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페리(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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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Calbraith Perry
(1794.04.10 - 1858.03.04, 63세)
1. 소개
2. 일생
3.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흔히 페리 제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리 호 전투에서 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영웅 올리버 해저드 페리[1] 제독의 동생이다. 쇄국을 하고 있던 일본에도 막부에 함대를 이끌고 내항하여 미일화친조약을 통해 일본을 개항하게끔 만든 사람이다. 내항 당시의 막부네덜란드어 통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서에는 네덜란드어식 발음의 '페루리(ペルリ)'로 불렸으며 한자로는 피리(彼理)로 표기되었다.

2. 일생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에서 미국 해군 사략선장 크리스토퍼 레이먼드 페리와 처 세라의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809년에 자신도 해군에 들어가고, 1812년부터 미영전쟁에 두 명의 형과 함께 참가한다. 1833년에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조선소장이 되고, 1837년에 미국 해군 최초의 증기선 풀턴 함을 건조한다.
동년 해군 대령으로 승진하고 1841년에는 브루클린 해군공창의 사령관이 되었다. 증기선을 주력으로 하는 해군의 강화책을 진행함과 동시에 사관교육의 임무를 맡은 그는 증기선 해군의 아버지라고 칭송받게 되었다.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았다. 동년 11월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했다. 프리깃함 USS 미시시피 함을 기함으로 한 4척의 함대카나리아 제도·케이프타운·싱가포르·영국령 홍콩·상하이·류큐 왕국·오가사와라 제도를 경유하여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에 입항했다.
7월 14일에 막부 측이 지정한 구리하마에 호위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도다 우지요시·이도 히로미치에게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는 않은 채 개국의 요구를 한 것으로 보이며, 만을 며칠간 측량한 후 식료 등 함대의 사정도 있어서 막부에 다음 해까지 유예를 주어 류큐로 돌아가고 홍콩에 기항했다. (쿠로후네 사건 참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미국에 극동사정이 전해지는 중이던 1854년 2월 13일에 기함 USS 서스케하나 함 등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현재의 요코하마시 가나자와구 앞바다에 육박해 조약체결을 요구하여, 3월 31일에 가나가와에서 미일화친조약을 조인했다. 또 그 후, 나하에 기항하여, 7월 11일에는 류큐 왕국과도 미류수호조약을 체결했다.
귀국한 후는 함대 복무 시절의 경험을 담은 원정기 등을 썼다. 만년에는 가발을 착용했다. 1858년 3월 4일에 64세로 뉴욕에서 죽었다. 묘소는 로드아일랜드주의 아일랜드 묘지에 있다.

3.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일본 입장에서는 좋게 봐줄 수 없는 인물이여서 그런지 일본의 대중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 박살천사 도쿠로에서 도쿠로가 사쿠라의 검열삭제당한 몸을 고쳐주려다 잠이 들어버렸을 때 사쿠라의 모습이 페리로 변해버렸다.(...)
  • 용기전승최종 보스인 마슈 기어하자드 제독이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
  • 다가시카시에서 일본을 상대로 상술한 막무가내식으로 개국을 조르는 역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성우가 스기타 토모카즈라 스쳐가는 인물 치고는 묘하게 임팩트가 남는다(...) [2] 호타루의 설명으로는 라무네를 두 병 갖고 와서 한 병은 따서 맛을 보게 해주고 나머지는 안 열고 돌아가서 더 먹고 싶어한 일본인이 병을 열어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 해서 개국이 되었다나 뭐라나(...).
[1]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의 1번함 이름이 된 인물이다.[2] 다가시카시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스키타가 TVA 1기 방영당시 트위터에 올라오는 관련 정보를 여러번 리트윗했는데, 이걸 눈여겨 본 포니케니언(다가시카시 1기의 메인 스폰서)측에서 고맙다는 표시로 페리 제독 역을 제안했고 나중에 니코니코 동화에서 송출된 다가시카시 이벤트 방송에도 게스트로 나와 페리 제독 코스프레를 선보였다(...). 참고로 스기타는 일본 성우들중 가장 많은 158만명이란 트위터 팔로워를 지닌 인기인이라 이런 리트윗만 해줘도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었을 테니, 스폰서 측에서도 고마워 하는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