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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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에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히트를 친 대한민국의 1세대 힙합 가수로 데뷔 전에는 이태원동 나이트클럽 문나이트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국 비보이 1세대이기도 했다. 현재 K POP로 일컫는 아이돌 위주의 댄스음악을 개척한 선구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댄스계에선 이주노, 박남정 등의 후배뻘이며 당시에 이주노, 박철우, 도건우 등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 당시 이태원에서 활동하던 댄서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주노, 박남정, 박철우, 현진영이 이태원의 터줏대감격이었으며, 강원래, 구준엽, 양현석 그리고 박진영 등이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였다. 그리고 이들이 갖추지 못한 엄청난 가창력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한국 뉴 잭 스윙의 1세대이면서 서구적인 스타일의 가수이기도 하다.
2. 활동 내역
그는 15살부터 대한민국 1세대 비보이팀 스파크에서 프로댄서로 춤을 추기 시작했으며 그 당시 비보이 중에 드물게 독자적으로 댄스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댄서였다고 한다. 박남정 밑에서 백댄서 생활을 한 적도 있으며 이태원의 이주노-양현석 패밀리들(영턱스클럽 멤버들이나 지누션 등이 대표적이다)을 나중에 자신의 백댄서로 쓰기도 했을 정도로 댄서들 사이에서 신망과 실력을 모두 인정받았다.[2]
1988년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한다.[3] 현진영의 춤실력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고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이수만은 현진영의 트레이닝을 성악의 기초부터 성실히 가르쳤고 이수만의 트레이닝 방법은 상상을 초월할정도로 체계적이고 혹독했다고한다.
기초를 충실히 하여 춤을추며 안정감있게 발성을 구사하는 보컬의 초석을 만들었다.
훗날 현진영의 이수만에게 트레이닝 받은 갖가지 방법을 응용하여 물구나무 선 채 산토끼 노래하기, 뛰면서 노래하기, 산 정상까지 오르며 계속 노래하기 등등 특수발성이란 신개념 보컬트레이닝 만들어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후배양성을 하고있다.
현진영이 응용해 업그레이드한 이수만의 트레이닝 방법은 SM의 정식 훈련법이 되어 보아를 단련시키는 데 그대로 쓰였다. 특히 동방신기는 아직도 한시간 이상 러닝머신 위에서 뛰면서 노래하는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이 장르로는 선구적인 가수로, 1990년 "현진영과 와와"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제1집 "New Dance"에서 한국에 바비 브라운 스타일의 뉴잭스윙 음악을 소개했다.[4] ‘와와’는 두 명의 백댄서로 1기 멤버는 구준엽, 강원래, 2기는 김성재, 이현도, 3기엔 지누션의 션이 있었다. ‘인순이와 리듬터치’, ‘박남정과 친구들’ 등등 메인가수와 댄서명을 합친 그룹명은 기존에도 있었지만, 백댄서 개념을 넘어 쇼 프로 출연이나 잡지 촬영까지 댄서와 함께하는 등 댄서와 완전히 3인조 그룹처럼 활동하는 방식은 "현진영과 와와"가 국내 최초였다. [5] 1집의 타이틀곡 '야한 여자'는 당시로서는 노골적인 가사와 힙합이라는 낯선 장르로 인해 여러모로 반향을 일으켰지만,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며 다행히도 후속곡 '슬픈 마네킹'이 큰 인기를 얻으며 주목받았다. 국내 댄스가수 중 처음으로 헤드셋형 마이크를 끼고 등장하여 2년 후 서태지와 아이들과 ZAM이 적극 활용해 1990년대 댄스가수들의 주요 아이템으로 고착화시켰다.
1992년 제2집 "New Dance 2"를 발표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타이틀 곡인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높은 완성도로 KBS 가요톱텐에서 5주 1위, MBC 음악방송에서 9주연속 1위를 SBS 음악방송을 8주 연속 1위를 하는 등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며 아직도 현진영의 대표적인 노래로 남아있고 같은 앨범의 '너는 왜(현진영 GO 진영 GO)’는 '현진영 고 진영고'라는 후렴구와 랩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인기를 이어갔다.[6]
그가 무대의상으로 즐겨 입었던 X마크가 새겨진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깔의 후드티와 큼직한 힙합스타일의 청바지는 당시 청소년 및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힙합 패션이라는 장르를 새로이 유행시키며 X세대 문화를 만들어낸 효시로 평가 받는다. 당시 1990년대의 최종보스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풍 때문에 빛이 가려지긴 했어도 당시로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다.[7] 서태지 돌풍 당시 초기는 현진영, 중기는 이현도, 김성재의 힙합 듀오 듀스가 라이벌이었다.
1993년에 3집 "Int: World Beat And Hiphop Of New Dance 3"를 발표하여 '두근두근 쿵쿵'이란 곡으로 인기를 이어갈 듯 했으나, 발매 직후 필로폰 투약혐의로 구속되고 이때부터 방송금지되어 긴 시간동안 활동을 하지 못하게된다. 1991년 이미 대마초 흡입 혐의로 처벌을 받은 바 있었으며 이후에 1994년에도 필로폰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후 현진영은 사실상 나락으로 떨어진다.[8]
당시 SM은 현진영이 수익을 낼 시점에 대마초나 필로폰으로 구속되면서 음반과 상품을 모두 폐기시킬 정도로 큰 손해를 보았고 매니저들도 수사를 받으면서 고초를 겪게 되었으며, 이수만은 그 당시 수입이 좋았던 월미도와 방배동카페를 팔아서 SM의 부도위기를 겨우 넘기던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이현도가 와와로 활동할 때 현진영이 대마초로 체포되면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현진영을 디스하였는데 현진영도 자서전으로 이현도를 디스했다. 이현도는무대에서 현진영의 구속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로 인해 와와생활도 끝났으므로 현진영에 대해 인간적인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고 하지만 현진영은 잘나갈 때 함께 했던 동생이 자신이 힘든 사정에 처한 시기에 본인을 외면한 것에 대해 큰 상처를 받은듯 보인다.-
.--] 2007년 인터뷰에서는 이수만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연락도 하고 지낸다고 했으며, 2015년에도 라디오에서 ‘나에게 이수만이란?’이라는 질문에 “아버지”라고 말했다. “한참 말썽을 부릴 때도 나를 콘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가슴이 뭉클하다. 죄송하다”라고.
과거 2000년대 초반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에서도 배임 문제로 미국 도피 중인 이수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준 고마운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어서 "그러나 배임문제로 도피한 건 다 자기인생이니 내 알 바 아니고, 너희들이 미국가서 이수만을 까더라도 상관 없다."라고 말했다(…). 뭐 이렇게 말한 건 사실 굳이 자신이 개입해서 이수만의 범죄 행위까지 쉴드를 쳐야 할 명분은 없었기에 방송 분위기를 고려해 본인 스스로 적당히 드립을 친 거라 보는 편이 맞을 듯.
1997년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힙합 가수였던 이탁[9] 과 IWBH(International World Beat Hip-hop)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고 "Stop aids Stop drug" 앨범을 발표해서 '뻗어봐'로 활동했고 힙합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서승맨TV의 인터뷰에서 SM의 수익배분은 6:4로 밝혀졌다. 6은 SM, 4는 현진영이다. 또한 2014년 라디오스타에서 현진영은 흐린 기억속의 그대로 대박을 내면서 1억7000만원을 받았는데 쓰는데 두 달 걸렸다라고 하며 "주변사람들에게 시계나 명품 선물했다. 나 자신한테 쓰는 돈도 크게 썼다"라고 하였다. 또한 현진영이 방송에서 이수만이 현진영을 발탁할때 트레이닝문제로 댄서를 그만두게 했는데 당장 현진영의 아버지가 신부전증등의 병원비로 생계가 막막해지자 어려움을 감안해서 1억원을 가불해주었다고 하였다
2000년에 현재의 부인인 영화배우 오서운씨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면서 오 씨의 설득으로 마약후유증,우울증과 공황장애,인성인격장애 치료를 본격적으로 마음먹게 되고, 2002년 4집 발매와 동시에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서 '''마약 후유증 및 공황장애에 관한 공개치료를 선언'''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순천향대학교병원 정신병동에 스스로 입원'''하였다. 공개치료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그동안의 마약에 찌든 삶과 수감생활을 적나라하게 회고하는 등 이주일 씨가 폐암 말기에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한 것처럼[10] 마약퇴치를 위해 공익활동을 많이하였고, 치료에서도 좋은 경과를 보이며 정상적인 행보를 보여준 덕분에 그동안 현진영을 마약 연예인으로 낙인 찍고 있던 대중들의 부정적 인식도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게 되었다.
5집 준비 시기에 "재즈힙합"이란 새로운 쟝르의 음악을 선보이며 '중저음대 음색'과 '소리의 통칼라'를 바꾸기 위한 울림통을 키우기 위해 137kg으로 '살을 찌웠다'고 한다.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에서는 찌고 나니 저음이 좋아져서 일부러 놔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음악 작업을 하면서 엄청나게 찌웠다 뺐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건강을 걱정해서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후 2002년 4집 "21C New Dance Jin Young Vol. 4"을 발표하였고, 2006년 5집 "Street Jazz In My Soul"을 발표하였다.
2011년에는 데뷔 20주년 기념앨범을 냈다.
2016년에는 디지털싱글 "무념무상"이라는 재즈힙합 음원을 냈다.[11] 이후 "무념무상"은 발표한지 일주일만에 멜론 재즈부분 Top100에서 6주간 1위를 차지했다.
2017년에는 디지털싱글 "내맘대로"라는 재즈힙합 음원을 냈다.
2020년에는 디지털싱글 “나의길”이라는 정통 발라드를 발표하며 감성보컬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2018년부터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 목요일 방송에서 '현진영 데이' 코너를 맡으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3. 여담
- 연예인이 되고 나서도 혼돈의 시절이 있지만, 연예인이 되기 전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전형적으로 유복한 부유층 자녀로 천진난만하게 살았으나, 모친을 중2때 잃으면서부터 인생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살 시도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지금은 인상이 상당히 달라졌지만, 젊은 시절에는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서 활동했던 4 Seasons의 리드보컬 프랭키 발리를 닮은꼴로 유명했었다. 얼굴의 인상 뿐만 아니라 목소리 역시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현진영의 전성기에 국내에서의 지명도와 프랭키 발리의 활동 당시 미국 내에서의 지명도 역시 대충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띠동갑이다.
- 소년시절부터 고도로 숙련된 전문 비보이들을 능가할 정도로 브레이크 댄스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사실 온몸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미쳤다고 할 정도로 가공할 운동신경과 인간문화재급 춤 실력으로도 유명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춤신춤왕이라는 구준엽마저 ‘윈드밀과 헤드스핀을 손을 대지 않고 11바퀴를 도는 사람은 처음 봤었다’며 현진영을 당시 문나이트에서 최고의 춤꾼으로 꼽았다.해당영상턴 영상 그때 당시 현진영이 보여준 운동신경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정도였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백플립이나 핸드스프링을 제자리에서 수십 회 반복한다거나 농구공을 손가락 위에서 돌리면서 최대한 높이 던졌다가 받아내서 계속 돌아가는 상태를 유지시키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부터 시작해서 일반적인 모든 비보이들이 하는 수직으로 하는 윈드밀이 아닌 몸 전체를 지면과 수평이 되는 각도로 띄운 상태에서 윈드밀을 제자리에서 수십 회 돈다거나 한 팔의 전완 부분으로 지면을 받친 상태에서 몸 전체를 지면과 수직이 되게 든 후 콩콩콩 돈다기나 한 팔로 몸을 받친 그 상태에서 다리로 원심력을 가했다가 풀면서 더 이상의 원심력을 가하지 않은 상태로 팽이처럼 수십 바퀴를 회전하면서 어떤 원리와 힘으로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을 정도로 마치 물리학 법칙을 벗어난 듯한 것들까지 다양했었다고 한다.[12]
- 옛날에 몰래카메라(SBS‘꾸러기카메라’)에 출연한 적이 있었으며 미국에서 온 프로듀서가 한국의 실력있는 랩퍼를 오디션을 통해 스카웃해 가기 위해 찾아왔다......라는 설정이었는데 스카웃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춤을 춘다. 도중 매니저로 부터 전화가 와 이 사람들은 사기단이니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라고 현진영에게 지시한다. 프로듀서를 연기하는 배우는 시간이 지체되자 각본대로 자리를 뜨려고 했고 그럴 때마다 현진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애걸복걸했는데 나중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허탈해 했었다.
- 절대무적 라이징오 국내 비디오판 오프닝을 불렀으며 원곡에는 없는 랩 부분도 있다. 이후 투니버스에서 재방영할 때도 이 오프닝을 썼다. 비디오를 틀면 첫 부분에 현진영이 토끼춤 등을 가르쳐주는 영상도 짤막하게 있어서 이 부분을 기억하는 80년대 중후반생도 있을것 같다. 방송을 할때 사람들이 하도 라이징오를 언급하는 바람에 처음엔 싫어했으나, 지금은 자신이 당시 어린아이였던 지금의 2 ~ 30대의 추억속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라이브 방송에서 라이징오 주제가를 부른적도 있었다.
- 한 라디오 방송에서 스티브 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실력 있고 좋은 녀석인데, 왜 군대를 안 가냐"라는 발언을 해서 병역 대 마약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정작 본인 역시 병역면제인 것이 아이러니하다. 항간에는 학력으로 인하여 면제를 받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는 중졸 학력 등의 문제로 인하여 방위 판정이 나왔는데,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소집이 면제된 경우다.
- 2014년 6월 법원에서 파산 신청을 하여 파산이선고되었다.
- 2002 SBS 가요대전에서 문희준, 강타,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보아와 콜라보 무대를 했었다.
- 2013년 9월 7일, KBS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초청을 받아서 문희준, 은지원과 콜라보해서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불렀고 410점을 받으면서 우승했다.
- 복면가왕 33회에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 119라는 이름으로 참가했으며 코스모스를 꺾은 최강자인 캣츠걸과도 상당히 좋은 무대를 보여줘서 호평을 받았다. 이후 복면가왕 경연을 보면 알겠지만 캣츠걸은 이긴 상대들을 그야말로 압살했다. 참고로 그가 파리잡는 파리넬리(13점 차)를 제외하면 캣츠걸과 대결한 상대 중에서는 두 번째로 좋은 점수를 받았다(40표). 의외로 가창력이 너무 좋아서 패널들 모두 그를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권선국, 박상민 등의 가수를 예상했는데 정체가 드러나자 다들 멘붕해버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후에 자신을 있게 해준 대표곡이자 클레오파트라를 꺾게 해준 명곡인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열창한 뒤에 퇴장했다.[13] 그 뒤에 여러분의 선택! 복면가왕에서 관절팔팔 아기사슴이라는 가명으로 재도전을 했고 그 뒤에 107차 경연에서 사장님~ 여기 감성 가득이요~ 감성충전 주유소로 재도전 해서 가왕... 자니? 음악이 고플 때 24시 음악편의점, 신에게는 아직 열두곡의 노래가 남아있습니다... 천하무적 거북선을 꺾고 준우승을 했다. 참고로 생방송 우승자를 포함하면 최초로 3개의 복면을 썼었던 출연자다.
- 그의 장르가 힙합/댄스 위주였고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가창력 좋다고 쳐주는 감정폭발형이 아니라사 그렇지만 원래부터 가창력이 굉장히 좋은 가수다. 그의 전성기 시절 라이브를 보면 90년대의 열악한 음향장비 + 격렬한 안무에도 불구하고 노래들을 연달아서 메들리로 부르는데 음정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가창력이 좋다. '소리쳐봐'를 들어보면 미드템포로 갔을 때도 기교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즉, 춤, 노래, 랩, 작사, 작곡, 편곡이 모두 되는 가요계의 천재적 재능의 뮤지션이다.
- 드라마 응답하라 1988 16화에서 직접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이름으로 언급되면서 간접적으로 출연했다. 류동룡이 엑셀 1대가 우승상품으로 걸려 있는 데코 나이트클럽 댄스 대회에 출전했다가 현진영과 박진영이 춤추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서 출전을 포기하는 장면에서 박진영의 이름이 언급된다. 사실, 1980년대 후반 시절에 박진영과 현진영은 전국구급의 춤 실력으로 이름 좀 날렸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적절한 출연이었던 셈이다. 사실, 이 때는 시기상으로 현진영이 아직 데뷔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명인 허현석으로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아서 사실상 고증오류가 된다.#
- 2016년 JTBC 걸스피릿에 '레전드와 콜라보레이션'편에 레전드로 초청을 받아 출연했다.여기서 스피카의 김보형과 한팀이 됐는데 여기서 본명을 밝히고 '내 본명은 법조계 종사자들만이 안다(...)'며 장렬히 자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김보형이 김해 김씨라는 것과 자신이 김해 허씨라는 걸 알고 팀명도 '로열 패밀리'로 지었다.[14] 어쨌든 본 경연에서 김보형에게 철저히 포커스를 맞춘 무대를 보여주며 김보형의 1위에 공헌했다.
- 2017년 카카오TV에서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으며 채널 생성일은 2017년 4월 12일. 현진영 카카오TV 채널
- 개 농장에서 학대받는 강아지 10마리를 구조한 적이 있다. 링크 이 소식을 전한 애견 웹진의 댓글란에 개 식용 찬반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는데 본인이 등판하여 댓글을 달았다.
- 유튜브에 본인 계정의 채널이 있고 주기적으로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 강연에 따르면 불운한 가정사 때문에 춤꾼이 된 경우다. 어릴 때 수영장이 있는 집에 개인기사, 요리사가 있을 정도로 부유하게 자랐으나 어머니가 오랜 암투병 끝에 중학교 시절 돌아가셨고, 투병하느라 집안에 모든 재산을 쏟아붓는 바람에 집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쓰러졌고, 장남이었던 현진영은 생계유지를 하기 위해 댄서의 길로 가게 됐다.[15]
- 중학교 시절 댄서로 생계유지를 하다가 2번 자살시도를 했는데, 모두 살아남았고, 이로 인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한순간에 바뀐 집안사정과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맞물려 마포대교에서 투신했는데, 한 번은 어떤 쓰레기 줍는 아저씨 배 인근에 떨어져서 바로 구조돼서 살아남았고,[16][17] , 또 한 번은 팀 단장이 6개월치 임금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바람에 집에 전기, 가스가 끊기자 이전과 같은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고 하며, 예전에 살았던 집을 쳐다보고, 동호대교를 지나가던 도중 충동적으로 투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물에 입수하자마자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느껴서 물 밖으로 숨 몇 번 쉬고 미치듯이 수영을 하여 육지로 나왔다고...[18] 그러고 나서 다시 동호대교를 지나 집으로 가는데, 이전에 투신했던 곳을 지나가며, 투신하기 전/후 느낌이 전혀 다름을 깨닫게 되어 삶을 바라보는 시선, 상황을 인식하는 시선을 다르게 바라보게 됐다고 한다. 이 경험이 가수가 되는데 있어, 또한 삶을 사는데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강연풀영상
- 유튜브 채널 현진영고진영고를 운영 중이며, 팬들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본인의 유튜브 채널 영상 및 타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된 본인의 공연 영상 댓글에 일일이 답글을 달아준다.
- 2021년 2월, 지인의 소개로 핵인싸 앱인 clubhouse에 입성하였다. 처음엔 다른 연예인 이용자들에 비해 팔로워가 많지는 않았으나, 2월 13일 무려 12시간동안 마라톤 방송을 하며 참여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말을 걸어주고 각종 개그드립을 치는 등 다양한 소통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작곡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한국에 있는 클럽하우스 이용자들이 들어가 같이 수다를 떨다가 잠이 들 때쯤엔 해외에 있는 접속자들이 들어가 인원을 다시 채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현진영의 클럽하우스 이용에 감명받은 몇몇 사람들이 '현진영 없는 현진영 방' 등을 조직해 팔로워 수를 늘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여, 하루에 100명 이상씩 팔로워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
- 2021년 2월 14일 현재 26시간 연속 방 개설로 아내 손에 이끌려 월요일에는 상담받으러 병원에 가야한다고 고백했다.
- 현진영의 클럽하우스 자기소개에 보면 자신을 힙합문익점으로 칭하고 있다. 이에 착안하여 클럽하우스에서 활동하는 현진영 팬클럽은 자신들을 스스로 목화씨라고 부른다. 이들은 현진영의 클럽하우스 접속을 기다리며 방에서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선다.
- 2021년 2월 19일에 올라온 매불쇼에서 현진영은 말미에 자신의 팬클럽인 '옥바라지'와 더불어 '목화씨'의 존재를 최초로 언급하였다.http://podbbang.com/ch/16898?e=23967854
4. 디스코그래피
[1] 대한민국 최초 미8군 재즈밴드 트리플A 를 만든 대한민국 1세대 재즈 피아니스트다. 2005년 사망했고 어머니(임춘자)는 1984년 지병으로 사망했다.[2] 그의 백 댄서 밴드격인 와와를 거쳐간 가수 중에는 구준엽, 강원래(1집 초반), 김성재, 이현도(1집 후반), 션(3집)등이 있다.[3] 2집만 이수만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진영이 직접 이수만이 자신을 발탁해서 1988년부터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1,2집 모두 이수만의 휘하에서 발표.[4] "최초"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현진영이 매우 초기에 도입한 사람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5] 2년 후 ‘서태지와 아이들’도 이 시스템을 적용한다.[6] 훗날 2000년대 중반 연재된 삼국전투기에서 '''함'''진영이란 별명을 가진 여포군의 고순이 현진영의 모습을 하고 나와서 "함진영 고! 진영 고!"를 한다.
[image] [7]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팬층이 현진영과도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8] 수감과 출감을 밥 먹듯 하던 이 시기에 같이 수감되어 있던 전인권을 우연히 만났다는 에피소드가 공개된 적도 있다.# 이 둘은 연령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점이 은근히 비슷하다.[9] 1973년 6월 9일생으로 본명은 이광민. 구준엽과 더불어 탁2준2라는 듀오로 활동했으며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공동 작사/작곡가다.[10] 하지만 이주일은 얼마 못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다.[11] "무념무상"은 소외된 계층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일부 몰지식한 권력층과 재벌들을 향해 일침을 놓는 내용의 가사로 현진영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소외된 계층의 심정을 느껴야 그들의 마음에서 말할수 있을 것 같다며 서울역에서 한 달 동안 노숙자들과 노숙을 하며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며 완성한 곡 이라고 한다.#[12] 사실 물리학 법칙을 알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령 수평 윈드밀의 경우 물이 든 주전자를 빠르게 돌리면 물이 중력 방향으로 떨어지지 않고 원을 그리며 따라 도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물론 그것을 머리로 구현하는 것과 몸으로 해보이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다.[13] 그 뒤에 1라운드 듀엣곡으로 2번 사용됐다.[14]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야의 수로왕이고, 김해 허씨의 시조는 그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다.[15] 본인이 제일 잘 하는 게 춤이었기 때문에 춤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번 돈의 일부를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아버지가 왜 시키지도 않은 걸 하냐며 심하게 다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현진영 본인은 장남으로서 책임감으로 스스로 택했다고 밝혔다.[16] 당시 한강은 지금과 달리 수질이 나빴고, 여러 생활 쓰레기 및 오폐수가 유입이 많이 되어서 배를 타고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다.[17] 그 아저씨가 현진영을 못 미더워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쇠로 된 구두주걱으로 먼지나게 맞았다고...[18] 현진영이 나온 리라초등학교는 스케이트와 수영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곳이다. 현진영이 회상하기를 초등학교 시절 춤 못지 않게 수영도 잘 했다고 한다. 예전에 잘살았을 적에 다녔던 학교에서 배웠던 수영 덕분에 살아남은 셈.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처지 비관으로 투신한 걸 생각하면 참 묘한 연결이다.
[image] [7]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팬층이 현진영과도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8] 수감과 출감을 밥 먹듯 하던 이 시기에 같이 수감되어 있던 전인권을 우연히 만났다는 에피소드가 공개된 적도 있다.# 이 둘은 연령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점이 은근히 비슷하다.[9] 1973년 6월 9일생으로 본명은 이광민. 구준엽과 더불어 탁2준2라는 듀오로 활동했으며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공동 작사/작곡가다.[10] 하지만 이주일은 얼마 못가 악화되어 결국 세상을 떠났다.[11] "무념무상"은 소외된 계층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일부 몰지식한 권력층과 재벌들을 향해 일침을 놓는 내용의 가사로 현진영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소외된 계층의 심정을 느껴야 그들의 마음에서 말할수 있을 것 같다며 서울역에서 한 달 동안 노숙자들과 노숙을 하며 그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소통하며 완성한 곡 이라고 한다.#[12] 사실 물리학 법칙을 알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령 수평 윈드밀의 경우 물이 든 주전자를 빠르게 돌리면 물이 중력 방향으로 떨어지지 않고 원을 그리며 따라 도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물론 그것을 머리로 구현하는 것과 몸으로 해보이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다.[13] 그 뒤에 1라운드 듀엣곡으로 2번 사용됐다.[14]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야의 수로왕이고, 김해 허씨의 시조는 그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다.[15] 본인이 제일 잘 하는 게 춤이었기 때문에 춤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번 돈의 일부를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아버지가 왜 시키지도 않은 걸 하냐며 심하게 다그쳤다고 한다. 하지만 현진영 본인은 장남으로서 책임감으로 스스로 택했다고 밝혔다.[16] 당시 한강은 지금과 달리 수질이 나빴고, 여러 생활 쓰레기 및 오폐수가 유입이 많이 되어서 배를 타고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이 있었다.[17] 그 아저씨가 현진영을 못 미더워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쇠로 된 구두주걱으로 먼지나게 맞았다고...[18] 현진영이 나온 리라초등학교는 스케이트와 수영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곳이다. 현진영이 회상하기를 초등학교 시절 춤 못지 않게 수영도 잘 했다고 한다. 예전에 잘살았을 적에 다녔던 학교에서 배웠던 수영 덕분에 살아남은 셈.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처지 비관으로 투신한 걸 생각하면 참 묘한 연결이다.