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말살정책

 



1. 개요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에 동화시켜 태평양 전쟁중일전쟁에 협력하도록 강요한 정책이다. 이 정책은 1930년대에서 일제 패망까지 시행되었다. 간이학교가 이 시기에 생겼다.

2. 상세


어감이 어감인지라 마치 한반도에서 시행된 제노사이드 대량학살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서 민족은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미한다.

2.1. 내선일체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선인일본인에 동화시키려 하였다. 때문에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는 등,[1] 적극적으로 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각급 학교의 ‘국어상용패’가 이 때 생겨난 것이다.

2.2. 식민사학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고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하게 만들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에게 역사를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가르쳐서 세뇌 목적으로 만든 사이비 역사 관점이다.

2.3. 일선동조론


일선 동조론을 내세워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은 같다고 주장하였다.[2]

2.4. 창씨개명


일본어로 된 이름으로 강제 개명 해야 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큰 불이익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아이는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2.5. 황국신민


황국 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황국신민서사라는 맹세문을 외우게 하였다.

2.6. 궁성요배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강제했다.

2.7. 신사 참배


신사 참배도 강요하였다.

2.8. 징용과 위안부


일제는 조선 남자를 일본군이나 노무자로 징병 징용하였으며 조선 여인은 위안부로 끌고 갔다.

[1]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언어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본어 강습 강화와 조선어 교육 사이를 오락가락하였다. 1930년대 말에서야 농촌 소학교, 일본어 강습회 및 야학을 통한 본격적인 일본어 교육책을 펼쳤지만, 낮은 교육 인프라와 고작 270시간 짜리의 강습회 시간, 총독부의 의지 부족 등으로 수업 효율은 바닥을 기었다.(참고: Tsuzuki Tsuguo, 〈일제 시대 야학 및 학술강습회에서 실시된 일본어 강습〉) 근본적으로 말해서, 교육 인프라는 낮은데 신민 의식은 심어놓고 싶다는 발상부터가 놀부심보였다(...) 학교가 많아야 민족주의이든 내선일체이든 뭘 배우는 법이다.[2] 사실 따지고 보면 인류차원에서 조상은 같다. 현재 학설을 따르면 한반도에 오기전에는 남조 문화권 장강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야요이인이 한반도 남부에 적어도 수백년간 머무르다가 일본 열도로 건너갔고 소수의 한국어족 사용자도 같이 일본에 건너가면서 당시 원주민이던 조몬인을 압도하면서 혼혈되어 일본인이 탄생했고, 한반도에 남은 야요이인은 한민족에 흡수됐다는 것이 현 학설. 다만 당시 일제가 정말 이런 의미로 조상이 같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말살시켜 보다 쉽게 통치하기 위한 의도로 주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