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 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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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orghini Miura'''
람보르기니에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간 총 764대를 생산한 12기통 스포츠카. 참고로 최초의 양산형 V12 미드쉽 차량이다.[1][2]
미우라 라는 이름은 미우라 목장에서 키워진 유명한 투우소에게서 따왔다. 뜻은 난폭한 자, 사악한 자.
1966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특이하게도 엔진을 시트뒤에 배치하는 전형적인 미드십이면서도 엔진을 가로로 배치[4] 하였으며, 마르첼로 간디니의 시대를 앞서간 역동적인 디자인은 큰 충격을 몰고왔다.
람보르기니의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퓨어 스포츠카보다는 '''그란투리스모'''를 선호했기 때문에, 미우라는 페루치오 몰래 기술자들이 만들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완성된 후 페루치오는 이 차가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생산 허락을 내줬다.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는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로[5] 젊고 경험도 부족하여 자동차 디자인의 기본이나, 인체공학적인 측면을 따지는 능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런 기성 디자인 공식에 얽매이지 않는 차를 디자인한 것이며, 그 결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디자인이 탄생했다.
P400은 275km/h라는 최고기록으로 가장 빠른 양산차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페라리의 365가 1968년에 280km/h로 해당기록을 갱신하자, 1970년에 다음모델인 P400S의 출력을 강화하여 288km/h를 달성해 타이틀을 다시 되찾아왔다. 이후 P400SV로 290km/h를 달성하여 타이틀을 갱신하였으며, 같은 회사의 쿤타치에 의해 또다시 갱신되었고, 1984년에 페라리 288 GTO가 갱신하기 전까지 람보르기니가 소유한 기록이었다.
"미우라"라는 이름은 오너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직접 붙인 것으로 이슬레로, 가야르도, 무르시엘라고 등 걸출한 투우용 소들를 길러낸 돈 안토니오 미우라라는 사육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단순히 P400으로만 불렸다. 참고로 이 사육사가 길러낸 소의 등급이 람보르기니 사의 차량 이름으로 자주 쓰인다.
표에 써진 모델말고도 레이싱 규정에 맞춰서 만든 1970년식 Jota[6] 라는 단 한대만 만들어진 모델이 존재했는데, 만들어진 지 10년 후인 1980년, '''교통사고로 불타버렸고, 완파되었다(...)''' 더욱이 이 차는 원오프모델 답게 경매에 나올 시 천문학적인 가격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대신에 요타에 대한 소문을 듣고온 고객들의 열화같은 성화에 힘입어 이후 SV/J라는 모델을 12대 정도 생산했다.
딱 봐도 너무나 멋지게 생긴 차이긴 한데, 초기형 P400모델은 초짜 디자이너와 젊은 엔지니어들이 부업성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차답게 여러 문제들이 있다. 치명적인 단점으로는 공력특성이 엉망이고 연료탱크가 앞에 있기 때문에 연료를 소모할수록 차 앞이 가벼워져 고속주행 시 '''프론트가 떠버리는''' 문제가 있다. 당연히 이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조향이 불가능해 미우라는 고속주행이 극도로 위험한 차였다. 설계 불량으로 운이 없으면 휘발유가 뜨거운 엔진커버 위로 분사되어 불이 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실내공간은 2명이 타기에도 비좁을 정도였고 무거운 엔진으로 인한 리어헤비 특성과 엄청난 소음, 허접한 냉각 및 방열성능으로 운전하기도 어려웠다. 이렇듯 60년대 기준으로도 정말 거친 차였지만, 성능과 스타일이 워낙 센세이셔널한 차였던지라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명차로 인정받고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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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미우라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컨셉카가 발표되었으나, 람보르기니는 미우라의 부활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식스티 세컨즈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몰고 나온다. 본인 소유의 차라고... 참고로 니콜라스 케이지는 이차에 대한 애정이 너무 큰 나머지 SV/J 버전을 손에 넣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드라마에서 후속모델인 람보르기니 쿤타치로 되풀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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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borghini Miura'''
1. 개요
람보르기니에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간 총 764대를 생산한 12기통 스포츠카. 참고로 최초의 양산형 V12 미드쉽 차량이다.[1][2]
미우라 라는 이름은 미우라 목장에서 키워진 유명한 투우소에게서 따왔다. 뜻은 난폭한 자, 사악한 자.
2. 제원
3. 상세
1966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특이하게도 엔진을 시트뒤에 배치하는 전형적인 미드십이면서도 엔진을 가로로 배치[4] 하였으며, 마르첼로 간디니의 시대를 앞서간 역동적인 디자인은 큰 충격을 몰고왔다.
람보르기니의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퓨어 스포츠카보다는 '''그란투리스모'''를 선호했기 때문에, 미우라는 페루치오 몰래 기술자들이 만들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완성된 후 페루치오는 이 차가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생산 허락을 내줬다.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는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로[5] 젊고 경험도 부족하여 자동차 디자인의 기본이나, 인체공학적인 측면을 따지는 능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런 기성 디자인 공식에 얽매이지 않는 차를 디자인한 것이며, 그 결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디자인이 탄생했다.
P400은 275km/h라는 최고기록으로 가장 빠른 양산차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페라리의 365가 1968년에 280km/h로 해당기록을 갱신하자, 1970년에 다음모델인 P400S의 출력을 강화하여 288km/h를 달성해 타이틀을 다시 되찾아왔다. 이후 P400SV로 290km/h를 달성하여 타이틀을 갱신하였으며, 같은 회사의 쿤타치에 의해 또다시 갱신되었고, 1984년에 페라리 288 GTO가 갱신하기 전까지 람보르기니가 소유한 기록이었다.
"미우라"라는 이름은 오너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직접 붙인 것으로 이슬레로, 가야르도, 무르시엘라고 등 걸출한 투우용 소들를 길러낸 돈 안토니오 미우라라는 사육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단순히 P400으로만 불렸다. 참고로 이 사육사가 길러낸 소의 등급이 람보르기니 사의 차량 이름으로 자주 쓰인다.
표에 써진 모델말고도 레이싱 규정에 맞춰서 만든 1970년식 Jota[6] 라는 단 한대만 만들어진 모델이 존재했는데, 만들어진 지 10년 후인 1980년, '''교통사고로 불타버렸고, 완파되었다(...)''' 더욱이 이 차는 원오프모델 답게 경매에 나올 시 천문학적인 가격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대신에 요타에 대한 소문을 듣고온 고객들의 열화같은 성화에 힘입어 이후 SV/J라는 모델을 12대 정도 생산했다.
딱 봐도 너무나 멋지게 생긴 차이긴 한데, 초기형 P400모델은 초짜 디자이너와 젊은 엔지니어들이 부업성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차답게 여러 문제들이 있다. 치명적인 단점으로는 공력특성이 엉망이고 연료탱크가 앞에 있기 때문에 연료를 소모할수록 차 앞이 가벼워져 고속주행 시 '''프론트가 떠버리는''' 문제가 있다. 당연히 이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조향이 불가능해 미우라는 고속주행이 극도로 위험한 차였다. 설계 불량으로 운이 없으면 휘발유가 뜨거운 엔진커버 위로 분사되어 불이 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실내공간은 2명이 타기에도 비좁을 정도였고 무거운 엔진으로 인한 리어헤비 특성과 엄청난 소음, 허접한 냉각 및 방열성능으로 운전하기도 어려웠다. 이렇듯 60년대 기준으로도 정말 거친 차였지만, 성능과 스타일이 워낙 센세이셔널한 차였던지라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명차로 인정받고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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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미우라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컨셉카가 발표되었으나, 람보르기니는 미우라의 부활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4. 미디어에서의 출연
식스티 세컨즈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몰고 나온다. 본인 소유의 차라고... 참고로 니콜라스 케이지는 이차에 대한 애정이 너무 큰 나머지 SV/J 버전을 손에 넣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드라마에서 후속모델인 람보르기니 쿤타치로 되풀이되기도 했다.
5. 관련 문서
6. 둘러보기
[1] 물론 출시된 지 50년을 넘긴 차고, 양산차라고 해도 애초에 생산된 양이 적기에 2020년 현재에는 엄청나게 희귀한 차이다. 그래서 그런지 경매에 올라오거나 하면 '''최소 10억원 이상에 팔린다.'''[2] 이전 서술에는 최초의 양산형 미드쉽 차량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초의 양산형 미드쉽 차량은 1962년 출시된 프랑스 보넷(Bonnet) 사의 젯(Djet)이라는 모델이다. 처음 2년 간은 경영난으로 198대만 생산됐으며, 1964년 마트라에 인수된 뒤 68년 단종 때까지 1,491대가 더 생산됐다. 보넷 젯 외에도 1964년 출시된 드토마소 발레룽가가 미우라보다 앞서 미드쉽 레이아웃을 채택했다.[3] 엄청난 경량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었다.[4] 일반적으로 8기통 이상급의 대형 엔진을 MR로 얹는 경우는 엔진의 길이 때문에 세로배치가 대부분이다. 가로배치 MR은 토요타 MR 시리즈(4기통), 혼다 NSX(6기통) 등 컴팩트한 엔진을 탑재한 경우 주로 채택된다.[5] 1938년생이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는 80대 이상의 할아버지이며 자동차 디자인 부분에서 엄청난 유경험자이시다. 이후 람보르기니 쿤타치를 디자인하였다.[6] '요타'로 읽는다. 일본에서는 '이오타'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유래는 J의 스페인어 표기인 Jota(호타)를 이탈리아식으로 읽은 것.[7] 상술했듯 람보르기니의 원래 관심사는 GT카였으며, 미우라의 데뷔 당시에도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차는 쇼카이며 다른 차량의 판매촉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많아야 30대는 팔릴까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네바 모터쇼 당시 많은 주문을 받은터라 완성도는 높진 않지만 일단 생산라인을 깔고 한 대 한 대 생산할 때마다 기능적 개선, 오류 수정을 하면서 점차 완성도롤 높여갈 생각을 했었던 듯. 이처럼 프로토타입을 판매하면서 개량하는 것은 당시 소규모 코치빌더들에게는 흔한 일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