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터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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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레스터 윌리스 영(Lester Willis Young). 애칭은 대통령(President)의 줄임말인 프레즈(Prez).
미국의 재즈 색소폰/클라리넷 주자. 콜맨 호킨스와 함께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본좌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1909.8.27~1959.3.15
1. 생애
미시시피 주의 우드빌에서 태어났고, 음악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바이올린, 드럼, 색소폰 등의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 이어 가족 악단에서 연주하면서 뮤지션 생활을 시작했지만, 1927년에 남부로 순회 공연을 떠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뛰쳐나오고 말았다.[1]
이후 미국 여러 도시와 악단을 돌며 연주 경험을 쌓았고, 1933년에 캔자스시티에 정착해 막 유명세를 얻기 시작할 무렵의 카운트 베이시를 만났다. 베이시는 영의 연주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빅 밴드에 영입했는데, 당시 재즈 색소폰계를 휘어잡고 있었던 호킨스의 거칠고 대범한 연주 스타일과는 거의 극점에 있는 부드럽고 느슨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계속 발전시켰다.
1934년에는 퇴단한 호킨스의 후임으로 플레처 헨더슨의 밴드에 들어갔지만, 호킨스처럼 터프한 스타일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등쌀에 밀려 1년도 못채우고 그만두고 말았다.[2] 헨더슨 밴드에서 나온 뒤에는 앤디 커크 밴드에서 반 년 정도 연주하다가 1936년에 다시 베이시 밴드로 돌아갔다.
물론 베이시 밴드에서 두 번째로 활동하던 때도 느슨하고 희미한 박자감의 연주로 상당히 엇갈린 평가를 받았는데, 밴드 내에서도 호킨스 스타일로 연주하던 허셀 에반스와 경쟁이 붙어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이시 밴드의 인기 상승과 더불어 영의 연주에 영향을 받은 신진 색소폰 주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호킨스와 함께 재즈 색소폰의 스타일을 양분한 거물로 평가받았다.
1930년대 후반에는 클라리넷 연주도 겸했고, 베이시 밴드의 리듬 섹션 연주자나 소규모 리드 연주자가 모인 그룹의 공연과 녹음에서 클라리넷을 부는 영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전설적인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와도 이 때부터 자주 협연하기 시작했고, 홀리데이 역시 느슨하고 자유로운 스타일의 가창으로 영의 스타일과 찰떡궁합을 보여주었다.
1940년에 베이시 밴드를 다시 나온 뒤에는 홀리데이나 냇 킹 콜 같은 보컬리스트들의 녹음 세션과 공연에서 솔리스트 혹은 사이드맨으로 활동했고, 여타 연주자들과 소규모 그룹을 결성해 공연했다. 1943년 겨울에 임시로 베이시 밴드에서 연주했지만, 2차대전의 여파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징집되는 가운데 밴드 드러머였던 조 존스와 함께 입대해야 했다.
하지만 연주 경력이 있었다면 대부분 군악대로 빠졌던 백인 뮤지션들과 달리, 흑인이었던 영은 그냥 일반 육군 부대로 배치되었고 상관으로부터 악기 연주를 금지당했다. 자유분방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관을 갖고 있던 영은 규율과 명령이 지배하는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1944년 후반에는 소지품 검열 중 대마초와 술이 적발되자 군사법원에 넘겨져 1년 형을 선고받고 군대 영창에서 복역해야 했다.
1945년 말에 불명예 전역한 뒤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 때부터 영의 전매 특허였던 부드러운 음색이 사라지고 (호킨스 만큼은 아니었지만) 거칠고 쉰 소리와 무거운 프레이징이 자주 눈에 띄게 되었다. 연주 스타일의 변화에 관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양한 추측이 있었지만, 그와 관계 없이 여전한 유명세 덕에 재즈 음반사인 버브(Verve)를 소유하고 있었고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zz at the Philharmonic)이라는 재즈 음악제를 주관하고 있던 노먼 그랜츠에게 발탁되기도 했다.
버브 외에도 사보이를 비롯한 음반사에서 당시 막 뜨기 시작한 비밥 뮤지션들과 협연을 하는 등 새로운 영역의 연주자들과도 곧잘 어울리기 시작했지만, 1950년대 초반부터 알콜 중독이 심해지면서 모든 면에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병원 신세까지 질 정도로 악화되었지만, 이듬해 퇴원한 뒤에는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이 이끄는 퀸텟(5중주단)과 협연하면서 음반을 내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음 습관은 나아지기는 커녕 날이 갈 수록 심해졌고, 심지어 식사도 거르고 술로 배를 채우는 등 캐막장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다. 결국 간경변을 비롯한 여러 질환이 겹쳐 총체적인 건강 악화로 이어졌고, 1959년에 프랑스에서 공연할 때는 거의 반은 죽어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공연 일정이 끝난 직후에는 완전히 만취 상태로 귀국했고, 미국에 막 도착한 지 1시간도 채 안되어 뉴욕의 한 호텔 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유해는 브루클린의 에버그린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연주 스타일
호킨스를 비롯한 많은 초기 테너 색소폰 주자들이 이 악기로 호탕하고 묵직한 소리를 빚어내기 위해 노력했던데 반해, 영은 그냥 듣고만 있으면 이게 알토인지 테너인지, 심지어 소프라노인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연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뽑아냈다. (아예 색소폰이 아니라 클라리넷 연주인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소리 뿐 아니라 프레이징과 박자, 템포 면에서도 매우 느슨하면서도 유연한 연주를 뽑아냈고, 어떤 때는 혼 섹션이나 리듬 섹션의 정해진 박자에도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면서도 비대칭적인 연주를 선보여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연주 생활 중반기 이후로는 빅 밴드 같은 대규모 앙상블 보다는 소규모 그룹이나 세션에서 더 자주 연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 이후로 음색이 굵어지고 연주도 꽤 격렬해지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영이 군대에서 겪은 모욕적인 처우와 영창 생활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스콧 야노 같은 재즈 평론가들은 이러한 주장을 일축하고, 영이 이 시기 그 동안 애용했던 목제 리드가 아닌 플라스틱제 리드를 자주 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3]
하지만 단순히 리드 바꿔서 음색이 달라졌다고 보기에는 너무 스타일 편차가 커서, 영이 뭔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삶에 있어서든 연주에 있어서든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보는 이들도 아직 많다. 무엇보다 활동 말기인 1950년대에 보여준 막장 음주 습관이 이러한 쇠락에 일조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1956년 이후로는 완벽한 하락세를 보이면서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가져다 주었다.
3. 사생활
영 생전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함께 '좀 많이 독특한 사람'[4] 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색소폰을 불 때 마우스피스를 비틀어 끼우고 악기를 오른쪽으로 30도 가량 기울여 연주하는 특이한 연주법으로 유명했다. 물론 후반기에는 그냥 수직으로 세워서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법으로도 연주했지만.
그리고 타인이나 사물을 지칭할 때는 자기만 아는 독특한 개념의 단어를 썼는데, 가령 연주자로서 자신의 성장에 큰 도움을 준 베이시의 경우에는 '더 홀리 메인(The Holy Main)' 이라고 불렀다. 스타일이 잘 맞아 자주 협연했던 홀리데이는 '레이디 데이(Lady Day)' 라고 불렸고, 홀리데이는 반대로 영에게 '프레즈' 라는 별명을 붙여줘 답례했다. 그 외에 뭔가 욕구를 표출하고 싶을 때는 'Eye' 를 중얼댔고, 어떤 의견에 동의한다고 할 때는 'Bell' 을 연신 외쳐댔다.
이런 탓에 몇몇 주변인들은 그가 완전히 또라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고, 특히 1940년대 중반에 끌려간 군대에서는 제대로 고문관 취급을 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상관이 영의 아내가 백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가혹행위를 자행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 하지만 영의 몇몇 지인들은 전역 후에도 자신이 군 시절 당한 처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5]
이렇게 매우 독특한 자신의 생활 습관을 견지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매우 유순한 성격이었고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나 욕설에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대인배이기도 했다고 한다. '타인에 대한 증오라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 이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다.
4. 후계자들과 경의
비록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다고는 하지만, 영의 생전에도 그를 격찬하며 전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영의 개성을 자신의 연주에 도입한 후배 혹은 동료 연주자들도 꽤 많았다. 처음에 비밥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가 영의 연주를 듣고 버로우탄 뒤 영의 음색/프레이징 스타일과 비밥 스타일을 혼용한 연주자들로 스탄 게츠와 덱스터 고든이 있다.
주트 심스나 알 콘, 제리 멀리건 같이 훗날 쿨 재즈의 거물이 된 이들은 영을 대선배로 모시기까지 했고, 폴 퀴니체트는 영과 붕어빵 급으로 유사한 연주를 보여줘서 '바이스 프레즈(Vice Prez. 미국 부통령)'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재즈 외에도 소울이나 블루스 등 관련 장르의 음악인들도 영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소울 가수 마빈 게이는 자신의 창법이 영의 프레이징과 호흡에서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는 영의 부고를 듣고 곧바로 영이 자주 쓰고 다닌 파이 모양의 모자를 제목으로 한 '포크파이햇 안녕(Goodbye Pork Pie Hat)' 이라는 추모곡을 작곡했고, 그 해(1959년) 출반된 자신의 명작 앨범 중 하나인 '밍거스 아 음' 에 수록했다.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도 '레스터가 마을을 떠나다(Lester Left Town)' 라는 추모곡을 작곡했고, 레스터 영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인 '프레즈' 도 1930~50년대의 재즈나 재즈신을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 연극 등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1]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 수준은 장난이 아니었고, 특히 남부에서는 '짐 크로우 법' 이라는 악법이 그것을 용인하고 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2] 심지어 헨더슨의 아내가 영을 앉혀놓고 호킨스 음반을 틀어준 뒤, 이렇게 연주하라고 강요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 색소폰은 리드 악기이기 때문에, 리드의 재질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음색이 많이 달라진다.[4] 붉은 빛이도는 모발색과 초록눈도 그의 특이함에 한 몫했다. 어렸을적에는 머리색 때문에 별명이 말콤 엑스처럼 ‘Red’ 였다고.[5] 영은 전역 후 'D.B. Blues' 라는 곡을 썼는데, D.B.는 Detention Barrack, 즉 영창의 줄임말이다. 이 곡을 쓴 것이 군 시절의 악몽에 대한 조소인지, 아니면 그냥 영감이 떠올라 제목을 붙인 것인지가 종종 논쟁 떡밥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