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1세

 

1. 아글라브 왕조의 5대 아미르 (841 ~ 856년)
3. 호라즘 왕조의 초대 샤 (1097 ~ 1127년)
4. 셀주크 제국의 7대 술탄 (1105 ~ 1118년)
5. 아사신의 3대 수장 (1138 ~ 1159년)
6. 나스르 왕조의 초대 술탄 (1238 ~ 1273년)
7. 하프스 왕조의 2대 술탄[1] (1249 ~ 1277년)
8. 차가타이 칸국의 22대 칸 (1342 ~ 1343년)
10. 후사인 왕조의 3대 베이 (1756 ~ 1759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권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 이유로 역사상 무함마드 1세라 불린 인물은 많은 편이다.

1. 아글라브 왕조의 5대 아미르 (841 ~ 856년)


아불 압바스 무함마드 이븐 알 아글라브
초대 아미르 이브라힘 1세 이후 그 세 아들이 계승하다가, 손자 세대 중 처음으로 아미르가 되었다. 치세 초반에 시칠리아의 아글라브 군은 나폴리의 도움으로 메시나를 점령하였다. 이후 그들은 부테라 전투에서 동로마 원군을 대파하며 시칠리아 정복의 주도권을 잡았는데 사령관 알 압바스가 점차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쟁하듯 아미르 무함마드 역시 이탈리아 해안에 대한 습격에 나섰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846년 로마, 정확히 말하면 바티칸을 약탈한 것이었다. 대군과 함께 오스티야에 상륙한 그는 바티칸 수비대를 격파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약탈하였다. 다만 아우렐리우스 성벽의 로마시 자체는 공격하지 않았고, 성벽 밖의 교회들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스폴레토의 롬바르드 군이 반격에 나서자 후퇴하였고, 그들의 공격과 항해 도중 폭풍으로 약탈물 일부를 잃었다. 그럼에도 기독교권에 준 충격은 지대하였고, 교황 레오 4세는 외성을 축조하였다.
가톨릭의 심장부인 로마를 습격한 무슬림 군주의 이름이 '무함마드'였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다만 로마 원정을 떠난 사이에 동생 아흐마드가 찬탈하고 압바스 칼리파 알 와시크처럼 순니 말리키 학파를 탄압하고 무타질라 학파를 후원하였다. 847년 그를 추방하고 복위한 무함마드는 수니파를 재정립하였고 감금되었던 법학자 사흐눈을 카디로 봉하였다. 한편 그는 기존의 동맹이던 나폴리 역시 약탈한 적이 있었다. 이에 나폴리는 849년, 재차 로마를 노린 아글라브 함대가 오스티아에 상륙했을 때에 교황군을 도와 그들의 격퇴를 도왔다. 이후 무함마드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권 확립을 위해 그곳으로 향하였는데 군부의 절대적 지지를 받던 알 압바스를 건드릴 수는 없었고, 856년 팔레르모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호전적이면서도 농업과 무역을 장려하였고, 공공 건축에도 힘써 수스와 스팍스 등지에 대사원이 건립되었다. 사후 아들 아부 이브라힘 아흐마드가 계승하였다.

2. 후우마이야 왕조의 5대 아미르 (852 ~ 886년)


톨레도, 바누 카시, 이븐 마르완, 우마르 이븐 하프순 등의 반란에 시달렸다. 앞의 2개는 진압했지만 뒤의 2개는 진압하지 못하여 후에 약 반세기 가량 후우마이야 조를 괴롭히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3. 호라즘 왕조의 초대 샤 (1097 ~ 1127년)


페르시아어 قطب الدين محمد
셀주크 제국의 호라즘 총독 아누쉬테킨의 아들로, 1097년 셀주크 술탄 바르키야루크에 의해 호라즘샤 (콰레즘샤)로 봉해졌다. 본래 아누쉬테킨 사후 에킨치가 새 총독이 되었으나 그가 아미르 코둔과 아루크타쉬의 반란으로 살해된 후 자립을 시도하였는데, 이를 진압한 셀주크 대장군 하바쉬 이븐 알툰타크에 의해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게 된 것이다. 무함마드는 에킨치의 아들 토그릴테킨의 도전을 물리치고 호라즘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사망한 후 호라산을 장악한 아흐마드 산자르에 충성하였고, 그가 서부의 술탄 마흐무드 2세에 대한 원정에 나설 때에 종군하였다. 그외에 같은 제후국인 카라한 칸국의 안정을 돕기도 하였다. 1127년 사망하고 아들 아트시즈가 계승하였다.

4. 셀주크 제국의 7대 술탄 (1105 ~ 1118년)


[image]
페르시아어 محمد تپار
셀주크 제국의 7대 술탄. 기야스 웃 딘 무함마드 혹은 무함마드 타파르로 불린다. 말리크샤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1095년 바르키야루크가 승리했지만 그의 동생 무함마드가 1099년 반발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 이에 1101년 바르키야루크가 회복하였으나 무함마드는 다시 바그다드를 점령하였고, 이듬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1104년, 형제는 휴전을 맺으며 무함마드는 이라크 서부를 대가로 바그다드를 형에게 내주었다. 다만 이듬해 바르키야루크가 사망하자 모든 영토와 술탄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명재상 니잠 알 물크의 아들 아흐마드를 재상으로 기용하며 제국의 중흥을 노렸다. 우선 이라크에 준동하던 베두인 세력인 바누 마즈야드를 공격해 1108년 그 지도자인 사다카를 전사시켰다.
당시는 십자군 국가들이 막 정립되던 시기로, 지속적인 시위와 여론의 요구에 그는 마우두드가 이끄는 정규군을 파견했지만 시리아의 무슬림 영주들 간의 제한된 도움만을 받다가 결국 실패하였다. 심지어 알레포의 경우에는 십자군과 연대해 술탄에 맞서기도 하였다. 결국 1118년 무함마드 1세의 사망과 함께 셀주크 제국의 시리아 개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외에 아사신을 멸하기 위해 1109년 재상 아흐마드를 파견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사후 장남 마흐무드 2세가 술탄으로 계승하였다. 하지만 다른 아들들인 마수드가 파르스와 이스파한, 토그릴은 카즈빈, 그리고 동생 산자르는 호라산을 상속받으며 셀주크 제국의 분열이 본격화 되었다.


5. 아사신의 3대 수장 (1138 ~ 1159년)



I.Muhammad
(? ~ 1162)
페르시아 아사신의 제3대 수장. 부주르구미드의 아들로 부주르구미드가 죽기 3일 전에 후계자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아사신파는 부자 세습 체계가 되었다.1138년에 수장이 되면서 파다이들을 보내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라시드를 살해했으며, 이에 대해 이스파한에서 이스마일리야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다. 1142년에는 피다이를 보내 바반드 왕조의 왕인 샤 가지 루스탐의 아들을 암살했으며, 1143년에도 피다이를 보내 셀주크의 술탄 다우드를 암살하자 라이의 셀주크 관리 아바스가 학살을 명했다.
무함마드는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밀사를 보내 박해자들로부터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동맹을 맺었으며, 그의 아들인 하산이 추종 세력을 모으면서 숨은 이맘으로 율법 위에 존재했으므로 그의 이단적 행위들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하산은 자신의 아들이자 단지 다이에 불과해 이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산의 지지자 250명을 죽인 다음에 또다른 250명의 등에 시체를 묶은 뒤에 알라무트로 추방했다. 다만 죽기 직전에 아들 하산을 후계자로 임명했다.(하산 2세)

6. 나스르 왕조의 초대 술탄 (1238 ~ 1273년)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창건자. 12세기 말엽부터 안달루스를 통치하던 무와히드 왕조는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참패 이후 쇠퇴하였다. 특히 내전이 겹치며 그들은 안달루스에 신경쓰지 못하였고, 그틈에 1228년부터 안달루스는 사라고사 아미르 가문 출신인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후드)가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1231년 헤레즈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에 대패하며 쇠퇴하였고, 그 틈에 아랍 혈통의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나스르)가 고향 아르주나를 기반으로 자립하였다. (1232년 7월)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는 이븐 후드의 적들과 연대하여 같은해 인근의 큰 도시인 하엔을 수중에 넣었고, 일시적이긴 하지만 코르도바도 얻었다. 1234년에는 일시적으로 세비야를 얻었지만 한 달에 그쳤다. 두 도시 모두 이븐 후드의 통치로 돌아갔다. 결국 같은해 무함마드는 하엔 일대의 통치를 대가로 이븐 후드에게 재차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236년 카스티야 군이 남하하자 무함마드는 그들의 코르도바 점령을 도우며 이븐 후드를 배신하였다. 1237년 5월, 무함마드는 그라나다 유지들의 초청을 받아 지배자가 되었고 곧 자신의 새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1238년 이븐 후드가 암살되자 안달루스의 술탄을 칭하였다. (무함마드 1세) 그는 무와히드 조를 본따 스스로 칼리파인양 '알 갈리브 빌라'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같은해 알메리아, 이듬해에 말라가를 얻으며 나스르 왕조의 영토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카스티야의 침공에 1244년 첫 수도 아르주나를 잃었고 이듬해 하엔이 포위되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패색이 짙어지자, 1246년 2월 무함마드는 하엔을 넘겨주며 카스티야의 봉신이 되었다. 그는 1248년 카스티야의 세비야 정복을 돕는 등 충실한 모습을 보였고, 그 대가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54년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가 사망하고 알폰소 10세가 즉위하자 그 궁정에 출두하기도 했다.
1262년 니에블라를 점령한 알폰소 10세는 그해 5월 하엔에서 무함마드 1세를 소환해 마그레브와의 연결 항구인 알헤시라스와 타리파 할양을 명하였다. 비록 구두로 승복하긴 했지만 무함마드는 각종 핑계를 대며 이행을 지연시켰고, 마그레브의 마린 왕조와 연락하여 2천여 병력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1264년, 무함마드는 카스티야와의 휴전 연장을 논의하러 세비야로 향하였다. 알폰소 10세는 그에게 옛 아바드 왕궁을 내주었는데, 밤새 카스티야 군대가 궁전을 둘러싸기 시작하였다. 이를 함정이라 여긴 무함마드는 친위대에 출격을 명하고 황급히 그라나다로 돌아갔다. 알폰소는 이 조치가 기독교도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지만 이미 분노한 무함마드는 국경 도시들에 전쟁 준비를 명하고 튀니스 하프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1264년 봄, 무함마드는 카스티야를 침공하였다. 동시에 추방과 차별을 겪던 무데하르 (카스티야의 무슬림들) 역시 사전 협의대로 봉기하였고 무함마드는 수월히 시도니아, 헤레즈, 무르시아 등지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알폰소는 아라곤의 도움으로 반격에 나섰고, 실지를 수복한 후 1265년 그라나다를 침공하였다. 결국 무함마드는 협상에 나서 재차 카스티야에 복속하였다. 연공은 이전보다 훨씬 증가한 25만 마라베디스로 증액되었다. 또한 카스티야의 무슬림 추방이 가속화되었는데, 이들이 그라나다로 모여들며 나스르 왕조의 인구가 증기하긴 했다. 이듬해엔 말라가의 바누 아쉬퀼라가 반기를 들고 알폰소의 도움을 청하며 재차 위기가 찾아왔다. 무함마드는 원군으로 파견된 카스티야 사령관 누뇨 곤잘레즈를 오히려 알폰소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변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카스티야, 그라나다 양측 모두의 내전이 계속되던 와중인 1273년 무함마드는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

7. 하프스 왕조의 2대 술탄[2] (1249 ~ 1277년)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로, 1249년 부왕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가 사망하자 계승하였다. 그는 1253년, 바그다드의 칼리파가 건재한데도 칼리파를 칭하였다. 이로써 칼리파 조는 무와히드 왕조, 압바스 왕조를 포함한 3개가 되었다. 당시에는 마그레브와 안달루스의 일부만이 이를 인정하였으나 1258년 바그다드의 알 무스타심이 살해되자 메카의 샤리프가 그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이에 무함마드는 정식으로 라캅 '알 무스탄시르'를 정하였다. 다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그를 인정하지 않고 1261년 압바스 가문의 방계를 찾아내 칼리파로 옹립하였는데, 그 역시 알 무스탄시르를 택하여 동명의 칼리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비록 그해 말엽 후자가 바그다드 수복에 나섰다가 전사하며 오래 가진 못했다.
한편 1260년대 시칠리아 왕국에서 벌어진 앙주 가문과 호엔슈타우펜 왕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자의 인사들이 튀니스로 망명하였다. 이에 새로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한 샤를 1세는 하프스 조를 꺼림칙하게 여겼고, 알 무스탄시르에게 그가 기존 호엔슈타우펜 왕들에게 내던 조공을 요구했으나 답이 없자 더욱 분노하였다. 그러던 1270년, 튀니스의 제노바 상인들이 위조 금화를 정상 금화에 섞어 지불했다가 들통나 재산을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제노바는 동맹인 프랑스와 샤를에게 하소연하였다. 위의 이유들과 무역 대상인 이집트와 전쟁을 하기 싫었던 샤를의 사심이 작용하여 8차 십자군의 튀니스 행이 추진되었다. 신실했던 루이 9세는 알 무스탄시르가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는 소문에 이를 결정하였다.
1270년 7월, 루이의 십자군이 옛 카르타고에 상륙하였고 기습을 통해 성채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다음달 역병이 돌아 루이가 병사하며 십자군은 추진력을 잃었다. 다만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한 알 무스탄시르는 샤를에 협상을 요청해 조공 재개, 원정비 1/3 부담, 튀니스의 시칠리아 상인 구역 설치, 무관세 무역, 기독교 예배 및 선교의 자유, 기독교도 포로 석방 및 망명자들 추방의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다. 그해 11월, 십자군이 시칠리아로 철수하였다. 십자군과 싸우기 위해 튀니스 파병을 준비하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소식을 듣고 철회하였다. 이후로 안정적으로 통치하던 알 무스탄시르는 1277년 사망하였다. 아들 야흐야가 계승하였고, 그 역시 칼리파 알 와시크를 칭하였다. 여담으로 사냥에 관심이 많던 그는 왕자 시절인 1247년 '사냥에 관하여'란 책을 집필했는데 당시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로 여겨진다.

8. 차가타이 칸국의 22대 칸 (1342 ~ 1343년)


페르시아어 محمد ابن پلاد
본명은 무함마드 이븐 팔루드로,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에 차가타이 울루스는 내전과 분열이 한창이었다. 무함마드 칸은 이를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2촌 친척인 카잔 칸이 다음 칸이 되었다.

9. 오스만 제국의 3대 술탄 (1413 ~ 1421년)


메흐메트 1세 문서 참조

10. 후사인 왕조의 3대 베이 (1756 ~ 1759년)


아랍어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رشيد باي
18세기부터 1957년까지 튀니지를 지배했던 후사인 왕조의 창건자 후세인 1세의 아들로, 본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였다. 1735년 사촌 알리 1세가 부왕을 축출하고 베이가 되었는데, 무함마드는 수스에 봉해졌다. 그러던 1756년, 무함마드는 알제리의 도움으로 알리를 폐하고 베이가 되었다. 하지만 논공행상에서 콩스탕틴의 베이와 분쟁이 일었고, 무함마드는 요새화된 바르도로 피신하였다 동생 알리는 스팍스에서 근왕병을 모았다. 튀니스에는 튀르크 군부가 알제리 인들의 도움으로 임시 정부를 세우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알제리 군대와 바르도를 포위했는데 무함마드의 근위대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알제리 인들과 협상에 나서 연공 납부와 배상금 지불을 대가로 그들을 귀국시킬 수 있었다. 반란이 진안되자 후 동생 알리와 함께 재위했는데, 1759년 사망하자 그가 알리 2세로 계승하였다. 다만 그의 아들 마흐무드는 7대 베이로 등극, 이후 그 자손들이 세습한다.

[1] 그리고 자칭이긴 하지만 초대 칼리파[2] 그리고 자칭이긴 하지만 초대 칼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