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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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6월 해방 한 달 전 항공촬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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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까지 남아있는 마이다네크 수용소의 일부.
'''Das Konzentrantions- und Vernichtungslager Lublin-Majdanek''', '''KL Majnanek''' (KL Lublin, KZ Lublin) (독일어)
'''Majdanek concentration camp''' (영어)
1. 개요
2. 운영 역사
3. 폐쇄 시도와 해방
4. 희생자 수
5. 전후


1. 개요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 총독부에 세운 노동 및 절멸수용소로 총독부 SS경찰 사령부가 있던 루블린[1] 도심지 바로 외곽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루블린 강제수용소(KL 루블린)라고도 불린다. 1941년 10월 소련군 포로수용소로 지어졌으나 라인하르트 작전이 시작된 뒤 1942년 말 절멸수용소로 개조되었고 1944년 7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최소 6만 명의 유대인을 비롯해 8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마이다네크는 라인하르트 작전이 끝난 뒤에도 운영되었는데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몰아치던 소련군의 당도가 너무나 빨랐던 데다 당시 부수용소장이던 안톤 테르네스가 '''무능하여''' 수용소를 제대로 철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소련군에 접수되었고, 연합군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한 첫 번째 나치 강제수용소로 기록되어 있다.[2] 현재 마이다네크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와 더불어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절멸수용소로 남아 있다.
마이다네크는 포로 수용소와 노동수용소의 기능도 겸해서 항시 약 1만명 가량의 제소자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이곳이 절멸수용소로 분류되는 이유는 후술할 '수확제 작전' 때부터 1944년까지 남아있던 유대인 제소자와 더불어 폴란드 남부에 남아있던 마지막 유대인들을 학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2. 운영 역사


1941년 7월 하인리히 힘러는 총독부의 SS경찰 사령관 오딜로 글로보츠닉에게 소련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세울 것을 위임했고 이에 따라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포로 수용소로서 1941년 10월 루블린에 세워졌다. 키예프 전투 이후 소련군 포로가 급속도로 불어나면서 마이다네크 수용소는 25만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수용소로 계획되었으나 독소전쟁의 격화로 폴란드의 철도망이 극도로 혼잡해지면서 도저히 25만이나 되는 포로를 단선을 이용하던 루블린 한 곳에만 보낼 수는 없었기에 5만명을 수용하는 크기에서 확장을 멈췄다. 총 236개의 막사가 있었고 각 건물에는 207명이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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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블린의 총독부 SS 경찰 사령관이자 라인하르트 작전 사령관이었던 SS 집단지도자(Gruppenführer. 중장에 상응) 오딜로 글로보츠닉(Odilo Globočnik). 폴란드 총독부와 그 주변 유대인 200만명을 학살한 최고 실무책임자로 전후 1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1945년 5월 31일 체포되었고 체포 당일 심문 직전에 입속에 물고있던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1941년 말 라인하르트 작전이 시행되고 1942년 7월까지 세 개의 절멸수용소가 가동되면서 마이다네크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이들 절멸수용소에서 넘어온 희생자들의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의 기능도 수행했다. 하지만 폴란드 남부의 유대인 숫자가 너무 많아 해당 구역의 유대인 절멸을 맡은 베우제츠소비보르만으론 모두 학살하기 벅차자 1942년 9월 마이다네크의 목재 막사 하나가 가스실로 개조되었다. 이 가스실에선 다른 절멸수용소들과 달리 아우슈비츠처럼 치클론 B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될때까지 마이다네크는 루블린 게토와 더불어 폴란드 총독부가 유대인 노동력을 마지막까지 쥐어짜내던 곳으로 절멸보단 강제수용에 좀 더 중점을 두었다. 1943년 6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진압 된 뒤 약 50,000명의 유대인이 대거 마이다네크로 들어왔는데, 이들도 당장 죽음을 맞이하진 않고 죽을 때까지 노동하다 더이상 일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가스실로 보내져 목숨을 잃었다. 소수 단위로 학살했기 때문에 희생자들을 처형할 때 위장은 없었다. 그렇기에 가스 처형이 제소자들에게 그대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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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남아있는 마이다네크의 가스실. 막사 하나를 개조했기 때문에 수용소 내의 다른 막사도 외관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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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실 내부.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천장의 구멍 하나에서 치클론 B가 떨어졌다. 벽면의 파란색 얼룩은 치클론 B에 의한 가스 자국인데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되고 봉기가 두려워 절멸수용소들을 폐쇄한 루블린 사령부는 점령지 최대의 유대인 노동지역 중 하나였던 루블린 일대에서도 봉기가 터질 것을 두려워해 루블린 게토를 폐쇄하고 마이다네크의 유대인을 포함, 루블린 일대의 유대인을 한번에 모조리 '''정리'''하는 계획을 고안했는데, 이것이 그 이름도 대단히 끔찍한 '수확제 작전(Aktion Erntefest)'이었다. 작전명을 고안한 사람은 역시 SS내에서도 악마로 악명높던 라인하르트 작전 검사관 크리스티안 비르트로 추정된다. 11월 3일 단 하루동안 마이다네크에 있던 18,400명의 유대인이 총살된 것을 포함 루블린 일대에서 다음날까지 총 43,000명이 SS와 우크라이나인 학살대 '트라브니키(Trawniki)'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는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군이 단일로 벌인 학살로는 가장 큰 규모인데, 국내에선 바비야르 학살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듯 하다. 다시 돌아와서, 이후에도 마이다네크는 총독부에 마지막으로 남은 절멸수용소로 1944년 3월까지 유대인 절멸을 목적으로 한 학살을 계속해서 약 6만명의 유대인이 마이다네크의 운영기간동안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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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가을 수용소 구조

3. 폐쇄 시도와 해방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분쇄하던 소련군이 그렇게 빨리 당도할 줄 몰랐던 루블린 사령부는 급하게 수용소를 철거하려 했다. 하지만 수용소 간부들은 시체소각로 일부만 파괴했을 뿐, 철거를 맡은 부수용소장 안톤 테르네스가 우물쭈물한 "덕분"에 다른 구조물은 거의 손대지 못했다. 또한 약 1만에 이르는 제소자 중 1000여 명을 아우슈비츠로 강제 행진시키고 나머지 일부를 처형하긴 했지만 여전히 수천명의 제소자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고 그 상태로 마이다네크는 1944년 7월 24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마이다네크는 연합군이 발견한 첫 강제수용소였는데, 소련군은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어 마이다네크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한 뒤 이곳의 끔찍함을 전 세계에 알려 연합국의 공세에 도덕적인 당위성을 부여했다. 한편, 마이다네크에 대한 조사는 연합국 측에서 나치가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조사를 진행한 소련의 위원회는 이후 독일 점령지에서 엄청난 수의 강제수용소를 추가로 발견하고 경악한다.

4. 희생자 수


소련군이 처음으로 발견한 강제수용소로, 가스실과 시체 소각로를 본 소련군은 마이다네크를 순수 절멸수용소로 오인하고 처음엔 희생자 수를 유대인 40만명 포함 무려 170만명이라고 부풀렸다. 하지만 학자들이 곧 "현실적인" 수치를 내놓아 그 범위가 235,000~ 360,000으로 짐작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마이다네크가 순수 절멸수용소라기보다는 라인하르트 작전 말기에 집중적인 절멸작업을 벌인 곳으로서 보통 때에는 다른 강제수용소와 비슷한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희생자 수치는 많이 내려갔다. 따라서 현재는 홀로코스트의 일부로서 희생된 유대인 6만명을 포함해 최소 8만~9만명이 이곳에서 가스 처형, 죽음의 노동으로 인한 기아,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본다. 노동수용소의 기능도 겸했기 때문에 마이다네크에는 수많은 보조수용소(Subcamp)가 딸려 있었는데, 이들 보조수용소의 희생자까지 모두 더할 경우 마이다네크의 희생자는 최소 11만~13만까지 올라간다. 다른 절멸수용소보다는 적은 수치지만 절멸수용소를 제외한 강제수용소들에 비하면 여전히 월등히 많은 수치로, 나치의 수용소들 중 희생자 수가 6번째로 많은 곳이다.

5. 전후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독일 본토로 탈출하지 못했던 SS 간부 넷, 그리고 2명의 카포에 대해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 중 한명은 자살했고 나머지 다섯은 1944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이다네크에서 수용소장으로 있었던 인간은 총 5명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기 전에 초대, 그리고 세번째 수용소장은 유대인으로부터 강탈한 금품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이유로 1945년 4월 SS가 직접 처형했다. 남은 세명의 수용소장들도 증거가 그대로 남은 만큼 연합군 전승 이후 빠르게 조사받고 제거되었다. 두번째 수용소장 막스 코에겔(Max Koegel)은 재판이 진행되던 중 1946년 자살했고 네번째인 마르틴 바이스(Martin Gottfried Weiss)는 이전에 다하우 수용소장으로 재직한 적도 있었기에 1946년 다하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목이 매달렸다. 마지막 수용소장 아르투어 리에베헨셸(Arthur Liebehenschel)은 이전에 아우슈비츠 소장으로 재직한 적 있었기에 1947년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역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수용소장들은 다른 재판에서 사형되었기 때문에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에서 진행된 마이다네크 재판 때는 수용소의 중간 간부, 그리고 경비병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져 7명이 교수형, 2명이 종신형에 처해진 것을 포함 총 6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서독 뒤셀도르프 재판부에서 세번째 마이다네크 재판이 이루어졌는데, 전쟁 직후와 달리 다소 완화된 서독의 법적기준에 따라 대부분 고령으로 풀려나거나 훈방조치 되었고, 수십명의 유대인을 악독하게 고문해 죽인 아놀드 스티리펠이 3년형만 선고받은 것처럼 나머지 유죄를 받은 간부들도 가벼운 형만 선고받았다.
한편, 소련 역시 그리 인도적인 집단은 아니었기 때문에 NKVD는 마이다네크를 해방한 직후 폴란드 망명 정부에 충성하며 소련에 협력하기를 거부한 폴란드 국내군(이하 AK)을 가두는데 사용했다. 약 한달간 소련은 폴란드 점령지 전역에서 AK 병사들을 잡아들인 뒤 1944년 8월 23일까지 마이다네크에 구류된 AK 병사들을 전부 시베리아나 소련 오지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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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다네크 영묘.
소련군 점령직후 조사의 진행과 함께 마이다네크 추모 박물관이 세워졌다. 1947년에는 폴란드 인민정부에서 인간의 재와 유골 등이 섞인 흙을 쌓아 올려 큰 언덕을 만들었다. 1969년엔 해방 25주년을 기념해 폴란드 조각가 빅토르 토우킨이 추모지 입구에 큰 추모비를 만들고 유골과 재가 쌓인 언덕을 영묘로 만들어 주었다. 2006년 루블린 시는 나치가 일부 파괴했던 시체 소각로 건물을 복원했다. 현재 루블린은 관광도시라 하기는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닌데, 그래도 루블린에 들르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1] 라인하르트 작전 역시 이곳에서 지휘되었다.[2] 마이다네크 동쪽에도 말리 트로스테네츠라는 소규모 절멸수용소가 있었다. 이 수용소가 있던 지역엔 1944년 7월 4일 소련군이 당도했는데 이미 나치는 수용소를 거의 철거한 뒤였기에 소련군은 이곳의 존재를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희미하게만 알고 있었다. 마이다네크에 당도하기 전 소련군은 트로스테네츠에서 34개의 시체 구덩이를 발견했는데, 여전히 자료와 증거가 부족해 제대로 된 조사 결과는 전후에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