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깁슨
1. 소개
미국의 야구선수이고 '''야구의 신'''으로까지 불릴 자격이 있는 선수이지만...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하진 못한 비운의 선수. 그리고 현시점에서의 마지막 4할타자 타이틀을 가지고있는 선수기도 하다.
엑스파일을 단 한번도 빠짐없이 챙겨본 광팬이라면 '인간이 된 외계인'이라는 에피소드를 기억할 것이다. 니그로리그팀에서 베이브 루스만큼 홈런을 잘 치던 흑인 선수가 있었지만 알고 보니 외계인 이었던. 동료 외계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마지막 순간에 인간 친구가 그를 끌어 안을 때 우리 종족의 피는 위험하다며 친구를 만류했지만 친구 손에 묻어나온 건 인간과 똑같은 붉은 피였던 그 에피소드. 그 에피소드는 조시 깁슨에게 바치는 오마쥬라고 봐도 무방하다.
2. 우월한 능력
조시 깁슨은 실제로 베이브 루스만큼 홈런을 잘치는 '''우타자'''였다.[1][2] '''게다가 포수였다. 그것도 한 해 200경기 정도 소화 한'''. 야구팬이라면 포수가 훌륭한 공격력을 갖춘 것이, 그리고 한해 150경기 이상 꾸준히 마스크를 쓸 수 있는 내구력을 가진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을것이다. 게다가 '''포수가 한 해 200경기를 소화했다'''는 건 강철 체력을 넘어서 '''금강불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니그로리그는 기록집계가 상당히 부실했기 때문에 깁슨의 정확한 기록은 아무도 모른다. 명예의 전당에 걸린 그의 동판에는 깁슨의 홈런개수에 대해 '''Almost 800''' 이라는 참으로 애매하기 짝이 없는(...) 문구를 박아놨고 그밖에 800개에서 1000개까지 주장이 제각각이다. 니그로리그는 당시 유료관중을 받을 수 있었던 일요일 경기만 기록을 집계했는데 그에 따른 깁슨의 통산 홈런 개수는 115개.[3][4] 하여튼 모든 야구 역사가의 공통적인 의견은 '''800개는 넘기지 않았을까.''' 이니 대단하긴 엄청 대단하다.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최다 홈런이 배리 본즈의 762개임을 생각하자. 전 세계로 범위를 넓혀 봐도 세계 최고 기록이 일본의 왕정치의 868개이다.
당시의 니그로리그는 팀간 전력차가 너무 커서 하위권팀은 도저히 프로팀도 아닌 수준이었기 때문에 깁슨(과 니그로리그의 여러 슈퍼스타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 반대로 니그로리그의 상위권팀들은 당시 메이저리그의 강팀들조차 쩔쩔 맬 수준의 팀들이었고 이벤트전인 니그로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올스타 경기에서 대부분의 경우 니그로리그 쪽이 메이저리그를 아주 밟아버린 것을 내세워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5]
베이브 루스가 양키스타디움빨로 홈런왕이 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구장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6] 하지만 깁슨은 누가봐도 불리한 구장에서 뛰었다. 소속팀이 홈구장이 없어 워싱턴 D.C.와 피츠버그를 옮겨다니면서 경기를 했고, 두 구장의 펜스는 좌-중-우 순으로 각각 110-132-91, 124-128-98이었다. 우타자인 깁슨에게는 무지하게 불리한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Almost 800'''홈런을 쏘아 올렸다. 게다가 당시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폴로그라운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폴로경기장을 개조해서 만든 야구장이라 중앙펜스까지의 길이가 '''147m'''라는 괴랄한 구장이었는데 깁슨은 거기서 중앙을 넘기는 '''장외홈런'''을 때려냈다. 폴로그라운드 뒤 기차역에서 일하는 역무원이 승강장에 떨어진 공을 주워온 일도 있었는데 그 승강장에서부터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는 '''180m'''. 양키스타디움 개장 이후 양키스타디움에서 나온 장외홈런은 총 3개인데 그 중에서 깁슨이 날린 게 2개다. 약 20년 뒤 미키 맨틀이 간신히 하나 쐈을 정도고 그 이후 없다. 사첼 페이지는 돔구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깁슨이 살아있었다면 저 지붕 다 때려부쉈을걸.'이라고 대답하기도.
깁슨은 단순히 홈런타자가 아니었다. 사첼 페이지는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선수로 조시 깁슨을 꼽았으며 조시 깁슨을 상대해본 투수는 훗날 깁슨을 '''방망이를 휘두르면 베이브 루스, 안치고 기다리면 테드 윌리엄스'''라고 표현했다. [7] 그를 평생 워싱턴 세네터스에서 뛰게 하기 위해 노력한 월터 존슨은 깁슨에 대해 '''흔들의자에 앉아서도 내 공을 받아내고 앉은 상태에서 공을 1마일 밖으로 던질 수 있는 포수'''[8] 라고 평했다. 타격 능력 뿐만 아니라 포수의 능력도 출중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그냥 '''야구의 신'''.
3. 끝내 좌절된 메이저리그 진출
그런데 이렇게 출중한 야구선수가 왜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지 못했냐면 이유는, 단지 '''흑인'''이었기 때문.
그렇지 않아도 미국도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하필이면 당시 메이저리그의 커미셔너(연맹 총재)였던 케네소 랜디스 또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사첼 페이지, 재키 로빈슨 등의 데뷔를 막았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구단주였던 빌 빅이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사서 니그로리그 선수들을 데뷔시키려고 하니까 내셔널리그를 '''협박하여''' 빅에게 필리스 구단을 매각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이런 작자가 커미셔너였으니 결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없었다.
이처럼 유색인종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한사코 거부했던 랜디스 당시 커미셔너의 고집 때문에 그는 평생의 숙원이었던 메이저리그 진출에 번번히 실패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43년 머리가 아파서 찾아간 병원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는다. 수술을 받으면 살 수도 있었지만 야구는 영영 포기.
4. 사망
깁슨은 메이저리그 진출이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수술을 포기했고 1946년까지 정말 하얗게 불태우지만 한해 평균 200경기 가까이 소화한 포수였던 그의 무릎이 결국 한계까지 버티다 고장나 버리고 삶의 모든 희망도 목표도 잃은 그는 이듬해인 1947년 1월 20일 사망한다.
3개월 후,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다저 스타디움에서 흑인 2루수가 이뤄낸다. 이듬해 사첼 페이지도 41세[9] 의 나이로 데뷔하고 같은 해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포수가 데뷔한다. 바로 깁슨이 동생처럼 생각해 가르쳤던 로이 캄파넬라.[10]
1972년 깁슨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그나마 죽어서는 메이저리거로 인정된 것이니 그에게 위로가 되기를...
사실 깁슨도 흑인 선수들이 흔히 빠지는 방탕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 거의 모든 흑인 선수들이 그랬듯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 늦게나마 메이저리그에 진출이라도 했던 사첼 페이지는 비교적 그러지 않았던[11]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 애당초 재키 로빈슨이 인종차별을 이기고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된 이유 자체가, 대학을 나왔고 군생활 동안 문제가 없어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고 허락된 것이니만큼, 그렇지 않았던 깁슨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도 메이저리거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시 깁슨 레전드 스토리
5. 관련 문서
[1] 야구에서는 좌타자가 우타자에 비해 유리하다. 강한 좌타자를 처리하기 위해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이름으로 한 명의 타자만 상대하는 왼손 투수가 있을 정도.[2] 좌타자가 유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이유는 1루에 더 가깝고, 타자 입장에서는 우투수가 좌투수보다 많으며(통상적으로 좌타자는 우투수 상대로 더 강력하다. 특히 사이드암 계열의 투수에게는 더 강한데 좌완 사이드암 투수는 거의 없다.) 반대로 투수 입장에서는 좌타자가 우타자보다 적으니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3] 니그로리그의 일요일 경기는 무조건 더블헤더였다.[4] 일주일에 6~8게임 정도하니 하루에 똑같이 115개씩 쳤다고 가정하면 115 X 7=805개라는 기록이 나오므로 800개는 쳤을 것이다.[5] 물론 어떻게든 인정받아야 하는 흑인 선수들의 절박함과 이미 슈퍼스타인 백인 선수들의 여유가 이같은 차이를 냈다고 보기도 하지만... 반대로 흑인 선수들에게 지는 것은 상당한 모욕일진대 백인 선수들이 최선을 다 안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6] 좌타자인 루스를 위해 양키스는 우측펜스까지 거리가 90m밖에 되지 않는 구장을 만들어줬다. 왼손잡이 홈런타자가 가장 많은 홈런을 날리는 코스가 바로 우측 펜스쪽이고[7] 테드 윌리엄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구안을 갖췄다고 평가되는 타자이며 통산 출루율은 무려 '''.482'''[8] 참고로 월터 존슨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명이라고 평가받는 선수다. 무려 100년전부터 시속 100마일의 공을 던졌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니... 그런 그가 이정도의 발언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깁슨의 실력을 알 수 있다.[9] 이지만 아무도 안믿는다. 최소 43세에서 50세라고 보는 쪽도(...) 있을 정도.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10] 캄파넬라 역시 평범한 선수가 아니고 브루클린 다저스의 포수로써 3번의 MVP를 따내며 엄청난 활약을 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10년밖에 선수를 하지 못해 맘껏 기량을 펼치지 못한 선수이다. 그래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11] 아주 안 그랬던 건 아니다. 다만 다른 선수들보다는 매우 덜해서 늙어서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