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망명 정부

 



'''폴란드 공화국'''
'''Rzeczpospolita Polska'''

망명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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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1939년 ~ 1990년
정부청사 위치
파리(1939 ~ 1940)
런던(1940 ~ 1990)
수도
바르샤바
정치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대통령
언어
폴란드어
민족
폴란드인
주요사건
1939년 설립
1989년 해체
성립 이전
폴란드 제2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 해체 이후
폴란드 제3공화국
1. 개요
2. 설립
3. 항전
4. 냉전 시기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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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ząd Rzeczypospolitej Polskiej na uchodźstwie.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폴란드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세워진 폴란드망명 정부.
런던에서 수립되어 서방 연합군에 참가한 뒤 1945년에 귀국을 시도했지만, 폴란드 본토를 장악한 소련군과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1947년 친소파 신정부(폴란드 공화국) 수립을 거쳐[1] 공산국가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건국하자, 민주공화국 체제로 복귀할 때까지 계속 존속한다. 오늘날의 폴란드 제3공화국을 창립하면서 1990년에 국새, 대통령기, 국장을 전부 레흐 바웬사에게 넘겨준 후 해체하였다.

2. 설립


1939년 9월 30일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의 패망이 분명해지자 상원 의장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Władysław Raczkiewicz, 1885년 1월 28일 ~ 1947년 6월 6일)가 망명해 있던 파리에서 새로운 폴란드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설립되었다. 수상 겸 자유 폴란드군의 사령관으로는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가 임명됐다. 서방 연합국과 폴란드 국민들 대다수에게서 빠르게 정통성을 승인받은 라치키에비치는 사회당, 노동당 등의 좌파계열 야당들도 망명 정부에 참여시켰고, 의회의 해당되는 국민 위원회도 설치했다. 라치키에비치와 시코르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목표는 단 하나, '''나치 독일을 패퇴시킨 뒤 폴란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3. 항전


1939년 말에 접어들면서 소련군독일군의 추적을 피해 남부의 헝가리 왕국루마니아 왕국으로 탈출한 폴란드군들이 속속 폴란드 망명 정부 수하로 집결되기 시작했다. 육군만 해도 10만 가량을 헤아렸으며[2] 나치와 소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해군 전력 역시 영국으로 집결했다.[3] 이렇게 조직된 자유 폴란드군은 이듬해 봄에 일어난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군 지휘 하에 분투를 벌이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망했어요. 프랑스의 몰락 이후 폴란드 망명 정부는 다시 런던으로 위치를 옮겨야만 했다. 영국으로 옮긴 뒤에도 폴란드 망명 정부는 독일에 대항하여 영웅적인 항쟁을 계속했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도 영국 공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폴란드 조종사들이 독일 공군만 보면 어찌나 닥돌을 하고 닥치는 대로 루프트바페 전투기, 폭격기를 격추해 나가니 어떻게든 자국 공군의 피해 규모를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영국 왕립 공군이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였다. 거기다 야사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흥분하면 서툰 영어 대신에 폴란드어가 튀어나왔던지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도 좀 심각했고 영국인들에게 독일군으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그래도 이들은 폴란드 본토와 프랑스에서 계속된 항공전을 겪은 고참 베테랑 조종사들로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한 연합국 조종사의 5% 정도를 차지했지만 전체 격추 비율의 12%를 차지하며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펼쳤다.
이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소련과 외교 관계를 재수립했고 폴란드 침공 당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감금됐던 폴란드 군인들은 석방되어 소련군 혹은 자유 폴란드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다시 투쟁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폴란드 망명 정부와 소련의 사이는 외교 관계 수립 후에도 여전히 개차반이었다. 우선 이오시프 스탈린모스크바에 자리잡은 폴란드 공산당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면서 폴란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려는 검은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게다가 종전 후 1939년 전쟁 발발 이전의 영토로 복귀할 것을 요구한 폴란드와 달리 스탈린은 커즌 선을 지키고 싶었던 것도 분쟁의 한 몫을 차지했다.[4] 한편 폴란드 망명 정부는 1939년의 전쟁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와 병사들을 석방하여 폴란드군을 결성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모두들 알다시피 소련 측에서 벌인 어떤 사건 때문에 폴란드 장교층이 죄다 날아가서 제대로 된 군대를 꾸릴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좀 더 기후조건이 나은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동으로 이동, 재정비 이후에 북아프리카 전선과 몬테카시노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3년 4월 '''카틴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가 소련의 소행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마침내 단단히 빡친 폴란드 망명 정부와 소련은 단교를 해버린다.[5]

4. 냉전 시기


종전 이후 서방측은 커즌 선을 소련과 폴란드의 국경으로 승인하는 대신[6]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지만 우리 쓰딸린 동지께서 그러실 리가 있나... 당연히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1947년에 친소파 신정부(폴란드 공화국)를 수립한 사회주의 세력이 1952년에 공산주의 국가를 선포하면서 폴란드를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이에 폴란드 망명 정부는 친소파 신정부(폴란드 공화국)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승인을 거부했으며, 폴란드 본토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바탕한 민주공화국 체제를 수립할 때까지 런던에 머무를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힘없는 자의 설움은 여전해서 중화민국자유 프랑스 및 영국과 미국마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외면하였다. 즉 친소파 신정부(폴란드 공화국)와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차례로 승인하고 폴란드 제2공화국과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을 취소해 버렸던 것. 심지어 대사관까지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내주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이들과 자유 폴란드군 장병들은 종전 직후 열린 승전 기념 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나마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공을 세운 공군 조종사들은 유일하게 행사 참석 자격을 얻었지만, 이들은 다른 전우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불참했다. 마지막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를 국가로 인정한 나라는 아일랜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 바티칸 시국 정도이다. 한가지 웃긴 건 마지막으로 폴란드 망명 정부를 국가로 인정하던 바티칸 시국이 이를 철회한 게 1979년인데 이 시점이 폴란드인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에 즉위한 해였다는 것(...). 여기에 1954년부터 1972년까지 망명 정부의 본청에서 내분이 일어나 2개의 망명 정부가 존재하는 상황까지 터졌다. 때마침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회유에 넘어가 투항하면서 귀국하는 정치인들도 늘어났다.[7]
이런 악재의 연속에도 폴란드 망명 정부는 그들을 지지하는 자유 폴란드군 출신의 15만여 폴란드인들과 함께 꿋꿋이 버텨나가며 공산주의 폴란드에 대항하는 반정부 운동을 펼쳤고, 마침내 1990년에 레흐 바웬사폴란드 제3공화국을 수립하자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대통령기, 국새, 국장, 헌법 초안 등 법통을 바웬사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해체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무려 51년 동안 타국에서 유지한 법통이 이어지게 된 것. 이후 망명 정부 인사들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고국 폴란드로 돌아가거나 혹은 그대로 영국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과[8] 함께 외국에 남았다.

5. 기타


  • 시인 김광균의 시 '추일 서정'에서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포화(砲火)에 이지러진/도룬 시[9]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한국 대중에게 폴란드 망명 정부가 이름이나마 알려지게 된 가장 큰 이유.

[1] 소련과 공산당의 부정선거가 뒤따랐다.[2] 나중에는 소련에서 석방된 폴란드 포로와 해외 폴란드 교포의 입대까지 합쳐서 20만으로 불어난다.[3] 이렇게 집결한 해군 전력 중에는 폴란드 해안에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에스토니아까지 도망쳤다가 거기서 탈출하여 다시 영국으로 무사히 도망친 오제우같은 사례도 있었다.[4] 물론 처음부터 단호박으로 거절하진 않았다. 알았다는 답만 한 채로 '일단 나치부터 조지고 돌려줄게'라면서 시간을 끌다가 종전 후에 자기의 따까리인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는 '1939년의 국경? 그게 뭐임?' 이렇게 아몰랑을 시전했다. 영국과 미국은 당연히 폴란드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일을 격퇴시키는데 엄청난 공헌을 한 소련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얄타 회담포츠담 회담을 통해 커즌 선을 승인해주고 만다. 그나마 폴란드에게 다행이라면 뺏긴 몫만큼 독일에게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를 가져왔다는 것 정도. 사실 산업 기반 등의 가치로 따지면 얻은 영토 쪽이 훨씬 높기 때문에 국민 감정을 차치하고 보면 손해는 아니다.[5] 정확히는 폴란드 망명 정부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통해서 진상 조사를 촉구하자, 소련에서 단교를 선언했다. 게다가 진상 조사를 추진한 시코르스키 총리는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며 사망하고 말았다. 70년 뒤 레흐 카친스키(폴란드 제3공화국의 대통령)가 방문 도중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흠좀무한 대목.[6] 단 소련 점령지역 중에서도 동부의 비아위스토크와 그 주변지역만은 다시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폴란드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힘이 없었다.[7] 고무우카는 1960년대 초반까지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 대항한 정치인이었다.[8] 망명 정부의 각료들을 위시한 높으신 분들은 귀국해서 특별연금을 수령 받고 그 외에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귀국한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귀국을 아예 거부한 채로 미국과 프랑스의 시민이나 영국과 캐나다의 신민으로 사는 것을 택한 폴란드 사람들도 많았다. 2차대전 종전 후,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 재정착한 이래로 무려 50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폴란드로 귀국하기에는 현실적인 생계 문제가 매우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대의 폴란드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고, 지금의 폴란드는 여전히 중진국이니, 의식주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게다가 민주화한 폴란드에서도 여전히 떵떵거리는 예전의 공산당원 출신 지식인들에 대하여 그 동안 쌓인 배신감과 함께 미국과 영국과 캐나다 및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태어나 현지인의 정체성을 갖고 자란 2세대와 3세대 자녀들의 교육 문제(3세대들의 경우엔 2021년 시점에서 최소 20 ~ 40대 나이가 돼서 현지 국가의 어엿한 사회인으로 인생을 살고있음)를 고려하여 귀국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았다.[9] 폴란드 중부의 내륙도시인 토룬(Toruń)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