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힐 더라위터르

 



[image]
'''생몰년도'''
1607년 3월 24일 ~ 1676년 4월 29일
'''출생지'''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image] 제일란트주 플뤼싱[1]
'''사망지'''
나폴리 왕국[image] 시칠리아 시라쿠사.
'''복무'''
네덜란드 해군
'''복무기간'''
1652년 ~ 1676년
'''최종계급'''
중장
'''주요참전'''
포르투갈 독립 전쟁
영란전쟁
1. 소개
2. 생애
2.1.1. 제 1차 영란전쟁
2.1.2. 제 2차 영란전쟁
2.1.3. 제 3차 영란전쟁
2.2. 영웅의 죽음
3. 여담


1. 소개


Michiel de Ruyter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활약한 네덜란드의 제독. 상인 출신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간 인물로 최후에는 그의 인기를 시기한 총독(빌럼 3세)으로 부터 사실상 죽음과 다름 없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를 따르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네덜란드의 영웅. 특히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 메드웨이 강 하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를 기습하여 영국 해군을 초토화시키고 템즈 강을 봉쇄하여 2차 영란전쟁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이유로 호레이쇼 넬슨이나 이순신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해군 지휘관으로 꼽히기도 하며, 미국의 밀리터리 전문 잡지인 암체어에서 선정한 위대한 명장 100에 해군 제독으로는 가장 높은 순위(39위)를 기록했다.

2. 생애


플리싱언에서 맥주 운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창기 기록은 불분명하나 약 11살 무렵부터 선원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기록으로 확인 되는 것은 1622년으로 마우리츠 판나사우스페인 군대와 싸운 것이 그의 첫번째 전투 기록이다. 그리고 1631년 잠시 상회에 근무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 결혼도 해 딸을 낳기도 했다.[2]
1635년에 부유한 지역 유지의 딸과 재혼했고 1637년에 민간 상선의 선장이 되어 됭케르크 등에서 해적을 비롯한 침입자들을 막아 냈다. 그리고 1641년엔 네덜란드 해군 소장 신분으로 포르투갈 독립전쟁에 파견 되어 포르투갈 해군을 지원했다. 그리고 1642년부터 1652년까지 직접 배를 사들여 모로코와 서인도 제도사이의 거래를 담당해 부를 축적했다. 이때 기독교 노예들의 경우에는 몰래몰래 해방 시켜주기도 했다.
한편 1650년 재혼한 아내도 사망하자 1653년 미망인이었던 Anna van Gelder와 세번째 결혼을 하고 자신의 고향인 플러싱에 집을 산후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편하게 지내려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평범했던 상인 1로 남겨두지 않았으니...

2.1. 영국-네덜란드 전쟁



2.1.1. 제 1차 영란전쟁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무역로를 두고 벌어진 전쟁인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터지자 그는 참전 요청을 받는다. 바다생활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당시 네덜란드 해군은 그를 중령 제독(luitenant-admiraal-generaal)으로 임명했고, 1652년부터 1654년까지 네덜란드 해군을 이끌면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편 네덜란드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마르턴 트롬프(Maarten Tromp)[3] 가 지휘하던 네덜란드 해군은 잉글랜드 해군과의 해전에서 큰 공훈을 세웠으며 특히 1653년 7월 31일에 일어난 스헤베닝언(Scheveningen) 해전에서는 전략적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마르턴 트롬프가 전사하며 지휘부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마르턴 트롬프의 아들 코르넬리우스 트롬프(Cornelis Tromp)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지게 되는데 당시 네덜란드 총리였던 요한 드비트(Johan de Witt)는 그의 친구 미힐 더라위터르를 네덜란드 해군 중장으로 임명한다.

2.1.2. 제 2차 영란전쟁


중장이 된 그는 효과적인 신호체계를 만들어 네덜란드 해군의 전투력을 강화했다. 1667년 6월 1일에는 4일의 전투(Four Days' Battle)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6월 9일에는 잉글랜드 채텀 인근에서 일어난 메드웨이(Medway) 기습을 통해 영국 선박 13척을 불태워 버리고 템스 강의 하구(河口)를 봉쇄했다. 특히 이 메드웨이의 기습은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개박살을 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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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 이전, Van Soest, Raid on the Medway(메드웨이 기습)

It was one of the worst defeats in the Royal Navy's history.

(메드웨이 기습은)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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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R. 힉맨}}}

영국 해군 역상 가장 끔찍한 사건은 자신들의 앞마당(home water)에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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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조지 프랭크(Horace George Franks)}}}
안개 낀날에 이루어진 이 기습은 셰피 섬(Sheppey)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메드웨이에 위치한 영국군을 향해 돌격을 지시했다. 라위터르가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은 철저한 신호체계에 따라 영국 해군을 가지고 놀았으며, 그 결과 영국이 보유한 4척의 대형 전열함중 무려 3척[4]을 아작내고, 영국군 기함이던 로얄 찰스(Royal Charles)를 포획하는데 성공, 네덜란드로 복귀한후 전시함으로 활용했다. 참고로 이때 로얄 찰스는 당시 영국 왕이었던 찰스 2세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적국에게 엄청난 한방을 먹인 데다가 치욕까지 안겨 준 것.
자신들의 수도 코앞에 적들의 선박이 날뛰고 있음을 본 영국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결국 브레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2.1.3. 제 3차 영란전쟁


그러나 네덜란드사에서 재난의 시기(Rampjaar)라 불리는 1672년 8월 21일 요한 드비트는 빌럼 3세와 정치적 경쟁에서 패해 죽임을 당한다.[5] 자신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죽게 되었지만 빌럼 3세는 그를 밀어주게 되고 외내부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라위터르는 다시 막대한 임무를 맡게 된다.
영국은 1672년 프랑스와 손을 잡고 다시 전쟁을 선포,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육지에서는 프랑스의 군대가 진출해 네덜란드 요새를 각개격파하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침공해왔다. 하지만 라위터르가 이끄는 해군은 육군과 달리 연전 연승을 이어 간다. 대표적인 전투로 1672년 5월 28일에 일어난 솔베이(Solebay) 해전[6], 1673년 8월 21일에 일어난 텍설(Texel) 해전이 있으며, 네덜란드 해군이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해군을 연달아 물리치면서 영란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2.2. 영웅의 죽음


전쟁이 끝나면 인기가 많은 영웅이 정치로 부터 시기를 받는 것이 당연한 법. 영란전쟁은 결국 프랑스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이 진행되었고 빌럼 3세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인기를 받는 라위터르를 시기해 1675년에 스페인 해군을 도우라는 명령과 함께 지중해로 파견한다.

1676년 4월 22일 지중해에 위치한 시칠리아의 아우구스타(Augusta)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네덜란드-스페인 연합 해군 진영에 참전하여 전투를 벌이던 도중에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위 영상에도 묘사가 된 것처럼 포탄에 다리가 잘려나가 전사하였다. 다만 영화에서는 즉사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사망한 날짜는 일주일 후인 4월 29일로 다리가 잘려나간 이후 치료를 받고 며칠 더 살다가 상처가 감염되며 사망했다.
그의 죽음 소식에 모든 네덜란드 국민들이 슬퍼했고 그의 시신이 네덜란드로 돌아와 암스테르담에 안장 되었을때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고향인 블리싱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3. 여담



  • 2015년 그의 전기 영화가 제작 되었다. 제목은 The Admiral-Michiel de Ruyter[7] 네덜란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등 네덜란드 내에서는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제독: 미힐 드 로이테르"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1] 現 플리싱언[2] 이때 아내는 딸을 낳다가 사망했다.[3] 네덜란드 해군의 전설적인 제독 중 하나.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후반부에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격파하여 네덜란드의 독립에 큰 기여를 한 제독이다.[4] 로얄 런던, 로얄 제임스, 로얄 오크. 포츠머스에서 정박중이어서 그 자리에 없었던 로얄 소버린(Royal Sovereign)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5]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만든 홀란트 주 총독직을 폐지한 조칙을 오라녀파의 압력으로 스스로 취소한다. 그 직후 빌럼 3세를 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 폭도들에 의해 그의 동생과 함께 내장이 다 드러난 채 길거리에 공개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6] 당시 영국함대의 총사령관인 제임스 2세(당시에는 요크 공작)은 네덜란드 함대의 맹공으로 여러번 기함을 옮겼고 초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는 네덜란드 함대의 화공으로 역시 기함을 포기하고 다른 함으로 피신 하기 위해 보트에 탔다가 보트가 뒤집혀서 전사했다.[7] 여담으로 미힐 더라위터르와 비슷한 삶을 살다간 이순신을 다룬 영화 명량의 수출명이 The Admiral: Roaring Current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