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밍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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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2.4.22~1979.1.5
풀네임은 찰스 밍거스 주니어(Charles Mingus Jr.). 미국의 재즈 베이시스트. 2차대전 이후의 재즈 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거물급 뮤지션이며 재즈사의 위대한 뮤지션 중 한 명이다.
2. 생애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유년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냈다.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여서 밍거스도 어릴 적 찬송가를 비롯한 개신교 음악에 익숙했지만, 이내 집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재즈나 블루스에도 심취했다. 당시 인종차별 때문에 정규 음악 교육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학창 시절에도 트롬본과 첼로를 아마추어 수준으로나마 교습받는 등 계속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에 레드 칼랜더에게 콘트라베이스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만 그 때까지도 첼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연습했다. 이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 콘트라베이시스트였던 허먼 레인스하겐(Herman Reinshagen)에게 약 5년 동안 클래식 연주법을 비롯한 체계적인 베이스 연주법을 다시 배웠고, 로이드 리스로부터 작곡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초반부터 바니 비가드와 루이 암스트롱 등의 밴드가 순회 공연을 할 때 비상근 베이시스트로 협연하면서 재즈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비브라폰 연주자 라이어널 햄턴의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당시 비밥의 혁신가로 유명했던 찰리 파커와 잼 세션과 연주를 벌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파커 밴드의 드러머 맥스 로치와 함께 데뷰 레코드라는 음반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파커와 로치,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과 함께 퀸텟(5중주단)으로 팀을 이루어 잠시 공연했는데, 이 중 캐나다 토론토의 매시 홀 실황이 재즈 팬들에게 'The Quintet'으로 회자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명반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밍거스는 주로 비밥 베이시스트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같은 해 밍거스는 비밥 이후의 실험적인 음악을 위해 재즈 작곡가의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을 만들었고, 그 동안 코드(화음)에 기반한 즉흥 연주 위주였던 재즈 스타일에서 가능한한 악보화된 음악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 재즈 뮤지션이나 청중 모두에게 너무 분석적이고 되레 재즈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밍거스 자신도 악보로 기보하기에는 재즈의 세계가 너무 다양하다고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 대신 1950년대 중반에는 연주자들에게 피아노나 베이스 연주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연주자들이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처럼 더 자유롭게 그 틀에서 즉흥 연주로 음악을 뽑아나가는 방식의 새로운 워크숍을 열었다. 이런 방식으로 1956년에 애틀랜틱에서 나온 앨범이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라틴어로 직립원인)였고, 밍거스가 사이드맨이 아닌 리더로 낸 앨범 중 최초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비록 인류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밍거스가 어설프게 곡을 설명한게 까이기는 했지만, 듀크 엘링턴 이후 그와 다른 방식의 대규모 재즈 작품을 발표한 것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1년 뒤 발표한 ''''더 클라운(The Clown)''''에서는 아이티 민중들의 독립 투쟁을 반영한 Haitian Fight Song을 삽입했고, 존 카사베츠를 만나 영화 그림자들의 사운드트랙을 즉흥연주로 완성시키기도 한다. 그림자들 사운드트랙은 영화사의 뉴웨이브와 재즈사의 프리 재즈가 접목된 순간으로 기록된다. [1] 1959년에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에서 내놓은 ''''밍거스 아 음(Mingus Ah Um)''''에서는 레스터 영과 듀크 엘링턴, 젤리 롤 모턴 등 선배 뮤지션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곡들과 함께 2년 전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과 등교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가 아이젠하워에게 데꿀멍했던 주 지사 오벌 포버스(Oval E. Faubus)에 대한 공개적인 디스곡인 Fables of Faubus를 같이 끼워넣는 등의 행보로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1960년 애틀랜틱에서 발매한 ''''블루스 앤드 루츠(Blues & Roots)''''에서는 자신이 어릴 적 들었던 블루스와 흑인 영가의 추억을 바탕으로 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을 넣기도 했고, 1962년에 RCA에서 발매한 ''''티후아나 무즈(Tijuana Moods)''''에서는 라틴 풍 재즈 음악을 선보여 상업적인 감각도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임펄스!에서 대규모 발레 스타일의 모음곡만으로 앨범 전체를 채운 ''''흑인 성인과 죄있는 여인(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으로 엘링턴 이상의 복잡하면서도 대규모의 모음곡 형식 작품에 더욱 경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과 그 직후 발매한 셀프 리메이크 앨범인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이후에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는데, 대니 리치먼드와 재키 바이어드, 에릭 돌피, 조니 콜즈, 클리프 조던과 함께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이 결성 몇 달 만에 콜즈의 지병과 돌피의 사망으로 와해되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공들여 집필한 자서전 'Beneath the Underdog'도 상당히 과격한 내용 때문에 출판해주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뉴욕에 있던 자택을 처분하고 잠시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망했어요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972년에 콜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을 발표하면서 다시 복귀했고, 1974년에는 카네기홀 무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흔히 루 게릭 병으로 부르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리면서 베이스 연주가 힘들어지게 되었고, 1977년 이후 베이스 연주가 불가능해지자 작곡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이내 손발이 모두 마비되면서 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조니 미첼이 자신에게 헌정하는 앨범인 'Mingus'의 작업에 참가한 것을 끝으로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서 요양하던 도중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인도의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3. 수상 경력
- 구겐하임 펠로십 (1971. 작곡 부문)
- 다운비트 재즈 명예의 전당 헌액 (1971)
- 그래미상 평생 공로 부문 (1997)
4. 사생활
재즈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지만, 성격은 그야말로 개차반으로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인종차별에 시달린 것에 대한 분노를 계속 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재즈계를 돈으로 좌지우지한다면서 백인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포버스 디스 건에서 보듯이 이러한 성향이 자신의 작품에도 일부 녹아나 있고, 어느 동료 뮤지션들보다 흑인 민권 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의식도 상당히 강해서 연주자들과 입씨름을 벌이기도 다반사였고, 심지어 클럽 공연 중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크다고 판단하면 연주를 멈추고 욕설을 퍼붓는 등 무대 매너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애칭인 찰리(Charlie)로 부르는 사람에게도 "찰리는 말한테나 붙이는 이름이다. 찰스라고 불러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2]
이런 성깔이 한 번 크게 사단을 낸 적도 있었는데, 1962년 10월에 동료 트롬보니스트 지미 네퍼와 다투다가 네퍼의 입을 주먹으로 갈겨서 앞니를 부러뜨린 것이 유명하다. 관악기 주자, 특히 금관악기 주자에게 앞니는 마우스피스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네퍼는 이 사건 이후 당분간 연주 활동을 못하게 되었고, 밍거스에게 해고까지 당한다. 당연히 빡쳐서 밍거스를 폭력 행위로 경찰에 고발해 법정 싸움까지 가기도 했다.[3] 아직 초짜였던 1950년대 중반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도 서로 디스를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고, 자신의 멘토 격이었던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음악 빼고는 본받을 가치도 없는 막장 인생이었다고 대차게 까기도 했다.[4]
물론 이렇게 거칠고 돌발적인 성격이기는 했어도 밴드 리더로 보여준 카리스마나 작곡에 대한 역량은 거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고, '진정한 흑인 음악'을 표방한 소울과 이후 대두되는 프리 재즈 뮤지션들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5. 사후
밍거스 사후 트리뷰트 밴드들인 밍거스 다이너스티(Mingus Dynasty)와 밍거스 빅 밴드(Mingus Big Band)가 밍거스 작품을 중심으로 한 리바이벌 콘서트와 음반 활동을 하고 있으며, 1989년에는 밍거스의 유작이자 재즈 역사상 가장 대규모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Epitaph가 처음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재연되어 화제가 되었다.[5]
군터 슐러가 조직하고 지휘한 더블 빅 밴드 공연으로 행해진 이 초연은 콜럼비아가 소니에 인수되기 직전이었던 1990년에 CD 두 장짜리 음반으로 나왔고, 2007년에는 앤드류 홈지와 밍거스의 미망인 수 밍거스에 의해 새로운 미발표 대목들이 발견되어 마찬가지로 슐러 지휘의 밴드에 의해 뉴욕과 클리블랜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에서 완전판으로 재연되었다.[6] 물론 이러한 대작들 외에 소품들도 많은 수가 재즈 리얼북에 등재되어 후배들에 의해 계속 연주/녹음되고 있다.
[1] 원래는 마일즈 데이비스가 거론되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찰스 밍거스가 맡았다. 정작 밍거스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아직 촬영 중이라는걸 알고 사운드트랙 녹음을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즉흥 작업에 대한 신념이 있었던 카사베츠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샤피 하디와 즉흥연주로 완성시켰다.[2]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티후아나 무즈 앨범 커버에서는 찰리 밍거스라고 이름이 크게 찍혀서 나갔다. 일설에 의하면 앨범 발매 직후 밍거스가 커버 디자이너를 죽여버리겠다며 음반사에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한다.[3] 하지만 네퍼는 폭행당했을때 보복으로 방심하던 밍거스를 칼로 찌른것 때문에 밍거스가 구속은 당하지 않았다. 밍거스는 하마터면 위가 손상될수 있을만큼 칼에 찔렸다. 네퍼는 이후 10년도 넘게 밍거스와 적대 관계로 지내다가, 밍거스가 사실상 불구가 되어 버린 1977년에야 뒤늦게 화해했다.[4] 다만 파커의 경우 생활 방식과 성격이 워낙 상막장이었던 탓에, 밍거스 말고도 그와 협연한 거의 모든 음악인들이 한소리 했을 정도였다.[5] 연주 시간이 두 시간에 이르는 초대형 모음곡. 1962년에 뉴욕 타운 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축약판 형식으로 이미 선보여진 적이 있었지만, 밍거스는 이 공연에서 크게 실망해 이후 공연과 녹음을 일체 하지 않고 방치했다.[6] 이 사이트에서 로스앤젤레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공연의 실황 전체를 무료로 들어볼 수 있다. http://www.npr.org/templates/story/story.php?storyId=92884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