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휴스턴

 

''' 휘트니 휴스턴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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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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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휘트니 휴스턴
WHITNEY HOUSTON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20년'''
'''후보자격 연도'''
'''2010년'''
'''}}}#ffd700 후보선정 연도}}}'''
'''}}}#ffd700 2020년}}}'''








''' 역대 그래미 시상식'''[59]
[image]
'''올해의 레코드상'''
'''제35회
(1993년)'''

'''제36회
(1994년)'''

'''제37회
(1995년)'''
Tears In Heaven - 에릭 클랩튼

I Will Always Love You - '''휘트니 휴스턴'''

All I Wanna Do - 셰릴 크로우


''' 역대 빌보드 뮤직 어워드'''
[image]
'''톱 아티스트상'''
'''-[60]'''

'''1993년'''

'''1995년'''
-

'''휘트니 휴스턴'''

TLC


''' 역대 빌보드 뮤직 어워드'''
[image]
'''밀레니엄 어워즈[61] '''
'''2011년'''

'''2012년'''

'''2016년'''
비욘세

'''휘트니 휴스턴'''

브리트니 스피어스

''' 역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image]
'''인터네셔널 아티스트상[62]'''
''' 제35회
(2007년) '''

''' 제37회
(2009년) '''

''' - '''
비욘세

'''휘트니 휴스턴'''

-













'''Whitney Houston
휘트니 휴스턴'''
[image]
[image]










'''1987년'''
'''2009년'''
'''본명'''
휘트니 엘리자베스 휴스턴[1]
Whitney Elizabeth Houston
'''국적'''
[image] 미국
'''출생'''
1963년 8월 9일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
'''사망'''
2012년 2월 11일 (향년 48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직업'''
가수, 프로듀서, 배우
'''가족'''
아버지 존 러셀 휴스턴 주니어 (1920년생)
어머니 씨씨 휴스턴 (1933년생)
바비 브라운 (1992 - 2007)
딸 바비 크리스티나 브라운 (1993 - 2015)
'''신체'''
173cm
'''학력'''
Mount Saint Dominic Academy[2] (졸업) (- 1981)
'''종교'''
개신교 (침례회)
'''활동 기간'''
1977년2012년
'''데뷔'''
1985년 싱글 ‘Thinking About You’
'''레이블'''
Arista, RCA
'''서명'''
[image]
'''링크'''

1. 개요
2. 예술성 및 영향력
2.1. 가창력
2.2. 상업성과 영향력
4. 기록
5. 디스코그래피
5.1. 음반
5.2. 싱글
6. 영향력
6.1.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
6.2.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준 사람들
7. 필모그래피
8. 미디어매체
9. 여담
9.1. 머라이어 캐리와의 관계
9.2. 홀로그램 투어


1. 개요


'''The Voice'''[3]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휘트니 휴스턴의 부모는 모두 미국 흑인이고, 외가측 조상 중에는 인디언과 네덜란드계 조상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육군 군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가스펠 가수였다. 엄마를 따라서 교회에 가서 가스펠이란 음악을 배우게 된 것을 시작으로 학창 시절에도 꾸준하게 어머니께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LP시대를 마감하고 팝의 시대로 바뀐 미국 대중음악사에서 다이애나 로스, 아레사 프랭클린의 뒤를 이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디바로 인정받은 흑인 여성 보컬리스트'''이다.

'''202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정 기념 영상'''
'''상기한 것처럼 휘트니 휴스턴을 시작으로 가창력이 뛰어난 여가수를 디바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만큼 팝계의 전설적인 목소리로 통한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가창력으로는 항상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데, 'Queen of Soul'로 불리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뒤를 잇거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며, 국내에서도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함께 90년대 세계 3대 팝 디바로 꼽힌다. '성량의 휘트니 휴스턴, 기교의 머라이어 캐리, 음색의 셀린 디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특히 머라이어 캐리와는 매체들의 기사 소재 발굴 때문에 라이벌로 표현되기도 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휘트니 휴스턴의 데뷔는 1985년으로 캐나다 데뷔를 먼저 한 셀린보다는 늦지만 머라이어보다는 5년 빨랐으며 데뷔 초부터 이미 올킬 모드로 차트를 접수했다는게 차이점이다.
하지만 쇠락기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게 된다. 한 번 침체기를 겪고 다시 재기에 성공한 머라이어 캐리, 꾸준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셀린 디옹과는 달리 실패한 결혼 생활, 마약 중독, 과다한 라이브 공연,[4] 담배로 인한 목소리 변화 등 여러 이유로 완벽한 재기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5] 비록 말년엔 마약 남용[6][7]과 흡연으로 목소리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많은 세계인들은 그녀를 "The Voice"로 추억한다.
1990년대를 살았다면 다른 곡은 몰라도 '''I Will Always Love You'''는 다들 알 것이다. 휘트니의 대표곡 I Will Always Love You는 본인의 주연작 보디가드 OST로 널리 알려졌으며, 워낙 유명한지라 한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패러디된다.
영화로도 나왔다. 휘트니(영화) 참고.

2. 예술성 및 영향력



2.1. 가창력



'''휘트니 휴스턴의 전성기 시절 라이브 영상'''
'''별명이 'The Voice[8]’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여자 보컬의 전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엄청난 성량과 가성을 매우 부드럽게 올라갔다 내려오며 정확한 발음, 그루브, 폭발적인 진성, 기교, 감정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최고의 가수다. 수많은 보컬 학원에서 휘트니의 노래를 예시 삼아 가르칠 정도로 교과서 그 자체다. 올타임 레전드에 항상 거론되는 전설급 가수.
흑인 보컬로서 흑인 음악의 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가스펠리듬 앤 블루스 양자를 당대에 맞게 세련되게 풀어내는 해석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이브 영상을 보면 같은 곡을 단 한 번도 동일하게 부르지 않는다. 본래 가스펠 음악 집안 출신으로 데뷔 초기엔 백인 취향 컨템퍼러리 팝에 흑인의 목소리만 얹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L.A Reid와 Babyface 등을 위시한 여러 흑인 아티스트들의 집중 지원을 받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3집에 이르러선 흑인 사회에서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집대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흑인 보컬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그 가창력의 핵심이라면 역시 특유의 음색과 그를 뒷받침하는 공명감이다. 휘트니의 음색을 들어보면 막힘없이 쭉 뻗으면서도 깊은 배음이 울려서 아주 두텁고 단단한 공명감이 곡 전체에 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아무리 노래를 잘 하는 보컬이 휘트니의 노래를 불러도 휘트니의 공명감보다 약하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 쉽게 말하면 휘트니의 파워or목소리의 굵직한 느낌이 너무 강해 특유의 파워풀함이 덜한 것이다.
본래 데뷔했을 때엔 기존 흑인 알토들이 공유하던 비성으로 집중된 두성의 공명감을 사용했고, 이때에도 이미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 후로는 점점 더 공명감을 늘려갔고 벨팅, 특히 인 골라 테크닉까지 결합하기 시작했다. 즉 야구의 투수가 팔 근육을 뒤틀어 인간이 일반적으로 낼 수 없는 시속 140km의 공을 던지듯, 음을 만드는 조음부의 근육을 한계 이상으로 확장시켜 거대하게 울리는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함은 그 이후에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조음부 근육을 확장시켜 깊은 소리를 만들어내면 당연히 벨팅에서 그렇듯이 발음이 무너지고 섬세한 리듬감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휘트니는 그 한계까지 울리는 공명감을 가진 소리로 완벽한 발음과 그루브를 만들어 냈다. 두성은 아름다운 음색과 뛰어난 공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파워가 딸리며, 믹스보이스는 성구 변환이 자유롭고 그루브를 타는 데 좋지만 얇고 약한 소리다. 벨팅은 파워 하나만은 최강이지만 발음이 무너지고 성대 근육이 긴장해서 리듬을 타기 어렵다. 휘트니 휴스턴은 그 모두를 섞어버렸고 그 모든 소리를 완벽히 컨트롤 해내었다. 그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야 했지만.
멜리스마(melisma) 기교를 본격적으로 팝에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멜리스마는 한 음절을 다양한 음으로 쪼개 부르는 기교를 말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I Will Always Love You'의 첫 소절이 대표적인 예. 'If '''I''''에서 I라는, 한 음절에 불과한 가사를 8개의 음으로 쪼개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휘트니 휴스턴이 멜리스마를 최초로 사용한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며 스티비 원더를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제한적으로 사용한 것을 휘트니가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 이후 멜리스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기교의 머라이어 캐리가 등장하며 멜리스마는 기본적인 가창 기교로 자리 잡게 된다. 2010년대에 들어서야 개나소나 다 하는 멜리스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디바'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메조 소프라노였다. 앨범 음원으로는 E5(3옥미)나 F5(3옥파)와 같은 강렬한 고음도 있지만 '찍고' 내려오는 수준으로 길게 유지하지는 않으며 전성기 시절에도 실제 공연에서 D5(3옥레) 이상의 음은 잘 내지 않았다. 전형적인 소프라노가 아니라는 점은 소위 3대 디바가 모두 마찬가지인데 머라이어 캐리는 아예 성종 분류가 의미가 없는 사람이고 셀린 디옹은 메조다, 소프라노다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이들 모두 꾀꼬리 같은 소프라노 목소리로 곱게 올라가는 것이 아닌, 메조 소프라노면서도 소프라노 음역대를 커버할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로 고음에 강렬한 힘을 더해 전설적인 목소리를 들려준 보컬이었던 것이다.[9]
다만 휘트니는 메조 소프라노였기 때문에 말년에 목소리를 거의 잃었던 것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즉 전성기 시절엔 어린 나이에서 오는 피지컬과 신에게 받은 재능으로 음역대를 벗어난 고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지만, 마약과 흡연 등으로 피지컬이 떨어진 말년에는 메조 소프라노인 자신의 원래 음역대 이상의 고음을 구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전성기 당시 휘트니의 하늘을 찌를 듯한 파워와 고음을 기억하지만, 경력 후반기의 앨범과 싱글에서는 원래 음역대인 메조 소프라노 톤으로 돌아온 휘트니의 깊은 음색과 편안한 그루브를 들을 수 있다. "I Look To You" 앨범 시절에는 그 그루브마저 거의 잃긴 했지만...

2.2. 상업성과 영향력


휘트니 휴스턴은 1994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한 번에 8개의 상을 수상했다.
또한 '''여가수의 상업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가수로 평가받는다.''' 여가수 중 가장 많은 기간동안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고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아티스트. 즉 압도적인 가창력을 지닌 가수가 얼마나 상업적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휘트니의 데뷔 전에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았다. 하지만 휘트니 휴스턴처럼 싱글 앨범 비평까지 모두 성공한 여가수는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미디어에서는 뛰어난 여가수에게 붙여주던 '''디바'''라는 칭호를 휘트니에게 붙여주기 시작하였다.
소위 '3대 디바'인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 셀린 디옹의 팬들은 디바 칭호를 두고 끊임없이 치고받아 왔지만 '''휘트니 휴스턴의 위대한 점은 최초라는데 있다.''' 현대에 와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우아한 롱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웅장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고급스러운 발라드를 부르는 뛰어난 가창력의 흑인 여가수'를 평론가와 대중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 휘트니 휴스턴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두 사람에 의해서 흑인 뮤지션의 위상이 달라지게 되는데, 남자는 마이클 잭슨 여자는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성, 가창력, 댄스, 세트와 무대, 뮤직 비디오까지 완벽하게 결합된 '엔터테인먼트' 자체를 상징한다면[10] 휘트니 휴스턴은 압도적인 가창력을 상징한다.''' 휘트니 휴스턴은 백인 취향으로 여겨졌던 (소위 MOR이라고 하는) 고급스러운 발라드 음악을, 그 어떤 백인 여가수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가창력으로 불러냈다. 아무리 곡을 모방하거나 스타일을 모방한다고 해도 휘트니 휴스턴의 '''가창력'''만큼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휘트니 휴스턴 자신이 I Will Always Love You를 리메이크하면서 그 누구도 자신을 모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휘트니 휴스턴 - The Star Spangled Banner'''
'''휘트니의 예술성과 영향력을 볼 수 있는 가장 단적인 예인 미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 제창. 이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레전설 중의 레전설로 유명하다.''' 휘트니 휴스턴이 이 노래를 부른 뒤부터 국가를 부를 수 있는 모든 여가수들은 무조건 휘트니의 버전을 참고한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로는 빌보드 Hot 100 6위로 치고 올라가기도 했다.
91년 2월 열린 제25회 슈퍼볼에서 제창한 이 국가는 휘트니 이후 대형 이벤트에서 불리는 국가 스타일 그 자체를 바꿔 놓았다. 이 버전을 위해 박자는 기존의 3/4 박자에서 4/4 박자로 편곡해 한음 한음 곱씹어 부를 수 있게 바뀌었고, 대대적인 가스펠 풍 편곡이 가미됐으며 하이라이트 부분인 "free" 부분에서 가성 애드립을 처음으로 선보인 곡이다. 이 노래가 나온 뒤부터 대형 행사에 등장한 미국 국가에서 이 애드립이 빠진 적이 거의 없다. 곡이 대중에게 인식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다.[11]
립싱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 공식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변인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립싱크였음을 인정한 바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라이브 느낌을 낸 '사전 녹음'. 사실 음향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기장에서, 그것도 국가 제창과 같은 중대한 행사의 경우 립싱크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큰 흠이라고 할 것은 못 된다. 다만 92년 당시는 밀리 바닐리의 립싱크 파동 (91) 직후였기 때문에 립싱크에 대한 미국 여론이 살기등등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밀리 바닐리야 다른 보컬이 녹음한 앨범으로 립싱크만 한 것이라 문제가 되었지만 휘트니의 경우는 사전 녹음이라도 본인이 직접 녹음한 것이고 이후 공연을 통해 실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란 것을 증명해 보였다.
역대 슈퍼볼 국가를 제창하면서 츄리닝에 머리띠만을 두르고 나온 유일한 사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link
본인이 차별 철폐 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엄청난 성공은 흑인 사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원래 미국 국가는 가사에 서린 인종 차별과 노예 제도의 이미지 때문에 흑인에게 꺼려지는 노래였다. 그런데 가장 보배와도 같은 흑인 디바가 미국을 대표해 이 곡을 부름으로써 흑인이 국가를 부르는게 자랑스러워지는 효과를 낸 것이다. 보수적인 80년대 사회상에도 불구하고 MTV에선 휘트니의 뮤직비디오가 주구장장 나와댔고, 이런 성공은 미국 뿐만이 아닌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휘트니가 모든 가수들을 통틀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흑인들에 대한 업계 대우는 달라졌다.
다만 본인이 적극적으로 인권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는 의견과 달리, 휘트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가수 데뷔 전 모델 활동 시기에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치던 남아공과 거래하는 에이전시와는 계약을 하지 않았다. 988년 6월 11일, Moment of Truth World Tour 유럽 일정 중에는 다른 음악인들과 함께 당시 투옥 중이었던 넬슨 만델라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선 콘서트에 참여했다. 72,000명 이상의 관중들이 입장한 이 콘서트는 전 세계에서 10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청했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며 10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된 거대한 행사였다. 그 해 8월에는 뉴옥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흑인연합장학재단(United Negro College Fund)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 2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94년 10월, 휴스턴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된 남아공에서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의 미국 방문을 기념하는 만찬에 참석하여 "Love's in Need of Love Today", "People", "Greatest Love of All" 과 같은 곡들을 불렀다. 또한 1994년 11월,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선출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의 세 개 도시에서 Whitney - The Concert for a New South Africa로 이름 붙여진 세 번의 콘서트를 개최하며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휴스턴은 만델라의 선출 이후 새롭게 통합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한 첫 번째 주요 뮤지션이었고, 이 공연은 만델라 취임식 이후 가장 크게 펼쳐진 미디어 행사로 간주되었다. 세 번의 공연 가운데 11월 12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치뤄진 콘서트는 HBO를 통해 생중계되었고, 공연 수익은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자선 활동을 위해 기부되었다.

3. 생애




4. 기록


  • 빌보드 올타임 여성 아티스트 5위

  • 빌보드 선정 올타임 위대한 R&B 가수 9위
  • VH1 선정 아티스트 60위
  • AMA 인터내셔널 아티스트상 수상[12]
  • BBMA 밀레니엄 어워즈 수상[13]
  • BET 어워드 평생공로상 (Lifetime Achievement) 수상

  • 역대 총 음반 판매량 약 2억장 이상[14]
  • 역대 여가수 총 음반 판매량 4위[15][16]
  • 역대 솔로가수 총 음반 판매량 7위[17][18]
  • 역대 가수 총 음반 판매량 10위[19][20]
  • 빌보드 200 통산 46주 1위[21]

  • 역대 여가수 빌보드 200 1위 달성 기간 2위[22]
  • 빌보드 200에 10주 이상 1위를 기록한 앨범 3개 보유[23]
  • 역대 여가수 최초/유일하게 빌보드 200 10주 이상 1위 기록 앨범 3개 보유
  • 2000만 장 이상 판매된 앨범 3개 보유[24]
  • 빌보드 200 연말차트 2회 1위[25]
  • 역대 여가수 최초 빌보드 200 연말차트 2회 1위[26]
  • 빌보드 200에 여가수 최초로 1위로 차트 진입 (핫샷 데뷔)〈Whitney[27]
  • 빌보드 HOT 100 1위 4곡을 배출한 앨범[28]Whitney
  • 역대 앨범 중 빌보드 HOT 100 1위곡을 3번째로 많이 보유한 앨범〈Whitney[29]
  • The Bodyguard OST〉판매량 약 4500만장 이상[30]
  •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가스펠 음반 〈The Preacher's Wife OST[31]

  • 역대 여가수 빌보드 HOT 100 1위 곡 보유 수 4위[A][32]
  • 역대 솔로가수 빌보드 HOT 100 1위 곡 보유 수 5위[A][33]
  • 역대 가수 빌보드 HOT 100 1위 곡 보유 수 7위[A][34]
  • 역대 여가수 빌보드 HOT 100 1위 기간 합계 4위[B][35]
  • 역대 솔로가수 빌보드 HOT 100 1위 기간 합계 8위[B][36]
  • 역대 가수 빌보드 HOT 100 1위 기간 합계 10위[B][37]
  • 연속 7개 싱글이 빌보드 HOT 100 1위 달성한 아티스트[38][39]
  • 역대 빌보드 HOT 100 장기간 1위곡 순위 4위 - 'I Will Always Love You'[40][41]

  • 역대 UK Official 싱글차트 장기간 1위곡 순위 9위[42]
  • 역대 여가수 단일 싱글 판매량 1위 - 'I Will Always Love You'[43]
  • 빌보드 사상 3번째로 1위로 차트에 데뷔한 곡 - 'Exhale (Shoop Shoop)[44]

  • 통산 411개 수상[45]
  • 역대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여가수[46][기네스북등재]
  • AMA 시상식 한 회에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여가수 (8개)
  • BBMA 시상식 한 회에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여가수 (11개)

5. 디스코그래피



5.1. 음반





5.2. 싱글




5.2.1. 빌보드 핫 100 성적


'''Whitney Houston HOT 100 HITS'''
'''순위 (유지 기간)'''
'''차트인 기간'''
'''발매 시기'''
'''곡명'''
'''연말 차트'''
'''1위 (1주)'''
'''22주'''
1985
'''Saving All My Love for You'''
1985 - 23위
'''1위 (2주)'''
'''24주'''
1985
'''How Will I Know'''
'''1986 - 6위'''
'''1위 (3주)'''
20주
1986
'''Greatest Love of All'''
1986 - 11위
'''1위 (2주)'''
20주
1987
'''I Wanna Dance with Somebody'''
'''1987 - 4위'''
'''1위 (2주)'''
17주
1987
'''Didn't We Almost Have It All'''
1987 - 22위
'''1위 (1주)'''
19주
1987
'''So Emotional'''
'''1988 - 6위'''
'''1위 (2주)'''
18주
1988
'''Where Do Broken Hearts Go'''
1988 - 33위
'''1위 (1주)'''
19주
1990
'''I'm Your Baby Tonight'''
1991 - 42위
'''1위 (2주)'''
'''23주'''
1991
'''All The Man That I Need'''
1991 - 16위
'''1위 (14주)'''[47]
'''29주'''
1992
'''I Will Always Love You'''
'''1993 - 1위'''
'''1위 (1주)'''
'''21주'''
1995
'''Exhale (Shoop Shoop)'''
1996 - 14위
'''2위'''
'''28주'''
1998
'''Heartbreak Hotel'''
'''1999 - 4위'''
'''3위'''
'''21주'''
1985
'''You Give Good Love'''
1985 - 47위
'''4위'''
'''23주'''
1993
'''I'm Every Woman'''
1993 - 39위
20주
1993
'''I Have Nothing'''
1993 - 30위
20주
1996
'''I Believe in You and Me'''
1997 - 33위
20주
1999
'''It's Not Right But It's Okay'''
1999 - 44위
'''28주'''
1999
'''My Love Is Your Love'''
1999 - 73위
2000 - 47위
'''5위'''
17주
1988
'''One Moment In Time'''[48]
1988 - 89위
'''6위'''
'''27주'''
1991
'''The Star-Spangled Banner'''[49]
-
'''8위'''
20주
1996
'''Count On Me'''
1996 - 48위
'''9위'''
16주
1988
'''Love Will Save The Day'''[50]
-
'''9위'''
14주
1991
'''Miracle'''
15위
17주
1997
Step By Step
17주
1998
When You Believe
1999 - 99위
20위
10주
1991
My Name Is Not Susan
-
26위
20주
1996
Why Does It Hurt So Bad
27위
11주
1999
I Learned From The Best
31위
20주
1993
Run To You
41위
8주
1989
It Isn't, It Wasn't, It Ain't Never Gonna Be
46위
18주
1984
Hold Me
52위
19주
2000
Could I Have This Kiss Forever
63위
9주
2019
Higher Love
70위
9주
2000
Same Script, Different Cast
6주
2009
I Look To You
72위
19주
2002
One Of Those Days
77위
4주
1997
My Heart Is Calling
84위
12주
2003
Try It On My Own
96위
3주
2002
Whatchulookinat
100위
1주
2009
Million Dollar Bill

5.2.2. UK Official 차트 성적


'''Whitney Houston TOP 100 HITS'''
'''순위 (유지 기간)'''
'''차트인 기간'''
'''발매 시기'''
'''곡명'''
'''연말 차트'''
'''1위 (2주)'''
'''19주'''
1985
'''Saving All My Love for You'''
1985 - 17위
'''1위 (2주)'''
'''18주'''
1987
'''I Wanna Dance with Somebody'''
'''1987 - 3위'''
'''1위 (2주)'''
'''16주'''
1988
'''One Moment In Time'''
1988 - 14위
'''1위 (10주)'''
'''32주'''
1992
'''I Will Always Love You'''
'''1992 - 1위'''
'''1993 - 9위'''
'''2위'''
13주
1999
'''My Love Is Your Love'''
1999 - 19위
'''49주'''
2019
'''Higher Love'''
2019 - 26위
'''3위'''
12주
1993
'''I Have Nothing'''
-
'''18주'''
1999
'''It's Not Right But It's Okay'''
1999 - 25위
'''4위'''
11주
1993
'''I'm Every Woman'''
-
'''16주'''
1998
'''When You Believe'''
1998 - 110위
'''5위'''
13주
1985
'''How Will I Know'''
-
11주
1987
'''So Emotional'''
1990
'''I'm Your Baby Tonight'''
'''16주'''
2009
'''Million Dollar Bill'''
'''7위'''
8주
2000
'''Could I Have This Kiss Forever'''
'''8위'''
13주
1986
'''Greatest Love of All'''
'''9위'''
11주
2000
'''If I Told You That'''
'''10위'''
7주
1988
'''Love Will Save The Day'''
11위
11주
1995
Exhale (Shoop Shoop)
12위
9주
1996
Count On Me
13위
10주
1990
All The Man That I Need
13주
1997
Step By Step
3주
2002
Whatchulookinat
14위
9주
1987
Didn't We Almost Have It All
1988
Where Do Broken Hearts Go
5주
1993
Queen Of The Night
15위
7주
1993
Run To You
16위
3주
1993
Something In Common
8주
1996
I Believe in You and Me
19위
'''14주'''
1999
I Learned From The Best
25위
9주
1998
Heartbreak Hotel
29위
5주
1989
It Isn't, It Wasn't, It Ain't Never Gonna Be
1991
My Name Is Not Susan
44위
7주
1984
Hold Me
3주
2009
I Didn't Know My Own Strength
54위
2주
1991
I Belong To You
93위
1주
1985
You Give Good Love

6. 영향력



6.1.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받은 사람들


  • 로버타 플랙
  • 마이클 잭슨
  • 아레사 프랭클린
  • 시시 휴스턴[51]
  • 샤카 칸
  • 글래디스 나이트
  • Darlene Love
  • 디디 워윅
  • 디온 워윅

6.2. 휘트니 휴스턴이 영향을 준 사람들


출처: # #

7. 필모그래피



  • The Bodyguard (1992)
  • Waiting to Exhale (1995)
  • The Preacher's Wife (1996)
  • Cinderella (1997)
  • Sparkle (2012)[52]

8. 미디어매체


소니가 전기 영화로 제작 예정이다. 영화 제목은 '''아이 워너 댄스 윗 섬바디(I Wanna Dance with Somebody)'''[53]#

9. 여담



9.1. 머라이어 캐리와의 관계


전작에 비해 3집이 다소 부진한 성적을 기록 중이던 1990년[54] 소니 레코드의 토미 모톨라는 휴스턴의 아성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기 위해 브랜다 K. 스타의 백업 싱어로 일하고 있던 머라이어 캐리를 발굴해서 데뷔시키게 된다. 이후 90년대 초중반은 두 디바가 영향력을 양분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이 경쟁을 긍정적으로 비추기보다는 팬덤을 부추기면서 자극적인 기사를 써냈고 수많은 루머들을 생산했다. 1998년, 두 디바는 합심하여 이집트의 왕자 OST 'When You Believe'를 발매한다. 녹음할 때 누구 이름을 먼저 넣는지로 싸웠다거나,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서로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고 따로 녹음을 했다는 둥 여전히 루머는 많았지만 둘은 같은 녹음실에서 한 게 맞다며 루머를 공식적으로 부정했고 자신들이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이 루머는 녹음할 때 테이크를 따로 가져간 것이 와전된 듯한데, 원래 듀엣곡은 '듀엣이면 사이좋게 녹음실에 들어가서 같이 해야지'라는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두 보컬이 따로 녹음을 해서 한 트랙으로 합치는 것이다. 그래야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뽑아낼 수 있기 때문.[55] 즉 두 사람이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따로 하는 게 맞다.'''
결과적으로 'When You Believe'는 빌보드 15위라는 이름값에 비해 아쉬운 결과를 내고 만다.[56] 몇 개월 뒤 두 명은 셀린 디옹이 'My Heart Will Go On'을 터뜨리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휘트니 휴스턴은 2002년 Just Whitney 앨범을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다 재기의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결국 사망했고, 머라이어 캐리는 2001년 Glitter 프로젝트의 참패 이후 몇 년 간 암흑기를 겪다 The Emancipation of Mimi로 재기에 성공하여 한동안 메인스트림에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When You Believe'는 시간이 흐를수록 '전설적인 ''' 디바'''가 함께한 명곡' 등으로 화제되면서 스포티파이나 유튜브 같은 신세대 플랫폼과 매체 등에서 꾸준히 소비가 되고 있다. 현재는 두 가수 모두에게 의미있는 곡이 되었다.[57]

9.2. 홀로그램 투어


2020년 2월 25일 부터 휘트니와 저녁(An Evening with Whitney) 이라는 이름으로 홀로그램 투어를 진행한다. 일부 장면을 빼면 휘트니와 생김새가 전혀 달라서 비난을 받는 중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투어를 돈 뒤 라스베가스 레지던시 투어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인해 대부분 취소되었다.
투팍이나 로이 오비슨같은 아티스트들이 사후(posthumous) 홀로그램 투어를 진행한 바 있고 마이클 잭슨도 이런 홀로그램 무대가 있다. 이 중 로이 오비슨의 투어를 진행한 베이스 홀로그램(Base Hologram)이라는 회사에서 기이할 정도로 휘트니 휴스턴의 홀로그램 투어에 공을 들여, 마침내 투어를 진행하였다. 베이스 홀로그램은 이미 2016년 더 보이스 결승전 녹화에서 보컬 코치로 출연했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휘트니 휴스턴의 듀엣 무대를 선보였으나, '기술적 결함'을 이유로 실제 방송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이때 관객들이 찍은 핸드폰 영상이 인터넷에 유출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베이스 홀로그램의 휘트니 휴스턴 홀로그램 투어에 대한 집착(?)을 두고 팬들은 대부분 소름끼친다(creepy)는 반응. 다만 사후 홀로그램 투어가 진행된다면 휘트니 휴스턴이 적절하다는 평가이기는 하다. 팬들이 본인 사후 홀로그램으로라도 공연을 보러 갈 정도로 슈퍼스타이고, 다양한 음원이 기록되어 있고, 가창력을 보여주는 발라드 중심이면서도 댄스 히트곡도 제법 가지고 있어 댄서들과 무대를 꾸미기 쉬운 데다가, 직계 유족이 없어 유족과의 저작권 협의마저도 어렵지 않은 등이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의 무대가 그의 현란한 댄스를 구현하는 데 실패하여 욕을 먹었던 데 비해 휘트니 휴스턴의 사후 홀로그램 투어는 나름 반응이 좋았다.

1985년 발매된 whitney houston 앨범의 Greatest Love of All이다.

1992년 발매된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앨범의 I Will Always Love You이다.
[1] 미국에서는 "윗니 휴스튼"에 가깝게 읽는다. "브리트니"를 "브릿니"로 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2] 뉴저지에 위치한 카톨릭계 고등학교.[3] #[4] 첫 투어인 US Summer Tour(1985)부터 시작해서 25년동안 11번의 투어에서 601번의 공연을 펼쳤다.[5] 물론 보디가드 사운드 트랙으로 90년대 초중반을 압도했으니 데뷔 후 10년 가량 정상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6] 마약은 전성기인 보디가드 시절 이전부터 시작했다. 아래에 후술된 다큐멘터리 휘트니에서 나온 바로는 친오빠들과 그 무리들에 영향을 받아 16살(...)때부터 마약을 접해온 것으로 드러난다. 증거 링크[7] 심지어 친오빠들이 해당 영화에서 대놓고 밝힌 바로는 바비 브라운은 마약을 그렇게 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본인들과 바비가 어울리다보니 복용량이 늘게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바비의 타고난 마약 복용량이 대단치 못해서 휘트니 휴스턴과 그 형제들이 마약을 하는 타이밍에는 따로 빠져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술로 치면 주량이 대단치 못한 셈. '''즉, 휘트니가 바비보다 마약을 더 했음 더 했고, 마약을 오히려 소개해준 입장'''에 가깝지, '바비 브라운이 아무것도 모르던 휘트니에게 마약을 건네줬다'는 둥의 얘기는 루머라고 볼 수 있다.[8] 여기서 'the'는 보통명사를 강조하여 고유명사화하는 정관사이고 강형(强形)인 /ði/로 읽는다. '(누구나 아는) 바로 그 목소리', '유일한 목소리', '궁극의 목소리' 등으로 해석된다.[9]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인데, 바리톤 중 고음을 커버할 수 있는 하이 바리톤들은 압도적인 파워로 호평받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프레디 머큐리.[10] 실제로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11] 2018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Whitney"(한국에선 8월 23일에 개봉)에서 해당 곡을 편곡한 작곡가의 인터뷰가 실렸다. 마빈 게이가 1983년 NBA 올스타전에서 불렀을 당시 특유의 느낌을 살린 것에 감명받았고 흑인 음악의 느낌을 살려 휘트니가 곡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마빈 게이 버전 들어보기. 그런데 당시 반주를 맡은 밴드의 반응이 매우 안 좋았고, 설상가상으로 휘트니는 노래를 부르기 직전까지 편곡된 버전을 들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들어보고 나서 바로 부른 버전이 최종본이었다고. 과장이 섞였을 순 있겠지만 연습을 많이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감각적으로 음악을 살린 것은 맞는 듯.[12] 휘트니 휴스턴 포함 마이클 잭슨, 레드 제플린, 비지스, 비욘세 등 총 7명의 아티스트만이 수상함[13] 휘트니 휴스턴, 비욘세, 브리트니 스피어스 총 3명의 아티스트만이 수상함[14] #[15] #[16] 마돈나가 음반을 총 약 3억장 이상을 판매하며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머라이어 캐리가 2위, 셀린 디온이 3위이다.[17] #[18] 엘비스 프레슬리가 음반을 총 약 5억장 이상을 판매하며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마이클 잭슨이 2위, 마돈나가 3위, 엘튼 존이 4위, 머라이어 캐리가 5위, 셀린 디온이 6위이다.[19] #[20] 비틀즈가 음반을 총 약 6억장 이상을 판매하며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엘비스 프레슬리가 2위, 마이클 잭슨이 3위, 마돈나가 4위, 엘튼 존이 5위, 레드 제플린이 6위, 핑크 플로이드가 7위, 머라이어 캐리가 8위, 셀린 디온이 9위이다.[21]Whitney Houston〉(14주), 〈Whitney〉(11주),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20주), 〈I Look To You〉(1주)[22] 테일러 스위프트가 통산 47주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이다. 이 기록은 2009년 이후 11년 동안 깨지지 않았으나, 테일러 스위프트evermore가 3주 1위를 기록하며 깨졌다.[23]Whitney Houston〉(14주), 〈Whitney〉(11주),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20주)[24]Whitney Houston〉(약 2500만장), 〈Whitney〉(약 2000만장),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약 4100만장)[25]Whitney Houston〉(1986년 1위), 〈The Bodyguard OST〉(1993년 1위)[26] 이후 테일러 스위프트가 앨범 Fearless, 1989빌보드 200 연말차트 2회 1위를 2번째로 달성했다. 뒤를 이어 아델2125로 세 번째로 기록을 달성했다.[27] #[28] I Wanna Dance With Somebody (Who Loves Me) // Didn't We Almost Have It All // So Emotional // Where Do Broken Hearts Go가 1위를 달성했다.[29] 마이클 잭슨의 〈Bad〉와 케이티 페리의 〈Teenage Dream〉앨범이 5개의 1위 곡을 보유하면서 이 분야 공동 1위이다.[30] #[31] #[A] A B C 빌보드 HOT 100 문서 4.11 문단 참조.[32] 머라이어 캐리가 19곡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리아나가 2위, 마돈나가 3위이다.[33] 머라이어 캐리가 19곡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리아나가 2위, 마이클 잭슨이 3위, 마돈나가 4위이다.[34] 비틀즈가 20곡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머라이어 캐리가 2위, 리아나이 3위, 마이클 잭슨가 4위, 슈프림스&마돈나가 5위이다.[B] A B C 빌보드 HOT 100 문서 4.12 문단 참조.[35] 머라이어 캐리가 통산 84주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리아나가 2위, 비욘세가 3위이다.[36] 머라이어 캐리가 통산 84주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리아나가 2위, 드레이크가 3위, 어셔가 4위, 비욘세가 5위, 마이클 잭슨이 6위, 엘튼 존이 7위이다.[37] 머라이어 캐리가 통산 84주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에 올랐다. 뒤를 이어 리아나가 2위, 비틀즈가 3위, 보이즈 투 멘&드레이크가 공동 4위, 어셔가 6위, 비욘세가 7위, 마이클 잭슨이 8위, 엘튼 존이 9위이다.[38] Saving All My Love for You부터 Where Do Broken Hearts Go까지 7개 싱글이 연속해서 1위에 올랐다.[39] 1988년에 이 기록이 세워진 이후 33년이 지난 2021년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40] 빌보드 HOT 100 4.1문단 참조.[41] 릴 나스 엑스Old Town Road가 19주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이다. 뒤를 이어 머라이어 캐리 & 보이즈 투 멘One Sweet Day, 루이스 폰시 & 대디 양키Despacito가 16주 1위를 달성하며 공동 2위이다.[42] 프랭키 레인의 'I Believe'가 18주 1위를 달성하면서 이 분야 1위이다. 나머지 순위는 영국차트 참조.[43] #[44] 마이클 잭슨의 'You Are Not Alone'이 빌보드 사상 최초로 1위로 차트에 데뷔했다. 뒤이어 머라이어 캐리Fantasy가 2번째로 1위로 차트에 데뷔했다.[45] #[46] #[기네스북등재] [47] 14주 1위 기록은 빌보드 HOT100차트 역사상 '''4번째로 오래 1위를 유지'''한 것이다.[48] 서울올림픽 공식 앨범의 수록곡. 코리아나의 Hand in Hand는 서울 올림픽 공식 노래(song), One Moment in Time은 서울올림픽 공식 앨범 <One Moment In Time>의 수록곡이다.[49] 미국 국가[50] 이 곡으로 연속 7곡 1위 기록이 깨졌다.[51] 친어머니다.[52] 휘트니 휴스턴이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뒤인 8월에 개봉했다.[53] 그의 2집 앨범 '''Whitney''' 앨범의 대표곡이다.[54] 그래도 싱글 차트 1위 곡 2개를 배출했다.[55] 피아노 따로, 드럼 따로, 베이스 따로, 현악기 따로, 보컬 따로, 코러스 따로. 이렇게 트랙을 하나하나 녹음하고 멀티 트랙으로 합치는 것이 바로 믹싱이다.[56] 곡의 부진은 단순히 두 가수의 하락세라기 보다는 영화사, 휘트니, 머라이어 셋의 프로모션 의견차가 컸고 당시 휘트니와 머라이어는 각자 앨범 컴백 일정을 소화하느라 효율적으로 곡을 홍보하고 이용하지 못했던 것이 크다.[57] 머라이어는 최근 투어에서 존경하는 가수이자 친한 동료였던 휘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When You Believe를 부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