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드라그 안젤코비치
1. 개요
세르비아 국적의 공격수로 2004년에는 당시 K리그 신생 팀이었던 인천 유나이티드 FC에서 뛴 경력이 있다. 안젤코비치는 인천의 첫 득점자이기도 하다. 커리어 통산 16개의 국가에서 21개의 클럽을 경험한 저니맨의 표본.
2. 커리어
2.1. K리그 진출 이전
8살에 축구를 시작한 안젤코비치는 95/96시즌 OFK 베오그라드에서 프로로 데뷔했는데, 당시 총 18경기 1골에 그쳤다. 그 이후 그는 스페인의 RCD 에스파뇰에 합류했으나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고, UD 알메리아나 독일의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에스파뇰 시절에는 19살의 유망주였던 안젤코비치에게 장기 계약 제의가 오기도 했었지만, 선수 본인은 그 때까지는 오랫동안 외국에 있기가 부담스러워서 이를 거부했고, 이후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이스라엘의 하포엘 페타 티크바를 거쳐서 안젤코비치는 베오그라드에 돌아왔고, 이전보다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27경기 11골을 기록했다. 스메데레보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안젤코비치는 이번에는 터키의 안탈리아스포르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으나 다소 애매한 기록만을 남겼다. 터키를 떠난 뒤에는 브라질, 폴란드 등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또 한번 베오그라드로 복귀했고, 7경기 2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2.2. 인천 유나이티드 FC
베오그라드에서 뛰던 안젤코비치는 안종복의 눈에 띄었고, 인천의 제의를 받는다. 이후 라데 보그다노비치의 조언을 들은 후 인천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2004년 3월 1일 문학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감바 오사카와의 창단 기념 경기에서 안젤코비치는 제난 라돈치치와 투톱을 형성하며 출전했는데, 이 경기에서 안젤코비치는 전재호의 패스를 이어받아 팀 창단 후 첫번째 득점의 주인공이 됐다. 곧 이어 열린 4월 10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도 안젤코비치는 인천의 K리그 1호골을 성공시켰고, 5월 들어서는 울산 현대나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도 득점을 했다. 하지만 팀의 성적은 지지부진했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한 경기에서 한 득점을 마지막으로 일본의 세레소 오사카에 임대되었다. 그래도 인천 공격진에서 고군분투하던 선수라 이 이적에 대해 논란도 있었지만, 곧 이어 드라간 스토이사블례비치와 라디보예 마니치가 합류하며 논란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뛴 기간은 짧지만, 인천의 창단 첫 시즌을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선수 중 하나로 이름이 남았다.
2.3. 이후의 커리어
세레소에서는 4경기 1골에 그쳤고, 이후 다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리그 등 다양한 국가의 팀들로 이적했다. 중국 리그에서 경기를 뛰던 당시에는 하얼빈 이텅에서 22경기 7골을 기록하는 등 나름 활약했고, 루마니아 리그를 거쳐서 캐나다, 세르비아 리그까지 경험한 뒤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활동 범위가 넓고 개인기를 갖춘 선수였다. 다만 당시 인천의 미드필더가 공격진에게 볼배급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오프사이드를 많이 범한 편. 인천 시절 안젤코비치는 11경기에서 22개의 오프사이드를 기록했다. 즉, 한 경기에 두 개 정도의 오프사이드를 기록한 것.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안젤코비치는 인천의 최전방에서 꽤 괜찮은 플레이를 해줬고, 인천의 창단 시즌 전반기에 그나마 공격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4. 에피소드
- 과거 포항 스틸러스에서 대활약하였던 라데 보그다노비치와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인천에서 제의가 들어온 뒤, 라데에게 한국에 대해 물어봤더니 좋은곳이란 말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 2006년에는 사우디의 알 아흘리 소속이었는데, 훗날 한국에서 전설을 쓸 데얀 다미아노비치와 함께 뛰었다.
- 2007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적이 있던 조 본프레레 감독과 함께 중국 다롄 스더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