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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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1CDCD><colcolor=#000000> '''이름'''
마리아 루도비카 레오폴디나 프란치스카 테레제 요제파 루시아
(Maria Ludovica Leopoldina Franziska Therese Josepha Lucia)
'''출생'''
1791년 12월 12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호프부르크 궁전
'''사망'''
1847년 12월 17일 (56세)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파르마
'''재위'''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의 여공작
1814년 4월 11일 ~ 1847년 12월 17일
'''배우자'''
나폴레옹 1세 (1810년 결혼 / 1821년 사망)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 (1821년 결혼 / 1829년 사망)
샤를 르네 드 봉벨 (1834년 결혼)
'''자녀'''
나폴레옹 2세, 알베르티나, 빌헬름 알베르트, 마틸드
'''아버지'''
프란츠 2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사
'''형제'''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롤리네, 카롤리네 루도비카, 마리아 레오폴디나, 클레멘티나, 요세프 프란츠 레오폴드, 마리아 카롤리네, 프란츠 카를, 마리아 안나, 요한 네포무크, 아말리에 테레지아
1. 개요
2. 생애
2.1. 기대되는 결혼
2.2. 적장자 출산
2.3.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 탈출
2.4. 나이페르크 백작의 등장
2.5. 그 후
3. 가족 관계
3.1. 조상
3.2. 자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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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아이는 나폴레옹 2세.
독일어: Maria Ludovica von Österreich
프랑스어: Marie Louise d'Autriche
이탈리아어: Maria Luisa d'Austria
1791년 12월 12일 - 1847년 12월 17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딸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두 번째 황후. 그리고 파르마 공국의 여공.(재위 1814년 - 1847년)

2. 생애


마리 루이즈는 프란츠 2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프랑스 혁명을 증오한 마리아 카롤리나의 외손녀이기도 하다.[1] 어린 시절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철저히 털어버릴 당시 빈까지 당도했던 나폴레옹 군대로 인해 쇤브룬 궁전에서 두 번이나 쫓겨나는 경험을 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나폴레옹을 증오했던 마리아 카롤리나의 영향으로 나폴레옹은 '''무섭고 증오할 남자'''라고 배웠다. 그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형을 괴롭히며 자랐다.
취미로는 풍경화와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내곤 했고, 샤토브리앙 책과 모차르트베토벤의 작품을 피아노와 하프로 연주했는데 실력이 괜찮았다고 한다.

2.1. 기대되는 결혼


그녀는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 황후가 될 사람에게 진심으로 동정함과 동시에,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길 바라고 있어.

라고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을 정도로 나폴레옹에 대해 증오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공주 안나와의 결혼이 좌절된 나폴레옹이 점찍은 사람은 다름아닌 마리 루이즈였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외젠 드 보아르네를 보내 청혼에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
  • 1. 이 청혼은 거절할 수 없다.
  • 2. 약혼은 내일 한다.
오스트리아 대사였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경악했지만, 나폴레옹에게 저항할 수도, 오스트리아 본국 정부와 상의 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얼버무리는 것으로 대응하려던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의 요구에 굴복했다.
외무장관으로 승진한 메테르니히는 프란츠 2세에게 딸을 희생하여 숨 돌릴 여유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후임 대사 카를 필리프 폰 슈바르첸베르크 공[2]에게 "해방되는 날까지 계속해서 움직이고 모든 군사 행동을 피하며 아첨해야 합니다." 라고 했다. 영국 외무장관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자작은 ''' '미노타우로스에게 처녀를 바치는 꼴' '''이라고 비웃었다.
나폴레옹을 괴물로 알고 있다가 자신이 그와 결혼해야 하는 사실을 안 마리 루이즈는 계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조국을 구하는 일이라면 기꺼히 노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나폴레옹을 만나기 전까지 아는 남자라곤 아버지와 메테르니히 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점이 나폴레옹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그 시점까지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 대해서, 프랭크 매들린의 표현을 빌리자면 '걸어다니는 자궁'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기 때문.
이후 독실한 카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완전히 이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삼았지만 페슈 추기경을 데려와 금방 해결했고, 콩피에뉴 성을 개장하며 오스트리아 공주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조아킴 뮈라-카롤린 뮈라 부부가 혼수를 위해 빈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카롤린은 바로 마리 루이즈와 앙숙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카롤린이 마리 루이즈에 대해서 애송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반면에 마리 루이즈는 카롤린에 대해 제대로 간파한 편이었다고.
3월 11일, 빈에서 나폴레옹의 대리인으로 나선 숙부 카를 대공과 결혼식을 올린 마리 루이즈는 콩피에뉴로 이동했다. 마리 루이즈는 수행원과 개들까지 모조리 빈으로 돌려보내야 했는데, 이는 카롤린이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갑자기 마리 루이즈에게 온갖 연애편지들을 보내며 조바심을 냈고, 이 때문에 카롤린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3월 27일, 마리 루이즈가 콩피에뉴에 도착했고 나폴레옹은 직접 비를 뚫고 그녀를 맞이하러 가서 마리 루이즈를 껴안았다. 콩피에뉴로 들어온 나폴레옹은 하객들을 내쫓고 바로 마리 루이즈와 동침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주장한 바로는 마리 루이즈는 첫 관계를 가지고 나폴레옹에게 한번 더 하자고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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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뒤인 1810년 4월 1일에서 4월 2일에 걸쳐 마리 루이즈는 튈르리 궁전에서 민사결혼을, 루브르 성당 소속의 생클루 성당에서 종교결혼을 열어 나폴레옹과 결혼식을 올렸다. 나폴레옹은 해를 넘긴 1811년까지 신혼생활에 푹 빠져 스페인 방문도 취소하고 어전회의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무도회와 축연을 열고 오페라 관람과 사냥을 다니며 새로운 황후와의 연애를 즐겼다. 메테르니히조차 둘이 사랑에 빠졌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폴레옹이 자신을 매우 상냥하게 대했기 때문에 마리 루이즈는 마침내 마음을 열고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를 결코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마리 루이즈는 메테르니히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나폴레옹이 무섭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가 나를 무서워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친구에게도 비슷한 편지를 썼다 한다.

"빈에서는 내가 음험한 나폴레옹의 옆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조금도 무섭지 않아. 오히려 나폴레옹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최근 생각하기 시작했어."

둘의 특기할 만한 충돌점은, 나폴레옹이 마리 루이즈가 너무 많이 먹어 여성스럽지 않다고 한 것과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여전히 가까이 하는 것을 보고 마리 루이즈가 질투한 것 정도였다고. 마리 루이즈는 1810년 6월 13일에 나폴레옹이 조제핀을 만나러 가자 그런 늙고 천한 여자를 왜 보고 싶냐고 불평했다.
사교적인 성격으로 항상 수많은 여관들과 담소를 나누었던 전임 황후 조제핀과는 대조적으로, 마리 루이즈는 여관장인 몽테벨로 부인과 의상담당의 류세이 부인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들(그러니까 시누이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모양. 특히 공공 행사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는데, 프랑스 시민들이 자신의 고모할머니 마리 앙투아네트[3]를 처형한 사실을 잊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태성적으로 성격 자체가 내성적이기도 했고. 조제핀의 경우엔 파리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마리 루이즈는 사교와 잡담을 피해서 냉랭하고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로 보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그 이름 높은 합스부르크의 황녀였지만 치장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조제핀에 비하면 엄청 검소해서 옷이나 보석을 많이 구입하지 않았다고. 이 때문에 조제핀이 황후였을 때 그녀의 사치로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상인들은 갑자기 수입이 줄어 마리 루이즈 하면 이를 북북 갈게 되었다고 한다.

2.2. 적장자 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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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3월 20일, 마리 루이즈는 로마왕(나폴레옹 2세)을 출산했다. 그 동안 나폴레옹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다음 황제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좋아 날뛰던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이 소식을 듣고 집단으로 이를 갈았다(...).
마리 루이즈는 각국 대사들과 나폴레옹의 가족들, 궁정 신하들이 보는 와중에 아이를 낳았는데, 꽤 심한 난산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의 비명에 안절부절못하였고, 의사가 아이가 거꾸로 들어앉아 산모와 아들 중에 한쪽만 구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자 나폴레옹은 주저하지 않고 '''어머니를 구하라'''고 했다. 최후의 20분의 산통을 겪은 마리 루이즈는 아들을 낳았다. 나폴레옹은 결국 출산을 다 지켜보지 못하고 욕실로 물러났다.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야 돌아온 나폴레옹은 아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산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고, 의사가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자 아들을 두 팔로 안고 100발의 축포를 쏘아올리게 했다. 이날 '''나폴레옹은 눈물까지 흘렸다.''' 나폴레옹은 유일한 적자 나폴레옹 2세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고 아들을 귀여워했지만, 마리 루이즈는 별로 이 아이에게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아들을 얻은 나폴레옹은 그 때부터 마리 루이즈에게 옛날보다 싸늘하게 대하고 전 유럽에서 정부를 데려와 놀아나서 그녀는 큰 환멸을 느꼈다.[4]
양육 담당인 몽테스큐 부인은 갓 태어난 나폴레옹 2세가 눈을 뜨자 바로 마리 루이즈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양육에 익숙하지 않았던 마리 루이즈는 마치 부서진 물건을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다루었고, 가슴에 조금 안기만 하곤 바로 아이를 몽테스큐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매일 오후에 마리 루이즈는 습관처럼 나폴레옹 2세의 방에 찾아갔지만 그녀는 아이를 돌보는 데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신의 아들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마리 루이즈는 여관들이 그녀에게는 모성애가 결여된 게 아닐까 하고 진심으로 걱정할 정도로, 아이의 양육을 몽테스큐 부인에게 '''전부 일임해 버렸다'''.[5] 그 때문에 나폴레옹 2세가 가장 정든 사람은 부모가 아닌 바로 이 몽테스큐 부인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폴레옹 2세가 처음으로 말한 단어도 '''"마망 큐"'''였고 그 말을 들은 몽테스큐 부인도 매우 감격했다고 한다(…).

2.3.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 탈출


당신이 최근에 몇 차례 성공을 거둔 이후로 매우 용감해지는 나를 느낍니다. 나는 이제 더는 어린아이로 불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은 떠나기 전에 나를 그렇게 부르곤 했지요.

1814년 2월 2일,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에게 쓴 편지.

오늘 당신을 아주 많이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사랑의 증거를 그토록 감동적으로 보여 준 3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게 매우 소중한 날입니다."

1814년 3월 10일,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에게 쓴 편지.

"사람을 보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주셔야 합니다. (중략) 당신의 정숙한 아내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폴레옹 퇴위 이후 쓴 편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1812년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절하게 발리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1814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첸베르크 장군,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 나폴레옹의 옛 원수였고 스웨덴 왕세자가 된 '''칼 14세 요한'''과 영국의 웰링턴 공에 의한 대규모 나폴레옹 포위망이 결성되어 더욱 더 나폴레옹과 제국은 궁지에 몰렸다. 이 시기 마리 루이즈는 궁정에서 나폴레옹을 지지하며 탈레랑의 의도적인 배신과 조제프의 삽질에 맞선 유일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프랭크 매들린은 그녀가 남편을 위해 흠잡을 곳이 없는 행동과 지원을 했다고 고평가했다.
1814년 3월 말에 파리가 동맹군의 공격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튈르리 궁전에서 비상회의가 열렸는데, 황후와 로마왕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논의되었다. 경무장관은 "황후가 수도를 벗어나면 프랑스가 뒤집어질 거고, 반란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파리에 머물러야 함"이라 주장하자, 육군장관은 "이러고 있다가 동맹군이 쳐들어 와서 모두 잡히면 어쩔 거임?" 라며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장소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 루이즈는 끝까지 파리에 머무르며 동맹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밤새도록 결론이 나지 않자 투표로 부쳤고, 그 결과 나폴레옹 2세와 마리 루이즈는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막 결과가 난 때에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일어나서 2월 8일에 나폴레옹에게서 받아 둔 성명문을 읽었다.

"만일 내가 전투에서 진다면, 황후와 로마왕이 랑부예로 떠나도록 조치하시오. (중략) 황후와 로마왕이 절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오. (중략) 내 아들이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빈에서 오스트리아 왕자로 양육되는 것을 보겠소."

하지만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3월 29일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자들은 내가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중략) 나는 더없이 용감하게 여기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저 자들이, 특히나 파리 시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저토록 열의를 보여주는 마당에, 나를 파리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데 화가 많이 납니다. (중략) 그렇지만 저 한 무리의 인간들은 죄다 허둥대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제정신입니다. 하루나 이틀이면 당신이 내게 말해 주리라고 믿습니다. 수도의 거리들을 결코 지나지 못할, 고작 1만 5천 명밖에 되지 않는 기병들 때문에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던 제가 옳았다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 정말로 화가 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대단히 불리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 자들은 내게 내 아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지적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이 에게 보낸 편지를 읽은 후로는 저들의 말을 감히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도 그녀는 조제프를 비난하는 여러 편지를 썼다. 이때 조제프는 마리 루이즈에게 프랑스가 어떤 굴욕을 당해도 상관없으니 프란츠 2세에게 잘 말해서 보나파르트 가문만은 살려 달라고 징징대고 있었다(...).
결국 1814년 3월 29일 아침,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는 10대의 대형마차로 랑부예를 항해 출발했다. 하지만 랑부예도 이미 위험한 것을 알고, 마리 루이즈 일행은 더욱 먼 루아르 강 근처에 있는 블루아 성으로 나아갔다. 성에 도착한 것은 4월 2일 밤중이었다.
6일 뒤인 4월 8일, 마리 루이즈는 남편이 퐁텐블로 궁전에서 종전을 조건으로 퇴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폴레옹이 있는 퐁텐블로 궁전이 자신이 있는 블루아 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6] 그녀는 곧바로 마차를 준비해 나폴레옹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에게 계속 편지를 써서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당신의 운명을 함께 나누고 그 모든 좌절을 겪은 당신을 위로한다면 나는 더 용감해지고 더 침착해질 거예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오라는 말 대신 자신의 가족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라는 말만 했다. 마리 루이즈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레티치아, 루이, 제롬, 폴린, 엘리자에게 각각 100만 프랑씩을 주었고, 돈을 챙긴 가족들은 주저없이 나폴레옹 따윈 신경쓰지 않고 흩어졌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그녀에게 오라는 말을 하지 않고, 다만 4월 8일에 편지를 써서 "남겨준 것이 없어 미안하오. 당신이 가질 것이라곤 나의 불운한 운명 뿐이구려."라고 할 뿐이었다. 같은 날 마리 루이즈는 다시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건대, 나를 불러주세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성의없는 답장만 보냈다.

"오고 싶으면 오시오. 아니면 그곳에 있어도 되고."

아마도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의 의도를 의심했던 모양인데, 나폴레옹은 황후의 비서인 멘느발에게 편지를 써서 마리 루이즈가 자신의 곁에 오고 싶은 건지 파르마 공국이나 오스트리아 궁정으로 가고 싶은 건지 알아내라고 지시한 것이다. 4월 11일 퐁텐블로 조약 합의 도달 후에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가 자신을 따를 것이라 확신했는지 다음과 같이 썼다.

"당신은 최소한 거대한 저택 한 채와 아름다운 나라를 갖게 되겠지만 나의 섬 엘바에 싫증을 낼 것이고, 나는 늙었으니 젊은 그대를 따분하게 만들 거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마리 루이즈와 합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나폴레옹이 확답을 주지 않고 미적거리자 마리 루이즈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야 했고, 장 란 원수의 미망인인 몽테벨로 부인이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 시점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의 앞날이라도 프란츠 2세에게 요청해서 보장받는것이 좋겠다고 계속 조언했다. 여기에 혹한 마리 루이즈는 오를레앙에 도착해 나폴레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곧바로 당신이 있는 곳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어요. 우선 아버지와 만나려고 해요. 엘바 섬에서의 당신의 처우 개선과, 우리 아들을 위해서 토스카나 대공국을 요구하기 위해서예요. 만일 지금 당신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꼭 토스카나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선량한 아버지는 나의 눈물에 감동해서''' 분명 당신의 운명도 바뀌겠지요."

이 편지는 퐁텐블로로 오라는 나폴레옹의 편지와 엇갈리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이 말을 듣고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마리 루이즈가 프란츠 2세와 만난 다음에 자신에게 오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4월 15일 "지금이면 틀림없이 아버지를 만났겠소. 내일 퐁텐블로로 돌아오길 바라오. 그러면 우리는 피난처이자 휴식의 땅을 향해 같이 출발할 수 있소. 그곳에서 나는 행복할 것이오. 당신이 세속의 고귀함을 잊고 나와 동행하기로 마음을 굳힐 수만 있다면 말이오."라고 편지를 쓰고 기병대를 보내 마리 루이즈를 데려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츠 2세는 딸의 애원을 무시하는 건 둘째치고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 곁으로 돌려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마리 루이즈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허락하에 시집 보낸, 정략결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딸의 바람과는 달리 토스카나는 원래 통치자인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드 3세(프란츠 1세의 친동생, 마리 루이즈의 숙부)에게 돌려주었고, 딸을 위해서 파르마 공국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4월 11일 퐁텐블로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한편 나폴레옹과의 합류가 저지된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저들이 나로 하여금 오를레앙을 떠나게 만들었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당신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이제 당신은 알게 될 거예요. 조심하세요, 내 사랑. 우린 속고 있습니다. 당신이 몹시 걱정되지만, 아버지에겐 강경하게 나갈 거예요. 무조건 당신과 함께 할 것이고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고 말하겠어요."

하지만 편지는 이렇게 썼어도 엄격한 합스부르크 황가의 궁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순종만을 배워온 마리 루이즈는 아버지에게 막 나갈 수 있는 깡이 없었고(...) 결국 완전히 좌절하여 다시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과 함께하거나 당신을 만나거나 엘바 섬으로 같이 여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중략) 아버지는 먼저 오스트리아에서, 그 다음 파르마에서 두 달을 보내야 하며 그곳에서 당신을 볼 수 있다고 고집하세요."

이후 마리 루이즈는 콩피에뉴르 보내져서 알렉산드르 1세와 프란츠 2세와 만났는데, 콩피에뉴에서 동맹군 사람들은 나폴레옹에 관한 갖은 험담을 그녀에게 하며 그녀의 나폴레옹에 대한 애정을 식게 하려 했지만 그녀는 완고하게 나폴레옹을 옹호했고, 엘바로 가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마리 루이즈는 포기하지 않았건만 나폴레옹은 메테르니히가 마리 루이즈와 자신의 결합을 막을 것이라 여겨 '''이미 마리 루이즈와 같이 지내길 포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란츠 2세가 보낸 편지로 나폴레옹의 추측은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마리 루이즈에게 가족의 품 안에서 몇 달 지내라고 제안하기로 했소. 마리 루이즈가 조용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오. 폐하께서도 마리 루이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증거를 많이 보여주셨기에 이 문제에 관해 나와 뜻이 같으며 나의 결정에 찬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마리 루이즈는 건강을 되찾으면 자기 나라의 주권을 취할 것이며, 그로써 자연스럽게 폐하의 거소에 가까이 가게 될 것이오. 마리 루이즈의 아들이 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며 나의 영토에 머무는 동안 늘 엄마의 보살핌을 누릴 것이라는 점을 폐하께 보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낙담한 나폴레옹은 4월 7일과 4월 12일 두 차례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후 엘바로 간 나폴레옹은 갑자기 자신은 마리 루이즈 때문에 망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제핀에게 다시 집적대며 편지를 써대기 시작했지만 조제핀은 폐렴으로 5월 29일에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이틀간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4. 나이페르크 백작의 등장


러시아군이 주둔한 랑부예 성에서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그에게서 편지를 받는 일도 없이, 오랫동안 지내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재회한 그녀는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그러다가 9월에 엑스레뱅에 있는 온천에서 요양하고 거기서 엘바 섬으로 가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마리 루이즈는 빈에 아들을 남겨놓고 엑스레뱅의 온천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리 루이즈는 남편 곁으로 가려는 생각이 확실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메테르니히는 호위 겸 감시역으로 '''아담 알베르트 폰 나이페르크 백작(Adam Albert, Count von Neipperg)'''이라는 사람을 붙여주었다.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렸는데,
1. 엑스레벵에서 마리 루이즈가 체재하는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바 섬의 나폴레옹에게 가지 못하게 손을 쓸 것.
2. 만약에 그녀가 어떻게 해서 엘바 섬으로 가게 된다면 동행할 것.
이 명령을 받은 나이페르크 백작은 '''10개월 안에 연인이 되고, 곧 남편이 되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40세의 유부남[7]으로,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증오하고 있었다. 세련된 귀족인 그는 풍부한 기지로 금세 마리 루이즈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는 마침내 '''나폴레옹을 잊어버렸다.''' 두 사람은 어느 가을날, 산책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피한 소레이유 돌이라고 하는 조그만 숙소에서 남녀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와중에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또 다시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로도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돌아오라는 편지를 몇 통이고 보냈으나, 그녀는 1815년 신년 공식 하례 때를 제외하곤 다시는 나폴레옹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의 아내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2.5. 그 후


같은 해 6월 18일의 회의에서 마리 루이즈의 파르마 통치가 결정되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기의 영지로 떠났다.
그렇게 어머니가 행복한 신혼생활을 꿈꾸고 있을 때, 나폴레옹 2세는 빈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태껏 한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를 만나고자 했지만 마리 루이즈는 1817년 5월 1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 알베르티나를 비밀리에 출산해서 아들과의 약속을 깨버렸다. 나폴레옹 2세의 속이 뒤집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리 루이즈가 아들을 만나러 간 것은 헤어지고 '''2년도 더 지난''' 1818년 7월이었다.
로마왕과 재회한 뒤 파르마에 돌아온 마리 루이즈는, 1819년 8월 9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두번째 아이인 굴리엘모를 역시 비밀리에 출산했다. '''이후 나폴레옹 2세를 사실상 완전히 버렸다.'''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었다. 마리 루이즈는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러 오페라 극장에 갔을 때 우연히 본 신문에서 나폴레옹의 죽음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게 '''자신의 심장을 보관해 줄 것''' 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녀는 내 소원은 그의 심장이 그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라며 한 마디로 거절하고, 그 대신에 데스마스크를 받았다. 그 데스마스크는 오랫동안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나폴레옹에게 강한 감정을 품은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이 내 아들의 아버지이며 세간에서 대체로 믿는 것처럼 나를 나쁘게 대접하기는커녕 언제나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잊을 수 없다. 정략결혼에서 그 밖에 더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나는 큰 슬픔에 잠겨 있다. 나폴레옹이 그 비참한 생존을 끝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겠지만, 내가 전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니 그 사람만이라도 몇 년간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후 1822년 8월 15일, 마리 루이즈는 나이페르크 백작의 네 번째 아이가 되는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1825년에는 다섯 번째 아이를 유산했다. 그 동안 그녀가 빈에 있는 아들을 보러 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9월 초순에, 결국 프란츠 2세의 승낙을 받고 정식으로 나이페르크 백작과 결혼했다.[8][9] 나폴레옹 2세는 라이히슈타트 공이 되었다.
1829년 2월 22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이 남긴 유언에는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프란츠 1세에게도 라이히슈타트 공(나폴레옹 2세)에게도 비밀로 했던 알베르티나와 굴리엘모에 관한 일이 기재되어 있었다.[10] 이걸 알게 된 나폴레옹 2세는 분노했다고 한다. 프란츠 2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경악했으나, "신 앞에서 저지르면 안될 죄를 저지르고 슬퍼하고 있지만, '''나는 너의 아버지다. 부모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용서하겠다.'''"라고 딸에게 말했다.[11]
1832년 7월 22일, 라이히슈타트 공 나폴레옹 2세가 폐렴으로 21세에 요절하자 마리 루이즈는 다음날로 나폴레옹의 어머니인 마리아 레티치아에게 손자의 죽음을 편지로 알렸다. 그래도 아들이 사망하기 전, 그가 앓아 누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리 루이즈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이야기는 있다.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 뒤, 마리 루이즈의 통치 보좌역으로서 벨크라인, 다음에는 마르샬이 왔으나 인기가 낮거나 파르마에 친숙해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달아 잘렸다. 그 뒤, 7월 혁명까지 샤를 10세를 시중들고, 프랑스에 살고 있던 샤를 르네 드 봉벨이 왔다. 그는 온화한 인물로, 마리 루이즈와 그는 서로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1834년 2월 17일에 결혼했다.
이후 조용히 살다가 1847년 12월 17일에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파르마 여공작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 Duchess of Parma)
프란츠 2세
(Francis II)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프란츠 1세
(Francis I)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Spain)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12]
마리아 테레사(양시칠리아)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Carolina of Austria)
프란츠 1세
(Francis I)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3.2. 자녀


  • 나폴레옹 1세와의 사이에서 1남 - 나폴레옹 2세(로마왕, 라이히슈타트 공)
  •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사이에서 1남 2녀 - 장녀 알베르티나 / 장남 빌헬름 알베르트 / 차녀 마틸드
  • 샤를 르네 드 봉벨 - 자식 없음

[1] 마리아 카롤리나는 마리 루이즈에게 고모 할머니이자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인 레오폴트 2세마리아 카롤리나는 남매 지간인데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이 프란츠 2세이고 마리아 카롤리나의 딸인 마리아 테레사가 프란츠 2세의 2번째 부인이기 때문이다. 즉, 프란츠 2세와 마리아 테레사는 서로 사촌이다.[2] 훗날 라히프치히 전투에서 동맹군을 지휘하여 러시아 원정 실패로 기진맥진한 나폴레옹에게 결정타를 먹인 인물이다.[3] 친할아버지 레오폴트 2세의 막내 여동생이다.[4] 이때 마리 루이즈에게 접근해서 황제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던게 몬테벨로 공작부인이다.[5] 다만 당시 왕족들은 어머니와 떨어져서 유모가 키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긴 했다.[6] 160km 정도 된다. 바로 옆동네는 아닌 셈.[7] 트룬발사시나 백작부인 테레제 조제피네 발푸르기스(Therese Josephine Walpurgis, Countess Thurn-Valsassina)와 1806년에 결혼하여 4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부인은 1815년에 사망.[8] 이 양반은 슈탄데스헤어여서 왕족과 동등 결혼이 가능하다. 그런데 슈탄데스헤어 항목 보면 알겠지만 귀천상혼으로 취급되어 이 양반과 마리 루이즈의 아들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앞서 언급된 굴리엘모(빌헬름)은 백작이다가 1864년이 되어서야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의해 몬테누오보 후작(Fürst von Montenuovo)으로 서임된다. 하지만 3대 만에 남계가 끊겨 작위는 1951년 단절.[9] 여담으로 나이페르크 백작(정확히는 4대 백작 아담 알베르트)의 전처 사이의 5대손이자 차기 나이페르크 당주인 카를 오이겐(1951~)은 다시 합스부르크 출신인 안드레아(1953~,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맏딸이다)와 결혼하였다.[10] 나이페르크 백작이 남긴 유언의 내용은 "이 아이들(알베르티나와 굴리엘모)은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이 생존해있을 당시에 태어난 아이로, 마리 루이즈와는 별거를 강요당했고, 매일같이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는 것을 금지하고 타인과 같이 부를 것'''을 의무로 했다."라고 한다.[11] 이와 반대로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에게 시집간 마리 루이즈의 여동생 마리아 레오폴디네(프란츠 2세의 5녀)는 남편의 폭력성에 시달리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레오폴디네는 아버지인 프란츠 2세와 언니 마리 루이즈에게도 편지를 몇통씩 보냈지만, 두 사람은 거의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며, 마리 루이즈는 끝까지 여동생의 기분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레오폴디네는 자신을 합스부르크가의 희생자라 부르며 자신은 곧 남편의 폭력에 의해 죽을 거라는 비통한 내용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내고 곧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12]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