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

 

''' 엘비스 프레슬리의 주요 수상과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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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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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이름'''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6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86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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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ness World Records'''
[image]
''' ''Best-selling solo artist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솔로 음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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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
'''수치'''
'''출처'''
엘비스 프레슬리
약 10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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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어클레임드 뮤직 산정 1950년대 아티스트'''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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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7080 Hollywood Blvd.'''
---

}}} ||
'''Elvis Presley
엘비스 프레슬리'''
'''본명'''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35년 1월 8일
미국 미시시피 주 투펄로
'''사망'''
1977년 8월 16일 (향년 42세)[1]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
'''직업'''
가수, 배우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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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미국 테네시멤피스 그레이스랜드
'''장례일'''
1977년 8월 18일
'''학력'''
흄즈 프레파토리 아카데미 미들 스쿨(졸업)
'''종교'''
개신교
'''신체'''
182.2cm
'''활동 기간'''
1953년1977년
'''데뷔'''
1954년 7월 19일 싱글
<That's All Right>
'''장르'''
로큰롤, , 컨트리,
로커빌리, 가스펠, R&B
'''악기'''
보컬, 기타, 피아노
'''민족'''
프랑스계 미국인, 독일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별명'''
'''King of Rock and Roll (The King)'''
'''상징'''
[image]
'''링크'''
공식 사이트 공식 엘비스 샵
그레이스랜드 공식 유튜브
'''가족'''
<colbgcolor=#000034><colcolor=#fff> '''부모'''
'''부''' 버넌 프레슬리(1916–1979)
'''모''' 글래디스 프레슬리(1912–1958)
'''배우자'''
프리실라 프레슬리(1945-)[32]
'''자녀'''
리사 마리 프레슬리(1968-)
'''손자[33]'''
라일리 키오(Riley Keough)(1989-)[34]
벤자민 키오(Benjamin Keough)(1992-2020)[35]
'''언어별 명칭'''
'''한국어'''
엘비스 프레슬리
'''일본어'''
エルヴィス・プレスリー
'''중국어'''
埃爾維斯·皮禮士利
'''그리스어'''
Έλβις Πρίσλεϊ
'''러시아어'''
Элвис Пресли
'''아랍어'''
إلفيس بريسلي
'''페르시아어'''
الویس پریسلی
'''히브리어'''
אלביס פרסלי
'''힌디어'''
एल्विस प्रेस्ली

1. 개요
2. 생애
3. 성격
4. 평가
5. 기타
6. 가족
7. 생존설
7.1. 엘비스 생존설을 채용한 작품
8. 패러디
9. 디스코그래피
9.1. 앨범
9.2. 싱글
9.2.1. 빌보드 핫 100 이전 싱글 차트 1위
9.2.3. 빌보드 핫 100 2위
9.2.4.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
9.2.5.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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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의 전성기 시절 레전드 라이브[2]'''
'''King of Rock 'N' Roll[3]'''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로, 그의 음악은 미국영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로큰롤의 제왕'''이라는 평을 갖고 있다. 그는 비주류 장르였던 로큰롤대중음악계 주류로 끌어올린 최초의 록 아이콘으로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을 주 장르로 불렀으며, 로큰롤 이외에도 가스펠, 록 음악, 펑크, 발라드, 등의 장르에서 모두 최정상급에 올랐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이자 1950년대 시대정신의 상징으로,[4] 20세기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대중음악 역사상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끈 시대적 아이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최초이자 최고의 록 스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이다. 그리고 20세기 대중문화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로도 평가된다. 이는 몇몇 음악책에는 그가 성공 후 이야기한 어머니한테 선물로 드릴 레코드를 한장 발매하려고 레코드 회사를 찾았다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트럭 기사를 정설로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엘비스는 1950년대 초반부터 기타를 배우면서 가수의 꿈을 키우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음악적 교류를 하던 사람들이 브루넷츠 형제[5]였고, 사실 엘비스는 여러가지 밴드나 가수 경연대회에 수차례 응모했다 떨어진 전적이 있으며, 새 멤버를 구하는 기성 밴드들의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일도 비일비재했다. 즉, 밑바닥부터 기어올라간 자수성가형은 사실이나 트럭 운전수 일을 하며 꾸준히 오디션에 참가했으며 어머니를 위해 제작한 판은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해 하다못해 자작판이라도 만들어 선물하자는 결심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징병통지서'''
병역의무를 서독 주둔 미합중국 육군에서 했는데,[6] 이 때 독일 민요 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ädtele hinaus(노래는 즐겁다)를 'Wooden Heart(목석같은 마음)' 라는 곡으로 개사해 부른 게 유명하다. 이 곡은 엘비스가 출연한 영화 G.I.블루스에 삽입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 Jailhouse Rock'''[7]
공식적인 데뷔 후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춤과, 흑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로큰롤을 선보여 미국을 뒤흔들었고, 보수적인 세대들에게 혐오를 받았으나[8] 젊은 층에게 그 인기는 대단했다.
70년대에도 엘비스의 인기는 여전했으며,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 되기도 하였다.#
잘생긴 얼굴로 영화에도 많이 나왔다.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외해도 영화만 30여편이나 된다.[9]히트곡을 영화화했거나 영화에 나온 노래가 히트하는 식인 것이 많아 배우로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그래도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그가 나온다 하면 소녀 팬들이 몰려 가서 계속 영화는 찍을 수 있었던 것.[10]
하지만 엘비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약물 치료 등을 해 보았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1977년 1월 그의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이 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11]결국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일설에 의하면 변기 위에서 반쯤 바지를 벗은 채로 약을 맞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별로 곱게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아닌지라 이 이야기는 카더라 취급을 받는다. 이런 사례때문에 '''망가진 록스타'''의 전형으로 까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살빼기위하여 손 댄 게 마약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인지 로보캅 2를 보면 그의 사진과 그를 연상케하는 말라빠진 미이라가 잠깐 나오기도 한다. 마약밀매범들이 쾌락과 마약으로 죽은 가수라고 찬양하는 이미지. 그덕에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희생양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관심이 적어 보도되지 않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과 영국의 타블로이드들이 그의 사생활에 대해 근거없는 루머를 생산 중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새로운 사망설이 제기된다. 바로 변비로 인한 죽음이다. 실제로 엘비스 사망 후 부검에서 엄청난 양의 대변이 대장에서 검출되었고 몸무게가 갑작스럽게 불어난 이유를 근거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곤 할 수 없다. 이 사망설에 의하면 엘비스는 대변을 보지 못해 힘겨워했고 항상 대변이 마려운 그 상태가 멈추지 않은 상태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주치의는 엘비스에게 항문 이식 수술을 권유하였으나 엘비스는 연예인 신분인 자신이 항문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견디지 못해 자꾸만 수술을 미루다가 계속 쌓이는 대변의 독성에 점점 더 중독되었다.
또한 그의 약물 과다 복용[12] 역시 그의 심장마비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나온 주치의 역시 이를 인정하였으나, 이러한 처방은 엘비스를 마약에 손에 안 대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포레스트 터넌트 박사는 처방보다 10배 더 투여된 코데인 역시 약리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10배에 달하는 코데인 또한 치사량에 미치지 못 한다는 판정이 났다. 그런데 코데인은 변비를 유발한다. 설사 치료제로 과거에는 코데인이 자주 처방 되었다.
그리고 엘비스의 부검 당시, 많은 약물의 성분이 나온 건 맞지만 그 중에서 불법성 마약이나 알코올은 일절 나오지 않은 것 역시 주목 할 만한데 이는 엘비스가 말년까지도 마약이나 술에 쩔어 사는 더러운 인물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기도 한다.

3. 성격


전술되었듯 엘비스 프레슬리는 자신에게 엄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약물 남용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오명과는 달리 실제로는 생전에도 마약에는 일절 손도 안 댄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겉만 멋지고 잘 생긴게 아닌 그 당시 미국의 방탕한 분위기와 그 분위기를 조장하고 즐기기 바쁜 대부분의 연예인들의 모습에 반기를 든 마음 속까지 품위있는 사람이었다. 잘생기고 화려한 비주얼과 로큰롤의 상징이라는 큰 존재감, 그리고 이후 대중매체에서 느끼하게 나오는 특유의 이미지들을 생각하면 사치를 좋아하고 거만한 스타였을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가난한 시절을 보냈기에 성공한 뒤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입장을 잘 이해해서 자선단체에 꾸준히 많은 기부를 했으며, 우연히 만난 팬들에게도 선물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대중문화의 중심이 된 후에도 국민적 인기를 끄는 가수임에도 특권을 거부하고 군대에 자발적으로 입대해서 모범적인 군생활을 했으며,[13] 오만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관계자들에게도 늘 존중하는 모습과 겸손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젊은 시절 그의 춤과 노래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던 미국의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도 끝내 사랑을 받는 슈퍼스타이자 국민 가수가 될 수 있었다. 이 점은 복잡한 사생활과 괴팍한 성격, 뒷세계와의 커넥션등으로 논란이 많은 이전 세대의 아이콘인 프랭크 시나트라와 다른 점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왜 지금까지도 미국의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4. 평가


'''"엘비스 프레슬리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화적 힘이다. 그는 모든 것에 리듬을 도입했고 음악, 언어, 옷 등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것은 완전한 새로운 사회 혁명이었다. 60년대가 그것에서 왔다."'''

레너드 번스타인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엘비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존 레논

'''"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어요.'''"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는 전 세계 많은 팬들에게 미국 문화를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가스펠, 컨츄리, 리듬앤블루스(R&B) 등을 자신의 음악에 융합해 10억장이 넘는 음반판매 기록을 세웠다. 사후 40여년이 지났지만 프레슬리는 영원한 미국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백악관, 2018년[14]

엘비스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록스타이자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변화시켜버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엘비스의 등장 이전에도 리틀 리처드, 척 베리와 같은 초기 로큰롤 장르를 탄생시키고 활동한 아티스트들도 있었으나 '''로큰롤 장르를 영미권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리고 범세계적인 인기를 처음으로 갖게 한 장본인은 엄연히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엘비스가 일으킨 로큰롤 열풍은 스탠다드 팝, 재즈등으로 대표되던 기성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었으며 본고장인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무수히 많은 '엘비스 키즈'들을 만들어 냈고 그렇게 자란 엘비스 키즈들이 1960-70년대 대중음악 시장을 지배한 전설적인 록 음악 아티스트들이 되었다.[15]
북미 음악계에서 그의 위치는 아직도 확고해서 ''' 'King of Rock 'n' Roll' '''은 그의 별칭이기도 하다. 유럽에선 아직도 생존 가수들보다 더 많은 앨범 판매고를 올리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16] 비틀즈는 엘비스를 보며 로큰롤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키웠다. 존 레논폴 매카트니 역시 60년대 초반까지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와 함께 자신들에게 영향을 준 뮤지션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늘 언급했다. 그리고 엘비스와 만났을때의 경험과 감동을, 다들 노년에 접어든 1990년대에도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감명깊게 얘기했다. 밥 딜런도 자신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되고 싶다고 늘 말했었고, 실제로 그의 10대 시절 사진을 보면 가죽재킷과 리젠트 머리를 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패션을 그대로 따라한 모습들이 있다.
여기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흔히 작곡이나 프로듀싱 능력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국내에서도 이문세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받냐인 것이다. 60년대의 전설적인 록 스타들이 록의 꿈을 꿀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가장 핫한 로큰롤 스타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은 자신들에게 처음으로 '우상으로서의 로큰롤 그 자체인' 음악을 알려준 스타 혹은 아이돌이기도 했던 엘비스에 대한 경배이자 지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엘비스가 최초로 레코드를 녹음했던 스튜디오에 밥 딜런이 와서 엘비스가 서있던 자리를 표시해 둔 흔적에 무릎을 꿇고 키스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 산업에 대변동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는데 그 전에 보는 음악이 성공할 수 있을 지 가능성을 보여준 게 엘비스라는 말도 있다. 당시로서는 기성 세대들에게 폄훼를 받은 다리 떨기 등으로 큰 이슈를 끌었다. 한편, 마이클 잭슨은 엘비스에게서 받은 영향력은 없다고 말했다.[17]
현대에서 엘비스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백인이 흑인음악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흑백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대에 인종의 크로스오버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점이다. 다만 사실 그것보단 엘비스가 백인이라서 대중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이 때문에 많은 흑인 가수들은 엘비스가 우리의 노래를 빼앗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현재와는 달리 기독교 힙합이나 록 등의 장르가 활성화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로큰롤이 악마의 음악으로 여겨졌던 1960-1970년대에 < ''He Touched Me'' > 와 같은 가스펠 앨범들을 발매함으로써 선교 방식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한 가수로도 평가받는다. 특히 미국에서 소위 Megachurch 라 불리우는 대형 교회들이 록밴드 또는 기타 대중음악팀을 필수적으로 고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혜안.
은근히 까도 많은 편이여서,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으며 70년대 펑크 록 뮤지션들이 엄청나게 씹어댔다. 이들은 이전 세대인 히피문화부터 구닥다리 로큰롤까지 모두 척살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 더 클래쉬는 그들의 노래 "1977"에서 '''No Elvis, Beatles or Rolling Stones in 1977'''이라고 노래했다. 그런데 클래쉬가 위에 언급된 뮤지션들을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앨범 London Calling의 커버 자체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Elvis Presley' 앨범에 대한 오마주였으니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기타 케이스에 엘비스의 욕을 적어놓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들과 말년에는 약물 문제로 인해 죽었다는 점에서 당대에는 평론가들에게도 대차게 까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관리의 문제일 뿐 음악적인 면에서는 엘비스가 대중들에게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는 점과 그만의 독특한 패션 등은 아직도 심벌처럼 남아 그가 남긴 영향력은 지속 돼 현재는 평론가들도 모두 인정한다. 적어도 엘비스가 있었을 때랑 없었을 때를 상상해 본다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대중음악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평가는 계속 변하는 것.

5. 기타


  • 여담으로, 한국의 가수 남진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반쯤 벤치마킹한 사실도 유명하다.[18] 젊은 시절에 맞은 절정의 순간에 군복무를 했던 생애도 엘비스와 매우 닮아있다.
  • 특히 흑인 음악 쪽에서는 '흑인의 음악을 훔쳐와 적당히 흑인 색을 탈색시킨뒤 백인들의 인기를 얻었다'며 싫어하기도 한다(이런 시각은 특히 힙합 쪽에서 찾아볼수 있는데 모스 데프 1집의 'Rock & Roll'이나 퍼블릭 에너미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19]그가 이후의 록 아티스트와는 달리 창작곡이 없던데다가 대다수 히트곡이 (라기보단 전부) 흑인 작곡가, 싱어가 버젓히 있는 원곡이 있었다. 인종 차별로 흑인 싱어의 음악은 방송금지 되었고 오로지 메이저 채널에서는 엘비스의 음악만을 들을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보면 흑인들 입장에서 열이 안 받을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은 영화 드림걸즈에서 잘 표현된다. 이에 빡쳐서 흑인들이 메이저에 진출하려고 만든 제작사가 바로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마이클 잭슨 등등을 배출한 모타운이다.[20] 게다가 저작권 법이 잘 잡혀지지 않았던 시절이라곤 하지만 엘비스는 죽을 때까지 흑인 작곡가들에게 단 1페니도 지불하지 않았다. (참고로 엘비스는 자기 운전수에게 캐딜락도 펑펑 선물하던 사람이다.)그러나 흑인 음악가이자 로큰롤의 전설 리틀 리차드는 이 의견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엘비스를 “그는 통합자였다. 엘비스는 축복이었다. 그들은 흑인 음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흑인 음악을 위한 문을 열었다.”라고 평했고, 제임스 브라운은 “엘비스와 나는 유일한 미국의 오리지널”이라고 평하며 엘비스의 독보적임을 인정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다 못해 거의 당연시 여기던 그 당시에 사실상 백인 청년이 흑인 음악을 들고와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신드롬급의 인기를 일으킨 것부터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넘어 당대 미국 사회 시스템 자체를 뒤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와 비슷한 시기를 같이 보낸 흑인 뮤지션들이 그를 인정하는 부분도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시점의 시각으로만 판단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부분.
  • 슈퍼스타가 된 후에도 입맛이 딱히 변하지 않아서, 햄버거와 도넛, 콜라, 감자칩 등 서민적인 정크푸드를 좋아했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거의 매일같이 크리스피 크림 도넛의 글레이즈드 도넛 한 상자를 헤치웠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좋아한 것은 구운 식빵에 땅콩버터와 버터를 듬뿍 바르고, 썬 바나나, 튀긴 베이컨을 끼워 만든 샌드위치로 이는 일명 '엘비스 샌드위치'라고 불리우며 엘비스의 기일이 되면 그를 추억하며 직접 만들거나 카페에서 사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뿐아니라 그는 하루에 한 개 이상의 '파운드케이크'를 먹어치울 만큼 파운드케이크 역시 무척 사랑했다. 때문에 '엘비스 샌드위치'처럼 '엘비스 파운드 케이크'라는 레시피가 존재한다. 헌데 엘비스는 앞서 언급된 고칼로리 음식들을 한번에 4~5개 이상씩 먹었으며, 한끼에 땅콩버터와 버터 한통을 다 써서 먹을 정도로 폭식을 했다. 이는 30대 들어서 그가 비만으로 가는 원인이 되었고 이러한 식습관은 죽을 때까지도 고치지 못했다. 엘비스 사후 그의 시체를 부검했을때도 위에서 대량의 아이스크림과 쿠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딘 마틴의 팬인 그는 I don't care if the sun don't shine을 락앤롤 스타일로 커버했다.
  • 아래는 잘 알려지진 않은 영화 Girls Girls Girls(1962년작)의 한 장면. 그래도 당시 흥행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영화에 꽤 많이 나왔는데 1956년 영화 러브 미 텐더에 처음 주연으로 나오고 엘비스가 잠깐 사랑에 빠졌던 앤 마그렛이 여주인공으로 같이 나온 Viva Las Vegas(1964)에서부터 1972년 다큐멘터리 영화 Elvis on Tour 까지 모두 30편이 넘는 영화에 나온 바 있다. 평은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수준으로 모두 흥행은 어느 정도 성공한 편이다. 한국에서도 1961년에 주연으로 나오고 당연히 주제가도 부른 <블루 하와이>가 개봉했던 바 있다.


6. 가족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을 당시 집이 없어서 컨테이너를 개조한 집들이 모인 곳[21]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그를 무척 아꼈기에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상술한대로 성공한 엘비스는 활동 초기의 음반들은 어머니의 생일을 위해 조그마한 싱글 레코드나 한 장 만들어서 선물할까 하는 생각에 레코드 회사를 찾아가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엘비스의 어머니는 1958년, 40대 나이로 급사했고 당시 엘비스는 군복무 중이라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고 한다.
아버지와는 어릴 적에 여러가지로 서먹서먹했지만 그래도 가수로서 대박을 거두면서 아버지를 위해주었고 아버지도 어릴적 가난 속에 절망으로 술과 여러가지로 아들을 못살게 굴던 것을 후회하며 아꼈다. 그래서 아들이 갑자기 죽자 아버지도 충격 속에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 통곡하면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엘비스의 장례식에서 아버지 버너드는 종일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엄마를 만나러 간거니? 그래... 너를 꾸짖지 않으마. 이 애비도 곧 가서 우리 식구 다 같이 영원히 오붓하게 살자꾸나." 그리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들 사진을 쥐고 멍하게 지내다가 결국 1979년 아버지도 66살 나이로 아들과 아내를 따라갔다.
  • 리사 마리 프레슬리 - 딸
1968년생. 명성이 어마어마한 아버지를 둔 관계로 본인의 실력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데뷔 전부터 스타행. 때문에 미국 언론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왔는데, 특히 마이클 잭슨과 결혼하며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네 번 결혼하였는데, 첫 번째 남편은 Danny Keough라는 뮤지션으로 88년에 결혼하여 94년에 이혼하였다. 그와의 관계에서 2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아래에 나올 라일리 키오가 포함되어 있다. 이혼 이후로도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두 번째 남편은 다들 알다시피 마이클 잭슨.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 리사 마리가 첫남편과 이혼하자마자 마이클 잭슨과 결혼하였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 마이클 잭슨이 언론플레이를 위해 리사 마리와 계약 결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으며 2년 뒤인 96년에 이혼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세 번째 남편은 니콜라스 케이지. 2002년 결혼했으나 100일 만에 이혼 발표.[22] 이유에 대해선 공개되지 않았다.
네 번째 남편으로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락우드와 2006년 결혼하여 현재까지도 부부로 함께 하고 있다. 2008년 쌍둥이 자녀를 출산하였다. 이후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2012년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트럭에서 알바 중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160억 짜리 저택에서 사는 여인인 관계로 돈 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친구 가게에서 심심풀이 삼아 해봤다는 것.
여기까지라면 그냥 유명한 아버지와 유명한 전남편들로 유명한 여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니콜라스 케이지와의 이혼 이후 뜬금없이 가수로 데뷔하였다. 2010년대 이후로도 꾸준히 활동 중. 데뷔 당시는 '갑자기 뭐하는 짓?' 정도의 평가였으나, 이후 아버지 빨을 받은 백만장자의 취미생활은 아닌 것으로 인정받았다.
1998년에 스웨덴에 사는 리사 요한센이 '나, 리사 마리 : 엘비스 프레슬리의 진짜 딸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발표했다. 자서전에는 전세계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로 믿고 있는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가짜라는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는 1968년 2월 1일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와 프리실라 앤 불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멤피스에 위치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에서 보냈는데,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성인이 될 때까지 당분간 피신해 있어야 한다는 엄마에 말에 이름도 세리 로젠퀴스트로 바꾸고 유럽에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유는 요한센이 DNA 검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11년에 소송을 제기한다. 링크 이 부분은 2015년 9월 6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2020년 7월 13일에 손자 벤자민 키오가 향년 27세에 사망했다.
1989년생. 모델 겸 배우. 2010년에 데뷔하였으나, 이후 출연작 중 한국에서 흥행한 작품은 없었던 관계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2015년 개봉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케이퍼블 역으로 출연, 이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은 덕분에 한국에서도 제법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한편, 매드 맥스 촬영 중 알게 된 스턴트맨과 2014년에 결혼하였다.

7. 생존설


생전 높은 인기 때문에 '죽었다고 했으나 실은 살아있다'라는 설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음모론의 원조격이기도 하다.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심심하면 생존설이 튀어나온다. 사실 죽기 전까지 행방이 묘연한데, 이를 두고 많은 음모론이 일어났으나, 통설은 그가 도넛을 너무 좋아하여 지나치게 살이 찐 나머지 소속사에서 감추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1984년 무하마드 알리와 제시 잭슨 뒤에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사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동영상. 역대 추정사진 모음 영상에 차고 넘친다.
[image]
요런 마케팅용 훼이크까지 나왔다.
이제 그가 살아있으면 85세이기에, 이 음모론은 잦아들고 있다. 85세는 고령이기에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 만약 1977년에 죽지 않고 살았더라고 2000년대에 죽었을 수도 있다.

7.1. 엘비스 생존설을 채용한 작품


  • 음모론을 모티브로 한 어드벤쳐 게임 '왕을 찾아서'[23]는 아예 엘비스를 찾는 내용이다.
  • 소설 멋진 징조들에서는 한 찌라시교황에게 '엘비스를 보았냐'고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기아가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굽고 있다. 흥이 나면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는다. 죽음은 그에게 손가락 댄 적도 없다고 한다.
  •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포드 프리펙트가 소설 5권에서 지구로 귀환하던 중 레스토랑에서 술집 가수로 일하고 있었다.[24]
  • 영화 맨 인 블랙 1편에서는 K가 차에서 엘비스의 노래를 틀자 J가 딴지를 걸다가 엘비스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자 자신의 고향 별로 돌아갔다며 영화에서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나온다.
  •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는 불로불사를 얻는 대신 사회적으로 사망해야 하는데, 이 규칙을 가끔 어기고 있다고.
  •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무한경비대 특무부에 평행세계의 엘비스중 하나가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 겁스 판타지에서는 유르스에서 음유시인일을 하고 있다.
  • 샬레인 해리스의 로맨스 소설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에서 영안실로 실려온 엘비스 프레슬리를 본 뱀파이어가 팬심을 이기지 못하고 뱀파이어로 되살리고 만다. 엄청난 유명인이기 때문에 루이지애나의 뱀파이어들 모두가 그를 숨기고 '부바'라고 부른다.(소설 내에서 본명은 한번도 나오지 않으나 묘사는 틀림없이 엘비스이다.) 부활할 때 뇌세포가 파괴되어 지능이 낮아지고 고양이피만 마시게 되었다.(안습)
  • 부바호-텝이라는 영화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엘비스가 사실은 그를 따라 하던 모창 가수였으며, 진짜 엘비스는 삶에 회의를 느껴 모창 가수와 바꿔치기 한 뒤 홀연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세월이 흘러 거동이 불편해진 지금은 노인 요양원에서 과거 여자와 마약에 찌들어 가족을 소홀히 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살아가고 있었으나, 노인들의 영혼을 빨아먹기 위해 나타난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가 나타나자 홀연히 그와 맞서 싸운다
배우는 브루스 캠벨. 여담으로 본작에서는 케네디 대통령도 생존해 있는 채로 같은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25]
  • 티미의 못말리는 수호천사의 몇몇 에피소드에서도 등장한다. 뚱뚱한 엘비스이며 해변의 모래사장 밑 지하에 살고 있었다. 도넛을 좋아했다는 이야기에 걸맞게 도넛을 씹어먹는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지하세계에 로큰롤 왕국을 세웠다고.
  • 다이 하드 2에서는 공항에서 수상한 자들을 목격한 존 맥클레인이 경찰들에게 이를 알리려 다가갔으나 경찰 두명 중 한 명이 자신의 차를 견인시킨 재수없는 경찰이었고 그 경찰이 "뭘 봤는데"라고 묻자 말을섞기 싫다는 의미로 "엘비스... 엘비스 프레슬리를 봤소" 라고 얼버무리는 장면이 나온다(이는 아마도 엘비스의 생존루머를 빗댄 개그인듯)
  • 가수 컨츄리꼬꼬의 노래 '명옥씨 엘비스는 죽지 않았어요'도 해당 설을 차용한 바 있었다.노래

8. 패러디


커리어 후반기에 들어서 주로 선보인 하얗고 펄럭거리는 옷과 리젠트 머리가 강한 인상을 남겼기에 여러 미디어에 패러디 혹은 오마쥬가 되었다. 이미지 자체가 너무 강렬하다보니 코스프레 대상으로도 자주 쓰인다. 엘비스 닮은 사람 뽑기 대회가 있을 정도.
  • 의 노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들으면 알수 있지만, "이거 원래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아니야?"란 생각이 들정도로 엘비스 전성기의 음악과 빼닮았는데, 프레디가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해 쓴 헌정곡이라고 한다. 심지어 유튜브에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elvis presley라고 치면 엘비스가 진짜로 부른 것처럼 영상이 올라와있는데, 엘비스의 창법과 목소리를 카피해 부른 가짜 커버 영상. 당연히 이 노래는 엘비스 사후 프레디가 작곡한 노래다. 아이러니하게도 엘비스풍으로 만든 이 노래가 그 많고 많은 퀸의 명곡중에서도 단 둘뿐인 빌보드 hot 100 1위곡 중 하나라는 점이 재미있는 점.[26]
  • 트루 로맨스 - 주인공인 클래런스의 환상 속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여러번 등장한다. 극 중 엘비스의 역할은 발 킬머가 맡았다.
  • 3000 마일 -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커트 러셀, 크리스찬 슬레이터 등이 엘비스 프레슬리 닮은 꼴 대회가 열리고 있는 라스베가스의 리베라호텔 카지노를 털기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 분장을 하고 흉내를 낸다. 사실 단순히 위장한 것만은 아니고 이들 스스로도 엘비스의 엄청난 팬이라 케빈 코스트너는 자신이 엘비스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후반부 총격전에서는 커트 러셀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케빈에게 너 진짜 엘비스 아들이냐?라고 물어볼 정도. 영화의 영어 원제도 '3000 Miles To Graceland'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가인 그레이스랜드를 포함하고 있다.
  • 릴로 & 스티치 - 릴로가 워낙 좋아하는 가수여서 스티치가 자주 흉내를 낸다. 작품의 OST로도 많이 쓰인다.
  • 롤리팝 체인소 - 최종보스인 킬라빌리는 말년의 살찐 엘비스의 패러디.
  • 팝픈뮤직에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티브로 한 이란 캐릭터가 1편부터 등장한다. 금발인 것을 제외하고 외모나 복장, 심지어 설정상의 생일도 1월 8일로 똑같다. 그리고 자칭 "음악의 제왕".
  • 포레스트 검프 - 엘비스가 검프네 집에서 머문 적이 있고 사실 엘비스의 춤은 검프가 버둥대는 모습을 따라했다는 설정.
  • 폴아웃: 뉴 베가스 - 뉴 베가스의 하층민 거주지인 프리사이드에서는 엘비스의 "숭배집단"[27] 갱단이 등장한다. 페이서의 옷은 Jailhouse Rock의 그 옷.
  • 야가미 이오리 - 음악이 사실상 생업에다가 복장을 바꿔도 특유의 리젠트 머리는 안 바꾸었다. 그리고 그가 뜨기만 하면 인기있는 컨셉을 생각하면...[28]
  • GTA 산 안드레아스 - 가끔 사람들이 엘비스 복장을 하고 돌아다닌다. 라스벤츄라스에 있는 4 드래곤카지노 주변에 많다. 종류는 파란색, 회색, 흰색 엘비스 세 가지가 있다.
  • 1999년에 나온 컬트 삼총사(현 컬투) 3집 타이틀곡 <어설픈 엘비스와 살찐 마돈나의 사랑>에서 쓴 복장도 엘비스의 것을 차용한 바 있었다.
  • - 피스톤컵 대회장에서 코스프레한 차가 나온다. 리젠트 머리를 탑차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 포인트.[29]
  • 딘 쿤츠의 살인예언자 시리즈에서는 한동안 엘비스의 유령이 주인공 오드 토머스의 친구 겸 동료 뻘이 되어 따라다닌다.

  • 썬즈 오브 아나키 - 주인공이 속한 폭주족 갱단 SAMCRO의 회계 담당 로버트 '바비 엘비스' 몬순은 부업으로 가수 활동도 하는데, 그때마다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착용한다. 그리고 작중에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동양인 엘비스를 좋아한다고 언급된다.

9. 디스코그래피



9.1. 앨범


  • Elvis Presley (1956)
  • Elvis (1956)
  • Loving You (1957)
  • Elvis' Christmas Album (1957)
  • King Creole (1958)
  • Elvis Is Back! (1960)
  • G.I. Blues (1960)
  • His Hand in Mine (1960)
  • Something for Everybody (1961)
  • Blue Hawaii (1961)
  • Pot Luck (1962)
  • Girls! Girls! Girls! (1962)
  • It Happened at the World's Fair (1963)
  • Fun in Acapulco (1963)
  • Kissin' Cousins (1964)
  • Roustabout (1964)
  • Girl Happy (1965)
  • Harum Scarum (1965)
  • Frankie and Johnny (1966)
  • Paradise, Hawaiian Style (1966)
  • Spinout (1966)
  • How Great Thou Art (1967)
  • Double Trouble (1967)
  • Clambake (1967)
  • Speedway (1968)
  • Elvis (1968)
  • From Elvis in Memphis (1969)
  • From Memphis to Vegas/From Vegas to Memphis (1969)
  • That's the Way It Is (1970)
  • Elvis Country (I'm 10,000 Years Old) (1971)
  • Love Letters from Elvis (1971)
  • Elvis Sings The Wonderful World of Christmas (1971)
  • Elvis Now (1972)
  • He Touched Me (1972)
  • Elvis (1973)
  • Raised on Rock (1973)
  • Good Times (1974)
  • Promised Land (1975)
  • Today (1975)
  • From Elvis Presley Boulevard, Memphis, Tennessee (1976)
  • Moody Blue (1977)

9.2. 싱글



9.2.1. 빌보드 핫 100 이전 싱글 차트 1위


등 10곡은 빌보드의 바꿔진 룰로 비공식 1위로 기록되있다.

9.2.2. 빌보드 핫 100 1위


'''이 노래들은 개편 이후에 차트에 오른 노래들이다.'''
  • A Big Hunk o' Love (1959)
  • Stuck on You (1960)
  • It's Now or Never (1960)
  • Are You Lonesome Tonight (1960)
  • Surrender (1961)
  • Good Luck Charm (1962)
  • Suspicious Minds (1969)

9.2.3. 빌보드 핫 100 2위



9.2.4. 빌보드 핫 100 3위 ~ 10위


  • Wear My Ring Around Your Neck (1958)
  • One Night (1958)
  • I Got Stung (1958)
  • I Need Your Love Tonight (1959)
  • I Feel So Bad (1961)
  •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 (1961)
  • Little Sister (1961)
  • She's Not You (1962)
  • (You're The) Devil in Disguise (1963)
  • Bossa Nova Baby (1963)
  • Crying in the Chapel (1965)
  • In the Ghetto (1969)
  • Don't Cry Daddy (1969)
  • The Wonder of You (1970)

9.2.5. 빌보드 핫 100 11위 ~ 20위


  • My Wish Came True (1959)
  • Fame and Fortune (1960)
  • I Gotta Know (1960)
  • Flaming Star (1961)
  • Follow That Dream (1962)
  • One Broken Heart for Sale (1963)
  • Kissin' Cousins (1964)
  • Such a Night (1964)
  • Ask Me (1964)
  • Ain't That Loving You Baby (1964)
  • (Such an) Easy Question (1965)
  • I'm Yours (1965)
  • Puppet on a String (1965)
  • Love Letters (1966)
  • If I Can Dream (1968)
  • Kentucky Rain (1970)
  • You Don't Have to Say You Love Me (1970)
  • Separate Ways (1972)
  • Steamroller Blues (1973)
  • If You Talk in Your Sleep (1974)
  • Promised Land (1974)
  • My Boy (1975)
  • Way Down (1977)[30]

[1] 만약 현재까지도 살아있었다면 86살이다.[2] NBC-TV Special에 녹화 한 것으로 1968에 발매한 Elvis 앨범에 수록되었다.[3] 번역하면 로큰롤의 제왕. 간단하게 The King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 비단 1950년대로 한정하기에는 그는 1960~70년대까지 여러 장르에 걸쳐서 대활약한 인물이다. 사실상 1950년대 후반 이후의 대중음악계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비틀즈, 마이클 잭슨과 같은 현대 대중음악가들의 등장 이후에도 클래식 시대(1958년 빌보드 차트 개편 이전)의 마지막 보루로써 수 많은 히트곡들을 남겼다.[5] 이들은 후에 조니 브루넷 트리오로 이어진다.[6] 최종계급은 Sergeant이다. 국방부 정식 번역으로는 병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사에 대응되는 계급이다. 의무복무기간 중에 이루어진 특진의 연속으로 달게 된 계급인데, 당시 대부분의 징집병들이 일병이나 상병(준부사관)이 실질적인 진급상한선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엉덩이를 흔드는 춤을 볼 수 있다.[8] 그의 50년대 중반 TV 공연 영상들 상당수가 부자연스럽게 상반부만 보여서 몸을 흔드는데, 당시 검열이 엄격하던 미국에선 하반신을 흔들면서 춤추는 행위를 외설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검프 영화판에서도 나오는데 시내의 TV가게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TV에 방영되자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어린 포레스트의 눈을 가리면서 "저건 아이들 보는게 아니야." 라고 말하며 급히 떠나는 장면도 있다. ##. 에드 설리번 쇼에서 보여준 다리 흔들기. [9] 10년동안 30개의 영화를 찍었으니까 매년 3편을 공장장식으로 찍은것이다. 당연히 퀄리티는 영화가 아니고 엘비스의 노래 선전용 90분짜리 뮤직비디오에 가깝다.[10] 다만 1960년작 플레이밍 스타는 작품성이나 연기력 모두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를 둔 혼혈 청년이 백인과 인디언의 충돌이 격해지자 그 가운데서 선택을 강요받고 피해받는 모습이 잘 그려졌고 노래로 도배하다시피한 다른 작품과 달리 노래씬도 최소화하면서 영화 자체에 집중했다. 엘비스 본인도 외가쪽에 체로키족 피가 흐른다.[11] 엘비스는 생전 매니저가 3일에 한번 1더즌(12개들이)을 사다줄 정도로 크리스피 크림 도넛의 오리지널 글레이즈드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182cm 키에 100kg이면 골격이 큰 서양인 치고는 심각한 비만은 아니며, 심장마비로 죽을만큼은 아니다. 사망 당시의 상태라면 120~140kg대의 체형으로 보이며, 당뇨병이나 신장 질환이 있을 경우라면 부종으로 인해 더 부은 모습일 가능성이 있다.[12] 불법 마약이 아닌 각성제, 진통제와 같은 치료 목적의 약물을 말하며, 엘비스는 말년에 거의 암말기 환자와 맞먹을 정도의 약물을 사용했다.[13] 이때문에 일각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예술인에게 병역 특혜를 주자는 주장에 대한 반박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14] 기사[15] 물론 엘비스는 50년대 당시 초창기 로큰롤을 현재의 록 음악으로 확실히 정의시키거나 더 나아가 세부장르화시킨 인물은 아니다. 엘비스의 역할은 로큰롤을 말 그대로 전세계적으로 폭발적 '유행'시킨 아이콘이었으며 로큰롤 장르를 더 발전시키고 현재의 록 음악으로 완전히 정립시킨 아티스트들은 그 전설적인 비틀즈, 롤링 스톤즈와 같은 60년대 밴드 아티스트들을 통해서이다. 엘비스의 중요성은 비틀즈를 비롯한 후대의 아티스트들의 어린 시절에 록 음악이 뭔지를 알게끔 들려주고 보여준 아이콘이자 첫 선구자의 역할이었다는 점이다.[16] 한국으로 치면 조용필같은 대중음악의 황제이자 영원한 아이콘 대우를 받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일종의 영구결번같은 개념.[17] 마이클 잭슨은 제임스 브라운을 항상 동경해왔고 춤과 노래에서도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한가지 웃긴 사실은 제임스 브라운과 엘비스 프레슬리는 동 시기에 활동한 동료로서 서로를 리스펙하던 친구 사이였던 것[18] 당시 경쟁자였던 나훈아는 톰 존스를 벤치마킹했으니, (한국인 기준으로 볼 때) 엘비스만큼 외형이나 노래에서 특색이 있는가수가 아니었으므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19] 백인 래퍼 중 가장 유명한 에미넴 역시 흑인이 주류인 힙합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Without Me'에서 본인이 흑인 음악을 이기적으로 써먹어서 자신의 주머니를 부풀렸다며 엘비스 이래로 최악이라고 한다.[20] 그런데 마이클 잭슨은 엘비스의 딸과 결혼했다...이혼하긴 했지만.[21] 트레일러 파크라고 부르는 곳이다. 집을 살 능력도, 집세를 제대로 낼 능력이 없는 빈민들이 사는 곳이다. 미국 빈민의 상징과도 같은 곳.[22] 이혼소송에 시간이 걸려 실제 이혼은 2004년에 이뤄졌다.[23] 국내에 알려진 제목은 '황제를 찾아서'[24] 포드의 말로는 자기 의지로 따라온 듯.[25] 본인 말로는 당시 저격당하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는데, 존슨 부통령이 보낸 비밀요원에게 납치당해 흑인으로 피부색을 개조당하고 양로원에 처박혀졌다고 한다. 게다가 이사람의 머리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저격당한 같은 곳에 흉터까지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사람이 정말로 케네디 대통령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 정확히 짚고넘어가지를 않으니, 해석은 관객의 몫.[26] 이노래는 퀸이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불렀다. 하지만 보헤미안 랩소디 라이브 에이드 씬에서는 짤렸다.[27] 엘비스에 관련된 것들을 일종의 종교적 심볼로 바라보고있다고 한다.[28] 사실 95시절의 일러스트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엘비스를 보고 그린거나 마찬가지다... 다만 화풍에 따라 가린 비대칭 머리로도 보이기 때문에 리젠트라고 말하기엔 좀 애매한 헤어스타일이다.[29] 실제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가수 하기 직전의 직업이 트럭 운전기사였다.[30] 엘비스의 생전 마지막 히트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