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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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민강(閔橿)
이명
민소광(閔小光)
자 / 호
호삼(虎三) / 은포(恩浦)
본관
여흥 민씨[1]
생몰
1883년 7월 26일[2] ~ 1931년 11월 4일
출생지
충청도 청주목 남이면 양촌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3]#[4]
사망지
경기도 경성부 화천정
(현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종교
대종교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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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민금봉은 삼종질(9촌 조카) 민영덕(閔泳德)의 딸이다.

2. 생애


민강은 1883년 7월 26일 충청도 청주목 남이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에서 무관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아버지 민병호(閔竝浩)[5]와 어머니 숙인(淑人) 전의 이씨 사이의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덕수 이씨 이효민(李孝敏)[6]과 혼인하여 슬하에 장남 민인경(閔寅慶), 차남 민인창(閔仁昌), 장녀 민인숙(閔寅淑) 등 2남 1녀를 두었다.[7] 민병호는 궁궐에 드나들며 평소 친분 있게 지낸 전의(典醫)에게 궁중 비방을 전해 듣고, 1897년 국내 최초 양약인 활명수를 개발한 뒤 아들 민강과 함께 활명수의 대중화를 위해 동화약방[8]을 창업했다. 당시 민중들은 급체,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는데, 활명수를 복용한 이들이 회복되는 사례가 늘자 활명수는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 불리며 만병통치약 대접을 받았다. 이후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학부를 졸업하고# 부친에게 가업을 물려받고서 국운이 기울어지는 걸 안타까워하며 인재를 양성하고자 동화약방 내에 공부방을 운영했다. 그는 교사는 물론 생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월급을 주며 교육에 힘썼다.
1907년에는 평소 뜻을 같이 하던 동지들과 함께 소의학교를 세우고,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인 서울약학교 설립에도 기여했으며, 대종교 선교부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1909년경 안희제, 김홍량, 신백우, 남형우 등 각계 인사 8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민강은 이에 참여하는 한편 홍진, 안상덕, 이규갑 등과 함께 한성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그는 주로 연락과 준비의 임무를 맡고 홍진, 이규갑 등과 함께 국민대회 취지서 및 임시정부의 약법(約法) 등을 작성하여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경영하는 동화약방을 연락 거점으로 삼아 자금을 조달했다.
1919년 4월 21일, 서울 시내 각처에서는 이들이 인쇄한 각종 인쇄물들이 살포되었다. 한성정부는 '13도 대표자대회'와 '국민대회'를 통해 국민적 기반과 절차를 거쳐 임시정부 조직을 선포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축한 연통제에 가담해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를 맡았고, 그 거점을 동화약방 내에 설치했다. 그러나 얼마 후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출옥했다.
민강은 출옥 후 전협, 최익환(崔益煥)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동화약방을 대동단 및 연통본부(聯通本部)의 연락거점으로 제공하는# 한편 대동단이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인 10월 3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자 강매(姜邁)와 함께 서울의 7개 학생단체들의 동원책임을 맡고 이를 추진했다. 이때 민강 등이 통솔한 학생청년단체는 연통단(聯通團)·중앙단(中央團)·중앙청년단(中央靑年團)·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이었다.
그러나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다가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민강은 재차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아# 곧 공소하였으며,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 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100일 본형에 산입)으로 다소 감형되었으나# 재차 상고했지만 1921년 5월 7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을 역임하며 활동했으며, 이후 국내로 귀환하여 동화약방을 '동화약품'으로 개명하고 주식회사로 전환해 경영난을 겪는 기업을 살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1924년 3월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다시 체포되어 몇달간 취조받았고,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1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민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평의사공파 27세 '''호(鎬)''' 용(鏞) 항렬. 족보명은 민기호(閔祈鎬).[2]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884년 9월 1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독립운동판결문에는 7월 2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여흥 민씨 평의사공파-노천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민금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4] 대동단사건 당시 신문조서에는 출생지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중초리(초포)라고 밝혔다.[5] 1858년 ~ 1939년 8월 24일. 족보명 민병호(閔炳浩)·민치덕(閔致悳). 자는 중일(仲一), 호는 노천(老川). 1886년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6] 1933년 동화약품주식회사 제3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1935년까지 근무하였다.[7] 그런데 여흥민씨세보에는 1914년생의 외아들 민영박(閔泳博, 호적명 민인복(閔仁復))만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민인복은 1935년 동화약품주식회사 제4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여 1937년까지 근무했다.[8] 동화약품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