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갑
[image]
'''馬甲 / Horse Armor, Barding'''
1. 개요
말이 장비하는 갑옷.
마갑을 입힌 말을 타는 기병을 카타프락토이라고 한다.
2. 역사
원래 말 위에는 중무장을 한 기병이 승마하고, 마갑 자체의 무게도 상당하기 때문에 말이 그 정도 무게를 견딜 수 있게끔 품종이 개량된 후에야 등장한 무구다. 갑옷의 무게뿐만 아니라 말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장구류(안장, 등자, 그리고 말고삐 등)의 무게가 이의 절반을 차지[1]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중량 때문에 말이 폭삭 주저앉지 않을까 의구심이 드는 사람도 있겠는데, 당시의 군마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품종의 개량을 통해 그 무게를 견뎌내도록 훈련받았으며, 현대의 경주마처럼 속도를 더 내기보다는 굵고 튼튼한 뼈에 근육이 많은 체형에 가까웠다. [2][3][4]
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기병은 영화 등 매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항상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말도 생물이고 당연히 무게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군마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도, 말도 완전군장을 한 상태에서는 오래 달리기는 힘들다. 각종 매체에서는 기병이 등장할 때면 어디를 가든 풀 갤럽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사료에 묘사되는 기병 돌격에서 갤럽으로 최대속도를 내는 구간은 실제 돌격이 시작되는 목표물 50m 전방 지점 정도였다.
즉, 기병대가 처음 기동을 시작할 때에는 대열을 맞춰 나아가야 할 필요성도 있고 말의 체력을 보존해야 할 필요도 있었으므로 놀랍게도 트롯과 같은 가벼운 속보로 대부분의 거리를 주파했으며, 목표물을 100m 정도 둔 지점에서부터는 캔터, 그리고 마지막 50m 에서 최대 '스퍼트'인 갤럽의 속도로 질주하여 돌격을 개시했다.
영화에서는 기병들이 돌격을 시작하면 처음부터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거리를 주파하며 적진에 들이받는데, 실제 전투에서는 한 번의 돌격으로 항상 적진을 패주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 말의 체력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기에 놀랍게도 화살이나 총포가 쏟아지는 가운데 목표물 100m 앞 정도까지는 조금 빠른 속보 정도로 터벅터벅 이동했다는 것.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잘 묘사돼있다.
다만 화살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해지고, 명중률도 낮아진다. 화살이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50m 정도였으니 그보다 멀리서 발사한 화살은 적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있어도 사살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30m 거리에서 직사로 발사한 석궁화살조차 갑주에 막힐 가능성이 있었다. 궁병 입장에선 100m 거리에서 기동하는 기병이 매우 위협적이었는데, 어설프게 100m거리에서 쏘는 순간 기병이 기습을 오면 2탄을 쏘기 전에 돌격을 얻어맞는 것이다. 100m 위협사격을 날릴지 50m에 들어올 떄까지 기다릴지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보통 말을 탈 경우, 승마자(기사)는 갑옷에 의해 잘 보호되지만, 말 자체는 무장을 하지 않았거나 덜 무장했기 때문에 비교적으로 취약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말을 무력화시키면 기수가 발휘할 수 있는 충격력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수보다는 말을 공격하는 전술[5] 이 생겨남으로 인해 말을 보호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말이 착용하는 갑옷은 보통 기병용 갑옷(Field Armour)과 한 쌍의 장비로 분류된다.
유럽의 양식은 여기(영문 위키백과)를 참조.
▲대한민국의 국보 제275호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창[6] 과 방패, 갑옷과 마갑으로 중무장한 가야의 중기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한국사의 삼국시대가 중장기병의 전성시대였고, 고분벽화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가야, 백제 모두 마갑 유물이 많은데, 2009년 기준으로 동북아에서의 마갑 유물은 21점인데 그중 16점이 우리나라에서 출토되었으며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말갑옷 전체가 완전히 출토된 유적 사례는 경남 함안군 마갑총에서의 신라 중장기병 갑옷 풀세트가 유일했었으나,
[image]
2009년 경주 황오동 쪽샘지구에서도 마갑 풀세트가 또 발견되었고 2020년 복원 완료되었다.복원 완료 기사기사 2 이는 동북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드문 고대 마갑 풀세트 출토 사례로 그만큼 당시 삼국은 중장기병을 적극적으로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황오동 마갑을 보면 740매의 찰갑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게는 36kg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북방 이민족 출신 경기병과 궁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전략을 활용하면서 전체적으로 중장기병 전략은 도태되었고 나당전쟁에서 신라는 중장기병 대신 장창과 쇠뇌로 당나라에 대응한다. 이후 한중 공히 한동안 사라졌다가 요나라-고려 시기에 마갑이 다시 쓰였다.
3.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마갑 목록
[1] 미국 필라델피아 박물관에 소장된 독일 울리히 공작의 갑옷과 말의 갑옷을 예시로 들자면, 말의 갑옷의 무게가 28kg, 말의 장구류가 20kg 정도다.#[2] 중세 시대의 군마는 현대의 대형 노동마인 '샤이어' 정도 크기로 추정; Ralph Henry Carless Davis의 저작인 The Medieval Warhorse: Origin, Development and Redevelopment, 1989[3] 하지만 현재는 마갑과 중세 미술사 연구 등을 통해 그보다 훨씬 작은 5~600kg 정도 내외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판금으로 만든 의장용 마갑이 아닌 실제 전투에서 사용된 마갑은 대게 판금보다 가벼운 가죽이나 누비옷을 이용했기 때문에 묘사된 무시무시한 중량은 허구에 가깝다. 애초에 말은 사람보다 몇 체급 큰 대형 포유동물이라 피통이 크고, 말가죽을 기본으로 장착해 방어력도 있다. 총탄이라면 몰라도 화살 몇 발 정도는 버텨낼 수 있는데, 여기에 가죽덮개 하나만 씌워줘도 어지간한 사격은 버틸 수있다. Ann Hyland 저작의 The Medieval Warhorse: From Byzantium to the Crusades, 1994 등 참조.[4] 다만 고구려 고분 벽화 등지에서 찰갑 형식의 마갑을 씌운 말을 실전용으로 투입한 중기병들이 묘사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철제 마갑이 실전용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금나라 중기병들도 두터운 마갑을 둘러 화살 공격을 무시하고 돌진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유럽에서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정면에서 프랑스 중기병의 마갑을 뚫지 못해 측면으로 이동해 사격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전차가 장갑에 힘을 주느냐 기동성에 힘을 주느냐에 따라 스타일이 달라지듯이 중기병들 또한 어느 정도의 기동성을 갖추되 방어력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완전히 방어력에 치중하고 기동력을 포기하느냐로 스타일이 갈렸다. 누비 마갑을 두른 중기병들이 있는가 하면 금나라 기병대처럼 아예 기동성을 버리고 방어력에 몰빵한 중기병들도 있었다. 이러한 금나라 중기병대는 3필을 줄로 묶어서 돌격시켰는데 이를 '괴자마'라고 한다.[5] 갈고리를 걸어 말을 넘어뜨리거나, 아예 말을 목표로 공격하거나 혹은 장창으로 밀집대형을 만들고 돌격할 때에 말의 배 혹은 목을 찌르는 쪽으로[6] 창은 원래 저렇게 짧진 않았지만 발견했을 때 이미 부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