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1세
스페인어: Maximiliano I (막시밀리아노 1세)
독일어: Maximilian I. (막시밀리안 1세)
멕시코의 황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며 프랑스의 괴뢰국인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였다. 더 나아가 멕시코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먼 후손.[1] 어머니 조피 대공비[2] 가 나폴레옹 2세와 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은 나폴레옹 2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소문에 불과하나 나폴레옹 2세가 병중에 있을 때 조피 대공비가 막시밀리아노 1세를 임신 중인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병간호를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다.
1832년 7월 6일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으로 빈에서 태어나 황족으로서 자라다가 1854년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사령관이 되었고, 1857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딸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의 북이탈리아 영토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을 지냈다. 그대로 살았다면 평범한 황족으로서 편안하게 살았을 테지만 나폴레옹 3세의 욕심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그 당시 멕시코에서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원주민의 권리를 확보[3] 하고 성직자와 군인의 특권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반대파들은 후아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벌여 수도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후아레스 대통령이 무기한 영토 종단 통과권까지 약속해가며 미국의 힘을 빌린 덕분에 패퇴당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반대파가 와해되고 후아레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수도의 주인이 두번씩 바뀌는 등 국토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멕시코 경제는 마비되는 상황에서 빚 갚을 날은 다가오자 후아레스 대통령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를 주고 말았다. 나폴레옹 3세가 이것을 기회로 멕시코를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 속셈으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보통 같았으면 프랑스를 막으려고 수작을 부렸을 영국은 자기도 멕시코에 돈을 떼먹힌 채권국이었으므로 오히려 프랑스를 도왔고,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프랑스의 간섭을 막을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를 상대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던 1864년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를 멕시코로 데리고 와서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세웠다. 이 때, 막시밀리아노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멕시코로 가려면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가라고 하였고 이에 막시밀리아노 1세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멕시코로 떠나 1864년 6월 10일자로 멕시코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4] 막시밀리아노는 자신보다 먼저 멕시코의 황제로 즉위했던 아구스틴 1세의 손자인 아구스틴, 살바도르[5] 를 입양했다.[6]
하지만 말이 멕시코 제국의 황제지, 막시밀리아노 1세는 나폴레옹 3세가 세운 괴뢰 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막시밀리아노의 황제 자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반 후아레스 세력의 추대로(물론 나폴레옹 3세의 입김이 강했지만) 황제에 오르긴 했지만 멕시코 국민들은 외국 사람인데다가 낙하산으로 들어온 막시밀리아노를 크게 지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막시밀리아노 본인은 후아레스의 개혁을 일부 지지하는 입장을 내보였기 때문에 그를 추대한 세력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더욱이 남북전쟁으로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멕시코에 대한 내정간섭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막시밀리아노 1세의 멕시코 황제 재위를 반대했고,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점점 강대해지자 멕시코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가 막시밀리아노 1세의 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에게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막시밀리아노 1세는 지지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황제로 있던 오스트리아 역시 머나먼 타 대륙이였던 멕시코에 어떻게 영향력을 끼칠 처지도 못되고[7] , 그나마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처지라 오스트리아로 귀환하라고 권고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막시밀리아노 1세를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황제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군의 멕시코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막시밀리아노 1세는 결국 후아레스군에게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측근인 두 장군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레 미제라블의 작가이자 당시 프랑스 정계 진보파의 거두였던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유럽의 명사들, 그리고 교황,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이었던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마저도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막시밀리아노 1세의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부탁했다. 사실 후아레스 대통령 본인 또한 인간적으로는 막시밀리아노에게 나름 호감을 가졌었다. 내전 당시 막시밀리아노 1세는 후아레스에게 '''"항복하면 모든 죄를 사면함은 물론 대법원장에 임명하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세력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물론 후아레스는 그 제의를 거절했고, 후에 막시밀리아노 1세에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자기편이 유리한 상황에서 저런 통큰 제의를 해 온 막시밀리아노 1세가 나쁘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8]
하지만 후아레스는 "이 기회에 함부로 내정간섭하면 어떻게 되는지 유럽 국가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고 하며 결국 처형을 명했다. 처형되기 전 막시밀리아노 1세는 총살형을 집행할 병사에게 금화를 주면서 얼굴이 아닌 다른 곳에 총을 쏘아달라고 부탁했지만[9] 정작 병사들이 얼굴을 정조준해 쏘는 바람에 안습한 죽음이 되어버렸다.(…) 그의 유언은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멕시코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정당한 대의 아래 죽는다! 지금 흐를 내 피가 이 땅의 마지막이 되기를! 멕시코 만세!"였다.
그의 수염은 매우 독특해 생전에 많은 신망을 얻었는데, 그가 죽자 그의 시체에서 그의 '아름다운 수염'을 수집가들이 잘라갔다고 전한다.
현명하고 사람 좋으며, 인품 또한 고결했던 동생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통보받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큰 충격을 받으며 슬퍼했다고 한다.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 역시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하다가 5년 후인 187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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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에서 동분서주하던 아내 샤를로트(카를로타)는 끝내 남편이 비참하게 죽은 것에 충격을 받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강제로 유폐 생활을 하다가 1927년 사망한다. 사망 당시 샤를로트의 나이는 87살이었으니 60년 가까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참하게 지내야 했던 셈.
막시밀리아노를 사지로 내몰고 나몰라라 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이 일 정도였다. 참고로 샤를로트가 남편을 구해달라고 나폴레옹 3세에게 애원했으나 정작 한 명의 인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그저 '''그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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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는 이를 비판하는 "막시밀리앙[10] 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복장을 프랑스군의 복장과 비슷하게 그려 막시밀리아노를 버린 자신의 조국을 비꼬았다. 또한 맨 오른쪽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군인은 나폴레옹 3세와 상당히 닮았다.
결국 남을 사지에 내몰고 나몰라라 한 나폴레옹 3세도 프로이센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하고 강제로 퇴위당한 뒤 비참하게 죽었으니 그 복수는 결국 프로이센이 해준 셈.
나폴레옹 3세의 큰아버지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즉 나폴레옹 1세의 형)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1820년에 미국에서 그를 멕시코 황제로 옹립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의 허수아비 국왕 호세 1세로 있었던 적이 있어 허수아비와 같은 군주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안다며 거절했기에 그는 막시밀리아노와 달리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
아무튼 자신이 '벼락출세자'라 불렀던 나폴레옹 3세에게 이용당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에게는 '쓸모있는 바보'로 불리는 등 왕족이 지나치게 순수하면 비극이 된다는 사례를 몸소 보여준 사례였다.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만 바닷가에 있는 미라마레 성은 그를 위해 지어진 성이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독립한 남부연합의 지원으로 황제 자리를 유지하며 남부연합과 함께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얻기 위해서 북부를 침공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 사건 이후 멕시코는 전제군주제인 세습정권으로 2차 대전때도 존속한다. 대신 혁명세력을 지원하는 북부와 황제를 지원하는 남부연합 간의 대리전으로 끝없는 내전 상태 중으로 묘사된다.
멕시코 출병 당시를 다룬 1954년의 서부영화 베라 크루즈에서 잠시 등장한다.
막시밀리아노 1세 본인은 키가 매우 큰 187cm였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사람 모두 막시밀리아노 1세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키가 작았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137cm, 나폴레옹 3세는 160cm이다.
독일어: Maximilian I. (막시밀리안 1세)
1. 소개
멕시코의 황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이며 프랑스의 괴뢰국인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였다. 더 나아가 멕시코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의 삶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먼 후손.[1] 어머니 조피 대공비[2] 가 나폴레옹 2세와 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은 나폴레옹 2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소문에 불과하나 나폴레옹 2세가 병중에 있을 때 조피 대공비가 막시밀리아노 1세를 임신 중인 무거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병간호를 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다.
1832년 7월 6일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으로 빈에서 태어나 황족으로서 자라다가 1854년 오스트리아 제국 해군 사령관이 되었고, 1857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딸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의 북이탈리아 영토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총독을 지냈다. 그대로 살았다면 평범한 황족으로서 편안하게 살았을 테지만 나폴레옹 3세의 욕심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2.2. 멕시코 제국의 황제
그 당시 멕시코에서는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이 원주민의 권리를 확보[3] 하고 성직자와 군인의 특권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반대파들은 후아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벌여 수도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후아레스 대통령이 무기한 영토 종단 통과권까지 약속해가며 미국의 힘을 빌린 덕분에 패퇴당하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반대파가 와해되고 후아레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수도의 주인이 두번씩 바뀌는 등 국토가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멕시코 경제는 마비되는 상황에서 빚 갚을 날은 다가오자 후아레스 대통령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를 주고 말았다. 나폴레옹 3세가 이것을 기회로 멕시코를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 속셈으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보통 같았으면 프랑스를 막으려고 수작을 부렸을 영국은 자기도 멕시코에 돈을 떼먹힌 채권국이었으므로 오히려 프랑스를 도왔고,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프랑스의 간섭을 막을수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를 상대로 승전에 승전을 거듭하던 1864년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를 멕시코로 데리고 와서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세웠다. 이 때, 막시밀리아노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멕시코로 가려면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가라고 하였고 이에 막시밀리아노 1세는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제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멕시코로 떠나 1864년 6월 10일자로 멕시코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4] 막시밀리아노는 자신보다 먼저 멕시코의 황제로 즉위했던 아구스틴 1세의 손자인 아구스틴, 살바도르[5] 를 입양했다.[6]
하지만 말이 멕시코 제국의 황제지, 막시밀리아노 1세는 나폴레옹 3세가 세운 괴뢰 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막시밀리아노의 황제 자리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반 후아레스 세력의 추대로(물론 나폴레옹 3세의 입김이 강했지만) 황제에 오르긴 했지만 멕시코 국민들은 외국 사람인데다가 낙하산으로 들어온 막시밀리아노를 크게 지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막시밀리아노 본인은 후아레스의 개혁을 일부 지지하는 입장을 내보였기 때문에 그를 추대한 세력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더욱이 남북전쟁으로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멕시코에 대한 내정간섭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막시밀리아노 1세의 멕시코 황제 재위를 반대했고,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점점 강대해지자 멕시코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가 막시밀리아노 1세의 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에게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막시밀리아노 1세는 지지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형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황제로 있던 오스트리아 역시 머나먼 타 대륙이였던 멕시코에 어떻게 영향력을 끼칠 처지도 못되고[7] , 그나마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처지라 오스트리아로 귀환하라고 권고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막시밀리아노 1세를 지원할 수 없었다.
2.3. 최후
결국 황제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군의 멕시코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막시밀리아노 1세는 결국 후아레스군에게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측근인 두 장군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 레 미제라블의 작가이자 당시 프랑스 정계 진보파의 거두였던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유럽의 명사들, 그리고 교황, 오스트리아와 적대적이었던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마저도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막시밀리아노 1세의 목숨만은 살려주라고 부탁했다. 사실 후아레스 대통령 본인 또한 인간적으로는 막시밀리아노에게 나름 호감을 가졌었다. 내전 당시 막시밀리아노 1세는 후아레스에게 '''"항복하면 모든 죄를 사면함은 물론 대법원장에 임명하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세력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물론 후아레스는 그 제의를 거절했고, 후에 막시밀리아노 1세에게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자기편이 유리한 상황에서 저런 통큰 제의를 해 온 막시밀리아노 1세가 나쁘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8]
하지만 후아레스는 "이 기회에 함부로 내정간섭하면 어떻게 되는지 유럽 국가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고 하며 결국 처형을 명했다. 처형되기 전 막시밀리아노 1세는 총살형을 집행할 병사에게 금화를 주면서 얼굴이 아닌 다른 곳에 총을 쏘아달라고 부탁했지만[9] 정작 병사들이 얼굴을 정조준해 쏘는 바람에 안습한 죽음이 되어버렸다.(…) 그의 유언은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멕시코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정당한 대의 아래 죽는다! 지금 흐를 내 피가 이 땅의 마지막이 되기를! 멕시코 만세!"였다.
그의 수염은 매우 독특해 생전에 많은 신망을 얻었는데, 그가 죽자 그의 시체에서 그의 '아름다운 수염'을 수집가들이 잘라갔다고 전한다.
2.4. 사후
현명하고 사람 좋으며, 인품 또한 고결했던 동생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통보받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큰 충격을 받으며 슬퍼했다고 한다.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 역시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대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칩거하다가 5년 후인 1872년 사망했다.
[image]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에서 동분서주하던 아내 샤를로트(카를로타)는 끝내 남편이 비참하게 죽은 것에 충격을 받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강제로 유폐 생활을 하다가 1927년 사망한다. 사망 당시 샤를로트의 나이는 87살이었으니 60년 가까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비참하게 지내야 했던 셈.
막시밀리아노를 사지로 내몰고 나몰라라 한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이 일 정도였다. 참고로 샤를로트가 남편을 구해달라고 나폴레옹 3세에게 애원했으나 정작 한 명의 인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그저 '''그 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image]
에두아르 마네는 이를 비판하는 "막시밀리앙[10] 의 처형"(L'Exécution de Maximilien)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복장을 프랑스군의 복장과 비슷하게 그려 막시밀리아노를 버린 자신의 조국을 비꼬았다. 또한 맨 오른쪽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군인은 나폴레옹 3세와 상당히 닮았다.
결국 남을 사지에 내몰고 나몰라라 한 나폴레옹 3세도 프로이센에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하고 강제로 퇴위당한 뒤 비참하게 죽었으니 그 복수는 결국 프로이센이 해준 셈.
나폴레옹 3세의 큰아버지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즉 나폴레옹 1세의 형)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1820년에 미국에서 그를 멕시코 황제로 옹립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의 허수아비 국왕 호세 1세로 있었던 적이 있어 허수아비와 같은 군주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안다며 거절했기에 그는 막시밀리아노와 달리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
아무튼 자신이 '벼락출세자'라 불렀던 나폴레옹 3세에게 이용당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에게는 '쓸모있는 바보'로 불리는 등 왕족이 지나치게 순수하면 비극이 된다는 사례를 몸소 보여준 사례였다.
3. 기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만 바닷가에 있는 미라마레 성은 그를 위해 지어진 성이었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독립한 남부연합의 지원으로 황제 자리를 유지하며 남부연합과 함께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얻기 위해서 북부를 침공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 사건 이후 멕시코는 전제군주제인 세습정권으로 2차 대전때도 존속한다. 대신 혁명세력을 지원하는 북부와 황제를 지원하는 남부연합 간의 대리전으로 끝없는 내전 상태 중으로 묘사된다.
멕시코 출병 당시를 다룬 1954년의 서부영화 베라 크루즈에서 잠시 등장한다.
막시밀리아노 1세 본인은 키가 매우 큰 187cm였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사람 모두 막시밀리아노 1세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키가 작았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137cm, 나폴레옹 3세는 160cm이다.
[1] 족보상으로 보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고조모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통해 모계 쪽으로 먼 조상중 하나이다.[2] 조피의 남편 프란츠 카를은 황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조피 역시 황후가 될 수 없었다.[3] 후아레스 자신도 원주민 출신. 실제로 후아레스는 역대 멕시코 대통령 중 유일하게 백인이 아니었다.[4] 결혼 전에 이미 매독 치료로 수은을 사용하여 불임이 되었다.[5] 이들은 이투르비데의 아들 아구스틴 2세의 아들이다. 아직도 가계가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멕시코의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6] 물론 합스부르크 왕조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제위 계승권은 없었다. 제위는 막시밀리아노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즉 조카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카를 루트비히에겐 여러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중에서 맏이가 바로 '''프란츠 페르디난트'''다. 현재 이쪽 계통의 멕시코 황제위 요구자도 대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앞서 말한 아구스틴 1세의 후손들에게는 라이벌이나 다름없다.[7] 당시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현대와 같은 내륙국이 아니라 해군력과 해운업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그 수준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해양 강국에 비해 빈약했다.[8] 막시밀리아노 1세는 후아레스한테 "나는 멕시코를 자유롭게 만들려 왔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후아레스는 "그러면 당신 나라인 오스트리아부터 먼저 자유롭게 만들라."고 비아냥거렸다.[9] 자신이 죽은 후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10] 막시밀리안/막시밀리아노의 프랑스어식 바리에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