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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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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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의 야마토급 전함 2번함 '''무사시(武藏)'''.
일본 제국이 마지막으로 건조한 전함이며 옛 일본의 율령국 가운데 하나인 무사시노쿠니(武蔵国)의 이름을 따 무사시(武藏, 무장)으로 명명되었다.
3. 상세
3.1. 건조
무사시의 건조계획은 일본이 군축조약에서 탈퇴한 후인 1936년 12월 26일, 해군 함정본부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의 최고 간부를 초청하여 건함계획인 마루 3 계획에 따라 거대전함 건조를 위해 준비를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37년에 개최된 제 70회 제국 회의에서 예산을 승인, 3월 29일에 계획명이 [A140-F6]에서 [제 2호함]으로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9월 8일, 해군 함정본부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에 [A140-F6]의 정식 발주를 지시했다. 1년 뒤인 1938년 3월 29일, 예산 견적이 절충됨에 따라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2] 에서 기공되어 건조가 시작되었다. 도크에서 건조된 1번함 야마토와는 달리 무사시는 선대 위에서 건조되었기에 현측이나 주요 방어구획의 장갑을 진수식 이후 부착하는 등의 중량 경감화를 해야 했다. 또한 선체를 가리기 위해 종려나무를 대량으로 매입했는데, 이로 인해 시장에서 종려나무 가격이 급등하여 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 경찰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고, 무사시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나가사키 주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강해져[3] 건조 당시 주민들은 시커먼 발 속에 가리워진 무사시를 귀신, 괴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강 건너편에는 미영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시를 숨기기 위해서 차폐용 창고를 건설하는 등, 건조 중인 함의 모습을 추측하지도 못하게끔 하였다. 그리고 조선소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고지에 있었던 글로버 저택이나 홍콩상하이은행 나가사키 지점을 미쓰비시 중공업이 매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장원장이자 초대 함장인 아리마 카오루 대좌조차도 완장을 차지 않으면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보안을 철저히 했음에도, 초보 제도공이 도면을 분실하는 일이 발생하거나 숙련공들도 진수대의 제작에 어려움을 겪는 등,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몇몇 사고나 문제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공사 자체에는 별 차질이 없었으며, 2년간의 함체 건설을 마치고 1940년 11월 1일 진수되었다. 진수식 때는 함체가 바깥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방공연습이라 하여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근처 일대에 헌병 및 경찰관 등 600명, 사세보 진수부 해병단 대원 1200명 등을 배치하였다. 이렇게 엄중한 경계 태세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오이카와 고시로 해군 대신, 도요타 소에무 함정 본부장 등이 참석하여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도 평복을 입고 식장에 왔으며, 도착 후 제복으로 갈아입는 등의 철저한 보안 아래 진행되었다. 워낙 함체가 거대했던 탓에 중량을 줄여서 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시가 진수되자 주위 해안에서 큰 파도가 발생했고 근처 하천의 수위가 높아져, 인근의 주택들에 침수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진수식 장면이 영상으로 기록되었으나 종전 후 소각되었다.[4] 그리고 이때 무사시의 존재를 배수량 4만톤 가량의 전함으로 세계에 공표할 예정이었으나, 도요타 데이지로의 반대로 공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화객선 카스가마루로 가리면서 이동, 무카이지마 의장용 안벽에서 1년간 장갑 부착, 장비 탑재 등의 의장공사를 한 끝에, 1942년 8월 5일 취역했다.
3.2. 개선된 점
무사시는 먼저 건조된 야마토에서 확인된 문제점을 개선하고 업그레이드 된 장비를 탑재하는등 많은 부분을 보완한 배였다. 그리고 1번함 야마토와는 달리 사령부 시설에 충실했으며,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던 부포탑 주위의 방어력도 강화되었다.[6]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도 '야마토와 비교하여 개선된 점이 많다.' 라고 평가했다. 또한 연합함대 사령부의 요구에 따라 내부 시설들을 교체하여 구축함 한 척 분의 금액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며 공사기간이 3개월 가량 늦어졌다. 야마토도 이후 무사시에 탑재된 것과 같은 제도품들을 탑재하였으나, 그래도 무사시에 탑재된 제도품이 더 좋았다는 증언이 있다.[7]
4. 전반적인 함생
1943년 전함 야마토와 연합함대 기함임무를 교대해 연합함대의 기함이 되어 트럭 환초에 배치되었다. 이때 부건빌 섬 상공에서 격추되어 전사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유골을 사령장관실에 안치하여 일본까지 운구하였다.
7월 31일에 무사시는 일본을 떠나, 8월 5일에 다시 트럭 환초에 도착하여 훈련을 계속하였다. 다음 해인 1944년 2월 10일에 트럭 정박지를 떠나, 15일에 요코스카로 귀환했다. 무사시가 트럭 정박지를 떠난지 불과 며칠 뒤에 트럭 환초에 미해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가해져서 정박지가 무용지물이 되었으므로, 일본해군은 서쪽 캐롤라인 제도의 팔라우로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무사시는 육군 상륙 부대와 5000톤 가까이 되는 대량의 물자를 실은 채 24일에 요코스카를 떠나 29일에 팔라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29일, 팔라우에서 머물고 있던 미군과 대치하여 연합함대 사령부를 육상으로 옮기기 위해 잠시동안 환초에서 나와 경계행동을 취하고 있던 중 미 잠수함 튜니가 발사한 어뢰를 맞고 함수부가 손상, 2600톤 가까이 침수되어 전사자 7명, 부상자 11명이 나왔다. 그 이후 야마토, 나가토와 함께 필리핀 해 해전에 참가하였지만 미군 함대나 함재기들과의 접촉은 없었다.
5. 레이테 만 해전
5.1. 시부얀 해전
1944년 10월, 무사시는 레이테 만 해전당시 출항 전 다른 함선들과 마찬가지로 대공포대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는 등의 출격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 때 무사시는 공습을 당할 경우 미군 함재기들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끌기 위한 미끼역할을 하기 위해서인지, 함체를 함대의 다른 함선들과는 다르게 밝은 회색으로 도색을 했다.[10] 때문에 당시 함내에선 '우린 미끼다.'라는 소문이 돌아 승조원들이 불안해했으며, 다른 함선들에서도 무사시가 미끼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선체를 밝게 도색하도록 한 것이 당시 함대에서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가연성 물질인 도료를 빨리 소비해서 없애버리기 위한 무사시의 지휘부의 독자적인 판단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밝은 색상으로 인해 미군 함재기들의 이목을 크게 끌게 된 무사시는 1944년 10월 24일 다른 함선들과 시부얀 해를 통과하던 중 미 해군 제 3함대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무사시는 주포로 3식탄을 발사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사전 경고 없이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대공포 사수들을 포함한 갑판에 있던 수병들이 주포발사의 후폭풍을 그대로 받았다고 한다.[11][12] 1차 공습 중 무사시는 250kg 폭탄 한 발을 1번포탑 천장에 맞았으나 튕겨냈다. 그러나 이 튕겨나온 폭탄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폭발하며 폭발과 파편으로 인해 근처에 있던 대공포와 갑판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3]
오후 12시 11분 즈음, 여러 발의 어뢰가 무사시에 명중하며 그 충격으로 주포의 조준 방위판(조준기)이 고장났고, 이로 인해 무사시의 주포는 각자 개별적으로 조준하여 사격을 가하게 되는 바람에 명중률이 크게 저하되었다. 다만 주포 조준기의 고장이 어뢰 피격시의 충격 때문이 아닌, 주포발사시의 충격때문이었다는 몇몇 생존자들의 증언도 있다.[15]
이후 1번 포탑에 장착된 3개의 주포중 가운데의 포에서 3식탄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해 1번포탑의 양탄기가 모두 고장나며, 1번 포탑은 사격을 멈췄지만 2,3번 포탑은 사격을 계속했다고 한다.[16]
오후 1시 30분경 3차 공습이 가해졌으며, 무사시는 어뢰 5발, 폭탄 4발, 지근탄 2발을 맞았다.
오후 2시 15분경 에식스급 항공모함 프랭클린에서 발진한 공격대가 4차 공습을 가해 무사시에 어뢰 1~3발, 폭탄 4발을 명중시켰다. 무사시의 피해상황을 보고받은 함대 사령관 구리다 다케오 중장은 오후 2시 53분에 무사시에 전열에서 이탈해 회항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2시 59분,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공격대가 무사시에 6차 공습을 가했고, 이때 무사시는 이전 공습으로 받은 피해와 경사각 회복을 위해 주입한 해수의 무게, 그리고 어뢰에 피격되며 발생한 파공[19] 으로 인해 속도가 크게 저하되었으며 회피기동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20]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는 무사시에 어뢰 8발, 폭탄 11발을 명중시켰으며, 이로 인해 무사시는 대화재가 발생하고 좌현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그리고 이 폭탄들 중 하나는 무사시의 함교 상단부에 명중해서 방공지휘소 제 1함교, 작전실의 갑판을 뚫고 폭발했고, 이 폭발이 제 1함교로 역류하며 항해장을 포함하여 준사관 이상 11명과 그 외 46명 가량의 인원이 전사했다. 함장인 이노구치 도시하라 대좌도 이때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5.2. 침몰
무사시는 총 6번의 공습으로 인해 어뢰 20발, 폭탄 17발 혹은 어뢰 10발, 폭탄 16발에 피격되어 전투능력을 거의 대부분 상실하고 함수부가 좌현으로 크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중순양함 토네와 카게로급 구축함 이소카제, 하마카제의 호위를 받으며 6~7노트 가량의 속도로 가까운 해안으로 돌입하려 했다. 무사시의 지휘부와 수병들은 1차대전 당시 함수가 완전히 물 속으로 가라앉은 상태에서도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항구로 돌아갈 수 있었던 독일제국 순양전함 자이틀리츠를 상기하며 아직은 무사시가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좌현 닻을 바다에 버리고, 기자재들과 부상자, 전사자들의 시신들까지도 함의 우현으로 옮기며 경사각을 줄여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7만톤이 넘는 거체를 일으키기는 역부족이었다. 거기에 결국, 침수로 인해 동력도 완전히 정지하며 무사시는 해상에서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부의 보일러실을 비롯한 함체 내부에서 침수로 인한 익사자들이 속출하고 있었으며, 전기계통이 끊기며 해치가 작동하지 않아 격실 내부에 갇힌 승조원들을 천장에 구멍을 내서 구출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200mm의 두꺼운 장갑이었기 때문에 결국 모두 익사했다고 한다. [22] 침몰 당시 무사시는 다수의 어뢰로 인해 약 3만 5000톤가량의 해수가 유입되어 부력을 거의 상실하였고, 복원력도 없어진 상태였다.
이후 함의 경사각이 12도에 달하게 되고, 경사각이 복구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7시 15분, 총원 퇴함준비명령이 하달되었고, 군함기가 마스트에서 내려졌다. 이후 7시 30분, 경사각이 30도에 달하게 되고 총원 퇴함명령이 내려졌으며, 7시 35분에 완전히 침몰했다.[23] 이때 구축함 이소카제에서 촬영된 함수부가 크게 가라앉은 상태의 무사시의 사진은 무사시의 최후의 모습으로 유명하다.
무사시는 침몰당시 수면 아래에 잠겨있던 좌현 함수부 방향부터 가라앉으며 전복되어 침몰했는데, 침몰하며 연돌을 통해 바닷물이 기관으로 유입되며 한 차례 증기폭발로 추정되는 폭발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함체 자체는 원형을 유지한 채 천천히 뒤집히며 가라앉았다고 한다. 다만 저 폭발이 함이 전복될때의 충격으로 인해 탄약고가 유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무사시가 침몰할 당시 퇴함한 승조원들 중에 침몰 당시 일어난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거나 상술한 수중폭발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함의 경사가 30도에 달하며 침몰이 확실시 되었을 때 호위중이던 구축함 두 척이 생존자 구조를 위해 접근했으나, 침몰로 인해 발생할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100m 정도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구축함들은 오전 1시까지 생존자 구출작업을 했으며, 약 1350명을 구조할수 있었다고 한다.[24]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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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의 함장인 이노구치 도시하라 대좌는 퇴함하지 않고 함과 운명을 함께했는데, 퇴함 당시 함교 근처에 있던 몇몇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총원 퇴함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함의 경사가 커져갈 무렵, 함교의 지휘갑판에서 퇴함중인 승조원들을 바라보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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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의 침몰로 인해 충격을 받은 일본 해군은 레이테만 해전 이후 야마토의 대공무장을 대폭 증설하여, 현재 잘 알려진 야마토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토 최후의 전투 당시의 전과를 보면 알 수 있듯, 효과가 크진 않았다.
또한 무사시는 1번함 야마토, 3번함 시나노와 같이 방뢰능력에 문제가 있었다. 선체가 리벳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탓에 어뢰 피격시의 충격으로 이 리벳들이 파손되거나 장갑의 연결 부위가 휘어지면 이렇게 생긴 틈 사이로 침수가 될 수 있었다.[28] 두꺼운 장갑판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1번함 야마토가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를 3번 포탑 근처에 맞았는데, 상정했던 피해량 이상의 심각한 침수가 발생하였다. 무사시의 승조원도 이러한 이야기를 야마토의 승조원에게서 들었다고 하며,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에 참여했던 마키노 시게루 주임도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점을 상부에서는 누수대책을 세우면 되며, 근본적인 설계변경은 필요없다며 넘겨버렸다고 했으며 이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고 기록해 뒀다.
하지만 무사시는 피격 추정 최대기준으로 어뢰 20발, 폭탄 17발에 피격되었음에도 완전히 침몰하기까지 4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무사시에 다수의 어뢰를 명중시켰으나, 어뢰가 함의 한쪽 측면에만 명중한것이 아닌 양현에 비슷한 숫자의 어뢰가 명중했기 때문에 침수가 좌,우현 모두 비슷하게 이루어져 함이 오랜시간동안 전복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군에선 "사실 무사시는 가라앉지 않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잠수함이 어뢰를 발사해 치명타를 입혀 최종적으로 무사시를 격침시켰다." 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 탓인지 이후 야마토의 격침 당시에는 특별히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뇌격기 조종사들이 자체적으로 야마토의 좌현에 공격을 집중해서 함의 전복을 유도했다.
무사시의 전투상황, 피해규모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또한 구리다 함대의 각 함선들의 보고와 무사시의 보고에는 일치하지 않는점이 많은데 이는 6번째 공습에서 무사시의 함교 우현에 명중한 직격탄으로 인해 무사시의 항해장을 비롯한 다수의 사관들이 전사하며 그들이 기록한 전투기록, 항적도, 신호기록 등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7. 침몰 이후
이후 1945년 8월 31일, 무사시는 전함 3척(야마토, 후소, 야마시로), 항공모함 4척(쇼카쿠, 즈이카쿠, 시나노, 다이호)과 함께 일본 해군에서 제적되었다.
8.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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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영방송 NHK BS1에서 방송된 전함 무사시의 최후 - 완전판(2017)'''
1985년에 잔해가 발견되어 수중탐사가 진행된 야마토와 달리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정확한 침몰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상태였다. 몇 차례의 탐사가 진행되었으나 잔해는 발견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무사시가 완전히 가라앉은 이후에도 내부의 많은 방수구획 때문에 부력이 남아 완전히 해저면에 가라앉지 않고 내부에 갇힌 전사자들의 영령들과 함께 8~12노트 가량의 조류를 타고 바닷속을 떠돌고 있다." 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 3월 3일 자선활동가로 활동중인 폴 앨런(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이 탐사팀을 꾸려 약 8년간의 탐색을 한 끝에, 자신의 요트인 옥토퍼스로 시부얀 해 해저 1km 지점에서 무사시를 발견했다.[29] 유튜브로 2015년 3월 13일 한국시간 오전 10시부터 생중계로 침몰한 무사시를 탐사하는 것을 방송하였다. 영상1000m가 넘는 심해에 가라앉아 있었던 탓인지 야마토에 비해 부식은 덜한 편이라고 한다. 처음엔 두 동강이 난 야마토와는 달리 비교적 온전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추가 조사를 해 보니 마찬가지로 두동강이 난 상태였다. 잔해를 탐사한 결과, 2번포탑이 있던 지점에서 함체가 분리되었고, 해당 포탑의 잔해가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 있으며 장약통을 비롯한 탄약의 잔해가 해저면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현재는 완전히 가라앉은 후 수중에서 압력이나 보일러실에서의 수증기 폭발, 함이 전복될 당시 포탄에 가해진 충격과 같은 원인으로 2번 포탑의 탄약고가 폭발하며 선체가 산산조각났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8.1. 상세
함수 부분: 함수 부분은 해저에 수평상태로 가라앉아있다. 1번 주포탑은 함이 전복되며 빠져 버렸고 빈 바벳만이 확인되었다. 2번 포탑이 있던 지점에서 함체가 분리되었기 때문에 2번 주포탑의 바벳은 남아있지 않았다. 함수부의 국화 문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탈락되었거나 부식되어 없어졌다고 추정). 왼쪽의 닺은 함체의 경사를 회복시키기 위해 닺줄과 함께 바다에 버려졌기때문에 함수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른쪽 닺은 남아있다. 선체 하부에는 여러 발의 어뢰에 의한 파공이 확인되었다.
함미 부분: 함미 부분은 함수로부터 150m 떨어진 곳에 전복된 채 가라앉아있다. 절반 정도가 진흙에 묻혀 있으며, 함저와 스크류, 방향타만이 확인되었다. 절단 부분은 터빈실 부근이며, 절단면을 통해 터빈의 모습이 관찰된다. 2 개의 방향타는 중간에 고정 된 상태로 해저에 직립하고 있지만 주 키는 파손된 상태였다. 스크류는 1개가 파손되었지만,[30] 3개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어뢰가 명중하여 발생한 파공은 확인되지 않았다 .
상부 구조물: 전방 함교와 후방 함교, 15m 거리계, 굴뚝 등의 상부 갑판 구조물은 통째로 선체에서 떨어져나왔으며, 선수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 가라앉아 있다. 함교는 상술한 직격탄에 의해 우현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다. 후방 함교의 망대 등도 발견되었다. 굴뚝은 손상이 심하다. 마스트와 후방 함교의 상부는 떨어져 나갔으며, 발견되지 않았다.
기타 부품: 해저 1200m의 심해에 침몰해 있기 때문에 부품은 1km 범위 내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함교보다 더 심하게 손상된 2 번 주 포탑의 급탄실 등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1번 주포와 3번 주포는 발견되지 않았다. 함교와 뱃머리 부분 사이 500m에는 비교적 큰 선체 구조물과 보일러, 고각포, 대공포, 삼식탄 등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가라앉아 있다. 부포도 1개가 발견되었지만, 전체의 대부분이 진흙에 묻혀있어 뒤의 구멍이나 한쪽 거리계만을 확인할 수 있다.
9. 매체에서
노부나건 7화에서 침몰한 함선에서 망령으로 사로잡힌 원혼과 교감하여 진화생명체가 해당 함선째로 가라앉은 것을 강제로 부상시켜 주역들을 고생시켰다.
하이 스쿨 플릿에서 학생들이 이용하는 배로 등장한다. 작중 최고 크기의 배인 듯. 다만 어찌된 일인지 개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취역 형태 그대로의 상태이다.
일본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별 비중없이 등장해 레이테 만 해전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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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쉽에서 9티어 프리미엄 함선으로 출시되었다. 흔히 익숙한 레이테 만 해전 당시의 대공포가 증설된 버전이 아닌 3연장 부포 4기를 장착한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나왔으며, 가격은 미주리와 마찬가지로 자유경험치 75만, 1 크레딧이다. 티어 대비 매우 부족한 대공 수치로 인해 별명은 야마스시다.
여담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컬렉션에서 야마토와 함께 사진으로 등장한다.
NHK에서 무사시의 잔해를 탐사한 영상 자료등을 분석하여 "NHK 스페셜 무사시의 최후-알려지지 않은 진실"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무사시의 제원, 전투 당시의 상황, 승조원과 설계 기술자의 회고가 있으며 무사시의 방뢰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 등도 지적하고 있다.
10. 관련 문서
[1] 일본해군만 쓰는 배수량표시[2] 당시 일본 내 민간조선소 중 약간의 확장만으로 7만톤의 거함을 건조할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이전에도 공고급 전함의 4번함 키리시마(순양전함), 이세급 전함의 2번함 휴우가(전함), 카가급 전함의 2번함 토사(전함),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3번함 타카오(88함대의 미완성함)과 같은 여러 척의 전함을 건조해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3] 무사시가 건조중인 나가사키 조선소 쪽을 바라만 봐도 헌병들이 야단을 치거나 체벌을 가하고, 심하면 체포되기까지도 했다고 한다.[4] 여담으로, 무사시가 진수된 후에도 제 1선대는 계속 종려나무로 된 발로 가려져 있어 주민들 사이에서는 무사시가 한 척 더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이후 조선소에서 밤중에 발생한 화재로 발에 거대한 함선의 모습이 비춰져서 주민들이 놀라기도 했지만, 사실 발에 비친 함선은 그 옆 제 2선대에서 건조중인 개조항모 준요였다고 한다.[5] 무사시의 초대 포술장 나가하시 타메시게의 유족들이 2015년 즈음 발견하여 언론에 공개되었다.[6] 이 때 부포탑의 완전한 철거도 고려되었던 듯 하다. 함정본부의 기술중장이었던 키요미즈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만나 부포탑의 방어력 문제에 대해 논의했을때, 야마모토 장관은 부포탑들을 철거하고 덮개로 덮어버리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7] 야마토에는 없는 자동주먹밥제조기가 설치되어 한 번에 주먹밥 10씩을 자동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8] 건조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측에 대공화기 대신 155 mm 부포탑이 설치되어 있다.[9] 앞쪽에 흰 천막 같은 것이 설치된 함선이 무사시다.[10] [image]시부얀 해전 당시 무사시의 모습을 재현해둔 프라모델이다. 당시 일본 군함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색이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재갑판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11] 이 때 주포발사의 충격으로 대공포의 조준 장비들이 모조리 고장나 이후 대공사격에 큰 어려움을 줬다는 말이 야마토급 전함 문서를 포함하여 국내 쪽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1번함인 야마토나 나가토도 삼식탄을 발사했는데 해당함들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있었다는 내용이 없고, 서양권에서도 볼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낮다. 다만 대공포 요원들이 충격을 받는 바람에 대공 사격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은 있다. 애초에 주포사격으로 자함의 장비들이 고장나는게 상식적일까?[12] 결코 과장이 아닌데 영화 언더 시즈를 보면 Mark 7 16인치 50구경장 함포를 발사할 때, 옆에서 얼쩡거리던 토미 리 존스 옹이 후폭풍을 맞고 쭈욱 날아가버린다. 즉, 무사시의 노천갑판에 배치된 대공포반 인원들이 이 지경이 되었을 거란 얘기... 기본적으로 고막이 터져나가 명령체계가 마비되었을 것이고(뭐라고? 안들려!) 후폭풍을 맞고 튕겨져 나간 인원들이 함 구조물 여기저기에 충돌하여 크고 작은 부상을 입거나 아예 바다로 날아가버렸을 수도 있다. 발사 후폭풍의 위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아래 사진 참고바람 [image][13] 1번함인 야마토도 2번 포탑에 직격탄을 맞았으나 포탑에는 별 파손이 없었고 주위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폭탄이 명중할 때의 충격으로 포탑 내부 인원들이 뇌진탕을 일으켰다고 한다.[14] 피격되어 솟구쳐 오르는 물기둥 옆에 어뢰의 항적이 희미하게 보인다.[15] 이 증언은 후부 측적소에서 근무하던 수병인 시바타 쿠라치(柴田倉治)에게서 나왔는데, 당시 주포 발사 후 방공지휘소에서 측적정보 송신을 중단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주포사격 시의 충격으로 인해 조준기가 고장난 것이 이유였으며, 수화기를 받아서 이 소식을 들은 측적반장은 "주포 바카야로!"를 외치며 하늘을 노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 수병은 함내 전기계통이 끊겨 조타가 작동하지 않자, 인력으로 조타를 하기 위해 타기실에 내려가는 결사대에 참여했으나, 명령이 내려오기 전 함이 동력을 잃고 완전히 정지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침몰 이후 구조되어 수송선을 타고 본토로 귀국했다고 한다.[16] 이때 무사시를 포함한 일본함대가 공습을 받는 모습을 근처의 시부얀 섬과 보아쿠 섬에서 현지 사냥꾼들이 구경했다고 한다. 당시 무사시가 공습을 받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육지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은 곳이었다.[17] 그 왼쪽으로는 회피기동중인 야마토와 다수의 순양함들도 보인다.[18] 함수부가 크게 기울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옆에 보이는 함선은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다. 무사시 주위로 여러 대의 함재기가 보인다.[19] [image]발견된 잔해를 확인해본 결과 어뢰에 피격되며 발생한 파공의 철판이 폭발의 충격으로 바깥 방향으로 휘어져있는 부분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휘어진 철판들이 해수의 저항을 크게 일으켜 함의 속도와 조타성을 떨어뜨려 폭탄이나 어뢰를 명중시키기 쉽게 만든것이었다.[20] 생존자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 무사시는 속도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속도가 나오지 않으니 도망도 못 치고 그야말로 떠 있는 거대한 표적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21] 연돌에서 희미하게나마 연기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 때까진 기관이 완전히 정지하지는 않은 듯하고 화재도 모두 진화된 듯 하다. 카게로급 구축함 이소카제에서 촬영.[22] 또한 이 때 무사시에는 구축함 아키시모에게서 인계받은 이전 팔라완 해협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타카오급 중순양함 마야의 생존자 769명도 탑승한 상태였는데, 이들 중에서도 134명 가량이 무사시가 침몰하며 전사하여 최종적으로 마야의 생존자는 635명이 되었다. 이들은 구축함 시마카제가 항구로 실어 보냈다.[23] 그래도 1번함인 야마토와는 달리 공습이 완전히 끝나고 전원 갑판에 집결한 상태에서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성공적으로 퇴함이 이뤄져서 함내 통신계통이 완전히 끊겨 승조원들 중 대다수가 퇴함명령이 내려졌음을 알지 못하였고, 알았다고 해도 탈출하기엔 너무 늦은 상황에서 완전히 전복되며 탄약고가 폭발하여 3000명 가량의 전사자가 발생한 야마토에 비해선 전사자가 적었다.[24]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가 지상전에 동원되어 전사하는 바람에 수송선을 타고 귀국길에 오른 인원은 430명 정도였다. 거기에 이 수송선도 귀환 중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바람에, 최종적인 생존자는 수송선에서 구조된 120명과 지상전에 투입된 인원 중 살아남은 56명 정도였다고 한다.[25] 사후 특진[26] 이노구치 소장이 부장을 통해 남긴 수첩에는 일본 해군 주력함들이 사용하던 대공화기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 대공포의 위력이 좋지 않으며, 명중한 적기가 여럿 있었음에도 좀처럼 격추당하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 무사시도 항공기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다.' 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해 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27] 첫번째 일러스트는 무사시의 것이긴 하지만 당시 야마토와 무사시의 대공무장은 차이가 별로 없었으므로 저걸로 사용.[28] 리벳접합 자체는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된 방식이라 리벳접합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어뢰 방어용 벌지와 측면장갑을 이어주는 부분에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측면장갑과 벌지를 이어주는 리벳의 접합이 너무 약해서 해당 부위에 어뢰를 맞으면 연결부위의 벌지가 밀려들면서 측면장갑에 구멍을 내는 송곳처럼 작용하게 되는 구조상의 결함이 존재했다. 벌지 자체도 200kg 수준의 어뢰 탄두에만 견디게 설계한 것이라 어뢰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수준이었지, 어뢰를 완벽히 막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29] 폴 앨런의 배의 함종은 요트인데, 전장 126미터에 달하는 구축함-순양함 급의 초대형 선박이다. 폴 앨런이 요트를 좋아하기에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앨리슨과 세계 1, 2위 대형 요트 경쟁을 하고 있다.[30] [image][image][image]해당 스크류다. 축이 부러진 것인지 휘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크류가 축이 일부 드러난채 빠져나와 있다. 또한 날의 일부가 부러져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31] 애초에 몽환의 전함 야마토라는 만화 자체가 흔해빠진 가공전기가 아니라, 가공전기 자체와 그걸 보고 정신승리하는 이들을 돌려 까기 위해 만든 만화인지라 중간중간 상황이 원 역사보다 악화되고 결국 일본이 더 확실하게 패망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