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리 부인

 

Madame du B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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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관련 문서


1. 개요


1743년 8월 19일 ~ 1793년 12월 8일(만 50세)
루이 15세의 마지막 로얄 미스트리스. 본명은 앙투아네트 베퀴(Jeanne Antoinette Bécu). 뒤바리 부인이라고 불리지만 프랑스어 표기는 Madame du Barry, 그러므로 ''''바리 부인'''', 혹은 '바리 백작부인(Comtesse du Barry)'이 맞다.
같은 평민 계급이라고 해도 부유한 집안의 딸로 교양을 갖추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s-1와는 달리 원래부터 매춘부(코르티잔)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신분이 낮다. 후술할 듯 바리 백작의 눈에 띄었을 때 코르티잔이 된 이야기가 있어서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재단사였고 아버지의 직업은 확실치 않다. 10대 때는 파리에서 장신구를 팔거나 미용사로 일했고, 귀부인에게 고용되어 말상대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후견인이 된 바리 백작은 처음부터 그녀를 국왕의 애첩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며, 실제 그녀를 본 국왕은 곧 매료되어 그녀를 베르사유 궁전에 들이게 된다. 다만 국왕의 애첩은 법도상 반드시 기혼녀여야 했고, 그래서 바리 백작은 그녀를 자신의 남동생과 급히 결혼을 시켜 그녀를 입궁시켰다.
한국에는 베르사유의 장미 덕분에 악랄하고 거만한 여자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따뜻하고 소탈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직접 보면 방탕한 요부보다는 오히려 영성체하러 나온 순진한 시골처녀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국왕의 애첩으로 실질적인 나라의 안주인이 된 이후에도 선량한 성격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호감을 샀다. 요컨대 벼락출세한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인물이었다. 항상 재정적으로 곤란했는데 이는 그녀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긴 것에도 이유가 있으나 더 큰 이유는 자선 활동과 후원 사업에 대부분의 수입을 사용해서였기 때문이다.

2. 생애


어찌 보면 의외로, 어찌 보면 당연히, 권력이나 정략에는 관심이 없었고 외교정치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 루이 15세는 이전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때처럼 정치적 행사나 회의에 동행했으나 바리 부인은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후세의 호의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물품, 특히 보석[1]을 굉장히 좋아해서 루이 15세에게 졸라 시도때도 없이 보석과 각종 사치품을 질러대는 바람에, 국민 여론은 굉장히 나빴다. 어차피 애첩이 좋은 평을 받은 적은 없는 프랑스지만.[2][3]
당시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4]가 사망한 프랑스 궁정에는 여주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왕의 애첩으로 자리잡은 뒤바리 부인은 사실상의 왕비 역할을 했다. 루이 15세의 딸들은 이 점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기에, 뒤바리 부인은 공주들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이러한 뒤바리 부인의 지위를 처음으로 위협한 것이 바로 왕세손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오스트리아공주인 그녀는 매춘을 금지할 정도로 윤리적으로 엄격했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5]으로 애첩에 대해 대략 충공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빅투아르를 필두로 한 루이 15세의 공주들은 프랑스에 온지 얼마 안 되었기에 프랑스어가 서툴러 궁중 생활 적응에 애먹고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접근, 뒤바리 부인에 대한 악평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이러한 친정어머니와 시고모들의 교육으로 인해 마리는 뒤바리 부인을 몹시 싫어하게 되어, 어떤 공식 석상에서도 말을 걸지 않게 된다. 신분제였던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 신분 낮은 귀부인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뒤바리 부인이 사실상 프랑스왕비였다지만, 형식상으로 이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귀부인은 왕세손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 15세의 공주들과 마리는 이 점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뒤바리 부인을 견제했던 것이다.
뒤바리 부인은 처음에는 손자며느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호감을 보이며 친해지려고 했으나, 왕세손비가 아예 말을 걸어주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뒤바리 부인은 계속 참다가 결국 격노해 루이 15세에게 달려가 울고불고 하소연했는데, 외국에서 시집온 어린 손자며느리가 귀엽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던 루이 15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직접 불러 타이르거나 딸들을 말리는 대신, 오스트리아 대사를 불러 공식적으로 따져 버린다.
엄청나게 당황한 대사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서 사태를 전했다. 비록 이라는 존재를 불쾌해하긴 했어도 왕들이 첩을 거느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압력을 행사한다. 결국 엄마의 지시를 들은 대사가 눈물로 설득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유 궁 신년 행사에서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건네게 된다. 그 유명한, "오늘 베르사유 궁에는 사람이 정말 많군요"가 이 때 나온 말이다.[6][7]
이 사건 이후 뒤바리 부인은 승리에 젖어 의기양양했고, 세 공주들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분한 감정을 참고만 있어야 했다. 그러나 1774년 4월 27일 루이 15세천연두에 걸렸고, 세 딸들과 뒤바리 부인은 열을 다해 그를 간호했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지한 루이 15세사제를 불러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고해 신부는 "뒤바리 부인을 출궁시키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주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따라서 루이 15세는 그녀를 출궁시킬 수밖에 없었고, 5월 3일 그녀를 뤼엘[8]로 떠날 것을 명했다. 당시 루이 15세가 했던 말은 "마담, 나는 병이 들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소. 이 휴식이 나로 하여금 늘 당신에 대한 가장 정다운 우정의 감정을 갖게 해주는구려."였다.
몇 시간 후 루이 15세는 뒤바리 부인을 불러올 것을 명했으나, 뒤바리 부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리고 5월 10일 루이 15세가 사망했다. 뒤바리 부인은 왕 사망 후 잠시간 수녀원에 머물러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곧 조치가 풀려 자신의 루브시엥 성에서 은거하였다.[9]
쁘띠 트리아농 궁은 루이 15세 때 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 세운 별궁으로 18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는데, 정작 완공된 것이 마담 드 퐁파두르가 죽은 이후인 1768년에 끝이 났기 때문에 뒤바리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베르사유 궁에서 쫓겨난 이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에게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낳은 선물로 받는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루브시엥 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1792년에 혁명이 피로 물들기 시작하자 친구를 만난다는 이유로 런던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인생 최대의 오판을 터트리니,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러 파리에 들른 것. 이 때 파리는 극렬 과격파인 '''자코뱅당'''이 득세하고 있었고, 귀족도 부족해서 부르주아나 악덕 상인들까지 잡아죽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대체 왜 파리에 갔는지 아직도 얘기가 분분하지만, 어쨌건 뒤바리 부인이 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평판이 여기서 입증되는 듯.
바리 부인이 체포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73년에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흑인 노예[10] 자모르를 시종으로 하사했다. 바리 부인은 자모르에게 루이베누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키웠는데, 프랑스 혁명 시기에 그가 자코뱅에 가입하면서 바리 부인이 반혁명파라며 밀고했던 것이다. 루이베누아 자모르는 바리 부인 사후 그녀에게 누명을 씌운 혐의로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영국으로 도망쳤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1820년에 죽었다.
재판을 받을 때까지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숨겨두었던 보석을 모두 제공할 테니 살려달라"고 탄원했지만 네임드를 잡은 극렬파 자코뱅당이 그녀를 살려줬을 리는 만무하다. 결국 자모르의 거짓 증언으로 1793년 12월 8일 단두대에서 사형당한다.
선고가 있기 전 자신이 석방될 줄로 알았던 뒤바리 부인은, 사형 판결이 나자 목청이 찢어질 정도로 절규했다고한다. 마차단두대까지 호송되는 와중에도 계속 자신을 석방해달라고 애걸복걸하고, 단두대가 눈에 보이자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가서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고 한다. 물론 더 이상 젊은 나이도 아니었고 나이가 들어서 뚱뚱해진 노부인이었기에 완력이 장난이 아니어서 그녀를 단두대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형집행인 수 십명이 달라붙어서야 겨우 고정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에도 계속 찢어지는 목소리로 "단 몇 분만, 몇 초만이라도 사형을 연기해 달라"고 애원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목이 잘린 뒤에 광장에 있던 시민들은,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유언은 "잠깐만, 난 할 말이 있소. 잠깐만!"[11]이었다. 또한 뒤바리 부인이 영국에 숨겨둔 보석 65점은 결국 2년 뒤 영국 정부에게 압류되어 경매로 다 팔려나갔고, 영국에 숨겨둔 150만 리브르(약 2000억원 대) 상당의 돈과 채권까지 영국이 차지하여 영국 정부만 돈을 챙기게 되었다.
그녀의 처형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유명한 망나니 가문인 상송 가문의 4대 당주이자 프랑스 망나니들의 우두머리인 "무슈 드 파리" 샤를 앙리 상송이 집행했는데, 공교롭게도 상송은 여성을 유혹하고 다니던 젊은 시절에 뒤바리 부인과도 인사를 나누어 구면이었다. 또한 상송은 바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목을 날린 사람'''이기도 하다.

3. 대중매체에서



3.1. 베르사유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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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의 초반 3화부터 등장하며, 작중에서는 꽤 인상적인 악녀로 나온다.[12] 성우는 키노미야 료코. 비디오판은 최문자, KBS판은 이경자, EBS판은 이소영.
성윤리에 있어서 매우 엄격하고[13] 매춘부를 하등하게 보던 루이 15세의 딸들에게 영향받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천한 여자로 여기고[14] 말을 걸지 않자 마리 앙투아네트와 치열한 신경전을 시작하는데, 여기에 오스칼의 어머니가 휘말려 그녀의 시녀가 될지 마리의 시녀가 될지 기로에 선 적도 있었지만 오스칼의 어머니는 마리의 시녀가 되길 택해서 결국 오스칼 어머니를 둔 경쟁에선 패배했다.
한편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신경전&서로간의 견제질을 이용해, 오를레앙 공이 후계자인 루이 16세를 처리하고 자기가 후계자가 되려고[15] 그녀와 손을 잡았던 적도 있었다.[16] 이후에도 여러 번 마리와 마주쳤지만 마리는 꿋꿋이 인사를 하지 않았고, 뒤바리는 툭하면 왕에게 하소연하고[17] 뒤에선 성질을 내며 분을 삭인다.
그러다가 그녀의 연이은 하소연을 듣던 루이 15세가 뒤바리를 무시하는건 곧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기게되어 아예 왕명을 내걸어버린다(...) 결국 오스트리아에도 이 이야기가 들어가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도 프랑스 VS 오스트리아가 되는 구도를 막으려고 신하의 이름을 통한 칙령을 찔러넣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뒤바리와 인사할 것을 요구한다. 뒤바리의 인시 받아내기와 마리의 뒤바리 씹기가 반복된 것이 무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평화가 흔들리는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이니 실로 나비효과.[18]
처음엔 당연히 씹고 무시하던 마리였지만, 마리 옆에 마리아 여제가 보좌로 붙여놓은 메르시 백작과 오스칼이 마리에게 현실을 직시시키면서 한 수 접고 들어갈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마리는 결국 뜻을 꺾고 인사를 하기로 하지만 이번엔 루이 15세의 딸들이 나서서 인사하기 직전의 마리를 잡아채 끌고가는 바람에 불발되어버린다. 다행히 마리의 본의에 의해 뒤바리에게 인사 걸기가 불발된게 아닌지라 루이 15세도 그냥저냥 넘어간듯. 이후 새해에 귀부인들이 황태자비 앞에서 인사를 올릴 때 마리는 분함과 굴욕감 등을 꾹 참고 뒤바리 부인에게 인사를 건냄으로써, 뒤바리 부인은 그토록 고대하던 마리의 인사를 결국 받아낸다. 이 때만 해도 권세가 추락하던 슬럼프 시기를 극복하고 다시 하늘을 찌를 것처럼 묘사되었다.[19]
그러다가 루이 15세가 천연두에 걸려 죽음 직전이 되자[20] 오스칼에게 사정해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봐주게 해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하자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패기를 보여준다.[21][22]
결국 원작 만화에서 천연두로 죽어가던 루이 15세는 끝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 고해성사까지 하게 된다. 이에 고해성사를 하러 온 대주교는 그동안 주님을 모독하고 사치로 프랑스와 왕실을 망신시킨 뒤바리 부인을 추방하라고 하자, 결국 천하의 루이 15세도 찍소리도 못하고 뒤바리 부인을 추방시킨다. 다만 루이 15세는 뒤바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애니메이션에서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희미하게 "뒤바리....." 라고 말하며, 궁궐에서 추방당해 슬프게 루이 15세를 부르는 뒤바리 부인의 목소리에 안타까워하는 묘사를 추가했다.
결국 루이 15세는 죽고 뒤바리는 비참하게 궁에서 쫓겨나지만 오스칼이 떠나는 길을 배웅해준다. 여기서 뒤바리는 오스칼에게 자신의 비루했던 과거를 얘기해주며[23] 작중에서 퇴장한다. 그래도 할거 다 해보고 살았기에 후회는 없다는 심경을 밝힌다.[24] 그리고 오스칼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헤어지기 직전에 이렇게 온화한 기분이 든 건 5살 때 부모를 잃은 후 처음이라면서, 오스칼에게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중얼거린다.[25]
그리고 나레이션을 통해 실제 역사대로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음을 알려준다.[26][27]
참고로 라이벌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의도치 않게 시간차로 엿먹인다.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주려고 제작을 주문했다가 구매가 불발되었기에 발생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바로 그것.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사건의 핵심인물이자 작정하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엿먹였던 라모트 백작부인의 본명도 이여서 맨 앞 이름이 둘이서 동일하다.[28]

3.2. 그밖에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도 나온다. 배우는 아시아 아르젠토. 밤에 루이 15세와 침대 위에서 하는 고양이 놀이 장면이 깨알같다.
만화 이노센트에서는 마리 잔느 베큐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오토메 게임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에서는 조연 인물로 나온다. 베르사유의 장미처럼 악녀로 나오지만 장르 특성상 비중은 없다.

4. 관련 문서



[1] 실제로 나중에 문제가 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서 보석업자가 팔려고 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뒤바리 부인을 위해 루이 15세가 주문했던 것이었다. 다만 너무 사치스러워서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도 그 목걸이를 사지 않았다.[2] 당시 프랑스는 직접 왕을 뒷담화 할수 없으니 애첩을 뒷담화 하는걸로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다. 반면 애첩이 없었던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약점이 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대상이 되어 수많은 외설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3] 애첩이 없는 왕은 생식기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루이 16세마리 앙투와네트 왕비의 자식들 중 하나는 왕의 아이가 아닌 페르젠의 아이가 아닌가하는 루머가 있었다.[4] 폴란드 공주 출신[5] 실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매춘을 전면 금지했다가 실패한 적 있고, 신하들이 을 둘 경우 굉장히 엄격하게 처벌했다.[6] 다만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는 것처럼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건 뒤에 분함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우는 장면은 어디까지나 창작이다.[7] 1938년에 제작된 노마 쉬어러(Norma Shearer) 주연의 헐리우드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역사와는 달리 뒤바리 부인이 '''먼저 말을 걸고''' 서로 안부 인사를 묻지만 그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두번 다시 상종할 일 없을거라고''' 못을 박는다.[8] 베르사유 궁 가까이에 있는 궁.[9] 정치적으로 음모를 짜거나 정적을 만든 적이 없어서인지,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았다. 사실 루이 15세의 세 딸들이 조카 루이 16세를 닥달해서 뒤바리 부인을 처리하라고 했기에 그나마 수녀원으로 잠시간 추방했을 뿐이었다.[10] 정확히는 흑인이 아니라 치타공 출신의 벵골인이었다.[11] 혹은 "난 할 말이 있소. 잠시만 시간을 주시오!"[12] 초반 보스로써의 강렬하고 화려한 존재감이나 캐릭터성이 뚜렷한 것과는 별개로 이 만화에서 고증오류가 매우 심각한(...) 실존인물이다. 만화에선 온갖 음모를 꾸미는 진성 악녀로 나오지만 실제 성격은 그와 거리가 먼, 오히려 정치권력에도 관심 없고 자선활동에도 힘쓴 선한 사람이었다. [13]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르침의 영향이 컸다.[14] 사실 잘 모를 적에 오스칼에게 마리가 뒤바리 부인 보고 누군지 묻자 오스칼도 마리가 크게 신경쓸 필요 없는 사람이라 말하긴 했다. 그런데 그럴만도 한게 군인인데다 정치판에도 별 관심도 없고, 겸사겸사 왕의 애첩이랍시고 권세를 휘두르던 뒤바리를 별로 좋지 않게 보던 오스칼 입장에서도 뒤바리보단 일단 공식적인 왕실 내 서열이 한참 위에 있는 마리 쪽이 더 높으니 뒤바리 부인을 서열상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봤을 것이다.[15]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는 뒤바리 부인이 오를레앙 공을 후계자로 해달라고 루이 15세 앞에서 빌어달라고 부탁한 것.[16] 물론 이들의 관계는 오월동주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실패했다.[17] 그런데 루이 15세는 초반엔 꽤 귀찮아하며 건성으로 들었다.[18] 메르시 백작은 이 이야기를 알게 된 후 여자들 신경전에 프랑스랑 오스트리아가 싸울 지경까지 갔다니 이게 뭔 일이냐고 경악한다.[19] 그리고 뒤바리 부인도 그간의 짜증과 분함이 풀려 엄청 호쾌하게 웃어재낀다.[20]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견제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뒤바리 부인과 루이 15세의 세 딸들 모두 루이 15세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뭐 루이 15세를 진심으로 생각하기보단 이 양반이 죽어버리면 자신들 모두 취급이 영 좋지 않아질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21] 물론 오스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칼에 스스로를 들이대자 당황한 뒤바리 부인이 칼을 떨어뜨렸다.[22] 그런데 이 때 오스칼이 부탁을 받아줬다고 쳐도 뒤바리 부인이 원하는대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치하의 시절에서 궁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애초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바리 부인의 출신부터 마음에 안 들어서 뒤바리 부인이랑 제대로 대화해보기도 전에 선입견부터 가지고 먼저 그녀를 거절했던 것이며 억지로 말을 건내게 된 후에도 두 번 다시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엄청나게 억울해할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초기엔 루이 15세의 세 딸들의 부추김 탓도 있지만 이후엔 그런 거 상관 없이 그냥 자기가 싫어서 그런다고 할 정도. 심지어 원래 역사에서 뒤바리 부인이 베르사이유의 장미 속 뒤바리 부인과 달리 야심가적이지도 않고 성품이 무난했는데도 마리가 거절부터 때리고 봤으니. 게다가 뒤바리의 손을 잡는가 싶었던 오를레앙 공마저도 뒤바리 부인의 뒷배인 루이 15세가 다 죽어가며 권좌가 위태로워지자 뒤바리 부인이 자기 저택 앞에서 애걸복걸해도 '죽어가는 왕의 정부가 무슨 힘이 있다고' 라고 말하면서 바로 손절태세를 취했다.[23] 유치원생 무렵에 부모를 잃고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서 빵같은 먹을 것을 닥치는대로 모으다가, 그것이 루이 15세의 정부가 된 뒤 보석이며 드레스를 닥치는대로 모으는 습관으로 이어졌다고. 이를 밝히면서 오스칼에게 당신은 내일 먹을 빵 걱정을 한 적이 없을거라는 투로 물어본다.[24] 그리고 자기는 뒤끝이 길지 않은 사람이라서 지난 일은 금방 잊는다고 한 걸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기싸움에 대한 미련은 내던진 듯하다.[25] 확실히 자신과 철저히 대립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상전으로 모시며 충성했던 오스칼이 자신을 안전히 호위해주며 배웅까지 해줬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 했다.[26] 뒤바리 부인은 퇴장하면서 자신이 지금은 철 지난 해바라기 신세지만 언젠가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할 걸 호언장담했는데 끝내 그녀의 결말은 처형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까지 고려해보면 그녀는 과거 그녀의 노예였던 자코뱅파의 누명 섞인 밀고로 처형당하는 셈이 된다.[27] 게다가 루이 16세가 즉위할 당시 백성들이 ''전 국왕은 우리들의 세금을 모두 뒤바리 부인에게 갖다 받쳤다."라는 말하는 걸로 보아, 라이벌인 마리 앙투아네트 못지않게 백성들의 미움을 많이 받았던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의 뒤바리 부인은 사치가 심하다고 명확히 묘사된다. 애초에 당시 프랑스에선 국왕의 애첩을 욕하는 게 거의 국민 스포츠였을 정도로 당연시 되었으니 악명이 높은 것도 당연하다.[28] 재미있게도 뒤바리 부인의 이름엔 '앙투아네트' 란 이름도 들어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