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 게이

 

'''마빈 게이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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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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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빈 게이
MARVIN GAYE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7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86년,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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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게이
Marvin Gaye'''
'''본명'''
마빈 펜츠 게이 주니어
(Marvin Pentz Gay, Jr.)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39년 4월 2일, 워싱턴 D.C.
'''사망'''
1984년 4월 1일[1](향년 44세), 캘리포니아 주
'''직업'''
싱어송라이터
'''신체'''
185cm
'''활동'''
1958년 ~ 1983년
1. 개요
2. 상세
3. 개인사
3.1. 비극적인 죽음
4. 디스코그래피
4.1. 앨범
4.2. 싱글
4.2.2. 빌보드 핫 100 2위
4.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4.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1. 개요


유튜브
미국의 가수. '''흑인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티스트로 꼽히며''', 후대 음악, 특히 소울알앤비 및 보컬 진행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된다. 워싱턴 D.C. 출신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전성기를 맞이하여 오랜 기간 동안 전성기를 유지했다는 점에서[2] 대중음악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는 40대 초반까지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미국 음악계를 지배했으나 45세의 나이로 아버지에게 살해당해 아쉽게 요절했는데,[3]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많은 팬들이 아쉬워한다.

2. 상세


초창기에는 테미 태럴[4]이나 타 모타운 가수들과 활동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이 시절에도 모타운 특유의 프로듀싱과 가창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1971년 동생의 베트남 전쟁 참전과, 듀엣으로 함께 20세기 최고 명반을 만들어냈던 짝꿍인 테미 테럴의 사망을 통해 충격을 받아 만든 What's Going On이라는 앨범을 내놓으면서 전설의 위상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스티비 원더와 함께 모타운 레코드의 중흥을 이끌고 가사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는 파격적인[5] 곡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음악적으로나 메시지적으로나 기존 소울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에 모타운 사장은 이런 음악은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마빈 게이는 고집을 꺾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으며, 결국엔 성공시켰다. 이는 후대 흑인 음악계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후 낸 Let's Get It On 앨범은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색이었다. 선지적이고 사회비판적이었던 전작과 달리, 다분히 성(性)적인 세속적 주제를 토대로 하였다. 이미 경지에 오른 뮤지션답게 완벽하게 자신의 색을 입혀 섹슈얼한 음악의 상징적 존재로 굳건히 자리잡게 된 앨범이기도 하다. 또 동명의 타이틀 곡은 베드송으로 가장 많이 리퀘스트 받는 넘버이기도 하다.
음악적으로도 다양한 악기들과 부드러운 하모니 등 가히 소울의 질감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을 들었으며 타 레이블에서 활동하던 오티스 레딩, 앨 그린, 커티스 메이필드아이작 헤이즈[6]와 더불어 소울이라는 장르에 천지개벽을 불러일으켰다.
가창력의 수준은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일도 드물지 않으며, 특유의 유려하고 부드러운 창법과 색채가 뛰어나 지금도 수 많은 남자가수들이 영향을 받고있고, 또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아카펠라로 혼자 커버하는 영상을 보면, 무반주임에도 완벽한 박자에 맞춰서 가벼운 춤까지 추며 노래를 부르는 마빈 게이를 보면 진정한 천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재가 45세에 죽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7]

3. 개인사


하지만 그의 개인사는 노래 파트너의 죽음과 이혼, 마약 중독[8]과 자살 시도 등의 굴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게다가 1980년대부터 실적 저조와 부인 '애나 골디'와의 이혼[9]에서 비롯된 모타운과의 불화가 심해져 계약해지를 하고 각고의 재활 끝에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앨범 Midnight Love을 내고[10] 간만에 대히트를 치며 부활했다.

3.1. 비극적인 죽음


그러나 이런 경사를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투어가 끝나고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휴식기를 갖던 도중[11] 1984년 만우절 날, 부모끼리 벌어진 싸움을 말리다가 아버지랑 몸싸움이 붙었고 화가 난 아버지의 총에 맞아 [12] 말 그대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곧 병원에 실려 갔지만 손 쓸 수도 없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마빈 게이를 죽인 총은 마빈 게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에게 줬던 것이었고, 마빈의 사망일은 그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아버지 마빈 게이 시니어는 체포되어 1급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당시 뇌종양으로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의사의 소견을 근거로 들면서 6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이 판결은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마빈 게이 시니어는 사건 이전부터 막장 부모로 악명이 높았다. 일단은 목사였으나 알콜 중독에 자식들에게 매우 폭압적으로 굴며 체벌을 일삼고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놀고먹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다 여장을 즐겨하는 크로스드레서였는데, 이 역시 마빈과 자식들의 유년 시절에 악영향을 미쳤다.[13] 시니어 본인은 아들을 사랑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마빈 게이 본인이나 그의 어머니랑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빈 게이가 가수로 성공해, 부모님을 챙겨주려고 했음에도 아버지 쪽에서는 별다른 감사도 표하지 않아서, 한동안 보러 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워싱턴 DC에서 마빈 게이의 날을 정한 뒤, 겨우 화해했다고 한다. 부인인 앨버타마저 1980년대 들어서 사이가 완전히 소원해져 각 방을 쓰는 처지였다고 한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인해 마빈 남매의 어머니인 앨버타 게이에게도 이혼당해 쓸쓸히 혼자 살다가 1998년 84세로 사망했다. 마빈 게이 시니어가 아들과 아내보다 더 오래살았으나 살아있는 동안 아들을 죽인 아버지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아내랑 손자, 손녀들에게도 버림받으며 외로이 죽은건 어찌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어머니 앨버타 게이는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이 사건으로 인해 남편과 이혼 소송을 내서 정식으로 이혼했다. 앨버타는 아들이 남겨준 재산 일부를 상속받고, 그 돈으로 알콜 중독 치료 병원에 기부하고 알콜 중독 치료 및 위해성을 알리는 활동에 나서며 살다가 1987년 골수암으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빈 게이는 어머니하고 사이가 좋았던 편이라고 한다. 노래 실력을 칭찬해주고 힘들어하는 자신을 위로해주는 다정한 어머니였다고 마빈 게이는 회고했다.
마빈 게이의 유해는 어머니랑 자녀들이 참석한 장례식에서 장례를 치룬 후에 화장되어 태평양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후 다이애나 로스토드 런그렌 등 동료 뮤지션들이 곡을 내면서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했다.
'아버지가 자식을 살해한 사건'은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경악할만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음악 채널인 VH-1/VH-1 Classic 에서 '제일 충격적이였던 음악사 순간 100선' 에 8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4. 디스코그래피



4.1. 앨범


'''연도'''
'''제목'''
1961년
The Soulful Moods of Marvin Gaye
1962년
That Stubborn Kinda Fellow
1964년
When I'm Alone I Cry
Together (With Mary Wells)
Hello Broadway
1965년
How Sweet It Is to Be Loved by You
A Tribute to the Great Nat "King" Cole
1966년
Moods of Marvin Gaye
Take Two (With Kim Weston)
1967년
United (With Tammi Terrell)
1968년
You're All I Need (With Tammi Terrell)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1969년
M.P.G.
Easy (With Tammi Terrell)
1970년
That's the Way Love Is
1971년
What's Going On[14]
1972년
Trouble Man
1973년
Let's Get It On
Diana & Marvin (With Diana Ross)
1976년
I Want You
1978년
Here, My Dear
1981년
In Our Lifetime
1982년
Midnight Love
1985년
Dream of a Lifetime
Romantically Yours
1997년
Vulnerable
2019년
You're The Man

4.2. 싱글



4.2.1. 빌보드 핫 100 1위


  •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1968)
  • Let's Get It On (1973)
  • Got to Give It Up (1977)[15]

4.2.2. 빌보드 핫 100 2위


  • What's Going On (1971)

4.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Pride and Joy (1963)
  • How Sweet It Is (To Be Loved by You) (1964)
  • I'll Be Doggone (1965)
  • Ain't That Peculiar (1965)
  • Your Precious Love (With Tammi Terrell) (1967)
  • If I Could Build My Whole World Around You (With Tammi Terrell) (1967)
  • Ain't Nothing Like the Real Thing (With Tammi Terrell) (1968)
  • You're All I Need to Get By (With Tammi Terrell) (1968)
  •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 (1969)
  • That's the Way Love Is (1969)
  • Mercy Mercy Me (The Ecology) (1971)
  • Inner City Blues (Make Me Wanna Holler) (1971)
  • Trouble Man (1972)
  • Sexual Healing (1982)

4.2.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You're a Wonderful One (1964)
  • Once Upon a Time (With Mary Wells) (1964)
  • What's the Matter with You Baby (With Mary Wells) (1964)
  • Try It Baby (1964)
  • It Takes Two (With Kim Weston) (1966)
  • Ain't No Mountain High Enough[16] (With Tammi Terrell[17]) (1967)
  • You're a Special Part of Me (With Diana Ross) (1973)
  • My Mistake (Was to Love You) (With Diana Ross) (1974)
  • I Want You (1976)

[1] 아버지에게 살해당했는데, 공교롭게도 생일 하루 전에 사망했다.[2] 45세의 나이로 사망할때까지 전성기였다. 이 시대의 가수들 중 롤링 스톤스, 비틀즈 멤버들, 다이애나 로스,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전성기가 제일 길었던 가수 중 한 명이다.[3] 두 발 맞았는데, 첫 번째 총알이 정확히 심장을 관통해서 즉사했다.[4] 모타운에서도 손꼽는 젊은 여성 가수였으나 (마빈보다 6살 연하다. 데뷔 당시 14살이었는데, 타 레이블에서 활동하다가 이적한거라 듀엣 자체는 1967년에서야 했다.) 뇌종양으로 인해 2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마빈 게이와 함께 부른 Ain't No Mountain High Enough로 잘 알려져 있다. 태미의 요절은 마빈에게 상당히 충격이었고, 마약 중독의 늪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5] 당시 모타운 소속 가수들의 노래는 팝적인 사랑노래가 대부분이였다.[6] 사우스 파크의 '셰프' 제롬 맥엘로이 역을 맡았던 그 사람 맞다.[7] 비슷하게 흑인음악의 범위를 늘린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50세에 죽었음을 생각하면 천재는 빨리 죽는다는 말이 잘 와닿는다.[8] 엄청난 코카인 중독자였다고 한다.[9] 모타운의 창업자인 베리 골디의 '''누나'''다. 1922년생으로 남동생 베리(1929년생)보다 7살 많았고, 전 남편이었던 마빈 게이보다도 17살씩이나(!) 연상이었다. 1966년 마빈 게이의 부인의 조카, Denise Gordy는 남자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고 그 때가 Denise의 나이 17살이었다. 나중에 마빈 게이와 Denise 사이의 아이로 밝혀졌고 출생 후 아이는 곧바로 마빈 게이와 Anna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점, 44살 즈음이었던 Anna는 자신이 임신한 것처럼 꾸며내야만 했다. 아무튼 마빈 게이는 이혼 당시 심정을 담은 Here, My Dear를 발표했으나 그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우울한 내용과 당시 하락세였던 마빈 본인의 인기가 겹처 망했다. 그러나 후일 재평가되었다. 이혼 당시엔 사이가 상당히 나빴고 애나도 Here, My Dear를 불쾌하게 여겼으나 마빈이 재기하면서 화해하고 앨범에 대한 평도 호전되었다. 하지만 화해 후 얼마 안 돼서 마빈이 아래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애나는 이후 재혼하지 않고 세간의 관심을 차단하고 살다가 2014년 사망했다. 항년 92세로 상당히 장수한 편.[10] 이 앨범에 수록된 곡이 바로 그 유명한 Sexual Healing이다. 이 노래를 만들 당시의 마빈 게이는 포르노에 중독된 상태여서(...) 지인에게 말 그대로 '성적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이런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고. 참고로 이 곡은 미국 흑인 음악 역사상 최초로 (훗날에 힙합일렉트로니카 씬의 핵심이 된) 롤랜드의 드럼머신 TR-808 사운드가 전면 배치된 히트곡이다.(미국 밖으로 돌려보면 롤랜드의 본국 밴드인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앨범 BGM이 최초)[11] 이에 대한 뒷말이 좀 있는 게, 투어의 압박감에 정신적으로 몰리게 되자 다시 코카인에 손을 댔다느니, 방탄 조끼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느니 이야기가 있다.[12] 앨버타가 말리고 난 뒤, 갑자기 자기 방에서 총을 들고와 아들에게 쐈다고 한다.[13] 마빈 게이가 유년기를 보냈던 1940-50년대 미국은 성 소수자나 크로스드레서 이미지가 매우 나빴다. 크로스드레서 자체가 나쁜건 아니지만, 자기 때문에 자식이 당하는 따돌림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폭압적으로 구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셈. 마빈 게이가 Gaye로 성을 바꾼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14]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1위'''[15] 2015년 3월, 로빈 시크, 퍼렐 윌리엄스, T.I.의 "Blurred Lines" 이 곡을 표절했다는 판결이 나서 유족들에게 거액의 돈을 물어주게 되었다.[16]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OST다.[17] 1945~1970. 25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