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사(포르투갈)
- 독일어: Marie Therese von Braganza
- 포르투갈어: Dona Maria Teresa da Imaculada Conceição Fernanda Eulália Leopoldina Adelaide Isabel Carolina Micaela Rafaela Gabriela Francisca de Assis e de Paula Gonzaga Inês Sofia Bartolomea dos Anjos de Bragança
아버지는 포르투갈 왕국 국왕 미겔 1세, 어머니는 아델하이트 왕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둘째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1833~1896)과 결혼했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상당했고(22세 차이),[1] 그의 둘째 부인(마리아 안눈치아타: 1843~1871)의 자식[2] 도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포함해 넷(3남 1녀)이나 있었음에도 대단히 아껴주었다고 한다.
상당히 개방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양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결혼을 지지했으며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사실상 유일한 황실 인사였다.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는데, 귀천상혼이란 이유로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프란츠의 자녀에게 연금 지급을 거부하자 마리아 테레사가 본인이 받는 연금을 대신 주겠다고 나섰다. 당시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서는 여성 중 가장 지위가 높고 발언권이 강해서[3] 마리아의 행동을 무시하기는 곤란했고, 이 때문에 연금을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또한 페르디난트 부부가 사망한 뒤, 며느리인 조피는 귀천상혼이라서 황실의 영묘에 함께 장례를 치룰 수 없게 되자 마리아는 프란츠를 혼자 영묘에 두느니 부부가 함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페르디난트 부부는 프란츠의 별장에 있는 묘지에 함께 안장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뒤 시조카 손주인 카를 1세와 지타 황후와 함께 마데이라 제도로 망명했으나, 곧 빈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말년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나폴레옹의 다이아몬드 목걸이(Napoleon Diamond Necklace)를 매각하려 한 적도 있었다. 이 목걸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2번째 아내인 마리 루이즈에게 선물한 것인데, 마리 루이즈가 죽은 뒤 올케인 조피 대공비가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아들인 카를 루드비히를 거쳐서 마리아 테레사가 소유하게 된 것. 그러나 마리아에게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려 했던 자들은 사실 가격을 후려치려는 사기꾼이었고, 결국 마리아는 매각을 포기했다. 마리아가 사망한 뒤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프랑스의 사업가에게 매각했고, 몇 차례 매각과 기증을 거쳐서 최종적으론 1962년부터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국립 자연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을 제외한 친자녀로는 두 딸인 마리아 안눈치아타(1876~1961, Maria Annunciata)와 엘리자베트 아말리에(1878~1960, Elisabeth Amalie)가 있다.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혼인하지 않고 수녀원에서 생활하다가 사망했으며, 엘리자베트 아멜리에는 리히텐슈타인의 알로이스 대공과 결혼했다. 리히텐슈타인 대공인 한스 아담 2세는 엘리자베트의 친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