸이를 마리 왕비가 살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보석상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그 목걸이를 손에 넣게 된다. 물론 구매 책임자는 로앙 대주교였다. 로앙 역시 마리 왕비의 총애받는 신하로서 충성을 보여주려는 열의(...) 때문에 비밀리에 구매를 대행해달라는 잔느의 부탁을 선뜻 받아들였다고 한다.
잔느는 가짜 계약서를 준비해서 로앙 대주교에게 지참시켰는데, "160만 리브르라는 목걸이의 대금을 할부로 갚겠다"는 것이 계약서의 골자였다. 이어 로앙 대주교는 "잔느에게서 들은 대로, 목걸이 대금을 내기 전에 목걸이를 미리 가져가겠다"는 왕비의 뜻을 전했는데, 드디어 빚투성이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기쁨에 겨운 보석상들은 그 제의를 수락한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로앙 대주교의 손에서 잔느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로앙 대주교의 집에는 왕비가 보냈다는 시종이 비밀리에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이 역시 잔느의 조작이었다. 잔느의 남편 라 모트는 런던에서 이 목걸이다이아몬드 알을 하나씩 떼어내어서 팔아 넘기려 했단다. 통째로 팔지 못한 것은, 이 목걸이가 프랑스 전역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알 정도로 대단했던 점도 있겠지만, 너무 고가의 물건이라 통째로는 처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보석상 바쎈즈와 뵈머는 목걸이 대금이 들어오지 않자 잔느를 독촉했는데, 잔느는 그때마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겼다. 그러나 빚독촉에 시달리던 보석상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제발 돈 좀 지불해주십사" 요청하게 되는데, 마리는 "나는 목걸이를 산 적도 없다." 로 일관했다. 보석상들은 다시 편지를 보내서 자신들이 잔느와 로앙과 접촉하여 목걸이를 판 경위를 설명했지만, 마리 왕비의 반응은 위와 다름없었다.[11] 이에 보석상들은 로앙 대주교에게 달려가고, 로앙은 이들의 편지를 루이 16세에게 보여주면서 선처를 부탁하게 된다. 그때는 1785년 8월 15일, 바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가 시작되려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이게 뭔일인가 싶으면서도 그 편지를 큰 소리로 낭독했는데, 읽자마자 거대한 사기극이 펼쳐졌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자칭 계약서 겸 편지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서명이 '마리 앙투아네트 드 프랑스(Marie Antoinett de France)'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이 결정적이었다. 최고위 왕족들은 대개 세례명으로만 서명했다.[12]
로앙은 긴급 체포(...)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고[13] 잔느 일당은 사흘 뒤에 체포된다. 알현 사기에서 왕비 대역을 맡았던 니콜과 필체 위조범인 빌렛은, 자신들의 혐의를 순순히 인정한다.

4. 희대의 재판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위신은 이미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오스트리아 잡X" 운운하며 왕비를 싫어하고 사치와 방종의 주범이라고 낙인찍었던 적대 세력들은, 마리가 로앙을 애인으로 삼고 정사를 나눴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전역이 이 소문을 들끓었다.
이 와중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담 변호사였던 메트르 두아요(Maitre Doillot)는 잔느에게 돈과 성접대를 받기로 약속하고, 변론을 잔느에게 유리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는데, 라모트 백작이 팔려고 했던 목걸이가 좀처럼 팔리지 않아서 잔느에게 돈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재판 결과 로앙은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분노한 루이 16세의 명에 따라 추기경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세스 디유(Chaise-Dieu) 수도원으로 추방당했다. 잔느는 채찍형을 받아 수백 대를 얻어맞고는 양 어깨에 '도둑(Voleuse)' 을 뜻하는 머릿글자 V 를 새겨서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자 수용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살게 되었다. 라모트 백작은 목걸이를 팔려고 런던에 있어서 수감되지 않았다.
그런데 잔느는 살페트리에르 감옥에서 반(反) 앙투아네트 일파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남편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자신이 이용했던 니콜의 이름으로 비망록을 출판한다.

5. 중상모략의 폭풍


잔느는 어이없게도 자신이 몰락한 것이 모두 마리 앙투아네트의 탓이라고 믿어서, 비망록에서 마리 왕비에 대한 허위사실을 마구 지어낸다. 즉 마리 왕비가 자신과 동성애 성행위를 하던 사이[14]이며 그 외에도 왕비가 다수의 남성 귀족들, 시동생들과 간통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내용이 비망록의 골자였다.
당연히 거짓이었지만, 당시 앙시앵 레짐의 붕괴를 바라던 프랑스부르주아들과 모순된 사회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길이 없던 다수의 민중[15]들은 이 내용을 열렬히 신봉하게 된다.[16]

6. 최후


그러나 잔느의 마지막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1791년 6월, 잔느는 자신의 재산을 몰수하러 온 사람들[17]을 피해서 자택 3층으로 도망갔다가 창문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그녀는 몇 달간 병상에 누웠다가 그 해 8월 23일에 사망하고 만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오를레앙 공작[18]이 자신에게 자객을 보낸 거라고 믿었다.[19]
우습게도 남편은 영국에서 편히 살다가 재혼도 했고 76세까지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7. 기타


우연히도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와 인상이 비슷한데 둘 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를 참수당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잔느는 원인을 제공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참수형을 집행했다.

[1] 물론 정실 왕비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후손은 아니며, 애첩인 니콜 드 사니비 사이에서 라모트 부인의 선조인 생 레미가 태어났다고 한다.[2] 당시 영유아들은 세례성사를 받을 때 가족관계 등 신원을 확인해야 했고 잔느의 아버지도 이를 통해 기록될 수 있었다.[3] 당시 프랑스에는 몰락한 왕손들에게 연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4] 이것은 결코 잔느의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은 아니다.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한 뒤에 수녀가 되는 것은, 당대 대귀족 영애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던 삶이었다[5] de라는 어휘는 프랑스귀족 작위가 있는 사람들만이 성(姓) 앞에 쓸 수 있는 말이다.[6] 참고로 이 사람은 '''Prince étranger(프랭스 에트랑주)'''인데 이 경우 프랑스 궁정에서 '''준왕족 취급을 받는다'''. 참고로 다른 Prince étranger는 '''로렌-기즈 가문(1825년 단절-엘베프 분파. 기즈 직계는 1674년 단절)''', '''사보이-카르닝엔 가문'''(후일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된다 - 여전히 존재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의 삽질땜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리말디(Grimaldi) 가문'''(존속 - 현 모나코 공 가문), '''곤차가 분파(곤차가느베르 공작)(House of Gonzaga-Nevers)'''(1629년 본계 단절로 만투나 공작이 된다. 페르디난트 3세의 세 번째 부인인 엘레오노라 곤차가가 이 집안 출신. 참고로 느베르 공작 작위는 마자랭에게 1659년 팔린다.), '''라 투르 도베르뉴(La Tour'd Auvernue)'''(튀렌으로 대표되는 - 부이용 공작령 소유 가문으로 그 공작령은 주권을 가진다. 1913년 단절) '''라 토레모이유(La Tremoilie)''' 가문(15세기 나폴리의 왕위 계승 예정 가문, 남계는 1933년 단절 - 참고로 여계는 계속 이어지고 현재 벨기에의 리네 가가 이어받아 성이 de Linie-La Tremoilie가 되었다.)이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의 '''로앙(Rohan)''' 가문은 과거에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인 덕에 이 칭호를 얻었는데 이 사람은 종가인 게메네(guemene)파로 혁명 때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여전히 남아 있는데 후계자 문제가 조금 있다. 이 파의 당주인 알베르트 폰 로앙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법대를 나와 외교관으로 일하고 현 유럽의회 의원이다. 참고로 아버지가 히틀러의 추종자(...)였는듯 하다. 나치당과 안슐루스에도 가담했고 당번은 6234513. 전후의 아데나워나 만슈타인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오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나치를 좋게 보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어째.......프랑스에도 분파가 하나 있는데(여긴 프랭스 에스트랑주는 아니었다)이 분파의 당주는 니콜라 사르코지(...)의 측근이다[7]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마리 왕비는 사치스럽고 여자도 밝히고 경솔하기 그지없는 로앙의 인물됨을 매우 싫어했는데,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선자로 묘사한 편지를 그가 쓴 것을 안 뒤로는,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며 상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덧붙여 이 문제의 편지는 하필이면 뒤바리 부인의 손에 들어가, 뒤바리 부인이 궁정 사람들 앞에서 그 편지를 큰 소리로 읽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8] 나중에 사기 사건이 들통나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마리 왕비는 엄청난 분노와 수치감을 느꼈다고 한다. 즉 당대 귀족 사회에서 남녀가 장미꽃을 주거나 받는 것은, 상대방을 애인으로 인정한다는 암묵적인 표시였기 때문이다.[9] 대략 '''2천 400억원'''정도다.[10] 루이 16세가 왕비의 부탁은 다 들어 주었기 때문에, 보석상들은 왕에게 "목걸이를 왕비에게 선물하는 게 어떻느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제안을 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차라리 그 돈으로 전함을 사들이는 게 낫지 않느냐." 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기가 싫어하던 뒤바리 부인을 위해서 만든 물건을, 명색이 일국의 왕비인 자신이 갖기에는 자존심 상해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11] 사실 마리 왕비는 이 편지를 받았을 때 뭔가 음모가 있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어렵게 왕세자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끄러운 소문을 만들기 싫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즉 자신이 이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만 말했다고 한다.[12] 루이 16세도 그냥 'Louis'라고만 서명했다.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매우 고귀한 신분이라는 뜻이다. 또한 국가원수는 국가 자체가 영지이니 따로 영지명을 표기할 필요가 없다.[13] 로앙 대주교는 감옥으로 호송되던 중에 잠시 자기 집에 들러, 왕비에게서 받았다고 믿은 편지들을 모두 없앴다고 한다.[14] 이 오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왕비에 대한 편견으로 남아 있었다.[15] 이미 그 전부터 마리 왕비나 귀족들은 당시 유행하던 음담패설 소설집에 단골로 출연해서 백성들에게 안주거리로 두고두고 농락당하던 상황이었다.[16] 미라보는 라모트 부인의 음성이 7월 14일과 10월 5일의 외침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17] 일설에는 강도라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잔느가 정신이상을 일으켜서 발작하는 바람에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18] 루이 16세의 숙부, 루이 필리프 1세의 아버지, 프랑스 혁명당시 자유주의를 후원하고 제3신분에 가담[19] 잔느가 벌인 행각을 보면 허언증에 과대망상증, 피해망상, 일종의 불안장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