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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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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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른쪽은 브루스 보치 감독이다.
일본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야구코치이다.
일본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였다.[6] 일본에서의 성적만 본다면 리그를 지배한 레전드는 아니지만,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과, 이중계약문제로 인한 비운의 일본 복귀등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남은 투수이다.
일본의 야구 명문고로 이름을 날렸던 호세이대학 제2고등학교 출신으로 고교 시절에는 큰 두각을 내지 못했다. 당시 고교 1년 선배였던 에이스 시바타 이사오[7] 의 백업 투수로서 활약한 것이 전부였으며 고시엔 기록도 1961년 전국고교야구 춘계대회에서 구원투수로 등판 1이닝을 소화한게 전부였을 정도였다. 시바타가 졸업한 뒤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긴 했지만 고시엔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프로 입단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본인도 대학진학 후 프로 진출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그러나 무라카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츠루오카 카즈토(鶴岡一人) 감독의 난카이 호크스가 무라카미에게 입단 제의를 하게 된다. 무라카미는 입단 제의를 받은 후에도 대학 진학을 원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이에 난카이 호크스 측은 "좋다. 그럼 우리 팀 입단하면 미국 유학 시켜줄게."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이 조건에 매력을 느낀 무라카미는 결국 1962년 9월, 난카이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63년에는 3경기에서 2이닝을 소화하였고, 시즌 후 난카이는 약속대로 무라카미를 팀 내 유망주 2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싱글 A 팀이었던 프레스노로 파견한다. 이 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계약서에 "만약 3명의 유망주 중 메이저리그에 승격하는 선수가 있을 경우, 샌프란시스코가 난카이 호크스에 1만 달러를 지급하고 해당 선수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는다"라는 조항을 넣었다. 난카이 측에서는 이 조항에 대해서 '설마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는 선수가 있겠어?' 라며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훗날 이 문제는 이중계약 파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때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무라카미는 동료들과 사전을 들고 다니며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1964년 6월까지만 프레스노에서 뛰기로 계획을 잡았으나 당시 난카이 호크스 측의 전력이 막강했기에[8] 복귀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싱글 A에 남은 그는 그의 특기인 커브를 활용해 11승 7패 ERA 1.78 162.0이닝 200K의 성적을 기록하며 캘리포니아 리그 신인왕으로 선정되면서 그의 잠재력을 인정 받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메이저리그 승격 요청'''이 온것이다.
1964년 8월 31일[9]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측에서 싱글 A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콜업을 요청한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뉴욕 메츠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난 상태였기에 뉴욕으로 가는 항공표를 전달했으며, "뉴욕에 도착하면 계약서에 사인을 해라"라는 말을 듣고 영문도 모른 채 뉴욕으로 날라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는데 구원투수로 등판해서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아 내면서 데뷔 경기를 무사히 마친 그는 중간 계투로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9월 29일 휴스턴 콜트 45'S전에서는 9회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11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팀이 연장 11회 말, 끝내기 승리를 기록하며 동양인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해 냈다.
1964년 한 해 동안 9경기에 출전해 1승 1세이브, 1.80 평균자책점 15탈삼진 3자책점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시즌을 보냈다. 다만 최초의 일본인 메이저리거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고국인 일본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1964 도쿄 올림픽이 열린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즌 후 귀국한 무라카미는 자신의 활약이 아닌, 이중계약 문제로 화제에 오르게 된다.
2년차에도 선발과 마무리 투수를 오가며 74.1이닝 4승 1패, 8세이브, 3.75의 평균자책점과 85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좋은 시즌을 보내던중...
1964시즌 후 샌프란시스코는 무라카미와 재계약을 맺었지만, 여기서 무라카미의 보유권을 놓고 난카이와 샌프란시스코 양 구단 사이에 마찰이 벌어지게 된다. 난카이 호크스 측에서는 그저 임대 보냈던 유망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10] , 다시 복귀시키려 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측에서는 임대 당시 계약서에 빅리그 승격과 관련된 양도 조항이 있으니 이제 우리 선수라고 반박함과 동시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포드 프릭[11] 은 일본야구기구에 항의서한을 보내며 단순한 선수계약문제가 아닌 미일 야구계 간의 분쟁으로 번져갔다.
결국 당시 일본야구기구의 커미셔너였던 우치무라 유시[12] 가 "1965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1966년부터 소속팀을 난카이로 변경한다."라는 중재안을 내세웠고, 시즌 시작 후인 1965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가 난카이에 지급한 1만달러를 돌려받고, 1년간만 선수를 보유하는 것으로 절충하며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1965년 개막하고 1개월 후에 팀에 합류한 무라카미는 중간계투로 맹 활약하며 45경기 등판에 74⅓이닝을 투구하여 4승 1패 8세이브, 평균자책 3.75, 85탈삼진과 아시아인 최초의 안타를 기록했다. 1965년 10월 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나 일본으로 복귀하게 된 그는 2년 간 54경기, 89⅓이닝 5승 1패 9세이브 방어율 3.43 100탈삼진을 기록한 후 일본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미국 통산 성적(베이스볼 레퍼런스)
1966년, 난카이 유니폼을 입고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한 그는 그해 46경기(선발출전 2경기)에 출전, 96⅓이닝동안 6승 4패 3.08를 기록하며 무난한 복귀전을 치뤘으나 이듬해 1967년에는 80⅓이닝 3승 1패 4.0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러나 1968년에 40경기 중 19경기를 선발로 등판하며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미친듯한 혹사를 견뎌내며 177⅔이닝 18승 4패 2.38의 방어율 9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최우수 승률 투수(최고승률) 타이틀을 획득하고 난카이의 에이스로 우뚝 선 그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거뒀고 1973년에는 7년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어 내며 팀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해냈다.
그러나 1973년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고, 1974년에는 경기마저 제대로 뛸 수 없게 되자, 난카이는 가차없이 한신 타이거즈의 아이바 요시히로와 트레이드를 했다. 한신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무라카미는 불펜으로 뛰었지만 19⅓이닝 1승 5.12이라는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다시 2:1 트레이드로 닛폰햄 파이터즈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 닛폰햄에서 53이닝을 뛰며 회복세를 나타낸 그는 2년째인 1977년에 112⅓이닝 7승 4패 6세이브 2.32라는 중간계투로서는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1978년에는 130⅔이닝 12승 11패 10세이브 3.03라는 선발급 스탯을 찍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에 많이 던진 여파와 더불어 나이도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1982년 2경기 2이닝 9.00의 방어율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일본방송, NHK BS1에서 야구해설자로 활약하였고 닛폰햄, 다이에, 세이부에서 투수코치로 뛰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극동 담당 스카우트로도 활약했고 현재는 NHK의 야구해설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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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5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요청으로 AT&T 파크에서 열린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전 시구를 맡기도 했다.
2014년 11월 16일에 도쿄돔에서 열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와 일본 올스타 간의 경기에서도 시구자로 나섰다.영상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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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른쪽은 브루스 보치 감독이다.
1. 소개
일본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야구코치이다.
일본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였다.[6] 일본에서의 성적만 본다면 리그를 지배한 레전드는 아니지만, 아시아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과, 이중계약문제로 인한 비운의 일본 복귀등으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남은 투수이다.
2. 선수시절
2.1.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다
일본의 야구 명문고로 이름을 날렸던 호세이대학 제2고등학교 출신으로 고교 시절에는 큰 두각을 내지 못했다. 당시 고교 1년 선배였던 에이스 시바타 이사오[7] 의 백업 투수로서 활약한 것이 전부였으며 고시엔 기록도 1961년 전국고교야구 춘계대회에서 구원투수로 등판 1이닝을 소화한게 전부였을 정도였다. 시바타가 졸업한 뒤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긴 했지만 고시엔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프로 입단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본인도 대학진학 후 프로 진출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그러나 무라카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츠루오카 카즈토(鶴岡一人) 감독의 난카이 호크스가 무라카미에게 입단 제의를 하게 된다. 무라카미는 입단 제의를 받은 후에도 대학 진학을 원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이에 난카이 호크스 측은 "좋다. 그럼 우리 팀 입단하면 미국 유학 시켜줄게."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이 조건에 매력을 느낀 무라카미는 결국 1962년 9월, 난카이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63년에는 3경기에서 2이닝을 소화하였고, 시즌 후 난카이는 약속대로 무라카미를 팀 내 유망주 2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싱글 A 팀이었던 프레스노로 파견한다. 이 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계약서에 "만약 3명의 유망주 중 메이저리그에 승격하는 선수가 있을 경우, 샌프란시스코가 난카이 호크스에 1만 달러를 지급하고 해당 선수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는다"라는 조항을 넣었다. 난카이 측에서는 이 조항에 대해서 '설마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는 선수가 있겠어?' 라며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훗날 이 문제는 이중계약 파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때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무라카미는 동료들과 사전을 들고 다니며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1964년 6월까지만 프레스노에서 뛰기로 계획을 잡았으나 당시 난카이 호크스 측의 전력이 막강했기에[8] 복귀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싱글 A에 남은 그는 그의 특기인 커브를 활용해 11승 7패 ERA 1.78 162.0이닝 200K의 성적을 기록하며 캘리포니아 리그 신인왕으로 선정되면서 그의 잠재력을 인정 받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메이저리그 승격 요청'''이 온것이다.
2.2. 아시아 최초 메이저리거가 되다.
1964년 8월 31일[9]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측에서 싱글 A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콜업을 요청한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뉴욕 메츠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난 상태였기에 뉴욕으로 가는 항공표를 전달했으며, "뉴욕에 도착하면 계약서에 사인을 해라"라는 말을 듣고 영문도 모른 채 뉴욕으로 날라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1일,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되었는데 구원투수로 등판해서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아 내면서 데뷔 경기를 무사히 마친 그는 중간 계투로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9월 29일 휴스턴 콜트 45'S전에서는 9회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11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팀이 연장 11회 말, 끝내기 승리를 기록하며 동양인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해 냈다.
1964년 한 해 동안 9경기에 출전해 1승 1세이브, 1.80 평균자책점 15탈삼진 3자책점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시즌을 보냈다. 다만 최초의 일본인 메이저리거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고국인 일본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1964 도쿄 올림픽이 열린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즌 후 귀국한 무라카미는 자신의 활약이 아닌, 이중계약 문제로 화제에 오르게 된다.
2년차에도 선발과 마무리 투수를 오가며 74.1이닝 4승 1패, 8세이브, 3.75의 평균자책점과 85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좋은 시즌을 보내던중...
2.3. 이중계약문제
1964시즌 후 샌프란시스코는 무라카미와 재계약을 맺었지만, 여기서 무라카미의 보유권을 놓고 난카이와 샌프란시스코 양 구단 사이에 마찰이 벌어지게 된다. 난카이 호크스 측에서는 그저 임대 보냈던 유망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10] , 다시 복귀시키려 했지만, 샌프란시스코 측에서는 임대 당시 계약서에 빅리그 승격과 관련된 양도 조항이 있으니 이제 우리 선수라고 반박함과 동시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포드 프릭[11] 은 일본야구기구에 항의서한을 보내며 단순한 선수계약문제가 아닌 미일 야구계 간의 분쟁으로 번져갔다.
결국 당시 일본야구기구의 커미셔너였던 우치무라 유시[12] 가 "1965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1966년부터 소속팀을 난카이로 변경한다."라는 중재안을 내세웠고, 시즌 시작 후인 1965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가 난카이에 지급한 1만달러를 돌려받고, 1년간만 선수를 보유하는 것으로 절충하며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1965년 개막하고 1개월 후에 팀에 합류한 무라카미는 중간계투로 맹 활약하며 45경기 등판에 74⅓이닝을 투구하여 4승 1패 8세이브, 평균자책 3.75, 85탈삼진과 아시아인 최초의 안타를 기록했다. 1965년 10월 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나 일본으로 복귀하게 된 그는 2년 간 54경기, 89⅓이닝 5승 1패 9세이브 방어율 3.43 100탈삼진을 기록한 후 일본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미국 통산 성적(베이스볼 레퍼런스)
2.4. 일본으로의 복귀
1966년, 난카이 유니폼을 입고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한 그는 그해 46경기(선발출전 2경기)에 출전, 96⅓이닝동안 6승 4패 3.08를 기록하며 무난한 복귀전을 치뤘으나 이듬해 1967년에는 80⅓이닝 3승 1패 4.03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러나 1968년에 40경기 중 19경기를 선발로 등판하며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미친듯한 혹사를 견뎌내며 177⅔이닝 18승 4패 2.38의 방어율 9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최우수 승률 투수(최고승률) 타이틀을 획득하고 난카이의 에이스로 우뚝 선 그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 연속 두자리 승수를 거뒀고 1973년에는 7년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어 내며 팀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해냈다.
그러나 1973년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고, 1974년에는 경기마저 제대로 뛸 수 없게 되자, 난카이는 가차없이 한신 타이거즈의 아이바 요시히로와 트레이드를 했다. 한신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무라카미는 불펜으로 뛰었지만 19⅓이닝 1승 5.12이라는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고 다시 2:1 트레이드로 닛폰햄 파이터즈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는데 닛폰햄에서 53이닝을 뛰며 회복세를 나타낸 그는 2년째인 1977년에 112⅓이닝 7승 4패 6세이브 2.32라는 중간계투로서는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1978년에는 130⅔이닝 12승 11패 10세이브 3.03라는 선발급 스탯을 찍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에 많이 던진 여파와 더불어 나이도 3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1982년 2경기 2이닝 9.00의 방어율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3. 은퇴 후
일본방송, NHK BS1에서 야구해설자로 활약하였고 닛폰햄, 다이에, 세이부에서 투수코치로 뛰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극동 담당 스카우트로도 활약했고 현재는 NHK의 야구해설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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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5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요청으로 AT&T 파크에서 열린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경기전 시구를 맡기도 했다.
2014년 11월 16일에 도쿄돔에서 열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와 일본 올스타 간의 경기에서도 시구자로 나섰다.영상
[1] 現 오츠키시[2] 1989년엔 1군, 1990년엔 2군 투수코치를 역임하였다[3] 9승 4패[4] 18승 4패[5] 18승 7패[6] 그의 진출 이후 박찬호가 두 번째 아시아출신 메이저리거(1994년 LA 다저스 입단)가 되어 다시 미국 땅을 밟기까지는 무려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야 했다. [7] 나중에 스위치 히터 외야수로 전향해 요미우리 V9 시대의 주전 중견수이자 리드오프맨으로 활약했고 통산 2000안타도 달성한다.[8] 실제로 그 해 리그 우승을 하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한신 타이거스를 4승 3패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었다. 이게 난카이 호크스로서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었다.[9] 마이너리그 정규시즌은 8월 말을 끝으로 모두 종료된다. 그 후에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들만 경기를 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로 콜업이 되지 않으면 그대로 그 해의 시즌이 끝나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9월 1일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있는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다.[10] 난카이는 당시에 4번타자 겸 포수 노무라 카츠야, 서브머린 에이스 스기우라 타다시, 또 다른 투수 에이스 미나가와 무쓰오, 도루왕 히로세 요시노리 등이 활약하며 좋은 팀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11] Ford Christopher Frick, 1894년 12월 19일~1978년 4월 8일. 로저 매리스의 홈런 문제로 유명해진 커미셔너.[12]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가인 우치무라 칸조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